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전국 여느 주요 도시처럼 광주에서도 사흘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행진이 진행됐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학생들의 행렬에 대학교수들이 함께 행진했고,
그 뒤를 따르는 많은 광주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1980년 5월 16일, 10만 시민과 학생이 운집한 5.16 횃불 집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고 박관현은 이날 생전에 했던 마지막 연설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횃불처럼 타오르게 하자"고 열변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된 다음 날.
대학 교문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대학을 지키고 있었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에 반발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계엄군을 상대로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 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고, 금남로까지 이동했다.
금남로를 메운 시위대를 맞이한 것은 신우식 준장이 지휘하는 7공수여단 33, 35대대. 피눈물나게 '화려한 휴가'는 이렇게 시작됐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
청각장애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김경철 씨는 귀가 하던 중 공수부대에게 구타를 당한다.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서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사망했다.
1980년 5월 19일.
참혹함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불어난 수천명의 시위대가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하게 부딪쳤다.
1980년 5월 19일 오전 10시.
7공수여단은 중원군으로 도착한 11공수여단과 함께 골목을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대검과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19일 20시.
광주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며 민주화의 물결은 수만 명의 인파로 더욱 거세어졌다.
1980년 5월 20일.
정부는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가하자 광주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전달했고,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속옷만 입힌 채 마구잡이로 구타하며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그 날 오후, 200여 대의 택시와 버스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공수부대의 저지선으로 전진했다.
20만 인파가 순식간에 운집했고, 이 날 저녁 처음으로 공수부대가 군중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즉각 3공수여단을 증파했고, 3공수 여단장은 실탄 장착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3공수여단의 무차별 살상은 극에 달했다.
1980년 5월 20일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했고,
1980년 5월 20일 23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국내 주요 일간지는 광주의 비극을 보도했다.
"시민의 피해보다 진압군의 희생이 더 많았다"고.
같은 날, 무차별 학살 속에서도 신군부의 보도지침과 눈과 귀를 닫아야 했던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며 공동 사직서를 제출했다.
언론의 거짓말에 시민들의 분노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 정부는 20사단을 광주에 또 증파한다.
이로써 인구 73만의 도시 광주이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최정예 무장병력이 집결됐다.
시민들의 사망 숫자는 계엄군의 완벽한 임무 수행에 의해 조금씩 더 늘어났다.
1980년 5월 21일 13시.
시위가 끝나기만을 고대하던 시민들이 모여있던 전남 도청 앞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11 공수부대의 총구가 일제히 시민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마'는 '사람'을 잡기 시작했고,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들은 광주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격은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약 20분 동안 계속 됐다.
시민들은 계속 쓰러져 갔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빌딩 위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준비했다.
병원은 총상 환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오자마자 죽은 환자, 얼굴에 총탄을 맞아 눈이 밖으로 빠져나온 환자 등. 병원은 아수라장이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는 독재와 학살의 악취로 가득했다.
수많은 청년들은 즉각 나주, 화순 등 외곽으로 빠져나가 도민의 총궐기를 호소했고, 시위대는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광주를 지키기 위해 지방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을 시작했다.
무장한 시민군들은 각지에서 진압군과 교전을 벌였고, 수세에 몰린 신군부는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계엄군은 외곽에서 광주를 봉쇄하였고, 아주 짧은 평화가 광주를 찾았드.
1980년 5월 22일.
시민군은 광주시의 외곽의 경비를 맡는 한편, 환자 수송, 주요 관공서 치안유지 등 스스로의 임무를 나누어 맡으며 자체적으로 질서를 찾아나갔다.
치안 부재의 상황 속에서도 당시 광주시내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 등에서는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주요 병원들은 일손과 의약품이 턱없이 부족했고, 수혈에 필요한 피도 부족했다. 이 소문이 시민들 사이에서 퍼지자 부상자를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이 때 중앙일간지들은 거의 모두 광주를 무법천지와 살인, 방화, 약탈, 폭도가 날뛰는 도시로 지면을 가득 채웠고,
계엄당국은 언론을 이용해 광주의 항쟁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보도해 광주를 철처히 고립시켰다.
