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호의 그 남자
옆집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이사를 하고 한 달이 지나서였다.
나름 수도권 거주자라는 몹쓸 자부심은 입학 첫날, 왕복 4시간이라는 긴 통학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던 서울은, 통학이 일상이 되자 교통체증에 지옥철을 경험하면서 끔찍하게도 먼 곳으로 여겨졌다.
대학에 입학 한지 한 달, 기숙사 신청이 이미 끝난 탓에 나는 뒤늦게 집을 알아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학교 근처에 좋은 자취집은 정보에 빠삭한 애들이 차지해 버린 지 오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집들은 관리도, 청결상태도 엉망이라 어느 곳 하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부동산 들락거리기를 꼬박 2주,
학교에서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조그만 오피스텔에서 마침내 생애 첫 독립을 시작했다.
자취의 이유는 비단 긴 통학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다가도, 밤 10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간신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어색하게 눈치를 살피며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게 너무도 싫었다.
‘더 놀고 싶다고, 늦게 까지 제발’이 사실 독립의 주된 이유였다.
결국 공부를 핑계로 아빠를 조른 끝에, 생애 처음 집을 떠나 내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아빠랑 평생 붙어살겠다는 딸의 자취 결정은 그들을 꽤나 서운하게 만들었다.
처음 한 달은 매일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야식을 시켜먹고, 훈남 선배 이야기를 재잘거리다가 TV를 켜 놓은 채 잠이 들고는 했다.
꽤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들의 짐은 방 안 한 가득이었고 우리 집은 동기들의 비공식 하숙집이 되었다.
나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친구들에게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그때 즈음 이었다. 옆집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건.
‘삐릭삐릭삐릭삐릭’
손에 든 커피 탓인지 자꾸 손이 미끄러져 도어락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렸다.
급한 성격 탓에 손은 빠른데, 기계가 번호를 다 인식하지 못해 경보음을 울릴 때가 많았다.
잘못된 번호라고, 한 참을 울리는 도어락 앞을 서성일 때 즈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다 흠칫 놀라 나를 보았다.
계속 울려대는 도어락 오작동 소리 때문인지 그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그 남자가 나를 어떤 눈길로 봤는지, 사실 그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이미 시끄럽게 울리는 도어락 경보음은 들리지 않았으니까.
“어 안녀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남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연스럽게 옆집으로 향하며 눈길은 나에게 머무는 남자에게 나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옆집.. 이신가 봐요?
“아아 네.....”
“전 여기 이사 온 지 한 달 됐어요. 근데 오늘 처음 뵙네요. 아 이게, 번호를 잘못 눌러서...”
계속 울려대는 도어락을 애써 등으로 막으며 나는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반가워요. 어 저는 이사 온 거어 오래 됐어요. 일련?”
옆집 남자는 자신이 언제 왔는지 골똘히 생각하더니 어설픈 발음으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갸우뚱 했는데 그가 말하는 긴 문장을 듣고 보니 확실히 외국인인 것 같았다.
부자연스러운 말투에 그를 의아하게 보았더니, 자신은 중국인이라며, 이름은 장위안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살짝 몸을 틀어 도어락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재빠르게 비밀 번호를 눌렀다.
“반가워요, 옆 집이네요, 잘 지내봐요, 아저씨”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는 아저씨라는 말에 잠시 멈추더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아니고오.... 오....빠”
아저씨는 분명 아닌데, 오빠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던지, 그는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고는 재빠르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외국인도 아저씨라는 말은 싫은가보지.
그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다 주섬주섬 짐을 들고 조용해진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
"카톡 - “
- 나 너네 집 지금 달려간다.
방에 가방을 두고, 컵에 남은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으며, 나는 휴대폰으로 방금 전 사건에 대해 친구에게 짧은 보고를 했다.
우연찮게 옆집 남자를 마주쳤는데, 그렇게도 잘 생겼다고.
친구는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올 기세다.
- 근데 외국인이야
- 어머 진짜? 누구 닮았어?
- 빨리 말해 현기증 나니까
- 셜록 닮았으면 좋겠다. 베네딕트!
카톡 알림음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 아니 인피니트 알지? 누구더라 제일 잘생긴 애 닮았어.
- 엘? 설마 엘? 대박.....
- 그럼 동양인이야?
인피니트 엘을 닮은 중국인.
도어락 경보음이 들리지도 않았던 건 사실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부끄럽지만, 잘생긴 그의 얼굴, 탁 트인 맑은 눈이 내 눈길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중국인이라는 내 대답에 친구는 인육캡슐을 들어는 봤냐며, 중국인이면 아무리 얼굴이 엘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실 그를 알기 전까지는 나도 중국인에게 막연한 편견이 있었기에, 친구의 말이 제법 솔깃하게 들렸다.
