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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순한 맛(?)인 로판 버전 먼저 ㄱㄱ




때는 뭐 대충 16세기...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남. 이 아이의 이름은 카테리나, 보통 카트린이라고 부름. 아버지인 로렌초 2세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우르비노 공작이었음.

근데 카트린의 어머니가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아버지인 로렌초 2세도 그해 5월 결핵으로 사망함. 결국 카트린은 태어난지 3주만에() 고아가 됨.




이 어린 영애는 로렌초 2세의 하나뿐인 딸이었고, 고로 메디치 가문의 적법한 상속자였음. 고작 생후 3주된 아기가 우르비노 여공작 겸 피렌체의 상속인 겸 메디치 가문이 축척해둔 막대한 부를 쥔 대부호가 된 것임...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모두가 탐내던 땅이었고, 피렌체의 상속인인 카트린은 그야말로 보물 그 자체였음. 카트린이 어떤 남자랑 결혼하냐에 따라 유럽 정세가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ㅇㅇ,,,















그리고 여기서 클리셰에 맞춰(?)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교황이 등장함.





당시 유럽 역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주자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15세기 중반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고 있었음. 즉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고,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것임.


특히 카트린이 아직 아기였던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카를 5세였음. 유럽 역사에서도 손 꼽히는 금수저로, 나폴레옹 등장 이전까지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한 군주였음. 대충 요약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스페인의 국왕 + 카스티야의 왕 + 오스트리아의 대공 + 나폴리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 + 독일의 왕 + 브라반트 공작 겸 림부르크 공작 겸 로트링엔 공작 겸 헬러 공작 겸 룩셈부르크 공작 겸 부르고뉴 공작 (;)








이렇다 보니 전대 교황들은 모두 카를 5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함.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의 불길이 막 시작되고 있었는데, 카를 5세 역시 교황과 원만하게 지내며 종교 개혁에 맞서 카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함.

근데 카트린이 4살 때 즉위한 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달랐음. 지나치게 커진 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카를 5세의 적들과 동맹을 맺고 카를 5세와 대립하기 시작함.















그 와중에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남.

(마찬가지로 쉽게 요약해주자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발루아 가문이 맞짱뜬 거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위에 언급한 대로 독일&스페인을 지배하는 카를 5세였고, 발루아 가문의 수장은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던 프랑수아 1세였음. 카를 5세를 견제하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당연히 전쟁 내내 프랑수아 1세 편을 들었음.

BUT 전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돌아감. 아예 포로로 사로잡혀 스페인까지 끌려갔다온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했고, 교황 클레멘스 7세도 카를 5세한테 살짝 굽히면서 화해의 스탠스를 취함.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그러고 바로 통수를 침ㅋㅋㅋㅋㅋ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트린과 마찬가지로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 피렌체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고, 카를 5세와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예 피렌체 공국 + 밀라노 공국 + 베네치아 공화국 + 프랑스를 다 끌여들여 코냑 동맹을 창설함.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한 것임.




이에 뚜껑이 열려버린 젊은 황제 카를 5세는 할아버지 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을 모셔온 장군을 부른 다음 용병 35,000명을 고용할 돈을 주고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하라고 명령함.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이게 유럽 역사에서 교황권의 붕괴를 상징하는 임.



사실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반목하는 와중에도 카를 5세가 교황령까지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음. ‘지가 아무리 빡쳤기로서니 교황령의 성도인 로마까지 올까? 독실한 가톨릭 교도면서?’ 정도.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카를 5세는 참지 않았음. 로마는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고,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이 카를 5세의 손에 떨어짐.



메디치 가문의 교황이 피렌체를 코냑 동맹에 끌어드리는 바람에 이 꼴이 난 거잖음?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과 그 적법한 상속인인 카트린을 공격했고, 카트린은 수녀원에 들어감. 어린 카트린에겐 자신의 땅과 작위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반쯤 몰락하게 됨.



