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다.
칼리프(이슬람의 교황직위라고 보면 됨) 자리를 누가 이어받냐로 눈치 게임이 벌어지게 되는데..
첫번째 후보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먼저 알리는 무함마드와 형제같이 자라온 사촌 동생이자
첫번째 남자 무슬림이었고
이슬람 창시 초기 수많은 암살 위협을 받던 무함마드 대신 미끼가 되고
이슬람 확장의 과정에서도 수많은 군사적 공을 세웠다,
일기토로 나가서 이기고 돌아온것도 여러번이고
반 무함마드 세력과의 충돌에서 가장 맹렬하게 싸운자였다.
신앙심도 굉장히 투철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무함마드의 유일한 남자 후손도 알리와 무함마드의 딸 사이에서 나온 아들들 뿐이었다.
무함마드도 이런 알리를 두고
"여러분 중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두번째 후보는 아부 바크르.
아부 바크르 역시도 초기 이슬람 신자로
개종하지 않는 아내와 아들과 연을 끊고 개종한 그는 무역업자 출신으로
초기 이슬람 세력에 재산과 인맥을 지원해주었다.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를 무함마드에게 시집보내 무함마드의 장인이 되었고
후대 칼리프인 우마르, 우스만, 이슬람의 명장인 알 주바이르, 사아드 이븐 와카스
전부 아부 바크르의 인맥이었으니 초기 이슬람 세력의 기반을 제공했다.
무함마드는 그에게도
"아부 바크르의 재력과 신앙심이 없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거다. 가장 친한 친구를 꼽자면 아부바크르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
초기 이슬람의 중흥에서
기반을 제공한 자 vs 항상 앞장서서 싸운자
로 후계구도가 나눠진 것이다.
초기였기에 아직 지배력이 공고하지 않았던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죽자 메카와 메디나에서 분열 조짐이 보였고
그를 핑계로 아부 바크르는 회의를 소집. 회의는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추천 -> 우마르가 거절 ->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로 추대
라는 결과로 정해졌다.
알리가 무함마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사이에 회의를 열어서.
이에
아니 그동안 앞서서 싸우고 무함마드의 혈연인 알리가 되는게 맞지 날치기 통과 실화냐? 장난함?
vs
이슬람의 지도자를 혈연으로 정하는게 맞냐? 능력대로 가는게 맞는거야
라는 양 진영으로 이슬람이 반절로 쪼개져 일촉 즉발의 상황으로 가자....
결국 알리가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인정하며 첫번째 양보를 한다.
그러나 나이가 많았던 아부 바크르는 초대 정통 칼리프로 즉위한지 2년만에 사망.
그 다음은 알리가 하겠지? 라고 모두가 생각하던 와중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후계자로 우마르를 지목한다.
그런데 여기서 알리는 두번째로 의외의 선택을 하는데, 알리가 우마르를 지지하여 우마르가 2대 칼리프가 된것이다.
이때의 결정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데
' 보나마나 아부 바크르랑 우마르쪽이 알리를 협박했겠지!!!!' 라는 시아파의 주장과
또는 당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위협이 존재하던 이슬람의 분열을 걱정해서 강직한 성품의 알리가 양보했다는 주장이 있다.
우마르는 신앙심이 투철한 알리와 성격이 비슷했기에 지지하기 더 쉬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2대 칼리프에 오른 우마르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동로마와 페르시아 양쪽의 를 전부 깨버리며 최초로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해냈다.
회계부서 설치, 신권정치 제도 정비와 이슬람력 반포 등의 내정 등에서도 업적을 남긴 우마르.
그러나 밝은 면만 있는것은 아닌데.
먼저 확장 과정에서 우마이야 가문을 필두로한 지방 호족 가문들이 성장하였다는 것이고.
피정복 민족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샀다.
결국 우마이야는 이 원한으로 기독교를 믿는 페르시아인 노예에게 칼에 찔려 사망한다.
우마르가 만든 제도에 의해 슈라 위원들이 회의를 열어 다음 칼리프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린다.
이제는 정말 알리가 하는게 맞다! 라고 생각하던 그때...
이번에 경합에 붙은건
상인 출신이자 우마이야 가문 출신인 우스만과 알리였다.
슈라 위원들은 둘에게 어떤 정책을 펼칠것이냐고 물었는데....
알리는
"초기 이슬람 세계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범으로 삼으며, 이전 칼리파들을 존중하나 나는 나만의 생각이 있으므로 변혁을 추구하겠다."
는 대답을.
우스만은
"나는 전임자들의 행적을 따르겠음ㅇㅇ"
라는 대답을 했다.
이미 무함마드가 죽은지 10년이 지나고, 성공적인 정복 활동으로 기득권층이 생겨버린 상황.
그런 기득권층은 안정을 바랬지 변혁을 바라지 않았다.
알리가 지지받았던 이유인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이 오히려 알리를 옥죄게 된 상황이 된것이다.