그렇지만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고, 뭔가 착해 보이는 인상이라고 하는 내 말에 친구는 코웃음을 쳤다.
‘얼굴에 홀렸다 훅 가는 수가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그는 뭐하는 사람일까, 중국인 유학생일까, 왜 한국에 왔을까’
잘생긴 옆집 남자에 대한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되었다.
#
하루 종일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수업이 끝날 무렵 결국 엄청난 비를 쏟아내고 말았다.
솨- 하고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구의 우산을 나눠 쓰고 정류장에 와서는 재빨리 집까지 가는 버스에 올랐다.
십 분여를 달려 도착한 정류장, 비는 귀가 울릴 만큼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옷을 버리는 수밖에. 혹시나 비가 조금 그칠까 기대하며, 정류장에서 언제 뛸 지를 고민하고 있을 즈음,
끼익- 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
“어? 702호 아저씨!”
옆집 남자다. 버스에서 내리며 자연스럽게 우산을 펴는 그는 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어”
“아저씨, 지금 집에 가죠? 저 좀 씌워주세요. 우산”
울상을 짓는 나를 보며 그는 손에 꼭 쥔 우산을 한 번 올려보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에 제법 익숙해진 듯 했다.
"감사합니다. 오빠“
그는 오빠라는 말에 피식거리며 웃었다.
우산을 씌워줄 때야 비로소 오빠라고 부르는 내가 제법 웃겼나보다.
나는 그의 검은 우산 밑으로 향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비가 오는 탓에, 제법 가까이 붙어 걷는데도 옆집 남자의 팔은 점점 젖어가는 듯 했다.
빗속을 걸으며 나는 그에게 진짜 몇 살인지를 물었다.
그는 두어 번 고민 하더니, 결국 서른 한 살 이라고 실토했다.
그럼 아저씨라고 불리는 게 맞다는 내 말에 빈정이 상한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그가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고 답했다.
“어리네. 근데 나 결호온 안 했으니까 아저씨 아니고"
"오빠라고 불러달라고요? 싫은데 아저씨.“
그는 나를 흘끗 보더니, 까분다는 듯, 이를 꽉 물었다.
그와 함께 집까지 걸으며 꽤 많은 궁금증이 풀렸다.
그가 지금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것과 한국에는 쉬러 왔다가 너무 좋아서 쭉 눌러 앉게 되었다는 것.
그의 우산 아래에서 나는 그의 친절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진실함에 무장해제 되었다.
중국인에, 혼자 사는 남자면 조심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은 까맣게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가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준 탓에 그의 어깨는 점점 젖어갔다.
늦봄인데도 비 때문에 제법 한기가 느껴졌다.
오피스텔 단지를 돌아들어와 오피스텔 현관에서 그는 우산을 접고는 빗물을 툭툭 털어냈다.
그의 오른쪽 어깨와 팔에 빗물이 흥건했다.
그런 그를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이럴 때는 따끈한 국물이 최곤데, 추울 때 딱 마셔주면 속도 따듯해지고.
아저씨 우리 집 와서 라면 먹을래요? 내가 끓여줄게요. 저 라면왕!”
그는 우산을 둘둘 말아 묶다가 내 말을 듣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아!”
“여자 집에, 남자아, 막 가는 거 아니야”
“그럼 아저씨 집에 내가 가면 되겠다, 아저씨 집에 냄비랑 라면은 있죠?”
“남자 집에, 여자 오는 거 더 안 돼. 위험해”
그는 제법 단호한 말투로 나를 말렸다.
“뭐가요? 뭐가 위험해요? 아저씨 무슨 생각을 했길래?”
“오오오, 그거 아니구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그는 한껏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 두 번 만난 옆집 남자를 놀리는 건 꽤나 재밌었다.
그는 내가 놀릴 때 마다 얼굴이 벌개져서는 어설픈 한국어로 자신을 해명하려 애썼다.
억울해 죽겠다는 그의 표정은 정말이지 귀여웠다.
도무지 서른한 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두고두고 그를 놀리게 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요, 아저씨는 남자 범주에 안 드니까.
라면 먹을 거죠? 혼자 먹는 라면, 이제 지겹단 말이에요,
아저씨 집은 위험한 게 많을 것 같으니까, 우리 집으로 와요.”
띵동-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그에게 10분 뒤에 오라고 말을 하고는,
혹시나 그가 거절할까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젖은 신발을 벗어두고, 부리나케 식탁 위에 뒹구는 과자 봉지를 치운 뒤, 방에 들어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을 아무렇게나 장롱 안에 집어넣었다.
뒷단이 젖어버린 청바지는 벗어두고 평소에 입는 짧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올려 묶을 때 즈음 띵동띵동 벨 소리가 울렸다.
“아저씨!”
현관문을 열자, 그는 라면 두 개가 담긴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맛있게 먹으라고 라면만 넘겨준 채 뒤돌아 집에 가는 그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긴 것은 결국 나였다.