보통 이때 죽고 회귀를 하지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이렇듯 카트린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에 대한 상속권을 잃어버렸지만, 완전히 몰락한 건 아니었음. 메디치 가문이 축적해둔 막대한 부가 여전히 카트린의 소유니까 ㅇㅇ


사코 디 로마를 겪고 카를 5세에게 GG를 친 후에도 합스부르크와 발루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교황에게도 카트린은 여전히 중요한 장기말이었음.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중매를 섰고, 카트린은 프랑수아 1세의 차남인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됨. 14살 때 일이었음.






그러나 이 결혼이 발표되기 무섭게 반기를 든 세력이 있었으니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바로 프랑스의 귀족들이었음.





당대 유럽에는 귀천상혼이란 게 있어서, 각자 신분에 맞게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음. 왕족은 왕족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독립국의 통치 가문이라면 공작이나 대공이어도 결혼에 관해선 일반적인 왕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게 원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건 적법한 결혼이었음. 메디치 가문은 오랫동안 피렌체 공국의 실질적 지배자 역할을 해온 피렌체 공작이었고 카트린은 그 메디치 가문의 상속인이니까 ㅇㅇ


BUT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 타이틀을 넘어 공식적으로 피렌체 공작 작위를 얻은 건 당시 기준으로 극히 최근의 일이었음. 프랑스 귀족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메디치 가문은 꼴에 돈 좀 있는 이탈리아 장사치였고, 그 상속녀인 카트린은 이탈리아 장사꾼 딸내미였던 것. ()










이에 프랑수아 1세는 라고 약속함. 카트린은 이 약속 덕에 겨우 반대를 뿌리치고 앙리와 결혼할 수 있었음.


그러나 결혼 3년 후인 1536년,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인이자 앙리의 형인 왕세자가 19살의 나이로 요절함. 자연스럽게 앙리는 왕세자가 됐고, 절대 프랑스의 왕비가 되지 않을 거라던 카트린은 왕세자비가 됐다가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사망 후 왕비가 됨.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앙리는 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를 닮아 키가 크고 각종 스포츠를 즐기는 건장한 남자였음. 카트린은 남편인 앙리를 지극히 사랑했지만...제목에 적혀있듯, 앙리가 사랑한 여자는 따로 있었음.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디안 트 푸아티에 라는 여자였음. 푸안티에 가문은 꽤 유서 깊은 귀족이었고, 디안은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아름답고 교양 있는 귀족 여성으로 성장함.


이 사람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을 찾아보자면 이라는 내용이 있음.









디안은 앙리보다 19살 연상으로, 앙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해 앙리보다도 나이가 많은 자식까지 두고 있었음. 왜 앙리가 자기 어머니 뻘인 디안을 평생 사랑한 건지 알아보겠음. (와 서론 정말 길었다)






로판을 자주 본 여시들이라면 알겠지만 당시 왕실 여성의 시녀는 고위 귀족 여성만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음.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인 디안도 결혼 전에 왕궁에 출입하며 시녀 노릇을 했는데, 이때 디안이 모신 사람이 프랑수아 1세의 왕비이자 앙리의 어머니인 클로드였음.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카를 5세의 포로가 됨. 카를 5세는 국왕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프랑수아의 1세의 두 아들을 인질로 요구함. 앞서 말한 (원래의) 왕세자와 앙리 ㅇㅇ


8살이었던 왕세자와 7살이었던 앙리는 졸지에 카를 5세의 포로가 되어 스페인으로 보내지는데, 이때 두 왕자의 어머니 클로드는 이미 사망한 후였음. 이에 두 왕자는 어머니 대신 그녀의 시녀, 즉 스물 여섯 살의 디안에게 마지막 이별의 키스를 남기고 프랑스를 떠남.
















두 왕자가 프랑스를 떠나고 몇 년 후 디안은 과부가 되는데, 31살에 과부가 된 디안은 항상 검은색이나 흰색 옷만 입고 다님. 이는 디안이 신비로운 분위기와 미모로 잔잔하게(?) 유명세를 떨치는 계기가 됨.

