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곧내 커플미정 장르미정 살인주의 소년 도경수의 의식이 서서히 이 세계에 나타났다. 이불속에 푹 파묻힌 채로 눈만 두어번 껌벅인 그는 잠시 후 천장 너머의 뜬구름들을 잡기 시작했다. 하나와 둘 그리고 다섯 개 정도의 잡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슬슬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천장에서 벽시계로 눈을 돌리면 시간은 벌써 아침을 지나 점심나절이 다 되어있을 것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경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학생 박찬열은 화들짝 두 눈을 떴다. 벽시계는 4교시의 막바지를 알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앞둔 이런 중요한 시간에 잠들어버리다니.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급식줄 순위권을 차지하기 위해 와르르 불타오르는 학우들의 투지가 눈빛들에서부터 느껴졌다. 찬열은 뜬구름 속을 헤매던 정신을 갈무리하며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조금 있으면, 혹은 5초 뒤엔 알림벨이 방송될 것이다. 박찬열은 그대로 숨을 삼켰다. 청년 김민석은 겨우 숨을 내뱉었다. 대인기피증을 앓는 그에게 있어 이런 공공구역은 참을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온다. 지하철 역의 대합실을 헤매다 겨우 들어선 화장실의 1인칸은 안정을 주기에 충분하다. 뜬구름 걷히듯 점점 맑아지는 정신을 느끼며 메모장에 오늘의 일지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12시 5분. 다행히도 오늘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쉬고싶다. 짤막한 문장들을 이어가던 그는 머리로부터 젖어 쓰는 듯한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그 순간 김민석든 한 무리의 타인들이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음을 느꼈다. 1인칸의 철문은 그런대로 견고했다. 김민석은 그대로 있었다. 지성인 변백현은 이제 없다. 살인자 변백현은 그대로 도망쳤다. 소년 도경수는 갑작스레 뜀박질을 멈췄다. 지금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창공을 헤엄쳐 가르는 저 동물은 새라고 부른다. 수면 아래로 나는 이 동물은 물고기라고 부른다. 도경수는 새와 물고기 중에서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단단한 대지에 구금된 이 생은 축복이다. 도경수는 그대로 웃었다. 학생 박찬열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박찬열의 상황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전부 창가에 와르르 몰려가버렸다. 찬열은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등줄기를 타고 오한이 밀려왔다. 식곤증에 지쳐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만 거기 있어서는 안 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추락하던. 다른 학생. 그리고 난 그의 이름을 안다. 차라리 전부 꿈이라면 안 될까. 박찬열은 그대로 쓰러졌다. 청년 김민석은 슬슬 일어나기로 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한다. 이제 집에 가자. 타인, 혹은 타인들은 여전히 힘들지만 후드를 뒤집어 쓰고 시선을 최대한 아래로 하면 그럭저럭 이동은 가능하다. 영 힘들 때는 '나는 무생물이다'를 계속해서 되뇌면 좀 더 나아진다. 그런데 막 문을 열기 위해 잠금쇠를 풀려는 찰나, 타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약간의 고민과 빠른 결정. 저 사람이 나갈 때 까지만 잠시 여기 머물러있자. 김민석은 그대로 기다렸다. 지성인, 혹은 살인자 변백현은 손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방금 전 손을 씻어냈지만 다시 본 거울엔 이마가 흥건한 남자가 피곤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뚝뚝 듣는 이 교사의 손은 방금 전 제 학생의 등을 떠밀고 오는 길이다. 손이 대신 울어주기라도 하는 건지. 순간 밀려든 감성적 생각을 어색해하며 그는 바지춤에 손을 비벼 닦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 고장난 핸드드라이어를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철제로 마감된 핸드 드라이어의 표면에 일그러져 비치는 제 얼굴을 발견했다. 웃겼다. 원초적인 웃음이 나왔다. 변백현은 그대로 살아갔다. 제자 김종인은 비밀과 함께 죽어갔다. 존경하는 스승에게 그 교복을 걸친 앳된 몸통이 떠밀려진 이유마저도 함께 으깨지고 스러졌다. 김종인의 마지막 기억은 추락 당시의 그를 발견한 한 쌍의 낯익은 눈. 물론 그 기억도 화장가마 속에서 재가 될 것이었다. 김종인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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