“아저씨, 내가 아저씨 안 잡아먹어요. 우산 씌워준 거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까 라면 먹어요."
그는 어색한 듯 두리번거리며 집에 들어왔고, 주방과 이어진 조그만 이동식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서 집을 힐끌힐끔 살폈다.
그를 앉혀두고는 끓는 물에 스프와 면을 넣는다. 라면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즈음 그가 물었다.
“저거 뭐야? 기타 쳐?”
“아,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오빠가 음악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가르쳐줬어요. 뭐 우리 동네 아이유 정도? 아 맞다, 아저씨 아이유 알려나”
“알아아, 나도오”
그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나를 쳐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근데 집, 학교 멀어? 왜 혼자 살아?”
“아, 집이랑 왕복 네 시간 걸리는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자.”
계란까지 풀어 넣은 라면을 냄비 채 들고 와 그와 나눠 먹는다.
거실은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 만 가득했다.
그는 배가 고팠는지 거절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급하게 라면을 해치웠다.
“여기 물 마셔요. 라면 그릇에 아주 빠지겠네.”
그릇 채 들고 국물을 마시던 그는, 민망한 듯 웃더니 물을 받아들었다.
“맞죠? 혼자 먹다가 둘이 먹으니까 훨씬 맛있죠? 아저씨 커피 마실래요?”
냄비와 앞 접시를 싱크대에 두고, 믹스 커피를 타며, 그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쏟아냈다.
그는 믿기지 않게도 북경 tv 아나운서 출신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순진해 보이는 아저씨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참 허풍도 세다고 생각했다.
아나운서처럼 뉴스 진행을 해보라는 말에 그는 내가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발끈한 듯, 의기양양하게 뉴스 오프닝 멘트를 쏟아냈다.
사실 그가 잘하는 지 못하는지는 내가 알턱이 없었는데도, 시키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멘트를 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압도당했다.
“와 아저씨 되게 잘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손뼉을 쳤는데도, 그는 내 반응이 진심이 아닌 것 같다며,
그의 스마트폰으로 학원 사이트에서 자신의 약력을 보여주었다.
여기 보라며, 북경tv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글귀를 확대해서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너무 재밌어서 계속 그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왜애”
“아니 아저씨 너무 재밌어서. 아저씨 가끔 이렇게 같이 밥 먹어요, 나 너무 웃겨서 눈물 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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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그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은 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학교 가는 길에 나는 자주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집에 있는 과일, 부모님이 주신 반찬을 퍼 나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집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왠지 기분도 좋아지고 웃을 일도 많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가 서른 한 살인지, 스물 한 살인지 중요하지 않을 만큼,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주 그의 집 문 앞을 서성였다.
아주 가끔 시간이 맞으면, 우리는 함께 라면이나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아저씨 대박, 우리 집 큰 일 났어요. 얼른 와 봐요”
그의 집 인터폰에 간단하게 말을 남기고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자 1분도 안되어서 그가 놀란 모습으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짜잔. 오늘은 허니콤보”
거실에 펴놓은 치킨을 보더니 그는 허탈한 듯 나를 보고는 금세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난하지 마. 노랬잖아”
“아저씨 요즘 바쁘다고 자주 안 보이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자 빨리 앉아요.”
그는 내 손에 이끌려 앉더니, 나한테 다음부터 이런 장난치면 진짜 혼난다고 말하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치킨을 뜯다가,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휴지로 급하게 손을 슥슥 닦고는 노트북을 가져왔다.
“아저씨 이거 봐요. 아저씨도 이 노래 알죠? 저 이거보고 완전 빠졌어요.”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는 노래를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워더거셩리. 취완팅 노래. 이 노래 중구에서 진짜 인기 마났는데, 그때 나는 중구에 없어서 한구에서 듣는 거 했어.”
그는 오랜만에 듣는 중국 노래에 모니터에 푹 빠진 듯 보였다.
옆집 남자를 만난 이후로 나의 관심사는 온통 그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
유튜브를 뒤지고 뒤져서, 가장 좋은 노래들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하는 오디션 프로에 등장한 몇몇 노래들이 귀를 사로잡았다.
“이 사람들 다 중구에서 지인짜 유명한 가수들”
그는 프로그램을 보며 정말 재미있어했고, 옆에서 심사평을 통역해주거나, 심사하는 사람이 중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지, 신나서 얘기했다.
그가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저씨, 진짜 이 노래 너무 좋지 않아요? 이 사람 인상은 무서워 보이는데, 목소리는 너무 부드러워요.”
취완팅의 노래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부르는 리따모의 목소리에 내가 제법 흥분하자,
그는 한 줄, 한 줄, 가사를 해석해주었고, 우린 그 노래를 일곱 번이나 돌려 들었다.