훗날 이 보도 내용은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합법행위로 규정됐다.
단 1명의 북괴 개입도 없었으며, 당연히 폭동도 아니었다.
광주가 부모, 형제와 가족을 잃어버린 희생자의 울음소리로 가득 찰 때 계엄군은 새로운 작전을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광주를 포위하고 조금씩 전진했다.
그동안 작전 중 시민의 사망자수는 계속 늘어갔다.
1980년 5월 24일 13시 20분.
공수부대는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놀던 소년들에게까지 사격을 가하여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방광범 군이 좌측 머리에 총탄이 관통되어 사망했고,
1980년 5월 24일 14시 20분.
송암동에서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해있던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했고, 오인사격 화풀이로 인근 무고한 주민들을 무참히 살상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광주의 아들들은 내 가족 내 친구를 학살한 계엄군에 대항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결사항전을 다짐한 시민군의 마지막 요구 조건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었다.
군의 과잉진압 사과와 희생자 보상, 사후 보복금지, 계엄 해제와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 등 일곱개 사항.
하지만 군 측은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상태에사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했고, 마침내 항쟁 지도부는 최후 무기 반납 시한을 넘기고 만다.
1980년 5월 26일.
광주를 포엄하던 계엄군은 시내 코 앞까지 진출하며 광주를 '완전제압'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무력 진압을 앞두고 신군부는 병력 사용에 관해 미국 측과 은밀히 조율했다. 미국 항공모함 등으로 '한국의 안전을 북한으로부터 보호' 하는 사이 2만의 최정예 부대는 광주를 둘러쌓았다.
1980년 5월 26일 오전 8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지만, 그날 밤 12시, 광주 시내 전화의 통화음은 끊겼고 그렇게 광주의 마지막 희망도 끊겼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고,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울렸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폭도'들을 소탕하러 온 2만여 명의 총에서 1만여 발의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은 1시간 만에 시민들을 완전히 제압했고, 8시 50분. 시내전화는 다시 재개됐다.
'광주의 폭도'들을 모두 진압하며 피비린내 났던 '화려한 휴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남도 계엄 군소에서 알리는 말씀입니다. 여섯시 현재 작전 결과,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습니다. 폭도들은 생포 207명. 사망 2명입니다."
신군부는 이날 새벽 다수의 전차, APC 장갑차, 무장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 각종 전투용 살상 무기를 총동원했다.
이렇게 신군부는 12.12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제압했고, 또 한 번 무력으로 시민을 진압했다.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이 되고 유신헌법의 변종인 8차 개헌으로 12대 대통령에 취임, 독재국가에서 7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전두환에 이어 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당선되며 그들의 권력은 영원할 것만 같았으나, 대한민국은 그들의 만행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1994년 5월 13일.
5.18 사건의 피해자들이 전두환 노태우 등 5.18 관련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고,
1996년 1심 법원은 전두환을 내란 및 반란의 수괴로 판시, 사형 판결을 내렸다.
2심에서는 전두환에 관한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했고, 대법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의 범죄를 확정해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했다.
노태우는 2013년 추징금을 완납, 전두환은 1600억여 원 미납상태이다.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개입설' 이나 '폭동설' 등을 허위라고 결론지었고,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광주 시민들의 정신은 훗날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쥐고 있는 자유와 민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광주광역시가 확인한 5.18 민주화 운동 사망자는 163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 후 사망자 101명이다.
부상자 3139명과 기타 피해자 1589명 등 피해자는 총 5189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를 수령한 사망자의 수이며,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난다. 피해자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는 밝혀지지 않은 채 진실은 광주의 금남로에 묶여있다.
우리는 아직도 '폭동' 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가운데, 36번째 5월 18일 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