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선생이 누구야.”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제 뒤를 쫓아다니는 말. 이번만 해도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제 셀 수도 없다. 탕비실에서 마주쳐도 하 선생이 누구야. 밥을 먹다가도 하 선생이 누구야. 한석율은 이에 대해 아주 강도 높은 집착을 보이고 있다. 출근하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장그래 씨, 오늘도 화이팅^^!’ 이라는 그녀의 문자를 석율이 봐버린 것이다. 딱히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못 느끼겠고, 정말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더니 하루 온종일 그래만 쫓아다니는 석율이다.
점심시간에 간만에 동기들과 같이 밥을 먹고, 야외 정원에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그 와중에도 석율은 종이컵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래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러더니 백기와 영이를 보며 하는 말이ㅡ
“너네 하 선생이 누군지 알아?”
그래는 못 말린다는 고개를 저었다. 석율의 말에 백기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영이는 왜요? 하고 물었다.
“어, 영이 씨. 누군지 알아?”
“선 차장님 딸 소미 있잖아요, 저번에 차장님 바쁘셔서 그래 씨가 대신 데리러 간 적 있는데 거기 어린이집 선생이에요.”
“아아…. 어린이집 선생?”
석율은 고개를 돌려 그래를 쳐다봤다. 그래는 괜히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 기분은 뭔가…. 뭔진 모르겠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괜시리 눈을 마주치기가 꺼려진다. 아아, 장그래. 어린이집 선생? 그 선생이 네 번호는 어떻게 아는데?
“아, 그때 저도 갔었거든요. 근데 그래 씨 가고 나서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오호, 그랬어? 근데 우리 그래 그래 장그래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줬을까? 서운하게?”
“…제가 한석율 씨한테 왜 말해야 합니까.”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에 따른 정적이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와 다르게 뒤따라오는 시끄러운 말대답이 없기에 흘끗 그의 표정을 보았더니 그것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래는 직감했다. 아, 나 뭔가 실수했나.
석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멍하니 땅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바지를 털고 일어나선 구겨진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더니 먼저 갈게, 하고 휑하니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세 사람은 멀뚱하니 석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뭔가 잘못한 건가요…?”
“…글쎄요.”
한석율 씨가 고작 이런 걸로 삐칠 사람은 아닌데…. 이어지는 백기의 말에 그래와 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마 뭐 이런 걸로 삐치기야 하겠어, 하며 사무실로 올라가지만 내내 그의 표정이 머리에 박힌다. 평소대로 했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말에 툭툭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애초에 이런 태도에 대해 일말의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았으니 방금 전 그의 반응이 다소 당황스러운 것이다. 난 평소대로 했을 뿐인데, 한석율이 평소 같지 않은 것이다. 암암, 그렇고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막상 얼굴 보면 석율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를 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래다.
그리고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한석율이 이상하다.
“아, 한석율 씨….”
차장님 심부름으로 잠깐 16층을 올라갔는데, 그 사이 복도에서 마주친 석율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건네니 정말 쌩,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바람을 일으키며 제 옆을 지나가는 한석율이다. 눈까지 마주쳤으니 못 봤을 리가 없고, 이건 명백한 무시다. 아주 컴컴한 저의가 담긴 무시. 그래의 곱게 펴진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아니, 저 사람이 진짜. 그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석율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 돌려세웠다. 그에 따라오는 웃음기 하나도 없는 건조한 눈빛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저어기…. 그게….”
“뭐 할 말이라도?”
“…한석율 씨.”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선 엘리베이터에 타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린다. 방금 전 그 태도와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분명…. 분명 아까 전 휴게실에서 내뱉은 제 말로 삐친 것이 분명할 터. 아니면 화가 났거나. 문제는 그게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시를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냐고. 사람이 적응 안 되게 하루아침에 변해버리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운 그래다.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내려가는 것을 넋 놓고 쳐다보다 옆에 있는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림에 따라 답답함과 이유 모를 걱정스러운 마음이 커진다.
풀어줘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아니 근데 뭘 풀어줘, 할 말은 영이 씨가 다 해줬고. 더 이상 말해줄 것도 없는데. 가서 홍삼 진액 하나 입에 물려주고 어르고 달래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야, 뭐야. 입을 비죽이며 연신 툴툴대는 그래는 제 자리에 앉아서도 멍하니 꺼진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을 석연치 않다는 듯 쳐다보던 오 차장은 세상 다 산 사람 마냥 한숨만 푹푹 쉬어대는 그래에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장그래 일해! 일하라고!”
“아, 아 네 차장님! 죄송합니다!”
정신이 번쩍, 재빨리 컴퓨터 화면을 키고 펜이라도 붙잡아 보지만 아무래도 오늘 업무는 도통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은 느낌이다. 하여튼 한석율이 문제다. 항상 그놈의 한석율이 문제야.
