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비 오니까 꼭 우산 쓰고 나와."
"내가 무슨 어린앤가?" "저번처럼 나랑 같이 쓴다고 몽땅 맞고 오기만 해봐." 찰박찰박. 신발 바닥에 빗물이 오밀조밀하게 감겨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 전정국이랑 우산을 같이 쓰는게 그렇게 좋더라고. 그래서 오늘도 일부러 우산은 집에 고이 모셔두고 밖으로 나왔다. 저멀리서 전정국이 나를 보고는 급하게 뛰어온다. 바지의 끝자락이 빗물에 진하게 물든다. 신발은 이미 푹 젖었다. 물 웅덩이에 잠겼다 나왔거든. "야, 너 발 다 젖잖아! 뛰긴 왜 뛰어!" "넌 진짜 우산 좀 들고 나오라니까!" "아 너랑 우산 쓰는게 좋은데 어떡해." "으이구 진짜... 빨리 와." 이렇게 비오는 날은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너에게 되도않는 어리광을 부리는 나를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받아주는 너도 참 대단히 나를 좋아하나보다. 쪼르륵 자신의 옆으로 달려온 나를 눈으로 슬금슬금 흘기다 내가 삐친 척하며 밑 입술을 쭉 내밀자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는 뽀뽀를 연달아 다섯번이나 하는 전정국이다. 이러니 내가 안 좋아하고 배겨? "우산으로 가리면 모를줄 알지?" "아무도 모를걸." 아무도 몰랐다. 너와 내가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같이 쓰지 않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난 몰랐다.
'우리 만약 헤어지는 날에는,'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아니 만약에! 우리가 헤어졌는데 서로가 너무 보고 싶으면,' '비 오는 날, 그 골목에서 만나자.' '...그래.' 비가 정말 많이 오던 날. 내가 새로 산 우산을 들고 집으로 가던 날. 너를 그 골목 처마 밑에서 처음 본 날. 비를 피하는 너와 눈이 처음 마주친 그 장소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보고 싶었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면 찰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만나러 가던 길이 그립다. 우산을 피는 소리에 내 한숨소리가 묻혔다. 그리고 그 우산을 피는 소리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혔다. 찰박찰박, 발에 빗물이 감기는 소리는 너를 생생히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대로만 가면 내 시선이 닿는 그 끝에 너의 운동화 앞코가 몽글몽글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우산으로 가리면 모를줄 알지?" "...아," 내 흐느낌은 빗속에 파묻혀 내 주위만 멤돌았고, 내 주위에 니가 나타났다. 비가 오는 날, 그 골목에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우산은 땅으로 곤두박질 쳤고 비는 온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리 와." 우산을 든 너에게 달려들어 푹 안긴다.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하고 무지개가 우산 위에 피어났다. 기분 좋은 찰박찰박 소리는 여전했고 그 여전히 기분 좋은 느낌을 풍기는 니 품은 여느 우산 속보다 촉촉하고, 맑았으며 그리웠다. "비 오는 날이 아니라도 널 다시 보러 내가 여기에 와도 될까?" "...물론." 나의 우산,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