‘조금의 준비도 고려도 없이
당신은 그냥 이렇게 제 세계에 나타나서 제게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주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또 이렇게 제가 모르는 사이
조용히 사라지네요.
제 세계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고 남은 것은 기억뿐이죠.
당신은 제 깊은 기억 속에 존재해요
제 꿈속에, 제 마음속에, 제 노래속에
당신은 제 깊은 기억 속에 존재해요
제 꿈속에, 제마음속에, 제 노래속에.‘
“나 이거 따라해 보고 싶은데 진짜 어렵다, 아저씨 이거 불러줘요.”
팔로 무릎을 감은 채 그를 뚫어지게 보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더니 가사를 천천히 읊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발음을 따라하는 나를 보면서 계속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내가 살짝 눈을 흘기자 그는 끅끅거리며 웃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 번쯤 그의 중국어 발음을 천천히 따라하고, 제법 천천히 진행되는 후렴구를 부르고 나니
그는 오오하며 눈을 크게 뜨고 박수를 쳐주었다.
“아저씨 ‘나의 노래 속에’가 워더거셩리 예요?”
“워더 나의, 내 거, 거어 노래, 셩 소리, 리이는 안에 라는 뜻. 워더거셩리”
“아, 알겠다. 그럼 응용은 이렇게 해야겠다. 워더장위안”
그가 또 피식 웃더니 내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아!”
“또 까부러어”
“아아, 알겠어요, 근데 아저씨는 중국어로 뭐예요?”
배슬배슬 웃는 나를 보며 그는 다시 이를 악물더니 으레 그렇듯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유투브로 그가 추천해준 중국음악 몇 개를 더 들었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서너 번 돌려듣고, 몇몇 노래는 흥얼거리며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늦었다며 돌아간 후에도 나는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들을 새벽이 되도록 듣고 또 들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옆집 남자의 표정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그와 나눈 대화, 얼굴의 움직임, 목소리, 찡그리며 웃는 표정.
동이 틀 때까지 잠은 한 숨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깨달았다.
내가 옆집 아저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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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시간은 흘러 오월의 중순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밖은 조금씩 더운 바람이 불었고, 긴 옷들은 한쪽에 치워두고 집에서 가져온 반팔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 워더 장위안 슈슈
今天也加油吧! (오늘도 파이팅!)
아침 수업을 듣기 위해 새벽같이 나와 그의 집 문 앞에, 밤새 네이버 지식인을 뒤적거려 찾은 표현을 붙여 두었다.
어릴 때부터 한자는 죽도록 싫어해서, 고등학교 때도 제2외국어는 중국어를 피해 불어를 배웠건만,
열 살이나 많은 아저씨 때문에 내가 밤새 네이버 중국어를 뒤적이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한자를 워낙 못 쓰는 탓에 포스트잇에 거의 그림을 그리듯 획을 쓰고 그의 문에 붙여 두고 나오니 왠지 설렌다.
우리는 가끔씩 서로의 문 앞에 포스트잇으로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카톡이나 문자가 있음에도, 나는 계속 포스트잇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집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특별한 전달 방식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강의실을 향할 즈음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 너도 찌아요우. 근데 한자 모양 진챠 웃겨
내가 쓴 중국어가 웃기다니. 이 양반이.
그럼에도 발끈하기에는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 나는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 그럼 중국어 안 웃기게 가르쳐 줄래요? 장위안 라오시
- 나는 열심히 공부 하는 학생만 가르쳐
- 아저씨, 제가 열심이 뭔지 보여드릴게요. 두고 봐요.
나는 그에게 더 묻지도 않고, 수업이 파하자 교내 서점에서 기초 중국어 책을 사서 신나게 집을 향했다.
방에 가방을 던져두고 그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리자,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온 그가 빼꼼 문을 열었다.
“장위안 선생님 중국어 공부해요.”
그 날 이후로, 그와 함께하는 중국어 수업이 시작됐다.
그는 정말이지 엄격하게 공부를 시켰다.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공부해 본적이 없다는 말에 그는 대체 대학교는 어떻게 간 거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도 꽤나 승부에 집착하는 편이라, 절대 중간에 공부를 그만두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끔 그는 팔짱을 끼고 공부에 한 획, 한 획 한자를 쓰는 나를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아저씨 이거 어떻게 읽는다고 했죠?”
세 번째 같은 문장의 발음을 묻는 내게 그는 한번 피식 웃더니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를 내뱉었다.
“니 쩌거 뻔딴”
“어? 아저씨, 어감이 이상하다. 왠지 욕하는 거 같은데”
그는 아니라며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두 번이나 흔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며, 내가 휴대폰을 들어 검색하려 하자 그는 내 양팔을 붙잡았다.
