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수다가 이어졌다. 김진아는 송민호와 강승윤의 대화에 입을 가리며 호호호 웃었다. 송민호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어색한 분위기만이 김진아와 강승윤, 그리고 나를 감싸고돌았다. 김진아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톡 두들기며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송민호를 기다렸다. 나는 강승윤에게 몸을 대었다. 따듯한 몸을 가지고 있던 강승윤이라 폭 기대었을 때 느낌이 좋았다. 아아, 힘들다.
강승윤은 흘러내린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김진아는 다 큰 사내 둘이 이러는 게 이상했는지 굉장히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게이인 것을 알아도 강승윤이 게이인 줄은 몰랐나 보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한 글자 한 글자 메모를 적어내려갔다. 강승윤은 내가 무얼 쓰고 있는지 궁금했는지 어떻게든 보려고 몸을 비틀었다.
계속 움직이는 강승윤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강승윤은 엄살을 부리는 건지 장난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다 쓴 메모를 강승윤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강승윤은 내 돌발행동에 한참을 핸드폰 액정을 보다가 쭉 읽어내려갔다. 강승윤은 메모장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그런 표정으로 보았다. 나는 눈썹을 찡긋했다. 그래도 눈치가 빠른 강승윤이라 바로 내 사인을 알아들었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송민호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질투 좀 내게 하고 싶으니까 나 좀 도와줘.'
메모장의 내용이다. 강승윤은 조금 떨어져 있던 엉덩이를 붙였다. 김진아는 우리 둘끼리만 키득키득대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 찌푸려도 상관 안 써, 이년아.
송민호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수트를 입어서 그런지 모델 느낌도 났다. 나는 송민호를 한 번 훑었다. 송민호도 내 눈길을 알아챘는지 더 당당하게 걸어왔다. 강승윤은 내 메모장에 무언가를 치려는지 내 핸드폰을 가져가 뭔갈 치는데 열중해있었다. 나는 강승윤의 어깨에 그 메모를 보기 위해 기댔다. 강승윤은 아까 내가 당부한 것을 기억했는지 나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강승윤은 계속 치다가 다 쳤는지 제 어깨에 기댄 내 얼굴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내밀고 웃었다.
'나중에 밥이나 한 번 사줘.'
강승윤은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래, 이 미소에 여자들이 홀딱 반하고 하는데 말이야. 왜 여자를 안 만날까. 송민호는 자리에 앉아 냅킨으로 젖은 손을 닦았다. 딱 달라붙어 있는 나와 강승윤을 의식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더 강승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강승윤도 싫지는 않았는지 제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계속되는 송민호와 김진아의 시선에 -김진아의 시선은 필요 없지만 송민호의 시선이 굉장히 중요했다- 나는 괜히 부담스러워져 다시 똑바로 앉았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각자 한 사람 앞에 접시들이 놓였다. 김진아는 입덧을 안 하는지 포크를 들고 침이 고이는 시늉을 했다. 맛있냐, 이년아. 내 앞에는 크림 파스타가 있었는데 괜히 강승윤 앞에 놓인 토마토 파스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계속 토마토 스파게티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나를 느꼈는지 강승윤이 포크로 돌돌돌 말아 내 입에 갖다 댔다. 나는 입을 벌려 그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살짝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김진아는 정말 경악한 듯 보였고, 송민호는 딱 봐도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하하하... 굉장히 친한 사인가 보네요, 승윤 씨랑 태현 씨랑..."
"네, 뭐. 꽤 오래 알아온 사이니까요?"
"악!"
"태현아, 왜 그래?"
"아니, 아니야."
입을 쭉 내밀고 있던 송민호가 강승윤의 대답에 테이블 아래로 내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김진아가 앞에서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송민호가 질투해서 그만하라고 다리를 차네요, 허허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대충 넘겼다. 나도 송민호의 다리를 안 세게 발로 찼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송민호가 우씨-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내 발을 살짝 밟았다. 나는 송민호의 유치한 태도에 괜히 열이 받아 아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강승윤 쪽으로 돌려 강승윤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를 보던 송민호가 관심 달라고 툭툭 치는 똥개마냥 내 다리를 아주 부러트릴라 퍽퍽 차 댔다. 나는 송민호를 한 번 째려보았다.