게다가 이름도 디안이라 당대에 달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를 모티브로 하는 예술작품들의 과반수가 디안을 모델로 그려짐.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디안을 모델로 그린 아르테미스 그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가면 있어용)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인질이 된 두 왕자는 황폐한 성에서 무려 5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가 1530년에야 프랑스로 돌아옴. 프랑수아 1세는 클로드의 시녀였던 디안을 다시 왕궁으로 불러 앙리의 교육을 맡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거로 모자라 힘든 포로 생활까지 겪은 앙리에게 디안은 유모이자 가정교사이자 어머니였음. 앞서 말했듯 디안은 몹시 교양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앙리는 금세 디안에게 푹 빠짐.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문학 속 기사에 본인을 대입하고 그 기사가 숭배하는 귀부인에는 디안을 대입한 너낌.






일례로, 두 왕자가 귀환한 직후인 1531년에 프랑수아 1세가 엘레오노르라는 여인을 새 왕비로 맞이 함. 엘레오노르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마상 시합도 열림.

이 시합에서 형인 왕세자는 새어머니인 왕비 엘레오노르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열세살의 앙리는 새 왕비가 아닌 디안에게 경의를 표함















여기서 더 나아가서 디안은 앙리의 결혼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카트린을 앙리의 배우자로 적극 밀어준 게 다름 아닌 디안이었음.

왜냐면 디안과 카트린은 육촌 자매였음. (이게 뭔...)




이참에 확실히 권력을 잡고 싶었던 디안은 자기 친척 동생인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을 적극 지지함. 디안은 클로드의 시녀였던만큼 국왕 프랑수와 1세와도 친밀한 사이였고, 뭣보다 앙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세하는 실세였음. 디안과 프랑수아 1세의 지지를 등에 업은 카트린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앙리의 아내가 됐고, 1536년 왕세자가 사망한 후 왕세자비 자리까지 차지함.

.














이렇듯 디안은 일찍부터 앙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앙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디안과 앙리의 나이 차가 워낙 크다 보니 아무도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그러나 원래 현실은 소설보다 더한 법 아니겠음? 성인이 된 앙리는 디안에게 본격적으로 구애하고, 디안은 얼마 안 가 앙리의 정부가 됨. 앙리가 19살, 디안이 38살 때 일이었음(....)


이후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고 앙리가 왕이 되자 디안은 공식적으로 왕의 정부가 됨.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카트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앞서 말한 신분 이슈 때문에 실권이 없었음. 결국 디안은 자연스럽게 프랑스 궁정의 실세로 떠오름.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앙리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데다 외국에 시집 와서도 신분 문제로 무시 당해온 카트린은 남편 앙리를 몹시 사랑하고 그의 애정을 갈구했지만ㅠㅠ....어린 시절부터 디안에게 빠져 있었던 앙리는 카트린을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음. 왕비 대우를 하긴 하되 의무 이상의 애정을 베풀지는 않는?


반면 디안은 앙리의 전부였음. 앙리는 디안을 사랑하는 걸 넘어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며 자기 운명으로 여겼음. 마상 시합에 나갈 때면 카트린이 준 리본 대신 디안이 준 리본을 걸고 나갔고, 디안이 왕실 소유인 슈농소 성을 좋아하자 카트린 역시 그 성을 좋아함에도 냅다 디안에게 슈농소 성을 선물했고, 왕관의 보석을 디안에게 맡겼고, 오로지 디안을 위해 성을 지었고, 서류에 서명할 때도 ‘앙리디안’이라고 서명했고(), 디안에게 여공작 작위까지 내림. 심지어 앙리와 카트린이 동침하는 날짜도 디안의 입김에 따라 정해졌음. 앙리와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도 대부분 디안이 맡았고 ㅇㅇ




당연하지만 카트린은 이런 두 사람의 관계에 몹시 고통스러워했음. 앙리가 디안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마다 슬퍼하며 “내게는 한 번도 저렇게 다정하신 적이 없었어...”라고 눈물을 흘림.

















클리셰대로라면 카트린이 회귀해서 디안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쭉 이어지다가...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1559년, 마상창시합에 참가한 앙리가 부서진 창날이 눈에 박히는 사고를 당함. 앙리와 카트린이 40세, 디안이 59세 때 일이었음.


