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벽 세시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지긋지긋한 이비는 몇일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이 비는 슬픔의 비일까? 니가 없다는 걸 하늘도 알고 있는 걸까. 비처럼 뚝. 눈물이 눈에서 한방울 뚝. 빗소리에 묻혀 들어간다. 한방울, 한방울 아득하게 흐려졌다. 정적을 깨고 진동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규칙적인 소리가 귀 옆에서 쉴새없이 웅웅거렸지만, 확인 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그 전화에 그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또다시 빗물처럼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다. 빗물처럼 세차게 울 수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평소보다 더 끈질기게 이어지는 진동소리에 나는 슬픔보다 짜증이 살짝 더 치밀었다. 제발 그만좀 했으면. 잔뜩 눈그늘이 내려와 피곤이 담긴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예상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세글자에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푹 쉬고는 휴대전화 액정이 보이지 않게 내팽개쳤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도피했다. 매일처럼 세상의 소리가 단절 되었다. 간간히 빗소리가 귀끝에 닿았다, 튕겨져나갔다. 몇 분이 지났을 즈음 나를 가리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휴대전화를 들어 익숙한 듯 번호를 눌러나갔다. 듣기 싫은 기계음이 들려오다 이내 뚝 멎었다.
"여보세요"
시간이 시간인지라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를향한 말문을 열었다. 헛기침을 몇번하고는 휴대폰에 그저 귀만 갖다대고 있었다. 곧이어 상대편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음성이 나의 달팽이관을 웅웅 울렸다.
"이시간에 무슨 일이야"
담담한듯 말하는 그의 말투에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짓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잘 때 깨우는거 싫어하니까. 미안한걸 알아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커다란 바늘로 내입을 잔뜩 꼬매놓은 것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혀가 잔뜩 뭉그러져 버렸다. 그저 상대편에서 무언가를 먼저 물어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의 나처럼 이기적이게도.
"진영. 무슨일 있어?"
짜증이 날텐데도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투 때문인지 또 빗방울이 눈에서 흘러나왔다. 원래 이렇게 자주 울지 않았는데. 바보같아. 나를 자책하면서 그저 앞만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진영아. 지금은 늦었으니까 내일. 내일 얘기하자. 몇초간의 정적을 깨고 이어진 그 말들이 얼마나 나를 생각하며 또 얼마나 고심하였을지 상상이 갔다. 넌 그런 성격이니까. 내가 무슨 이기적인 행동을 해도 너는 항상 나를 이해해줬어.
"고마워"
이제 더이상 통화를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전화를 대충 마무리 지어 버리고는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버렸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자 빗소리들 틈으로 단어 하나하나가 모여 생각이 되어 내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덕에 몇시간을 더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다.
딩동-
오랜만에 초인종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몇시간 밖에 자지 못한 나로써는 달갑지 못한 손님이였다. 택배에요 하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천근만근한 몸을 겨우 일으켜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문을열어 택배를 받았다. 운송장에 낯익은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있었다. '단의은' 내 생일날에 맞춰서 선물을 보낸다며 항상 신신당부 했었는데 올해도 또 늦고 말았다. 그의 음성, 그의 표정이 떠올라 살풋 웃으며 택배를 열었다. 내가 갖고 싶다고 했었던 운동화 한켤레와 편지 한통이 그의 모습처럼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곱게 접혀있는 편지를 펴보니 그 특유의 글씨체가 하얀 종이안에 채워져있었다. 중간중간에 눈물을 흘린것인지 약간 얼룩진 부분도 보였다. 너 답지않네.
DEAR. 진영
진영. 올해도 너의 생일 정말 축하해. 이번해는 안늦게 선물 도착했겠지?
신발, 니가 갖고싶다고 했던거야. 꼭 잘 신고 다녀야돼.
요즘 날씨 굉장히 추워 옷 따뜻하게 입고다니고 감기걸리지마.
혹시 그 사람이 나에대해서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 버렸다고 해도 돼
미안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들이 이런거라서. 행복해야돼 진영 사랑해.
달달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쥐고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레 읽어 나갔다. 나도, 나도 사랑해 단의은. 몇차례 더 편지를 읽어 나가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는 눈물을 옷소매로 슥 닦고는 아 아 하고 목소리를 몇번 내본뒤 전화를 받았다.
"진영 괜찮아?"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몇번더 메아리 쳤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였다. 그의 편지를 쥐고 또다른 그의 전화를 받고있었다.
그는 단의은과 참 많이 닮았다. 그저 그뿐이였다.
난 아직도 단의은을 잊지 못했고 단의은은 이미 죽었다.
뚝- 또 한번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랑해. 마크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