김진아는 티격태격 대는 나와 송민호를 보더니 약간 긴장했는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괜히 김진아가 가소로워 보였다. 정말 넘을 수 없던, 그런 넘사벽 같던 존재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니 사람을 무시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 돼버리고 만 말았다.
나는 송민호와 강승윤에게 눈길을 각각 한 번씩 주고는 자리에서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났다. 사실 급한 일이 생긴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송민호가 뒤를 따라와 줘야 일이 잘 풀릴 텐데. 괜히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가 안 들리나 온 신경을 뒤로하고 화장실 팻말이 걸려 있는 문으로 향했다. 의자가 드륵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발걸음을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향긋한 냄새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의자 끄는 소리가 강승윤인지 송민호인지, 아니면 이 둘도 아닌 김진아일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내가 바라는 그 사람일 것만 같았다. 나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된 거울 앞에 서서 아까 강승윤에게 기대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괜히 콧노래가 나와서 흥얼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굳은 얼굴을 한 송민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까 화장실 갔다 와서 또 오려면 오해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왔는지. 송민호는 내 앞에 두 걸음 정도 앞에 섰다. 상당히 굳은 표정이 나를 위축 들게 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송민호를 대면했다. 송민호는 뻔뻔하게 굴고 있는 내가 웃겼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강승윤이랑? 이러려고 강승윤 부른 거야?"
"제가 승윤 씨랑 한 거는 평소에 승윤 씨랑 하던 거예요. 원래 친한 사이였어서."
나를 노려다 보는 송민호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쫄 만도 한데 괜히 송민호에 대한 오기가 생겨서 계속 송민호를 쳐다보았다. 니는 김진아랑 꽁냥대면서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한참을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수그러 들었다. 통 송민호의 화난 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기분을 나쁘게 한 거는 사실이니까. 나는 눈빛을 유하게 풀고 송민호의 팔 사이로 내 팔을 집어넣어 송민호에게 안겼다. 송민호는 여전히 기분이 나빴는지 그냥 가만히 있다가 손을 가만히 있기가 조금 민망했는지 나를 안았다.
송민호 특유의 향이 났다. 시원한 남자 향수 냄새. 나는 송민호의 품으로 아이가 엄마 품으로 들어가듯 파고들었다. 송민호는 내가 아까 기껏 열심히 정리해놓은 머리 위에 큰 손을 올렸다. 내 머리를 살짝살짝씩 쓰다듬었다. 송민호의 행동이 괜히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팔색조네, 송민호.
"저 질투했어요? 강승윤이랑 그렇게 있으니까?"
"어. 그랬던 것 같애."
"도련님이 먼저 진아랑 얘기하고 붙어있었잖아요."
"어쩔 수 없잖아."
"나 좋아해요?"
"어."
"에?"
나는 꽤나 단호한 송민호의 대답에 잠시 품에 떨어져 나와 송민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은 송민호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옆으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두 남정네가 조금 이상하게 비쳤다. 이 고급스런 화장실에서 남정네 둘이 끌어안고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니. 송민호는 다시 나를 제 품에 가두었다. 나와 송민호가 있는 이곳의 분위기가 한층 더워졌다. 나는 괜히 열기가 올라오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지만, 별로 나아지는 건 없었다.
"김진아는요?"
"김진아도 사랑해.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김진아를 사랑하는 거보다는 내가 남태현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 이건 확실해."
"나는 좋아하냐 물었는데 사랑한다고 답하면 어떡해요."
"좋아하냐의 업그레이드 버젼이 사랑해니까 상관없는 거 아냐."
나는 정말 유치하게 말하는 송민호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살짝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그냥 먼저 뽀뽀를 했다는 사실이 괜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송민호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더니 내 머리를 마구 흩트려놓았다. 나는 송민호의 장난에 배시시 웃었다. 나도 송민호의 머리를 쓰다듬고 마구 흩트려 놓고 싶었지만 지엄하신 도련님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발을 살짝 밟아줄 뿐이었다. 근데 뭔가 엄청 까먹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저 이제 나가 보아야 해요. 여기 있은 지 너무 오래됐어."
"너 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갈게."
송민호는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송민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치고 대충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저 멀리 우리 자리에 강승윤과 김진아가 뻘쭘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 내가 이걸 까먹고 있었구나.
강승윤에게는 미안하지만 밀당은 성공한 것 같네. 밀당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