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 것을 기점으로 궁은 혼란에 빠졌다. 궁녀들은 모두 서럽게 눈물을 훔쳤고, 왕후는 기어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지금 막 동혁이 입궐하여 한빈을 만나러 왔고, 한빈은 그런 동혁을 궁의 입구에서부터 기다렸다. 한빈은 옆에 서 있는 신하의 주의에도 아랑곳 않으며 계속해서 입가로 손톱을 가져갔다. 여간한 불안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빈은 형의 죽은 몸을 보았다. 칼은 세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했고, 더불어 그의 호위무사까지 중상을 입게 하였다. 지금 쯤이면 송 주부가 입궐하여 다친 호위무사를 치료하고 있을 것이다. 세자의 사인은 망혈과다였다. 부모와 신하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상처 하나 없이 자라왔던 깨끗한 몸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빈은 그걸 처음 보았을 때 그만 아무렇지도 않게 형의 어깨를 건드릴 뻔했다.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치면 다시 일어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죽은 형의 표정은 늘 그랬던 것처럼 온화하고 깨끗했다.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무위영에 소속된 별기군이 궁을 지키고 곧 소식을 듣고 입궐할 세자빈을 궁녀들이 기다렸다.
몇 주 전, 궁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었던 얼굴이 사색이 되어 한빈의 앞에 나타났다. 아버지의 피, 그리고 다른 여자의 피를 각각 절반씩 물려받은 배가 다른 동생, 동혁이었다. 신하는 예를 갖춰 머리를 숙였으나 동혁은 그러지 못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을 그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보이는 건 없었다. 예상조차, 한 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형의 죽음에 동혁은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하던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 겹쳐 떠올랐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줄곧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전갈을 들었는가?"
"……예."
"불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하지만 어머니가 지금 네가 궁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 크게 노할 것이니, 부디 조용히 있어야 한다."
"……첫째 형님은…."
"……."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한빈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크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동혁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설움이 복받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가는 어느 틈엔가 축축하고 빨갛게 변해 있었다. 주위가 온통 캄캄한 밤인데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간 눈이었다. 한빈은 유난히도 진환을 따르던 동혁의 유년을 기억해냈다. 왕후는 동혁이 자신의 아들과 살갑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둘은 아주 몰래 책방에서 만나 서로 읽은 책을 교환하거나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동혁은 조금 거친 감이 있는 한빈보다 부드럽고 상냥한 기색의 진환을 더 좋아했고, 진환도 그런 동혁을 남다른 애정으로 챙겨왔다.
하지만 지금 동혁은 진환을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 받고 있다. 권력을 노리고 측근을 보내 살해하였다는 것이 신하들과 왕후의 주장이었다. 한빈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형의 죽음에 이렇게나 슬픔을 표하는 동생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한빈은 문득 고개를 떨구었다. 단 반나절 안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틀어지고 있다.
동혁은 결국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손은 너무나 심하게 떨려와서 한빈은 그저 그런 동생이 안쓰럽기만 했다.
"혹, 제가 그 범인으로 의심을 사고 있습니까?"
허를 찌르는 동혁의 발언에 한빈의 뒤로 선 신하들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한빈은 복잡한 눈으로 동혁을 쳐다봤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아닌 제가 책임을 지고 범인을 잡아내겠습니다."
"……."
"형님을 죽게 한 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찾아내겠습니다."
"…미안하구나. 못난 형을 용서해라.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이 단 조금도 없었다."
"……형님께서 사죄하실 일이 아닙니다."
동혁은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았다. 왕가의 자리에서 극히 애매한 위치의 그는, 죽지 않기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살해 위협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 중의 반은 왕후의 배후가 있었다. 왕후는 동혁을 미워했고, 동혁을 아끼는 왕 역시 미워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동혁을 몰아붙여 진환을 살해한 자로 누명을 씌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빈은 동혁이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서자의 신분으로 어디를 가도 눈치를 살피고,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란 그가 너무나도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비단 대신에 값이 싼 두루마기를 걸친 동혁이, 고정한 갓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한빈은 될 수 있다면 동혁이 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변동이 없는 한, 왕의 뒤를 이을 자는 이제 진환이 아닌 한빈이 될 것이다. 한빈은 막연한 현실에 불쑥 쓰라린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불행에 머리가 아파왔다.
궁 밖이 소란스러웠다. 곧, 무장한 사내가 한빈과 동혁의 앞으로 나타났다. 세자빈의 호위무사, 지원이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세자빈께서 깨어나신지 이제 단 하루가 되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으셔서 제가 대신 입궐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만함을 용서하시지요."
