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에서 여성혐오까지 ⑥·끝] 혐오를 자유화할 순 없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일베 현상의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지성을 조롱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넷상에 발화했다는 것이다. 비단 일베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권위는 인터넷 혁명과 맞물려 급전직하했다. 대중문화 비평이 더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다. 뉴스의 정보 독점력도 사라졌다. 이른바 전문가로 지칭되는 이들의 뉴스 코멘트에 대중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는 인터넷 포털 댓글로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지성에의 거부감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발달에 따라 커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 신문명이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지성인을 향한 대중의 혐오는 오랜 연원을 가졌다는 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 미국의 당대를 정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역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펴냄)는 미국 사회가 일찌감치 지성에의 불편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사회 다방면의 분야를 향한 스케치로 그려냈다. 이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이 지식 계층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자, 미국 출판계는 올 한해 이 현상을 조명키 위한 책을 쏟아냈다.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펴냄), 〈자기 땅의 이방인들>(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 등은 힐러리와 민주당으로 정체성을 대변하던 이들을 향한 대중의 거부감, 이른바 ‘PC함’에 관한 미국 대중의 피로의 연원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 책이다.
과감히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차용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는 하나의 강고한 흐름이 되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하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갈라 보길 거부하는 사회 태도, 이른바 '747 성장' 공약으로 대표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대 착오적 공약에 열광한 대중, 약자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결과물이 아니다.
특히 여성주의가 사회적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지금, 여성을 향한 혐오는 미국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 볼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상의 근원에의 이해를 거부하는 대중의 시각은 피해의식과 맞물려 강고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집단의 대대적 반발로 더 커지면서 소셜 미디어를 막말의 전쟁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랜 기간 문화 현상을 관찰했고,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로부터 받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글을 나눠 싣는다. 필자는 글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낳은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식민지 남성성을 꼽는다. 이를 바탕으로 약자의 상황을 애써 모르려 하는 태도가 집단 반지성주의로 현현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필자는 우리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행해진 블랙리스트 사태, 이명박 정부 시절 큰 반향을 낳은 나꼼수 현상,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반여성주의 현상에 관해 세밀한 의견을 글로 정리했다. - 편집자.
나오며 : 생각하는 인간에 대하여
블랙리스트 사건,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 마녀사냥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여러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의 '개인되기'를 방해하기에 비판적 의식을 통제하는 제도적 억압을 가하고, 상대적으로 진보 진영은 이 억압을 향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약자 혐오와 멸시를 정당화한다. 보수 우파가 특정 지역 혐오와 안보를 이용하고 페미니즘을 왜곡되게 활용한다면, 진보 진영은 '민주와 진보'라는 대의를 위해 노동자와 여성을 나중으로 미룬다. 혹은 노동자를 남성화하며 페미니즘을 억압한다. 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경계하며 배제하려는 진보와 이를 오용하는 보수 우파 사이에서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하는 사회 구성원이 누구인지 생각하자.
국정원이 3500명이나 동원해서 '댓글 공작'을 펼친다면,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나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등에서 인신공격성 댓글을 '전투력'의 하나로 과시한다.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의 인스타그램은 수시로 공격받는다. 만만한 타인에게 도덕성을 강요하거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으며 자신의 정의감을 확인한다. 이는 결코 익명에 기대어 벌어지는 태도가 아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자신의 얼굴, 이름, 소속, 거주지역, 출신학교, 나이와 배우자 유무, 심지어 자식 얼굴까지 밝히면서 욕을 하거나 차별적 발언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형성된 '끼리끼리'의 세계가 '공감과 소통'으로 포장되어 강화된다. '미개'한 타인과 '충'이 되어 박멸의 대상이 된 비/인간이 늘어난다.
