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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호는 때때로 세상이 저를 시험한다고 느꼈다. 대략 중학생 정도, 치기라면 치기고 무지라면 무지, 그런 류의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마주했을 때였던 것 같다.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려 줄까. 실실 웃는 창조주가 제 앞에 아른 거리는 듯한 환각을 은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좁은 반지하 단칸방 정가운데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신 제 아버지 앞에서도 보았다. 세상이 은호를 유혹했다. 아주 저급한 인간이 되어라. 아주 나쁘고 추악한 인간이 되어서 세상에 너를 알려라. 환각은 환청을 수반했고, 은호는 그 무렵 아버지가 남긴 쥐꼬리만한 보험금의 첫 소비를 학교 규율에 반하기 위해 하는 밝은 염색으로 선택하였다. 그 당시의 은호는 위태롭다면 위태로웠고 강인하다면 강인하였다. 갑자기 수업을 듣는 도중 책상에 코를 박고 교과서를 적시며 울기도 하였으며, 그게 아니면 지나가는 친구들에게 괜시리 시비를 걸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였으며, 또 그게 아니면 세상에 그림밖에 없는 인간처럼 중지손가락이 휠때까지 싸구려 펜을 잡고 인간,풍경,동물,식물 닥치는대로 교과서에 그려댔다. 


 다행히도 은호가 다니는 학교의 미술선생님은 인간성을 놓지 않은 사람이었어서 자연스럽게 은호에게 그림을 진로로 하면 어떨지 제안하게 된다. 그 당시 은호는 교과서에 미친듯이 남성의 나체를 그리곤 했다. 이목구비만이 비워진 수십개의 남성의 나체는 보는 친구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게 했지만, 미술을 전공했던 어른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외설적인 남성의 나체가 아니라 각각의 유동적인 선들이 만들어낸 '무언가' 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빼곡히그림으로  매운 수학교과서를 가르키며 무엇을 표현한거니 라고 묻는 미술선생님에게, 은호는 말한다. 목을 매달고 천장에 데롱거렸던 아버지의 사지라고.  고개를 숙인 은호의 정수리는 빼꼼하고 검은 머리카락이 새롭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은호의 초코송이 머리를 보며 순간적으로 미술선생은 알 수 없는 아득함과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안쓰러움을 넘어선 공포감이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차마 책임을 지는 상상조차 품을 수 없는 타인이었다. 모두에게 은호는 그런 존재였다. 역시나 그 미술선생님의 아연실색한 얼굴을 보며 은호는 또 한 번 마주했다. 입을 환하게 찢어 웃는 창조주의 얼굴을 말이다.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은호는 그날 점심시간에 공짜밥을 먹지 않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너무 안쓰러운 인간이었다. 착한데 멍청해서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창조주가 내린  줄이 그대로 아버지의 목을 타고 천장에 아버지를 매달아 버렸고, 아버지는 애써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두 마른 다리가 공중에 휘저어지고.....얼굴은 까만 어둠으로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은호는 교과서에 아버지의 전신을 그리고 있었다. 은호는 제자신이 공포스러웠다. 그당시  중학교 1학년었던 은호가 견딜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은호는 자신이 아버지의 자살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표현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거짓은 표현하는 순간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은호는 20살의 연희를 만나기 전까지 아버지가 타살이라고 믿고있었다. 참고로 가해자는 창조주라고 생각했다. 어이없는 상상이었다. 

 연희는 명문대생이었다. 은호와 같이 어린 날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고 했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자습서를 주워다가 아득바득 공부해서 유명대학의 유명과에 갔다던 연희는, 오후 8시부터 새벽3시까지 포이즌이라는 싸구려 호프집에서 서빙알바를 하였다. 당시 15살이었던 은호는 점점 환각이 심해져서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에 자신이 상상한 창조주의 얼굴을 입히는 단계까지 가버렸는데,  그래서 때때로 죄없는 사람들을 공포스런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볼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은호는, 젊고 취한 대학생들, 그러니까 에너지는 많은 데 풀데가 없는 그런 나쁜 형들에게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날도 운이 드럽게 없는 날이었다. 은호는 발악을 하며 어느새 투톤이 되어버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꽉 쥔 형에게 반항했다. 이새끼 저새끼 하며 눈깔이 더럽네 욕을 지껄이던 대학생은 똑같이 눈을 부라리며 욕을 지껄이는 은호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대로 은호를 포이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싸구려 호프집 안에서는 많은 손님들이 앉아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대학생의 남녀친구들 또한 그 속에 섞여 회포를 풀고 있었다. 과잠을 보니 체육전공이었다. 성별가리지 않고 다들 신체가 단단해 보였다. 남학생은 자신의 친구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어린 은호가 겁을 먹고 알아서 길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프집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처음이었던 은호는 갑작스런 청각적 자극에 의해 불안감이 극도로 상승했고, 호프집의 모든 인간들에게서 창조주를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은호가 깨달은 것은 창조주가 천장에 매달린 아버지의 얼굴이었단 것이다.