그렇게 알리는, 씁슬하게 슈라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우스만은 이슬람의 영토를 확장하고, 그동안 주먹구구식이었던 재정문제를 개혁해 중앙 집권화를 이뤄냈지만
서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떠안겨 엄청난 불만을 일으켰고
무엇보다 자신의 친족인 우마이야 가문을 지원해줘 우마이야 씨족을 각지의 총독에 꽂아줬고
특히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 이븐 아피 수피안은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세금에 불만을 가진 이집트인들이 사절단을 보내 총독 교체를 요구하는데
앞으로는 승낙하고 뒤로는 돌아가는 사절단을 처형 시도한 우스만.
그러나 그 사실은 들통나게 되고 분노한 군중이 우스만의 집으로 몰려가 하야 요구.
참지못한 이집트 병사가 우스만을 죽여버리며 허무하게 우스만은 죽는다.
무함마드의 생전, 무함마드의 제일가는 후계자로 꼽히던 그는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4대 칼리프에 결국 등극한다.
그런 그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을 줄 알았지만...
우스만 밑에서 온갖 특권을 누리던 우마이야 씨족은 그의 등극에 극렬히 반대.
알리가 우마이야 총독을 해임시도 하자 모든 총독이 들고 일어나 이슬람의 1번째 분열인 '1차 피트나'가 발발한다.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것은 아부 바크르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부인인 아이샤와 이슬람의 명장 알 주바이르, 원로 탈하.
낙타 전투(656년)에서 알리는 알 주바이르와 탈하를 전사시키고 아이샤를 생포해 승리한다.
그러나 알리는 승리를 즐길 틈도 없었는데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우마르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으며 우마이야 일족을 규합.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것이다.
정작 우스만이 군중에게 포위 되었을 때 무아위야는 우스만의 구원요청을 무시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서 맞붙게된 알리와 무아위야.
이때의 전투를 시핀 전투(658년) 라고 한다.
몇달간 지리한 대치를 이어가며 먼저 협상을 제의한 알리.
무아위야가 거절한다.
그럼 1대1 일기토로 짱뜨자고 제의한 알리.
알리는 수많은 전투에서 쌍검을 들고 선봉에 섰던 인간병기였기에 무아위야가 거절한다.
그러다 결국 붙게 된 양측.
무아위야의 군대는 80000명의 대군이었지만 대부분이 정복되지 얼마 되지 않은 시리아에서 긁어온 막 개종한 인원들이었고
알리의 군대는 이슬람 초기부터 숱한 전투를 겪으며 확장을 같이해온 베테랑 군대였다.
무엇보다 이끄는 알리 본인부터가 이슬람 역사의 산 증인이니
알리는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하며 무아위야군을 갈아버렸고
무아위야는 지휘소를 버리고 튈정도로 밀리게 된다.
그리고 양측의 출혈을 줄이자고 일기토를 제안한 알리.
너무 희생이 커지자 무아위야의 병사들이 제발 일기토 해달라고 청원을 하지만
무아위야는 끝까지 일기토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날 밤 벌어진 전투는 비명의 밤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아위야 군에게 처절한 패배였다.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무아위야는
"쿠란의 심판에 따르자"며
쿠란을 창에 꽂고 나아가 협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알리는 이런 말도 안되는 협상 제의를 받아줘 버렸다.
경건하고 고지식한 성품을 가졌던 알리는 무슬림끼리 더이상 희생을 내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쿠란을 피로 더렵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군대를 돌려버린다.
더이상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대부분의 중도파의 의견을 무시할수 없었다.
그리고 이 협상에서 알리는 일개 총독인 무아위야와 동등한 대표자로 서명하며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리고 무아위야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보장해주는 악수까지 둬버린다.
그냥 전쟁 안하는게 좋은 중도층은 전쟁 끝났으니 좋았지만....
알리의 극렬 지지층은 아니었다.
이따위 협상을 위해 우리가 알리를 지지하고 싸워왔단 말인가?
알리에게 실망하게된 그들은 떨어져 나와 카와리지파를 만들고, 알리를 암살하게 된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5대 칼리프에 오르게 되나
칼리프 직을 둘러싼 분열에 지친 하산.
그는 결국 무아위야에게 칼리프 직을 넘기게 되고...
선출로 지도자를 선출하던 정통 칼리프 시대의 종말.
세습 칼리프 시대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렇게, 아부 바크르부터 시작된 이슬람 분열의 씨앗은
1차 피트나를 통해 시아파와 수니파로 영원한 분열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알리를 지지하던 자들은 시아파로, 기존의 권위를 지지하던자들은 수니파로.
수니파 - 칼리파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어도 수행할 수 있다.
시아파 - 칼리파는 신성한 직위로 무함마드의 혈통이 이어야 한다.
요약
1. 무함마드의 친족이자 이슬람 개국공신인 알리
2. 알리는 수많은 억까를 당하다 4대가 되서야 칼리프에 오른다
3. 그러나 칼리프직을 두고 일어난 반란.
4. 전투에서 압도했으나 협상을 시도한 알리는 자신의 지지층에게 암살당하고
5. 이때 갈라진 이슬람교는 영원히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