그가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새빨간 동혁의 눈과 지원의 날렵한 시선이 일순간에 마주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5
지원은 정말로 밖으로 달려들 기세였다. 나는 그런 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향단이 화들짝 놀라며 그런 나를 부축했다. 세자가 죽었다. '세자빈'을 사랑하던 그가 죽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향단이 옆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들리는 건 없었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손이 떨려왔다. 향단은 계속해서 울음을 삼켜 넘기면서 그런 나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내내 나를 보살피려는 그녀가 문득 대견스러웠다.
단순한 사고를 당한 걸까? 아니면 지원의 말처럼, 그저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걸까? 둘 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게 그냥 하나의 꿈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세자가 죽었으리라는 예감이 머릿속으로 강렬히 찾아왔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모양이었다. 향단이 손을 뻗어 적삼의 고름으로 조심스럽게 뺨을 닦아주었다.
지원이 내 방 문 앞에 섰다. 그도 크게 동요하는 눈치였다. 어느 틈엔가 집에서 일하는 모든 머슴들과 몸종들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은 마당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고마운 감정을 느낄 틈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세자의 생각이 떠나가질 않았다.
"…아씨, 눈물을 흘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우발 사건에 지나지 않을 일입니다. 제가 대신 궁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지원아."
"……."
"…만일 정말로 그 분이 돌아가셨다면……."
"만일이라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확고한 지원의 태도에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조금 진정된 나를 살피며 향단은 찬우가 보내왔다는 전갈을 내게 내밀었다. 천천히 펼치니, 깔끔한 서체가 눈에 들어왔다. 띄어쓰기도 없이 빽빽하게 쓰여있는 전갈의 내용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방금 눈물을 흘려 시야가 흐리다는 것을 핑계로 문 밖에 있는 지원에게 편지를 넘겼다. 지원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향단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봤다. 어떤 내용이냐고 묻자, 지원은 편지를 접어 향단에게로 건넸다.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세자빈의 안부를 묻는 내용과, 나중에 그림을 보러 오라는 간청이 적혀 있습니다."
향단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걸 받아들었다. 지원은 그녀에게 바로 편지를 태울 것을 권했다. 향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알겠노라고 답했다.
그럼 향단아, 아씨를 잘 보살피고 있어라. 궁에 다녀오겠다. 지원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로 궁에 갈 작정인지, 내딛는 걸음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그가 궁에서 듣게 될 진실은 과연 어느 쪽일까. 향단은 편지를 태우고 따뜻한 물을 끓어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나는 방 안에 혼자 남겨졌다. 처음에는 홀로 남겨진 상황이 무섭고 외로웠지만 차라리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이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무디게 흘렀다. 일 분이 하루처럼 느껴지고, 십 분이 꼭 긴 이틀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안채에 있을 어머니가 걱정되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향단이 문을 두드렸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는데, 향단의 그림자 옆으로 눈에 익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아씨, 의원이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윤형이 찾아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러지 말라고 대답할 뻔했다. 지금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진심이 담긴 걱정을 들어버리면 틀림 없이 눈물이 터질 것이었다. 나는 망설이며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향단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작은 소반을 방 안으로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진하게 우린 차 두 잔이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아마 마당으로 들어선 윤형을 보고 급하게 한 잔을 더 준비했을 것이다. 안 쪽으로 놓인 잔에는 약하게 김이 피어올랐지만, 다른 하나는 아주 강하게 모락모락한 모양으로 김이 올라가고 있었다. 향단이 나가고 윤형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윤형이 그런 나를 말렸지만, 그래도 난 고집을 부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윤형의 등장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조금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무릎을 굽히고 앉자 윤형이 소반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야심한 시각에, 처녀가 홀로 계신 방 안으로 찾아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자빈이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세자저하의 옥체를 살피러 급히 궁으로 향하셨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깨어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덜컹 심장이 곤두박질을 쳤다. 거짓된 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세자는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윤형이 세자가 깨어나고 말고의 상황을 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상태는 위독할 것이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윤형은 잠시 침묵했다.
윤형의 앞에선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몇 분이 지났을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고개를 들어 윤형을 쳐다보니 그는 빗접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빗접 위에 놓인 연고 통을. 그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소반 위의 차 두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것과 자신의 잔을 바꾸었다. 윤형은 내 몫의 덜 따뜻한 잔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세자빈의 호위무사는 어디를 가셨습니까? 저번엔 그가 문을 열어주던데, 오늘은 다른 몸종이 대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러 궁에 갔습니다."
"그랬군요. 참으로 세자빈을 위하는 무사입니다."
윤형이 말을 마치고 내 손을 말 없이 주시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나도 따라서 고개를 내리니, 그 때가 되어서야 잔을 쥔 손이 형편 없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창피했다. 분명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런 불행이 나를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세자가 걱정됐고, 윤형의 앞에선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들켜버렸다. 마음이 서러웠다. 눈물이 쏟아졌다.