당대 최고의 명의가 사형수들로 미리 실험을 하고(...) 수술을 했지만 저 시대 위생에 뭘 기대하겠음. 앙리는 감염으로 인해 끔찍한 두통에 시달림. 자기 죽음을 예감한 앙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밤낮없이 디안을 찾음.

지독한 새끼...















그러나 카트린은 디안을 불러주지 않았음. 오히려 디안에게 왕궁 출입 금지를 명령하고 홀로 앙리의 곁을 지켰고, 앙리가 그동안 디안에게 선물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함.

카트린과 앙리의 장남인 왕세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앙리 사후 카트린이 섭정을 맡을 예정이었음. 주변 사람들은 입 모아 ‘카트린이 디안을 상대로 피의 복수극을 벌일지도 모르겠다’고 수군수군거리기 시작함.






그리고 사고 열흘 후인 7월 10일, 앙리는 끝끝내 디안을 만나지 못하고 사망함.















자 이제 카트린이 복수할 차례인데...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사실 디안과 카트린의 관계는 단순한(?) 연적이라기보단 복잡한 애증에 가까웠음. 디안이 항상 카트린에게 공손하고 다정했기 때문. 카트린이 신분 문제로 귀족 사회에서 무시 당하고 겉돌 때 방패막이를 해주며 카트린을 챙겨주는 사람은 디안이었고, 카트린이 아플 때마다 찾아와 몇날며칠씩 간호를 해주는 사람도 디안이었음.


즉 카트린에게 디안은 유서깊은 귀족이란 이유로 실권을 잡고 자기 남편을 빼앗아간 연적인 동시에, 프랑스 궁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기를 왕비로 존중하고 보호해준 동반자였음. 당연히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워만 할 수도 없는 여자 너낌.


참고로 앙리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사랑 이상으로 디안에게 목을 맸기 때문에, 카트린을 대하는 앙리의 태도 역시 전적으로 디안이 결정했음. 카트린이 무시당하면서나마 왕비 자리를 지키고 차기 프랑스 국왕이 될 아들들을 낳은 것 자체가 디안이 (로판 속 흔한 정부와 다르게) 카트린에게 다정했단 증거ㅇㅇ,,,










섭정이 된 카트린은 디안에게


- 앙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 것

-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슈농소성을 돌려줄 것

- 생전의 앙리가 맡겨둔 왕관의 보석을 반환할 것


세 가지만 요구할 뿐 다른 해코지는 하지 않았고, 앙리가 몇십년에 걸쳐 갖다바친 선물들도 계속 디안이 소유하게 허락해줌. 카트린에게 용서 아닌 용서를 받은 디안은 앙리가 자기를 위해 지어준 성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함.

(백합물로 먹고 싶다)
















이후 카트린의 삶을 이야기할 겸 다시 정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앞서 말한 것처럼 유럽은 종교 개혁이 한창이었음. 프랑스도 마찬가지라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음 ㅇㅇ


당대 프랑스에서 가톨릭을 대표하는 귀족은 기즈 가문이었음. 꽤 유서깊은 귀족으로 프랑수아 1세가 사망 당시 앙리와 카트린에게 유언으로 “기즈 가문을 조심해라. 그들은 너희들 아이의 조끼까지, 그리고 너희들 백성들의 셔츠까지 몽땅 벗겨 갈 것이다.”고 경고한 바 있음.







그러나 디안이 (앙리의 정부가 되기 이전에)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기즈 가문으로 시집 갔기 때문에, 앙리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기즈 가문의 세력은 오히려 더 늘어남. 기즈 가문의 권력에 왕권까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자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를 지키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 먹음.


앞서 말했듯 카트린은 피렌체 출신이라 종교적 열정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철저한 실리주의였음.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을 봉합하고 (아들들이 이끌) 발루아 왕조를 종파를 초월한 왕조로 만드는 게 카트린의 목표였음ㅇㅇ

이를 위해서 카트린은 때론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을 부추기고, 또 때로는 화합시키려고 애씀. 당대의 파리는 여전히 가톨릭이 주류였기 때문에 카트린은 개신교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기즈 가문과 적절히 연합해 가톨릭을 왕권의 지지 기반으로 만듬.