솔직한 '표현'의 '자유' 표현은 누구에게 도착하는가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공화당 후보 수락 연설 중 "나는 당신들의 목소리"라고 했다. 그가 대변하는 '목소리'에는 이민자 혐오, 여성과 장애인 비하가 넘쳐났다. 2016년 '' 발언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한 고위공무원에게서 쏟아져 나온 말 중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는 문장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구의역 사고로 희생된 젊은 노동자가 '내 자식처럼' 생각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답한 말이다. '그것은 위선'이라고 선포함으로써 '나 홀로 나쁜' 인간으로 취급 받을 수는 없다는 결의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2015년 프랑스의 〈샤를리 앱도> 테러 사건 이후 마린 르 펜은 무슬림 혐오를 드러내며 "더는 위선이 불가능하다"라고 다. 속마음을 대신 풀어내주는 트럼프나 르 펜은 솔직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들은 모두 혐오와 차별을 '위선에의 저항'으로 둔갑시키는 인물이다. 솔직함은 곧 순수가 되고 선이 되지만 위선은 믿을 수 없는 이중성으로 낙인 찍힌다. 트럼프와 그 지지자가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날린 비난의 언어 중에는 '거짓말쟁이'가 많았다. 힐러리는 위선적인 거짓말쟁이지만 장애인 기자를 조롱하거나 멕시코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는 솔직한 인간이다. 자유와 솔직함을 향한 극단적 찬양은 권력의 횡포마저 자유롭고 솔직하게 만든다. "우리, 솔직해지자",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라는 말은 간혹 위험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깔아놓는 안전장치다. 여기서 '우리'는 너와 나를 묶으며 일반적인 사람들로 확대된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은 '너도' 그렇잖아, 라는 속삭임이다.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인데 너는 왜 아닌 척 하느냐고 얄궂게 몰아 세우는 태도다. "나만 그런가요?"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위선이다.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보다는 타인도 옳지 않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프로 불편러'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말하거나, 그들을 두고 '쿨'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후 되려 약자와 소수자를 비웃는 편이 더 세련되게 보일 지경이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나'라는 주어 대신 '우리'를, '나의'라는 1인칭 소유격 대신 '우리'라는 복수의 소유격을 사용하는 언어 습관이 있다. 개인되기를 억압하는 제도와 문화 속에서 취향이 있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정서에 잘 적응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더 긍정적 인간상으로 여겨진다. 국민 오빠, 국민 여동생, 국민 남편 등 인기 있는 연예인에게 '국민'이라는 말이 붙듯이, '우리'와 '국민' 사이에서 개인은 없다. 개인되기를 부정적으로 보기에 혼자 밥을 먹어도 문제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집단에 잘 용해되는 개인이 사회성 있고 성격 좋은 사람이다. '무난한'을 좋아하고 '튀는'을 싫어한다. 나이에 눌리고 성별로 눈치 보며 개인의 의견을 말하기 어려운 사회다. 곧 한국은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개인되기' 그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 되어버릴 정도다. 사생활 인식이 부족하듯 취향도 제대로 권장 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표현'은 점점 왜곡된 개념으로 활용된다.
차별적 표현에 '자유' 개념을 덧입히는 이들의 관심은 표현의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음대로 '니그로' 발언을 하거나 여성 차별 발언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피해자 되기 전략을 짜고 있다. 미국의 대도시에서 벗어나 인종구성이 단일해질수록, "정치적 올바름은 정직하지 않다. 다양성은 백인학살의 언어다(Political corectenesse is not honesty. Diversity isa code word for whitegenocide)"와 같은 슬로건이 당당하게 표현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는 그들이 기존에 가진 권력-성과 인종처럼-이 더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로의 변화에 관한 두려움이 있다. 다인종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자원, 성정치가 논의되는 사회에서 남성성이라는 자원은 예전처럼 막강할 수 없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존 권력자는 사회적 약자 혐오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확인하려 한다. 혐오할 수 있는 타자의 존재는 나의 정체성을 부각시킨다.
정치적 올바름은 물론 논쟁적이다. '정치적' 올바름만 있거나, 정치적이지 않은 '올바름'만 있을 때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규제만 남을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꾸준히 올바름의 지향점을 찾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이러한 합의와 논쟁을 무시하고 위선과 자유라는 단편적인 대립항을 만드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둔해진다. 더불어 공론의 장을 소셜 미디어가 대체하면서 비평보다는 공격의 속도전에 시달린다. 진중한 분석보다는 촌철살인이나 '사이다'라 불리는 속 시원한 언어가 호응을 얻기 쉽다. 비평이 부실해지고 여론재판이 활발하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세요
혐오와 차별은 때로 취향이라는 고급스러운 외피를 두른다. 백인을 좋아하는 취향, 뚱뚱한 여자에 비위 상하는 취향, 가부장제가 잘 맞는 취향,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취향 등 별별 형태의 차별이 취향으로 포장된다. '취향'이라는 말 속에는 비정치적이며 판단이 중지될 수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할 자유, 그냥 내 의견, 다양성, 다른 것은 있어도 틀린 것은 없다 등의 말들로 자신의 올바르지 않은 말을 방어한다. 취향이라는 소음기를 장착한 총으로 혐오발언을 마구 쏠 자유가 ‘표현의 자유’로 자리잡게 된다.