끅끅 거리며 내 손을 붙잡고 나를 말리는 그를 밀어내고 그가 말했던 발음을 검색했다. ‘뻔딴 중국어’
“아저씨, 바보라고 했죠? 내가 다 찾아봤어요.”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끅끅 웃더니
‘취소, 취소’라고 하며 내 머리를 헝클여 틀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그와의 중국어 공부는 가끔 내가 보고 싶은 중국 영화나, 중국 프로그램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절대 공부 외의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그는, 내가 제법 잘 따라오자 가끔씩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해주었다.
우리는 함께 붙어 앉아 ‘말할 수 없는 비밀’ 이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같은 영화를 보고는 했다.
그는 대만 영화보다는 중국 본토 영화를 보길 원했지만, 아무래도 내 취향은 대만 영화였다.
“아저씨, 천옌시 예쁘죠?”
그와 함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보며, 나는 브라운관 속 여자주인공을 가리켰다.
“나는 왕쭈셴. 제일 예버. 중구 배우 중에 제일 좋아”
괜히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그의 양볼을 감싸고 그의 얼굴을 내게로 향하게 했다.
“내가 예뻐요, 아니면 왕조현이 예뻐요?”
그건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특유의 비웃는 표정이나, 끅끅 거리며 웃을 줄 알았던 그는 당황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빤한 눈빛에 나도 어색해 하고 있을 무렵, 그의 얼굴이 벌게지는 걸 느꼈다.
그는 내 손에서 자신의 얼굴을 떼어내고는 다시 또 장난치면 다시는 중국어 못 배울 줄 알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와의 공부 덕에 하루가 다르게 내 중국어 실력은 일취월장 했고,
나는 정말이지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 중국어 공부에 더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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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거워 보이네”
장위안에게 다가온 동료는 자리에 앉아 다이어리에 모아둔 포스트잇 뭉치를 보고 있는 그를 흘끔 보고 말했다.
장위안은 그런 동료를 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동료는 넌지시 포스트잇의 글씨를 보더니 말을 건넸다.
“글씨 진짜 못썼다. 수업 듣는 학생?”
“아니, 옆집 꼬맹이”
장위안은 끅끅 웃으며 자신이 보기에도 포스트잇 속 글씨가 한자가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것은 한자가 틀렸고, 또 어떤 건 표현이 틀렸다며 포스트잇을 하나씩 넘겨 그의 동료에게 보여주었다.
“휴대폰 사진에 그 여자?”
누군지 알겠다는 동료의 말에 장위안은 멋쩍은 듯 눈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장위안은 동료에게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 아저씨 아저씨하며 까부는 것이 꽤나 웃기다며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는 했다.
한국 여자애들은 원래 이렇게 당돌하고 재밌냐고 묻는 장위안의 말에 여자 강사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모든 한국여자가 그런 건 아니고. 장위안. 열 살이나 어리다면서.
진지한 관계가 되지 못할 것 같으면 미리 선을 그어.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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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 슈슈
오늘은 정말 빠질 수 없는 약속이 있어서 수업을 못 할 것 같아요.
对不起,下不为例 (정말로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의 문 앞에 살포시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오는 길.
매일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지만, 이번만큼은 친구들과의 약속을 피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던 내가 곧장 집으로 가는 날이 많아지자 친구들은 오늘만큼은 안 된다며 며칠 전부터 약속을 거듭 확인했다.
성년의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은 나를 데리고 한 카페로 향했다.
ATM기에서 출금해야 하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친구들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턱을 괴고 그녀들을 기다리면서, 나는 아저씨에게서 카톡이 왔는지 몇 번이고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문구를 다시 보기를 여러 번, 누군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 선배 어쩐 일이에요?”
눈을 들자 씩 웃으며 테이블 앞에 서있는 학교 선배를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동기들 사이에서 참 유명했던 복학생 선배. 동기들과 우리 집에서 밤을 새곤 할 때, 주로 나온 남자 얘기의 8할은 이 선배에 대한 얘기였다.
그는 의아한 듯 쳐다보는 나를 향해 다시금 웃더니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성년의 날이잖아, 네 친구들한테 부탁 좀 했어”
“네?”
“오늘 같은 날은 좀 같이 축하하자.”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한창 박스오피스 1위라는 영화를 함께 관람했다.
남들이 말하는 데이트가 이런 건가. 나는 하루 종일 어안이 벙벙했다.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며, 이런 상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즐거워야 할 이 때에, 무언가 빠진 듯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나는 그와 함께 있다가도 종종 옆집 아저씨 생각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버스정류장을 지나 오피스텔 단지를 향해 걸었다.
맞은편에서, 늘 그렇듯 롤업한 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장을 보고 오는지 큰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멍하니 걷던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나와 내 옆에 선 남자를 한 동안 바라보았다.
“어어. 남자친구우?”