BUT 카트린의 셋째 아들이자 카트린이 가장 사랑했던 앙리 3세는 카트린과 아예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 위의 두 형이 사망한 후 왕이 된 앙리 3세는 기즈 가문을 대놓고 적대시하면서 개신교도를 자기의 정치적 동맹자로 택함.

당시 프랑스 가톨릭의 핵심이었던 기즈 가문은 당연히 반발하고, 앙리 3세를 내쫓으려고 함. 이미 귀족 사회를 장악한 기즈 가문을 견제할 힘이 없었던 앙리 3세는 냅다 기즈 형제를 암살해버림





그전부터 병석에 누워있었던 카트린은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고, 오랜 친구인 추기경을 찾아가 “아, 그 가련한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 애는 자신의 모든 걸 무너트려 폐허로 만들고 있어요.” 라는 말을 남긴 후 이틀 후 사망함.

이후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를 위해 평생 헌신한 보람도 없이 약식으로만 장례를 치르고 묘비도 없이 성당 바닥에 묻힘,,게다가 이러나저러나 자기 지지 세력이었던 기즈 가문에게 엿을 먹인 앙리 3세도 폭동에 쫓겨 파리를 떠나 도피하는 신세가 됨.







모두에게 잊혀진 카트린의 유해를 수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앙리의 사생아 디안이었음. 이 애는 앙리가 18살 때, 즉 디안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 이전에 잠깐 사귀다 헤어진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앙리의 첫 아이기도 했음.

당시 앙리와 카트린은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서, 앙리는 불임인가 의심을 받고 있었음. 근데 비록 사생아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번에는 역으로 카트린의 위치가 흔들림. (실제로는 앙리가 카트린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 아이가 안 생긴 거지만 사정 모르는 사람 눈에는 카트린이 불임인가 싶으니까)

이 무렵 앙리와 정부 관계로 발전한 디안은 (카트린을 보호해주기 위해) 앙리에게 카트린과 동침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이 사생아를 자기 로 삼아 직접 교육함. 이당시 디안은 이미 40대로 아이를 낳기는 너무 늦은 아이였기 때문에 앙리는 이 사생아를 디안과 자기의 딸로 여기고 디안의 이름을 물려줌.

디안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작은(?) 디안은 궁정 내에서 대모인 디안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았고, 카트린의 자녀들과도 원만하게 지냄. 특히 앙리 3세도 이복누나인 디안을 엄청 좋아하고 따름.

대모인 디안이 그랬듯 카트린을 프랑스의 왕비로 존중하고 아꼈던 작은 디안은 카트린이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 카트린의 유해를 발굴함. 이후 카트린의 시신을 왕실 묘역으로 옮겨 앙리의 곁에 묻고 뒤늦게나마 안식을 선물함.








이후 앙리 3세는 개신교 세력인 나바르의 앙리에게로 도망쳐 그를 프랑스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해주고 거시서 프랑스의 국왕 대접을 받는데, 카트린이 사망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기즈 형제의 원수를 갚으려던) 가톨릭 수도자의 손에 암살당함. 카트린이 그렇게나 지키려고 했던 발루아 왕조도 같이 끝장남ㅇㅇ


이후 나바르의 앙리는 개신교 군대를 모아 파리로 진격하는데, 파리는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할 테니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요구함. 이에 “파리는 (가톨릭식)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지!”라며 화끈하게 개종해버리고() 프랑스의 국왕이 됨. 이 사람이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인 앙리 4세임.


(참고로 디안의 인 작은 디안은 앙리 4세랑도 정말 잘 지냈음. 왕세자의 교육을 맡을 정도.)





















자 이제 더 매운(?) 동양 버전


때는 뭐...대충 15세기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열여덟 살의 젊은 황태자가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함. 이름은 주견심.






앞서 말한 앙리가 그랬듯, 주견심의 유년 생활도 다소 막장이었음.

