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Mark Lee / Jeno
G
불가피한 것
J 번외
제 다리 하나 잘라버리면 그만인 덫보다는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늪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빨랐다. 키가 어머니의 키보다 이센티가량 컸을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죽음을 먹는 자의 자식, 살인자의 자식. 어딜가나 따라붙는 꼬리표였고 주홍 글씨처럼 보이지 않게 아로새겨진 낙인이었다. 그 늪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 수록 자신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구역질 나는 저 아래로 한 치의 빛을 볼 수 없는 저 바닥까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고 어떤 도움도 요청할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아득하게. 그 속으로 어쩔 수 없이 힘을 풀고 잠식하고 있을 때 시야를 가려온 건 다름아닌 네 얼굴이었다. 한없이 앳된 그 얼굴 하나 의지해서 늪을 헤치고 그 수면 위를 유영했다. 수면 아래의 어둠과 흙탕물을 무시하고 꿋꿋이 떠 있었다. 햇살 아래 머물며 햇빛 받아 훤히 빛나는 네 얼굴 한 번 보려고.
‘내가 너랑 호그와트를 왜 가.’
‘갈 거면 너 혼자 가.’
몇 십년도 되지 않는 내 짧은 인생 중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꼽으라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날의 일을 지목할 것이다. 그래, 너한테 모질게 행동하고 모질게 말했던 그 날의 모든 것들을 난 후회한다. 차라리 모든 걸 말하고 겁난다며 엉엉 울었다면 그렇게까지 멀어져야 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생각도 어리고 어리석어서 당장 내 앞에 놓인 길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이거 다 변명같은데 할 말이 이거밖에 없다.
‘그 사건’ 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데. 그 날 이전이나 이후나. 늘상 우리 집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대대적으로 패했던 호그와트 전투 이후였으니 당연한 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말로는 우리 부모님이 죽음을 먹는 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순간에 권력을 잃은 사람들은 숨어지내거나 오히려 더 발악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우리 부모님은 전자에 속했다. 하지만 숨어지내며 은밀히 움직였다. 주인을 잃었다는 악에 받혀 눈에 불을 키고 죽일 사람을 물색했다. 그러다 불사조 기사단 소속인 오러 한 명 죽이자며 타깃을 정하고… 기어코 아버지는 신문에 떠들썩하게 이름이 실리고 사진이 실렸다. 죄목은 살인으로.
그렇게 아버지가 아즈카반에 수감된 뒤에도 어머니는 '그 분'의 부활을 꿈꿨다. 언젠가는 돌아오실거라며 움직이지도 않는 표식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광기 어려가는 어머니를 두고 나는 학교에서만 숨어지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는 내 학교인 덤스트랭에서. 내가 끌린다고 너에게 말했던 그 덤스트랭. 그런데 여주야. 그거 알아?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는 북유럽의 덤스트랭도, 미국의 일버르모니도 아니었어. 너 혼자 가게 된 호그와트. 나도 엄청 가고싶었다? 왜 나라고 거길 안가고 싶었겠어. 더군다나 너랑 함께인데. 너랑 한 시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곳인데. 나한테도 호그와트의 입학 허가서가 날아왔던 날. 그 양피지 한 조각을 수십번 찢어 다 꺼져가는 난로에 흩뿌리면서 그제야 울었어. 너한테 보내려고 했던 꽃잎까지 다 태워먹으면서 펑펑 울었다 나. 내 하루의 절반은 너였는데. 내 웃음의 이유도 너였는데. 어떻게 그걸 한번에 두고 떠나.
그래서 다시 찾으러 왔어, 하루의 절반을. 내 웃음을. 내 꽃잎의 하나뿐인 수신인을. 그래, 너를.
휘갈겨지던 깃펜이 멈추었다. 열심히 적었지만 그 아이는 볼 수 없는 편지를 빼곡히 일기장 한 칸에 채워넣은 채. 제노는 일기장을 덮었다. 찾으러 왔는데 빼앗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뭐라도 해야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꼭 영영 잃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치솟은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밀린 숙제를 앞에 두고서도 자꾸만 분노가 튀어나와 집중을 방해했다. 분노의 화살은 이제노에게로 쏘아졌다. 갑자기 나타난 이제노가 나에게 했던 말은 온통 알 수 없는 말 뿐이었다. 행동도 똑같이 알 수 없는 행동 천지였다. 더군다나 갑자기 이제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마크의 한국 이름은 혼란스러움을 더했다. 그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걸까. 또한 왜 적대적인 태도로, 어딘가 화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올렸을까. 답을 알 리가 없는 의문들만 머리를 하나둘씩 채워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혼란스러운 머리속이었는데, 이제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질문을 곱씹었다. 이제노가 던졌던 단말마와 같은 질문.
‘너, 걔 좋아해?’
‘마크 리. 이민형.’
그래, 저 질문. 저 질문을 받기 전에도 아까 말했던 것처럼 머릿속은 충분히 엉망인 상태였다. 싱숭생숭한 마음도 포함해서. 그야말로 혼란스러웠다. 이유는 햇살 아래서 마주했던 이민형의 눈빛이 계속 잔상에 남아서. 자꾸 그 장면 속에 앉아 있게 되어서.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나는 자꾸만 그 잔디밭에 그와 함께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 웃던 그 얼굴은, 차츰 가까워지던 그 얼굴은 되새길 수록 선명해져서 그럴때마다 괜히 볼에 열이 올랐다. 그래…. 그랬는데 딱 저 질문이 뇌리를 치고 들어온거다. 너 걔 좋아해? 마크 리, 이민형. 잘근잘근 씹었던 질문을 한번 더 질겅거렸다. 더불어 그 장면 또한 다시 재생시켰다.