그는 제법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는, 내 손에 들린 장미 한 다발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애써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데이트 잘하라는 말을 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에요, 아니요, 학교 선배”
다급하게 말하는 내 말을 들은 채 하지 않고, 그는 1층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저씨와 나를 번갈아 보던 선배는 내 머리를 쓰다듬듯 툭툭 치고는 성년의 날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선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이어 했고, 선배와 헤어지자마자 뛰다시피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저씨는 이미 집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7층을 가리킨다.
문이 열리자마자 짐을 두고 나와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에 집 도어락을 누르려는데, 문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이 보였다.
‘成年节快乐’
(성년의 날, 축하해)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필체.
문꼬리에는 자그만 종이가방이 하나 걸려 있었고 그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조그만 향수가 있었다.
나는 던져놓다시피 가방을 두고 복도로 나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는 한참이 지나 문을 열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나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축하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아까 본 남자는 학교 선배인데”
“나한테 설명 안 해도 돼. 남자친구우 만나는 거는 수업 빠져도 돼”
그는 불편하게 웃어보였다.
“아니, 아저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만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친구들이”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남자친구우 만나야지. 향수도 뿌리고, 예쁘게, 머찐 남자친구우 만나”
그의 담담한 말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벽을 치는 남자.
나는 그를 한참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을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 날 밤은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우리 중 누구도 선뜻 중국어 공부를 하자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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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문을 닫고 거실에 앉은 장위안은 휴대폰을 들고 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 강사에게 연락했다.
포스트잇을 보고 웃는 그에게 제법 명쾌하게 답을 내려줬던 사람.
- 그때 말했던 거 기억나? 미리 선을 그어야 상처받지 않는다고.
- 아, 어 그래.
- 만약에 선을 긋지 않으면....?
- 너야 삼십대 초반에 이미 연애는 해볼 만큼 해봤잖아, 사귀다 헤어지는 것쯤은 큰 일도 아니겠지만,
이제 막 어른이 된 나이에는 그게 아니라는 걸. 네가 경험해봐서 더 잘 알잖아.
상처가 더 크게 남는 쪽은 네가 아니야.
역시나 그녀의 말이 옳다고, 장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롭지만, 지금 잘라야 상처가 되지 않는 법이라고, 그는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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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얼굴을 못 본지도 한참이 지났다.
팀플에, 과제에, 정신없는 나날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생각뿐이었다.
시험 준비를 위해 몸은 도서관에 앉아있었지만 내 전공 서적에는 그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의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멋진 남자친구 만나라는 그의 단호한 눈빛을 의도적으로 떠올리려 애썼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머릿속에서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드디어 기말고사 마지막 과목도 끝이다. 시험을 치고 나오자 불어오는 습한 바람에,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집에 가는 길, 시험 기간 내내 머릿속을 휘저었던 그가 다시금 떠올라 괴로워졌다.
멋진 남자친구 만나라는 그의 말을 듣고도,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 미운 마음보다 훨씬 더 컸으니까.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를 킨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 수 없이 반복한 끝에 눈을 딱 감고 나는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 아저씨, 오늘 학원 몇 시에 끝나요?
한 참 지나 울리는 알림음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것 같다.
- 6시? 왜?
뭐라고 답해야 하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끝나고 약속 없으면 저 좀 도와주세요.
- 무슨 일 있어?
- 다문화수업 과제가 있어요.
기말고사 대체로 외국인이랑 인터뷰하고 느낀 문화적 차이를 레포트로 작성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외국인 아저씨 밖에 없잖아요.
마음이 뜨끔했다. 레포트는 커녕, 그런 수업은 우리 학교에 개설 된 적조차 없기에. 속으로 아저씨 미안해요를 열 번쯤 되뇔 때, 그에게 답이 왔다.
- 그래. 집으로 가면 돼?
- 아뇨. 아저씨 일하는 근처.
강남역에서 봐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여섯시 반에 강남역 9번 출구.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방을 헤집어 놓는다.
왠지 어색해진 그와의 만남이 제법 긴장된다.
이 옷, 저 옷 다 입어보고 침대에 던져놓으니 방은 완전히 난장판이다.
이건 너무 어려보이나. 아아, 이 옷은 너무 혼자 데이트 하러 온 것 같은데.
이건 진짜 소개팅룩이다.
별별 고민을 다하다,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었다.
2호선을 타고 강남역까지 가는 동안 마음은 계속 두근 반 세근 반, 역이 가까워 올수록 터질 것만 같았다.
약속 시간에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한 나는 스타벅스 한 켠에 앉아, 늘 그렇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그에게 어떤 질문을 할 지 뽑아온 리스트를 보며, 혹시 거짓말이 들키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예행연습을 해 본다.
혹시나 그가 수업에서 배운 게 뭐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만약을 대비해 네이버에 다문화 관련 기사나, 포스팅을 쭉 훑고는, 검색창에 ‘강남 주변 맛집’을 입력했다.