일단 주견심은 아버지 정통제와 주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음. 이전까지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황후소생의 적자였기 때문에 주견심은 황태자 책봉을 못 받는 게 정상이었음ㅇㅇ





근데 주견심이 3살 때 토목의 변 이라는 사건이 일어남. 무역 문제로 마찰을 빚던 오이라트와 명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중 황제가 포로로 사로잡혀버린(...), 중국사에서 손 꼽히는 사건임.

아무리 정통성 따지는 시대라지만 나라가 위태위태한 마당에 고작 세 살짜리 어린애를 황제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잖음? 정통제의 어머니인 손태후와 조정 대신들은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올리고 정통제의 장남인 주견심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로 함. 당장 직무 수행이 가능한 어른에게 황위를 맡기되 황위는 정통제의 자손들이 잇자고 합의한 것ㅇㅇ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이리하여 정통제의 동생이자 주견심의 삼촌인 주기옥이 황제로 즉위함.




중국산 궁중 암투 작품들 읽어본 여시들은 알겠지만 동양, 특히 중국에서, 황제의 형제는 파리목숨이나 다름 없음. 권력 앞에 가족이고 뭐고 어딨겠음. 졸지에 황제가 된 주기옥은 형 정통제가 돌아와 다시 복위할 경우 (이유가 뭐든 황제 노릇을 한) 자기를 위협으로 느끼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임.








와중에 오이라트 군대는 정통제를 앞세워 베이징에 쳐들어오지만 조정 대신들은 여차하면 정통제를 버릴 작정까지 한 상태였음. 오이라트의 칸은 정통제 송환을 두고 협상을 하려고 하지만 흐지부지되고, 요새나 다름없는 베이징 함락도 실패함.


기껏 황제를 포로로 잡았지만 할 일이 없는(...) 상태가 되자 오이라트는 아무 조건 없이 정통제를 풀어줌. 이왕 이렇게 된 거 정통제가 돌아가 동생 주기옥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개판이 되길 기대한 너낌이랄까.











앞서 말했듯 형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던 주기옥은 돌아온 정통제에게 무늬만 태상황 작위만 던져주고 연금시켜버림. 정통제의 친아들인 황태자 주견심의 자리도 자연스럽게 위태로워짐. (겁 많은 거 치고 화끈하노)

결국 토목의 변으로부터 3년 후인 1452년 5월, 주기옥은 주견심을 폐태자한 후 자기 친아들 주견제를 태자로 삼음. 주견삼의 나이 여섯살 때 일이었음.





토목의 변 이후 친부모와 생이별해서 혼자 자라오던 허수아비 태자가 공식적으로 폐위까지 당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 그나마 할아버지 선덕제의 조선인 후궁이 연민을 느껴서 주견심이 죽지 않게 챙겨줬지만 그래봤자 힘 없는 후궁이었고, 괜히 주견심과 엮였다가 새 황제의 눈밖에 나고 싶지 않았던 황궁 사람들은 어린 주견심을 아예 투명인간 취급해버림.

앞서 말한 앙리는 어쨌거나 프랑스의 왕자로 대우 받았고 포로 생활 내내 친형이랑 같이 있었단 걸 고려하면 역시 동양 궁궐이 더 매움 ㅇㅇ 이 당시 주견심이 의지했던 사람은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열아홉 살 연상의 유모 만정아였음. 만정아는 원래 손태후를 모시던 궁녀인데, 손태후가 토목의 변 직후 어린 손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만정아에게 손자를 맡김.

뭔 평행 이론이니?


(참고로 일러는 그냥 취향이라 넣은 거고, 저런 절세가인st는 아니었음. 디안과 달리 뚱뚱하고 남자처럼 생겼다는 기록이 있음.)










유폐 5년 후인 1457년, 주기옥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정통제가 탈문의 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고 역으로 동생을 감금시켜버림. 11살의 주견심은 황제의 장자로써 다시 황태자 책봉을 받음.


사극 드라마를 본 여시들은 알겠지만 아들이 황태자 책봉을 받으면 엄연히 윗사람이 됨. 더군다나 주견심의 생모는 후궁이어서, 정통제가 도로 황제가 된 후에도 아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못함. 인격 형성에 제일 중요한 어린 시절을 저런 막장 환경에서 보낸 거도 모자라 후속 조치까지 없었던 바람에 주견심은 자연스럽게(?) 애정 결핍이 됨.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이런 주견심의 성격은 황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음.