‘….’
‘Sweetie.’
기억속 일련의 장면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재생된다. 그만큼 많이 꺼내봤단 뜻이다. 질리도록 들은 sweetie, 란 말이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을 간질거리는지. 또 왜 그 눈빛에 가슴 한 구석이 덜컹인건지. 또 왜 자꾸 얼굴이 빨개진건지. 그 이유를 깨닫기 위해 수십번을 꺼내 본 장면인데… 이제노의 질문 하나로 어렴풋한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단순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라고. 그래…. 이제야 하나의 혼란스러움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 장면을 되새겼다. 나를 보던 눈빛을 떠올리고,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가슴께가 울렁였다. 생각만 해도 수만마리의 나비가 뱃속에서 날개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그 모든 느낌의 이유를. 이민형을, 나를 스위티라고 부르는 마크 리를, 좋아한다.
*
좋아한다로 이민형에 대한 마음을 정의내리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때맞춰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이러다 터지면 어떡하지,라는 쓸데도 없는 걱정을 하다 밀린 숙제는 절반도 하지 못하고 잠에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이 공강이었으니 망정이지 있었다면 나머지 수업을 받을 뻔 했다. 빠르게 먹고 도서관으로 향할 요령으로 앞에 놓인 호두 파이를 우적대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퀭하다?” 이동혁이 옆에 걸터앉으며 물어왔다. 건너편에는 나재민이 마악 엉덩이를 의자에 살포시 붙이고 있었다. 엉. 잠을 조금 설쳐서. 다 씹기도 전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렸다. 물, 물! 급하게 손을 뻗을 때였다.
“Here.”
“…어?”
왜 안오나 했다. 나재민이 중얼거렸다. 왜, 누군데 라고 묻기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아서. 누군가가 내미는, 손에 닿아오는 잔을 쥐고 들이키자 호박주스의 달달한 향내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한 숨 돌리며 잔을 내민 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긴 누구야. 이민형이지. 곁눈질으로 본 이동혁과 나재민은 일찌감치 저 멀리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그래. 안가는게 이상하지. 어디 봐? 그러다 들려온 그의 물음에 그와 눈을 맞추었다. 오늘은 안경 썼네. 약간 가라앉은 머리에다 안경을 쓴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앞을 슬쩍 가린 머리카락 때문인지, 빛을 등지고 선 탓인지 모르겠지만… 안경 너머의 두 눈은 또 심연같이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Sweetie. 도서관 갈래?”
눈을 마주치려니 뒤늦게 깨달은 감정이 막아섰다. 괜히 떨리는 눈길을 피하자 꽤나 또렷한 한국말이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기에 망설임없이 남은 호두 파이를 뒤로 하고 그와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란히 빈 책상에 앉아 밀린 숙제를 꺼내들었다. 한동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깃펜을 움직였다. 산술점 과제를 하다 슬쩍 옆을 쳐다보았다. 그도 열심히 깃펜을 양피지 위에 휘갈기고 있었다. 열심히 하네.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몇 분동안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퍼뜩 시선을 돌릴 거면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작게 찢은 양피지 한 조각이 스윽 내밀어진다.
‘why are you staring at me?’
‘그냥.’
너무 빤히 쳐다봤나. 머쓱하게 웃으며 양피지 위에 끼적이곤 다시 그에게로 조각을 밀었을 때였다. 열심히 무언가를 적어내리던 그가 흘끗 양피지로 시선을 주더니 씩 웃으며 눈을 맞춰온다. 그렇게 갑자기 웃으면서 쳐다보면 설레는데. 또 괜시리 그런 마음이 들어 하던 산술점 과제로 고개를 쳐박았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더불어 가벼운 손길이 머리 위에 머물렀다. 어제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민형은 조심스럽게, 또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길이 멀어졌다. 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은 볼을 식히려 안간힘을 쓰며 그를 보았다.
“이렇게 하는거 맞아?”
아….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려 안간힘을 쓸 때였다.
“Ah, Sweetie. I'd like to ask you a question.”
묻고 싶은게 있다며 이민형이 속삭였다. 뭔데, 뭔데. 얼굴은 빨갛고 거리는 가깝고, 빨개진 얼굴 들키는 건 싫고. 급한 대로 양피지 한 귀퉁이를 찢어 내밀자 이민형의 깃펜이 바쁘게 움직인다. 다시 양피지 조각이 되돌아왔다.
‘아직도 나 별로야?’
아까 전부터 손바닥을 숨기더라니. 양피지 위에 삐뚤빼뚤하게 옮겨적은 듯한 글씨에 여러모로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별로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나 너 좋아하는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밀 자신은 없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여졌다. 어떻게 별로일 수가 있어. 아니라고 고갯짓하면 끝날 질문인데 속에서 꺼내야 할 마음이 생각보다 커져있어서,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쥔 깃펜만 더 세게 쥘 뿐이었다.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건, 아마도….
아니라고 단순한 부정의 답을 꺼내야 할지, 나 너 좋아한다는 말을 붙여 더 긴 부정의 답을 꺼내야 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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