"이제 완벽한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요."
김희애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나이, 위치, 가치를…올해로 데뷔 42년 차, 수없이 자기 객관화 작업을 거친 결과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 걷는 것도 힘들고 골프 치면 팔도 아파요. 대본 외우는 것도 점점 어렵고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 하나. "좋은 대본에는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말했다. '돌풍'이 그랬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를 탄 기분이랄까.
물론, 위험 부담도 있었다. '퀸메이커', '데드맨'에 이어 정치물만 벌써 3번째다. 그럼에도 선택한 이유, 김희애를 만나 물었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같이 가자, 지옥으로
'돌풍'은 두 정치인의 맞대결을 그린다. 타락한 대통령을 시해하고,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국무총리 박동호와 그를 막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의 이야기다.
김희애는 "대본을 읽고 정수진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매력적이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그 본성을 들춰낸다. 멜로가 없는데도 로맨틱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며 흥분했다.
정수진은 정의감에 불타던 운동권 인사에서 국회의원, 경제부총리까지 순탄한 길을 걷는다. 그러나 과정은 오염됐다. 남편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시작된 부패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다.
"처음엔 정수진을 악당이라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그런데 회가 거듭될 수록 서사에 몰입하면서 감정이입이 되고, 연민이 가더라고요. 악마성이 있던 게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인 거니까요."
사실 정수진의 워너비는 박동호가 아니었을까. "남편에게 '박동호처럼 돼야 했다'는 대사에서 정수진이 멀쩡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남편만 아니었다면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남편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이유도 물었다. "(운동권 시절) 그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정수진은 아마 남편과 자기를 동일시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 돌풍의 힘
김희애는 '돌풍'으로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최근 여자가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는 작품은 없었다. 권력으로 남자와 당당하게 끝까지 가니 쾌감이 밀려오더라"고 전했다.
정수진은 비서실장 최연숙과도 치열하게 싸운다. 두 사람은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는다. 공수를 번갈아가며, 반격의 반격으로 우아한 전투를 이어간다.
"최고위직 여자들의 두뇌싸움은 너무 멋있었죠? 김미숙 선배님은 라디오하실 때부터 팬이었어요. 정말 독보적인 목소리죠. 그리고 굉장히 지적이세요. 최연숙에 딱 맞는 분이세요."
'돌풍'은 분명 정치물인데, 고자극 아침드라마 같다. 반전이 휘몰아친다. 또 누구의 편도 아니다. 좌우 가릴 것없이 모두까기다. 재벌도, 사법기관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줏대 없는 국민성,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왜곡된 정치팬덤도 풍자한다. 보다 보면 실존 인물과 사건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김희애는 '소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현실 정치? 전혀요. 보시면 연관된 사건이나 인물이 있을 건데 그런 건 재료일 뿐이에요. 모든 게 믹스돼 새로운 음식인 '돌풍'이 차려졌다고 보시면 돼요."
절벽 엔딩은 김희애도 예상 못 했다. "박동호가 그렇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심복 이만길한테 빈틈을 준 건 어이없고"라고 웃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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