 갑자기 숨이 막혀버린 은호는 켁켁거리더니 혼자서 졸도했다. 공항장애 증세가 순간적으로 발휘된 거였다. 그리고 연희는 그런 은호에게서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해버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려버렸다. 오랜 노동으로 허기져있던 어머니가 허겁지겁 무심코 삼켰던 찹쌀떡.  마침 세상 떠나가라 옆방에서 자고 있던 어린 연희. 시간도 없고 돈도 없었음에도 연희는 뒷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대로 은호를 등에 업고 응급실로 뛰어간다. 그리고 그 날이 인연이 되어 은호는 연희와 약 1년동안 마음을 터 놓는 인생친구가 된다. 20살과 15살의 나약한 인간들. 그들은 때때로 시간이 되면 만나 20살의 여학생은 한손엔 소주를, 15살의 남학생은 한손에 두유를 쥐고 달만이 어둠을 비출때 남몰래 본인들의 이야기를 세상밖으로 내뱉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은호는, 그 인연이 평생이 갈 줄 알았더라. 약 1년뒤 2012년의 봄. 21살이 된 박연희는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항간에선 치매증세가 있는 할머니를 버리고 도망가버렸다고는 하는데, 은호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 가만히 연희를 기다렸다. 

 하지만 연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은호는 연희를 원망하지는 못했다. 연희가 은호에게 남겼던 다정한 기억만큼은 은호를 그 이후에도 세상으로부터 나가떨어지지 않게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연희가 잘 살아가고 있으거라 생각했다. 가진게 없는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는건 본인 밖에 없었으므로, 만약 연희가 할머니를 버리고 갔다 해도 은호는 그녀를 말없이 눈빛으로 위로해줄 수 있었다. 연희에 대해서 차근차근 잊어갈 무렵의 은호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다. 은호는 그 이후로 염색따위는 하지 않았다. 새까만 눈과 새까만 머리카락. 그 안에 연호는 밝은 미래를 꿈꿨다. 기필코 그림으로 성공하리라. 기필코, 내가, 나를 완벽히 책임질 수 있게 되었을때 연희를 찾아 고맙다고 하리라. 그런 미래를 그렸다더라.


[제발 이글을 보겓 ㅚ는 사람이 있다면 저를 궇.헤ㅜㅈ세요. 저는 버티고 있을테니까 제 이름은 박연희, 서울대입구역 포이즌호프집에ㅐ서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박연흐.ㅣ입니다. 사,ㄹㄹㄹㅕㄹ주세요ㅗ 젱 이름은 박연희 입ㄴ다.ㅏㅇ 박연희 박연희. 제이름은 박ㅇ,ㅕㄴ희 연희 연희 박연희]


 2013년 3월 3일의 봄. 겹벚꽃을 좋아한다던 연희는 이 나라 어디선가 흐드러진 겹벚꽃을 맞으며 웃고있을 거라 생각했다. 2013년 3월의 나는 어땠더라. 은호는 그등학교 1학년, 멍한 얼굴로 포이즌 입구 안에 앉아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따듯한 봄날의 밤은 포근했고, 등 너머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웃음소리는 아득히 은호의 등을 두드리고.. 은호는 그냥 연희를 기다렸다. 자신이 그렇게 멍청하게 밤의 달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연희는 연희는..




"연희는 반달이라고 불렀어."

 컥. 막힌 숨소리가 은호의 목을 뛰쳐나올때마다 크고 상처하나 없는 하얀 손이 은호의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다. 2019년 4월의 날씨는 여전히 포근했고, 밀폐된 공간에선 공기정청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은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제 위를 올라탄 남자를 쳐다볼 뿐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제 팔목에 놓은 주사는 생경한 느낌을 선사했다. 의식은 그대론데 신체만 어디선가 둥둥 떠다니는... 그러니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겠는 그런 이상한 느낌. 그 상태로 남자는 매일매일 다른 고문을 행했다. 오늘은 목을 조를 셈이었나 보다. 남자는 은호가 눈을 까뒤집으자 바로 큰손을 치워버렸다. 폐로 다급하게 공기가 주입되니 그것마저 고통이었다. 은호의 얼굴이 눈물과 침으로 퉁퉁 부어있었다. 은호가 켁켁거리며 줄이 끊어진 서커스 인형처럼 고개를 간신히 좌우로 까닥거리면서 고통에 반응했다. 남자가 뭐라고 했더라..연희...반달...반달...연희는 그래서 지금 어디있는 거지. 거대한 힘 앞에서 투지를 잃은 은호는 황망한 얼굴로 생리적인 눈물만 죽죽 흘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진정이 되는 은호를 아무 말없이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참으로 맑았다. 은호와 정반대로 밝은 갈색 눈동자. 남자의 큰손은 이번에 목젖언저리를 슬쩍 쥐었다. 은호가 절로 드는 공포감과 무력감에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 보지 못하고 회피하듯 눈을 감아버린다. 굵은 눈물이 타고 흘러 은호의 귓바퀴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남자가 가만히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이번엔 제대로 조를 참이었는지 놀고있던 한 손 마저 연호의 목위에 올리고 두손으로 은호의 숨통로를 여과없이 콱 눌러버린다. 

"은호..너는 달리라고 부를게"

 남자는 무력하게 대자 뻗은 은호의 씨뻘건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붙였다. 밝은 눈동자가 뒤집힌 은호의 새까만 눈동자를 섬뜩하게 응시했다. 십 구 팔 칠 육 오... 은호는 꺼져가는 제 의식속에서 본능적으로 남자가 세는 숫자만을 믿으며 살기 위해 참고 발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은호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몇년만에 다시금 그를  마주해버린다. 창조주. 아버지. 귓속에서 아주 천천히 남자가 읊어주는 숫자가 작아져간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저를 보며 환히 웃고 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닐까. 이 세상이 잘못되어서, 내가 이곳에서 힘들지 않을 방법을 나에게 미리 알려주었던 건 아닐까. 창조주가 내린 줄이 썪은 동아줄이 아니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은호의 귓전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삼...이...일... 동시에 은호는 그대로 정신을 놓고 까무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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