혐오 표현이 취향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상대가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취향이 존중 받는다는 것은 '개인'으로 존중 받는다는 뜻이다. '공식적으로' 개인의 취향을 가질 수 없는 집단이 학생, 군인, 죄수다. 이들은 집단으로 존재할 뿐 '개인'으로 존중 받지 못한다.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자른다. 소지품을 검열 받으며 개인 공간 확보가 어렵다. 군인은 업무의 특성상, 죄수는 징벌이라는 의미에서, 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역할수행을 위해 이러한 억압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취향의 억압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침해를 담보로 한다. 그래서 취향을 존중하자는 개념이 필요했거늘, 지금은 거꾸로 취향이라는 개념이 차별의 도구로 활용된다. 몰카가 예술의 자유, 혐오가 취향으로 둔갑한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혐오 표현을 변호한다. 무지의 취향화, 성적 대상화에 갇힌 상상력으로 취향과 자유는 심각하게 오염된 개념으로 빚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권력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
게다가 취향의 '개인적' 영역은 생각보다 좁다. 개인의 취향에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이 개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속버스에서 몸을 흔드는 취향과 오페라 공연을 보는 취향 사이에는 계층과 지역, 연령 등 수많은 사회 구조적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비평가는 이러한 담론을 생산하고 분석한다. 인류가 쌓아온 지적, 예술적 유산은 수많은 담론의 축적이다. 정치적 논쟁뿐 아니라 미적 담론에서도 취향 개념은 무책임하게 사용될 때가 있다. 치밀하게 생각하기 보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을 내세워 복잡한 담론을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더욱 과격하게 나아가면 비평의 내용과 질에 관한 비판이 아니라, 평론 자체를 폄훼하고 평론가의 역할을 부정한다. 평론가의 역할을 과소평가할수록 비평은 '먹물'들이 '인문체'로 허세나 떠는 작업이 된다.
소위 지식인 중에서도 평론이 "생산에 기생하는" 작업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 미적 탐구나 지적 생산물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란 어려워진다. 대중과 민중이라는 언어를 앞세워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강조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오히려 대중을 단순한 집단으로 본다는 점이다. 자신을 가장 현실적인 언어로 말하는 '잡놈'으로 규정하여 솔직함을 무기로 날 것의 언어로 지식인을 조롱한다. 이들은 지식인을 비판하며 '진짜' 지식인이 된다.
전위와 지성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호프스태터는 마커스 컨리프의 말을 빌려 미국의 지적 성취를 담당해온 정신을 '지식층과 아방가르드'로 유형화한다. 대체로 '전위'는 얼핏 보기에 대중적이지 않으며 당장 먹고 사는 것과 무관해 보인다. 기존의 권위와 이성에의 전복과 도전, 곧 전위는 지성사의 한 축이다. 아방가르드는 제도의 권위와 싸운다. '대중이 이해하는 예술'이라는 개념은 대체로 실용 중심의 사고다. 이러한 태도에서 더 나아가면 예술이 밥 먹고 사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런 것 없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 라는 예술 무용론에 다다른다. 쓸모 중심에 갇혀서 인간을 '먹고 사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한정 짓게 된다. 다르게 생각하기는 다른 형식을 필요로 한다. 쉽게, 대중적, 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대중의 다양성과 '다르게 생각하기'의 욕망을 무시한다. 쉽게 써라, 중학교 3학년도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지자. '대중'과 '시민'의 성별은 무엇이었는가. 대중과 시민의 젠더는 다양하지 않았다. 애국의 서사뿐 아니라 저항과 해방을 다루더라도 이 관점은 동일하다.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그리고 2017년 〈택시운전사>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성의 서사에 의존했다. '상식'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성 역할을 대부분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상식은 지배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사용될 때도 있다. 지성과 예술사의 편파적 축척은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삭제했다. 소수자를 멸시하며 축적한 저항의 에너지 속에는 혐오와 차별이 기생하고 있다.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을 만들어낸 '촛불정신'에 젠더 의식이 있었던가.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든 사건에 강하게 반발하는 '촛불시민'도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작가를 노동현장에서 제거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을 수 있다.