자기를 핍박한 삼촌 주기옥과 그 딸들에게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는 위치가 된 후에도 그들을 내버려뒀고, 오히려 삼촌 주기옥을 정당한 황제로 인정하고 경태제로 추존까지 해줌. 좋게 말하면 너그럽고 나쁘게 말하면 유약한 황제가 된 것임ㅇㅇ












주견심이 왜 만정아를 사랑한지 벌써 알 것 같지만 보충 설명을 조금 해보자면...




주기옥이 황제이던 시절의 주견심은 8년 내내 황궁 사람들에게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고 했잖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주견심의 곁을 8년이나 묵묵히 지켜주는 건 아무리 손태후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어려운 일임. 만정아 역시 목숨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한 너낌. 고로 주견심에게 있어 만정아는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음.

게다가 만정아는 저 시절을 곁에서 함께한 사람답게 주견심의 애정 결핍을 잘 이해하고 칼같이 케어해줌. 눈치가 빠르고 황제의 심기를 잘 맞춰준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을 정도?

예를 들어 주견심은 기존 호위기관인 금의위&동창만으로는 안심을 못해서 즉위 직후 서창이라는 새 호위 기관을 추가로 만들라고 명령함. 그러자 만정아는 그냘부터 주견심이 어딜 외출할 때마다 전투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자기가 앞장서서 나가줌.


야 근데 이건 나라도 좋아할듯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주견심은 다시 황태자가 된 후에도 만정아에게 극도로 의존했고, 이 감정은 서서히 사랑으로 발전함. 결국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발전함.






황제가 된 주견심은 즉시 만정아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지만 저 시대에 19살 차이가 가당키나 하겠음? 주견심의 친모인 귀비가 만정아보다 연하인 마당에 황후 책봉은 꿈도 못 꿀 소리였음.

더군다나 만정아는 주견심의 유모였잖음? 저 시대 왕족이나 황족의 유모는 단순한 베이비시터가 아니었음. 친모를 대신해 아이를 양육하며 실질적인 어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키운 아이가 황제가 되면 꽤 높은 품계의 직책을 얻을 정도로 공식적인 자리였음. 그래서 유모인 만정아에게 집착하는 주견심을 두고 패륜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음ㅇㅇ...











황후 책봉은 엄연한 내명부의 일이었기 때문에 태후의 승인을 받아야 했음. 주견심이 즉위할 당시 태후는 아버지 정통제의 황후인 전태후, 친모인 주태후, 이렇게 두 사람이었음. 조정 일에 관심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전태후는 너네 알아서 하세요 라는 스탠스를 취했지만 반대로 주태후는 기를 쓰고 반대함.


결국 주견심은 만정아를 황후로 책봉하는데 실패하고 귀비 첩지만 내림. 이후 (주태후가 선택한) 오씨 성을 가진 여자가 황후가 됨. 이런 고난 아닌 고난을 겪으며 주견심의 사랑은 한 술 더 떠 집착으로 발전함.













당연하게도 오황후는 주견심과 만정아 사이의 이런 기형적인 유대감을 이해할 수 없었음.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만정아를 거슬려하던 오황후는 어느 날 만정아의 무례한 행동을 이유로 회초리질을 함.

이 소식을 들은 주견심은 “내가 황후를 벌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는 그대로 태후궁으로 달려가서 황후를 폐위하라고 길길이 날뜀. 주견심의 눈 돌아간 모습을 처음 봤을 주태후는 마지못해 황후 폐위를 승인해줌. 황후 책봉 한 달 만에ㅇㅇ...














뭐 앙리도 주견심만큼 집착했으면 했지 덜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쪽이 서양보다 매운 맛이냐






19살 연상의 유모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동서양의 두 황제들 : 순한맛 로판과 매운맛 동양풍 로설 | 인스티즈


명나라는 쌍방 집착이었음.