감사의 의미로 내가 저녁 산다고 해야지.
시간은 제법 빨리 흘렀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저씨, 저 강남역 9번 출구, 스타벅스에 앉아 있어요. 여기로 와요”
시계는 어느 새 34분을 가리킨다. 1분 1초가 흐를 때 마다 마음이 쿵쾅쿵쾅 긴장해서인지 헛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내 눈은 아닌 척, 계속 출입문을 응시했다.
“저기요, 장위안씨 만나러 오셨죠?”
제법 예쁘장한 여자가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저 장위안씨랑 같이 일하는 학원 강사예요.
장위안씨 갑자기 학원에서 HSK 녹음 일정이 잡혀서 늦게 온다고, 저한테 좀 가달라고 부탁하기에 왔어요.”
그 보다는 훨씬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여자 앞에서 나는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나를 아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나를 대했다.
“아... 네... 저기 아저씨는 그럼 언제 와요?”
“아저씨? 아. 한, 두시간 뒤에 끝날 것 같아요. 만약에 너무 늦어지면 저랑 인터뷰 끝나고 먼저 가라고 전해달래요.”
왜 나는 그녀가 왠지 모르게 미운 걸까. 그녀의 말에,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너무도 야속했다. 나한테 직접 연락하지.
누군가를 통해 늦게 온다는 말을 전달하다니. 아니, 늦으면 그냥 가라니.
그녀와 나는 아주 형식적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삼십 여분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장위안한테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거 정말 싫어하는데”
“왜요?”
“가끔 학생들이 놀리려고 그렇게 부르거든요.”
옆집 남자에 대해 얘기하며 내 앞에 앉은 그의 동료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아저씨랑 친하신가봐요. 이렇게 대신 나와 주시고....”
그녀는 내 얼굴을 한동안 뚫어져라 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제일 친해요. 우리는 고향도 멀지 않고, 나온 대학도 같고요.
그래서 대화가 잘 통해요. 중국도 배경이 다양하거든요.
근데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서 함께 나눌 얘기도 많아요. 아 그리고 특히 나이가 비슷하죠.”
“아.... 그렇구나...”
“잠깐만요.”
그녀는 대화를 멈추고,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능숙하게 어떤 번호를 눌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몇 마디 하더니 전화를 끊고는 내게 말했다.
“늦는대요. 시간 더 걸린다고 먼저 가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슈슈. 아니 그 아저씨.”
당혹스러운 내 표정을 뚫어져라 보던 그녀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저 인터뷰 해주셔서 감사해요. 사례는 꼭 할게요.”
됐다고, 몇 번이고 만류하는 그녀에게, 나는 지금 약속이 있어 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다음에 저녁식사를 사겠다며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스타벅스에서 나와,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강남역 9번 출구를 향해 저벅저벅 걷던 여자는 뒤를 돌아보며 내게 소리쳤다.
“아, 장위안은 학원 6층 녹음실에 있거나, 3층 교무실에 있을 거예요. 찌아요우.”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뭐지. 마
음이 완전히 들켜버린 것 같아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에게 갈 지, 집으로 갈지를 한참이나 고민했다.
강남역을 지나는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내 시간만 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조금씩 어둑해지는 강남역 9번 출구에서, 나는 그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학원 안까지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나는 건물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와 옆집 남자는 무슨 관계일까. 단순히 동료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골똘히 생각하며 건물 안 엘리베이터를 주시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기를 몇 번. 제법 어둠이 내려 가로등이 켜질 무렵, 열리는 문 사이로 그가 나왔다.
나는 건물 옆 기둥으로 몸을 숨겼다.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어머, 아저씨, 이게 웬일이에요”
“어? 안 갔어? 아까 먼저 가라고 했는데”
“저 친구랑 약속 있어서 만나고 집에 가려고 하는 길인데, 와아 우연이다.”
그는 또 한쪽으로 입 꼬리를 올리더니 내 이마를 툭 치려고 하다가 멈칫 하더니 손을 내렸다.
“거짓말 안 돼애. 얼마나 기다렸어?”
“귀신같네. 정말.”
“아까, 인터뷰 해준 칭구 전화 했어, 너 아마 올 거라고, 일 발리 끝내라고”
그의 말에 뭔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인터뷰가 거짓인 것까지 그 여자 동료에게 완전히 들켜버린 기분이다.
“아저씨, 그 분이랑 어떤 사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의아한 듯 응? 하고 답하는 그에게, 나는 다시금 물었다.
“무슨 사이냐고요. 사귀는 사이에요?”
“같이 일하는 선생님. 왜 궁금해?”
그의 눈빛은 제법 단호하게 바뀌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는 이미 아는 것 같아서, 그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싫어서요. 아저씨랑 너무 친해보여서.”