시야가 흐러졌다. 불투명하게 변한 세상은 나에게 어떤 불길한 예감을 주었다. 이대로 너무 많은 눈물이 흘러서 방 안에 가득 출렁이게 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안에서 과연 익사하게 될까? 잠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윤형은 내 얼굴로 손을 뻗어오다가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거친 손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으나 제 미천한 손으로는 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손이 닿으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자태입니다."
윤형이 변명했다. 나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비단결이 눈가에 닿을 때마다 쓰라렸다. 잠시 아픈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니 윤형이 이번엔 고민 없이 손을 뻗어 그런 나를 제지했다.
"자꾸 손을 가져가시면, 그대의 예쁜 눈이 상할 것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만 얌전히 기다리셨으면 합니다."
그가 엄하게 말했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는 괜한 행동으로 그를 걱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손의 떨림은 어느 틈엔가 멎어있었다.
윤형은 미동도 없이 앉아서 나를 쳐다봤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런 그의 눈이 마주치려고 할 때, 향단의 그림자가 문 밖으로 비쳤다. 향단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씨, 궁에서 지원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세자저하의 친족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원으로부터 듣게 될 소식이 두려워 도저히 그럴 엄두가 서질 않았다. 윤형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황조차 하지 않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말을 듣게 되더라도 곡읍만은 그대를 피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저는 그대의 슬픔을 원하지 않습니다."
윤형은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직접 문을 열었고, 천천히 방 안을 나갔다. 벌어진 문의 틈 사이로 조금 긴장한 표정의 향단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 몇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지원을 제외하고 두 명이었다. 향단에게 가려졌고, 너무 멀리 있어 그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입은 옷을 보고 왜인지 섬뜩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둘은 검은색 비단을 걸치고 있었다.
"…아씨, 안채로 오셔서 마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향단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가 신을 올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향단은 이번에도 나를 따라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낮은 신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문득, 향단이 안쓰러웠다.
그녀가 사라지고 지원이 내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안채로 향하는 동안, 나는 겁이 나서 뒤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뒤에는 세자의 가족들이 있다. 두 명 모두 남자고, 검은색 옷을 입었다. 어떤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슬쩍 지원을 바라보자,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었다.
안채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올리자 곧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원이 문을 열었고, 내가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으로 들어오는 건 어제에 이어 두 번째다. 바뀐 건 얼마 없었다. 모든 게 똑같았다. 적응이 되질 않는 늙은 여자의 표정 또한 그대로였다. 어머니다. 그녀는 '세자빈'의 어머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내 뒤로 낯선 남자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지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쩐지 조금 어색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
딱딱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몸을 붙인 남자가 말했다.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앉고, 조금의 침묵이 있은 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가장 끝에 앉아있는 남자는 앳된 얼굴이었다. 높게 잡아야 내 또래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자가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망혈과다로, 궁으로 돌아가시다가 도적의 습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호위무사 또한 그들에게 많이 다쳤고, 치료를 받다가 깨어나서 지금은 그로부터 정확한 정황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범인이 누구인지, 작고 사소한 것 빠짐 없이 모두 조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게 설마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까와는 다르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젠 거의 반사적으로 손이 떨렸다. 나는 그걸 감추기 위해 소매 안으로 손을 숨겼다. 그런 내 행동에도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일 오시에, 세자의 장례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
"…이것을 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
"그리고 세자빈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게 무슨?"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의아해 묻자 남자는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차가웠다.
"현재 전하의 옥체가 안녕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지금 궁이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왕위에 오를 자가 누군지, 다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래라면 형님이, 그러니까 돌아가신 세자께서 받아 마땅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제 세자께서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다시 책봉식을 진행하는 대신에, 조금 전 왕가의 회의를 통해 제가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
"더불어, 왕가의 안정을 위해 형사취수제가 적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손이 더 심하게 떨려왔다. 어쩔 수 없이 치맛단을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 앉은 남자를 건드리게 될 것이었다. 나는 차마 똑바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세자가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세자가 되었다.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나는 아직 어렸다.
"이런 차림으로 고백을 드려 죄송합니다."
"……."
"형을 따라서 세자빈을 사랑하겠습니다."
그 말에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
*별기군: 조선에 설치되어 무위영 소속으로 활동하던 군대.
*소반: 작은 상.
*곡읍: 슬퍼서 우는 것.
*오시: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형사취수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을 대신해 형수와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계속하던 고려의 풍습.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이 감사한 마음이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ㅠㅠㅠ
다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예정이에요!
계속 함께 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답니다!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