만정아는 주견심이 즉위한 다음해에 아들을 낳음. 둘 사이의 첫 아이이자 주견심의 첫 아이였음. 근데 이 애가 유아기에 요절해버림.

당시 만정아의 나이 마흔. 만정아가 다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고, 실제로도 요절한 저 아이가 만정아의 유일한 아이였음.










안 그대로 후계 생산에 대한 집착이 심한 시대인데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니만큼 황태자 책봉이 시급했음. 대신들은 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댔고, 주태후도 허구한 날 주견심을 불러다 라고 잔소리를 해댐.


당시 후계자 생산은 황제의 가장 큰 의무였고, 유약한 주견심은 그런 압박을 단호하게 뿌리칠 성격이 아니었음. 게다가 만정아가 아이를 또 낳을 수 있다면 모를까. 첫 아이를 잃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를 못 낳았잖음? 결걱 주견심은 만정아에게서 태자를 보는 걸 포기하고 이따금 다른 후궁과 잠자리를 가짐.














물론 주견심이 사랑하는 건 만정아 뿐이었고, 다른 후궁과 하룻밤을 보내더라도 항상 만정아에게 돌아왔지만 앞서 말했듯 명나라는 쌍방 집착이었음. 만정아는 본격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함.



- 걸핏하면 후궁 뺨 때리는 등 패악 부리기

- 후궁이 임신하면 낙태약 먹이기

- 어쩌다 무사히 아이가 태어나 태자 책봉받자 태자와 생모를 독살하기


너무 매워요




주견심은 만정아의 이런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절대 만정아를 벌하지 않았음. 만정아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오면 찢어버렸고, 미쳐가는 만정아가 사람을 죽이면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라고 지시만 하고 묻어버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475년, 주견심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이 됨. 여느날처럼 주견심의 머리를 빗겨주던 태감이 충격적인 고백을 함. 사연인 즉 주견심이 후계자 생산을 위해 하룻밤 동침하고 잊어버린 후궁 중 하나가 황제의 아들을 낳았는데, 만귀비의 보복이 두려워 아이를 자기한테 맡겼고, 자기가 황자를 빼돌려 5년간 키워왔다는 거임.


주견심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이를 데려와 바로 황태자 책봉을 함. 제대로 미쳐버린 만정아는 즉시 아이의 생모를 죽여버렸고, (아이를 보호해온) 태감 역시 자기 운명을 예감하고 자살함.


만정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태자까지 죽이려고 하지만 이러다 나라 망하게 생겼잖음? 주태후는 즉시 아이를 태후궁으로 데려가 직접 양호하며 보살핌. 아무리 그래도 태후궁에서까지 깽판을 칠 수 없었던 만정아는 결국 태자 살해를 포기함.















이후 1487년, 59살의 만귀비는 궁녀를 매질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사망함. 끝까지 패악 부리다가 갔다고 할 수 있겠음.


평생을 만정아에게 묶여 살았던 주견심은 황귀비 작위를 만들어 만정아를 횅귀비로 추서하고, 황제만 묻히는 명당인 천수산 내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만귀비를 묻어주고, 황후의 봉관을 비롯해 온갖 금은보화를 부장품으로 묻어줌.


그렇게 황후보다도 극진한 장례를 마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주견심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그 해를 못 넘기고 사망함. 향년 40세로 유언은 “만귀비가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소.


진짜 지독한 새끼들...














이리 하여 둘의 지긋지긋한 사랑은 죽음으로 끝났고, 주태후가 양육하던 태자가 뒤를 이어 황위에 오름. 근데 이 때를 기점으로 명나라 황제들의 얼굴이 너무 확 달라져서, 이 태자가 주견심의 친자가 아니라는 음모론이 있음. 뭐 친자여도 만귀비의 아들은 아닌 판국에 주견심이 친자인지 아닌지 신경이나 썼겠냐만은 여튼ㅇㅇ















오늘의 교훈 : 유년시절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 끝 -



 
오래된 사랑시  🍓🌝
👍
2개월 전
👍
2개월 전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는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군요
2개월 전
😲
2개월 전
👍
2개월 전
이게 웹소설...? 인건가요?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일인가요?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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