그도 그저 내 말이 장난 같지 않았는지, 우리는 시끌시끌한 강남역 한 복판에서 심각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즈음, 툭툭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누구도 비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너, 자꾸 장난하는 거 안 돼.”
“.......장난 아니면요?”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머리를 타고 흘렀다.
“그건 더 안 돼”
“그건 왜 안 되는데요?”
“너 그냥 학생. 너 말대로 나는 아저씨. 그래서 우리 안 돼. 다시는 이런 거 얘기 하지마.”
나는 더 이상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비는 이제 제법 거세게 쏟아졌다. 그대로 뒤를 돌아 쏟아지는 빗속을 저벅저벅 걸었다.
그는 뛰어와서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려 했고,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저씨는...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왈칵 솟아 쏟아지는 눈물이 비와 섞여 흘렀다.
솨-하고 쏟아지는 비에 옷은 축축하게 젖어갔다.
긴 머리카락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를 맞으며 강남역 근처를 걷고 또 걸었다.
우산을 쓴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도 개의치 않았다.
그를 만난 첫 날, 들뜬 내게 친구가 해주었던 경고는 맞았다.
강남역 주변을 한 참을 배회하다, 어둠이 잔뜩 내리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감기에 삼일을 앓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나는 간단하게 짐을 싸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그의 문 앞에 마지막 쪽지를 남겼다.
‘我的歌声里’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 중국어 수업을 시작 하는 종종, 찾아서 또 들었던 노래,
그에게 완곡을 불러주고 싶어서, 그 모르게 기타를 치며 수없이 연습했던 그 노래.
우습게도 노래 가사와 딱 들어맞는 상황에 나는 그 노래 제목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자꾸 떠오르는 추억들에 가슴 한켠이 시큰거려, 나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재빨리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6월 말부터 개강 전까지 나는 부모님 집에서 머물렀다.
카톡 친구에서 그의 이름을 차단해버렸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만 3개월의 시간을 꽤나 아프게 보냈다.
그와 함께 한 기억들이 자주 떠올라, 나는 중국어 책도 보지 않고, 그와 함께 들었던 음악도 일체 듣지 않았다.
시간은 조금씩 아픔을 치유했다.
부모님 집에서 미적거리던 나는 개강을 하고서야 서울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피스텔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어 학생? 되게 오랜만에 보네”
나를 본 경비아저씨가 꽤나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죠? 방학동안 부모님 집에 갔었어요.”
“근데 왜 그렇게 붙어 다니던 총각 이사 갈 때는 같이 안 도와줬어?”
“네? 이사요?”
그의 이사 소식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또 본인의 입이 아닌, 타인을 빌어 자신의 소식을 내게 전했다.
화도 나지 않았다. 3개월 간 충분히 아파, 더 이상 남은 슬픔도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도 이 집을 떠나려 기숙사를 신청 해놓은 터였다.
현관 비밀번호를 들어와, 다시 돌아온 7층.
집 문을 열려는데, 문 앞에 붙여 둔지 꽤 오래돼 보이는 색이 바랜 포스트잇 한 장이 나부꼈다.
‘你不知道的事’
그의 필체에, 눈물이 왈칵 솟는다.
더 이상 아플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추억들이 그의 포스트잇 한 장에 고스란히 살아났다.
포스트잇을 들고 방에 달려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으로 어학사전에 접속해 한 획, 한 획을 마우스로 그어, 그가 적은 글자를 찾아냈다. 글귀의 뜻은 ‘당신이 모르는 일’
중국어로 적힌 전체 문장을 복사해, 검색하자 꽤 많은 글들이 나왔다.
대부분 포스팅들이 왕리홍의 노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내가 그에게 노래 제목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듯,
그는 꽤 오래 전에 내가 했던 방법으로 그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蝴蝶眨几次眼睛 才学会飞行
나비는 눈을 몇번 깜빡여야 나는 것을 배워
夜空洒满了星星 但几颗会落地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할 지라도 몇 개는 떨어져
我飞行 但你坠落之际
나는 날지만, 네가 추락할 쯤
很靠近 还听见呼吸
매우 가까워, 너의 숨소리가 들려
对不起 我却没捉紧你
미안해 난 널 잡지 못했지
你不知道我为什麽离开你
넌 모를 거야 내가 왜 널 떠나는지
我坚持不能说放任你哭泣
나는 너를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你的泪滴像 倾盆大雨 碎了满地
너의 눈물은 마치 큰 비처럼 사방을 부수고
在心里清晰
마음은 분명해
你不知道我为什麽狠下心
너는 모를 거야 왜 내가 모질게 마음을 먹었는지
盘旋在你看不见的高空里
네가 볼 수 없는 공중에서 고공에서 배회 했는지를
多的是 你不知道的事
많은 것은 네가 모르는 일이야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