그렇게 어영부영 제대로 뭐 하나 마친 것도 없이 퇴근 시간이 됐고,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한석율의 싸늘한 눈빛이 뇌리에 콕 박혀서 이전에 그가 어떤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는지 생각도 나질 않는다. 축 처진 어깨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보이는 한석율에 이제 헛것이 보이나, 하고 고개를 세차게 저어보는 그래다. 하지만 뚱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는 저것은 분명 한석율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피하고 싶다. 이걸 같이 타면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문 하나를 두고 꽤 오랜 시간 대치 중인 그래다. 하지만 여기서 피해봤자 뭐 하겠는가. 어차피 내일도, 내일모레도 볼 사람인 것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고개를 처박은 채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14층, 13층, 12층…. 원래 한 층 내려가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었나. 그리고 평소에는 층마다 멈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타서 짜증이 났었는데, 오늘은 어째 단 한 명도 타지를 않는다. 아주 멀미가 날 정도로 현기증이 나는 어색함에 괜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1층에 도착하자 한석율은 내일 봐, 하는 말과 함께 또 쌩하니 먼저 가버릴 생각이다. 왠지 이대로 그냥 보내면 절대 안 될 것 같다은 느낌에 그래는 잽싸게 그의 뒤를 쫓아갔다.
“한석율 씨, 잠깐만요!”
다급한 제 부름에 일단 뒤를 돌긴 하는데, 1m 가량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쉽게 좁힐 수 없는 거리와, 한석율의 내려간 입꼬리가 자꾸 마음 한구석을 콕콕 아프게도 찔러댄다. 어떻게 잡아두긴 했는데, 이제 대체 뭐라고 할 거냐고 장그래.
“…저기, 있잖아요.”
한석율 앞에서 이렇게 쩔쩔맨 적은 처음이라 그래는 적잖이 당황스럽고, 초조했고, 불안했다. 당장에라도 훌훌 떠나버릴 것만 같은 석율에 일단 뭐라도 말이라도 꺼내야겠다며 천천히 석율의 눈을 마주쳤다. 이 답이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한석율이 생각하는 정답이기를 바라며.
“그게….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뭐가?”
“아니, 솔직히 제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 밖엔 할 말이 없네요. 하 선생이랑 저, 아무 사이도 아니라구요. 번호를 제가 준 것도 아니고 영이 씨가 알려줘서 안 거고, 맨날 문자가 오기는 하는데 저는 답장한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진짜?”
“그럼 이 상황에 제가 농담 따먹기라도 할 까봐요? 그분이 저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확실한 건 전 그런 감정 전혀 없습니다. 혹시나 한석율 씨가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게 있다면, 정말 아닙니다.”
아주 속사포로 또박또박 잘도 말을 뱉은 그래는 조금 전 의기양양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시험지 채점하는 선생님을 기다리는 초등학생 마냥 눈치를 보며 석율을 힐끔거렸다. 오랫동안 말없이 가만히 그 눈을 마주치던 석율은 얼음장같이 차갑던 표정을 사르르 녹여 활짝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와 그래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한석율의 웃음에 그제서야 몸을 잔뜩 휘감고 있던 답답한 쇠사슬이 풀린다. 제 머리를 헤집는 손이 오늘따라 기분이 좋다.
아, 정답이다.
“장그래.”
“…네, 한석율 씨.”
“나도 너한테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앞으로도 이렇게 말해줘.”
“…네?”
그냥 네 얘기 말이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뭐든지. 어제는 누구와 만나 술을 마셨는지, 오늘 아침에는 뭘 먹었는지, 오늘 탄 버스에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냥 이런 거 말이야.
“나는 오전 9시 이전과 오후 6시 이후의 네가 궁금해. 평일이 아닌 주말의 너도 궁금하고. 그냥 그뿐이야.”
“한석율 씨….”
“그냥 뭐든지 다 털어놓으라고. 우리 장그래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내가 이래 봬도 입이 꽤 무겁다고.”
“…노력할게요.”
석율의 말에 그래는 심장이 간질거렸다. 오전 9시 이전과 오후 6시 이후의 한석율. 그리고 평일이 아닌 주말의 한석율. 뭐가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으면서, 그냥 그 생각 하나만으로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저 역시 궁금한 것이었다. 사람들과 같이 있지 않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때는 어떤 자세를 하고 자는지, 버릇이 뭔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그냥 그런 너무나도 사소해서 어쩐지 부끄러운 것들.
또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그래에 석율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장그래. 일단 오늘 오후 6시의 시작은 나와 같이 하는 걸로.”
“…네?”
“가자. 술 한 잔 하러.”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냥 그랬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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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에피는 어쩐지 글이 짧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네요...ㅠㅅㅠ 그래도 지금까지 쓴 율래 글 중에서 (그래 봤자 3개밖에 안 되지만) 어쩐지 가장 아끼게 되는 에피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오늘자 미생을 아직 안 봤는데, 율래 천국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네요 (두근두근) 내일이 마지막 화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합니다.. 미생 없으면 어찌 살죠ㅠㅠ 그래도 율래 덕질은 계속될 테지만...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빠른 시일 내로 또 찾아올게요^0^ 감기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저번 화에서 암호닉 신청해주신 보리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