미국 사회가 계급적 소외에의 분노를 인종차별로 배출한다면, 한국 사회는 여성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이러한 '문화'는 창작 환경에도 고스란히 흡수된다. 미적 사유가 약자를 향한 조롱을 동반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일베 손가락'을 조형물로 만들거나 음료 광고에서 여성 살해 이미지를 담은 학생의 작품이 생산되고, 남성 잡지는 여성 납치 살해를 암시하는 이미지를 표지로 사용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을 '새로움'이나 '신선함', 나아가 금기를 향한 용기 있는 도전으로 여긴다. 폭력과 혐오를 사유하기보다, 혐오에 편승하여 폭력을 선정적인 오락으로 상품화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토일렛>이라는 영화 포스터에는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분노"라고 선명하게 적혀있다. 욱해서, 우발적으로, 묻지마 살인일 뿐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경찰의 발표와 남성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대중문화로 재현된다. 이처럼 보는 권력을 극대화한 남성 중심의 관음이 펼치는 예술,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학대와 폭력을 자유의 매개로 삼는 저항 방식, 타인의 고통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오락은 생각하는 사회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고 있다.
증오는 반지성과 연대한다. 가상의 적의를 부추긴다. 왜곡된 평등주의는 뒤섞임을 인정하지 않고 분리와 제거를 통한 '정상화'를 추구한다. 비판을 진압하고, 진영 논리에 기대어 증오와 혐오를 확산하면서 이를 대의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한다. '더 많은 표현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MoreSpeech, Better Speech)는 주장은 발신자 중심으로 해석하기보다, 수신자의 입장에서 함께 생각해야 한다. 더 많은 표현이 누구에게 '도착'하는가. 발화 권력을 알아가기는 관계를 알아가는 기본이다.
반지성주의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을 짚어보면서 많은 문제를 언급했지만, 진보의 허위와 모순을 인식하되 깊은 회의와 냉소, 환멸은 꾸준히 경계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질문이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억압은 꾸준히 기록되고 있다.
한국의 블랙리스트 사태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미국의 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항한 작품을 떠올려 보자. 매카시즘이라는 폭풍이 지나간 뒤 에밀 드 안토니오(Emile de Antonio)는 냉전 시기 미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64년 발표된 〈포인트 오브 오더!>는 매카시즘의 절정기에 벌어졌던 공산주의자 색출 청문회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매카시의 모습이 직접 담긴 청문회가 다큐멘터리로 편집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사기와 그에 동참한 인물들은 역사 속에 박제되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좌파 지성사를 대표하는 저항 영화다.
기존의 자료를 편집하여 작가의 정치적 시선을 전달한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용산 참사를 다룬 연분홍치마의 〈두 개의 문>을 떠올릴 수 있다. (〈두 개의 문>은 '그 날의 사건'에 집중하지만 철거를 둘러싼 자본과 국가권력을 집요하게 보여주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면에서 아쉬움은 있다.) 억압과 지성의 위기 속에서도 이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함께 존재한다. 정권이 아무리 언론을 탄압해도 해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업으로 맞선 언론인도 있으며, 단단한 남성연대 속에서 '여혐민국'을 외치며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을 붙인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비판보다는 칭찬과 지지가 더 각광받고 속 시원한 '사이다' 언어가 늘어나는 시대에도 성실한 비평집은 생산되고 있다. 이미 〈비평의 매혹>, 〈비평과 권력>, 〈비평의 희망>처럼 비평에 관한 저서를 꾸준히 발표한 권성우의 〈비평의 고독>은 "정치적 올바름은 미학적 품격과 만난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개성적 문체와 심미적 품격에 실려 전달되는 그런 아름다운" 비평의 가능성, "왜 대부분의 문예지에서는 문학작품에 관한 비판적 서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때로는 오만함에 가까운 결기를 가진 지식인, 자존심을 지키는 예술가, 눈치보지 않는 비평,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기, 불완전함과 잡종성을 인정하고 사유하기, '정상' 집착을 경계하기, 그리고 엘렌 식수가 말한 '하얀 잉크'로 작성한 여성과 소수자 서사의 복원이 억압의 역사를 드러내어 지성을 축적한다. 한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안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곧 '고립과 참여'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실행하는 그 '불안정적인' 과정이 풍성한 지성의 숲을 이루지 않을까.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day@pressian.com)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046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