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키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170 정도만 되도 대한민국 남자 평균치에 약간 미달할 수준은 되는 건데. 그 정도도 안 되는 자신의 신장이 한없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학급에서 내가 제일 컸었는데. 정말 그게 끝이었는지 더는 위로 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물 대신 우유 마시는 것을 생활화 해도, 멸치를 아무리 먹어대도 키가 크기는 커녕 뼈만 튼튼해졌다. 뼈로 가는 칼슘우유였던 거지, 키로 가는 칼슘우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머리가 좀 큰 뒤에는 대놓고 작다고 놀리는 사회인들은 없었다. 어릴 때는 다들 철이 없어서 외모 가지고 놀리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이해했다. 그런데 임시완을 만나고 나서 판도가 완전히 뒤바뀐거다. 저 사람은 유년 시절 그 때의 애들보다 더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네요. 작아." "……." "뭘 어떻게 먹어야 그렇게 작아져요?"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거든요." "아 질문을 잘못 했네요. 뭘 어떻게 안 먹어야 그렇게 작아지냐고 했어야 했는데. 혹시 편식했나?" 편식 드립은 정말 주먹이 앞으로 나가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편식은 커녕 주는 대로 족족 받아먹느라 식중독 경험도 있는 사람에게 지금 무슨 드립을 날리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어퍼컷 날리는 걸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게 내 평생의 한이었다. 회사에 일 하러 오는 건지 시비 털러 오는 건지 당최 구분이 안 간다 진짜. 신입이 이 부서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잡다한 서류 정리와 포트폴리오, 결제 회수 등등이 있다. 하루종일 석굴암 본존 마냥 정좌로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으려니 좀이 쑤심은 물론이요 뒷목까지 쎄하게 뻐근했다. 그런데 의외로 무릎에 올려놓은 담요의 효과가 좋다. 무릎도 따뜻하고 다리도 시리지 않고. 이래서 여자들이 담요를 가지고 다니는 건가.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에 뺨을 살짝 두어 번 두드리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빨리 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야근 행일지도 모른다. 임시완은 제대로 일할 때만큼은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나름 봐줄만 했다. 솔직히 얼굴 잘 생긴 건 인정한다. 처음 동기들이 들어오자마자 눈에 섬광이 번쩍 튀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잘 생긴 남자가 부서 팀장이라니.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랬다. 나이도 어린 게 얼굴도 가져 능력도 가져 성격(?)도 가져. 딱 내 남자네! 그 후로 겁없는 여사원들의 수없이 많은 추파가 상공을 떠돌다 큐피트의 화살을 임시완의 가슴에 박아넣었으나, 어쩐지 그의 반응은 냉하기 그지 없었다. 로맨스 인 더 컴퍼니의 환상을 보기 좋게 아그작 부숴버린 것이다. 역시 그 나이에 성공한 남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나는 구석에 쭈구리처럼 박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래. 그렇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천상 요즘 신랑감 아닌가.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임시완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작지 않은 말소리에 일에 집중하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민망했다. 얼굴에 열이 몰렸다. 꼭 저렇게 대놓고 저격한다니까. "남의 얼굴 감상할 시간도 있는 걸 보니 회의안 다 작성했나 봅니다." "…이제 거의 작성 다 되갑니다. 그리고 팀장님 머리카락 뻗친 것 같아서 쳐다본 거거든요?" 내가 생각해도 말 안 되는 변명질에 군데군데 풉,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깟 얼굴 본 게 뭔 대수라고! 얼굴에 벌레가 기어오듯 피가 쏠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홱 돌렸다. 자기는 만날 부담스럽게 시도 때도 없이 보는 주제에 나는 잠깐도 보면 안 되나? 닳는 것도 아닌데 치사하긴. 담요의 효능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뜨듯한 실내 온도와 더불어 몸까지 뜨듯해지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거의 매일 야근질을 해대다 보니 골골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거다. 눈을 감다시피하다 화들짝 놀라서는 다시 키보드를 치려는데 모니터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오타 난무에 알 수 없는 영문자들이 가득했다. 졸음워크의 말로였다. 한숨만 자다 일어날까. 눈치를 슬슬 보며 몸을 책상쪽으로 낮췄다. 이미 다른 동기들도 전멸 직전이었다. 오 분만. 아니 삼 분만 자고 맑은 정신으로 일하자. 새로 태어나는 거다. 그렇게 아주 잠시동안 눈을 붙였다. 정말 눈만 감았다 뜨려고……. "김진환 씨 또 잡니까." 어렴풋이 들리는 미천한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했던 것도 같다. 8. 맛있는 전골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보쌈과 족발이 나의 발밑을 요리조리 피해갔다. 나는 눈이 훼까닥 뒤집어진 채로 그들을 잡기 위해 발버둥쳤다. 저걸 먹어본 지 얼마만이야. 다 내 거야! 광견병 걸린 개마냥 사족보행으로 뛰어다니다보니 어느새 족발 앞에 다다랐다. 게 섯거라! 점점 가까워지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으랏차!" 아. "……." "……." 박차고 일어났다. 아 xx 꿈의 제대로 된 현실화였다. "뭐 합니까?" 설상가상으로 임시완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훑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 동면을 취하고 싶었다. 쪽팔림이 지구 내핵부터 치고 올라와 옥황상제의 신전까지 뚫었다.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항상 임시완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 건가. 여즉 잠이 덜 깬 얼굴로 휘휘 주위를 살폈다. 임시완과 나를 제외하고 어쩐지 아무도 없다. 소등이 된 사무실 내에는 모니터 불만이 켜져 있었다. "꿈 한 번 거하게 꿨나 보네요." "아, 아니……." "보아하니 아주 그냥 숙면을 취했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등걸이에 걸어진 자켓을 들어보인다. 지금 우리 둘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갑시다. 한심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못한 임시완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처리할 서류들은? 그리고 대체 어딜 가는 건데? 상황파악이 뒤늦은 주제에 이해력도 딸린다는 건 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몸을 움직여 나가려는 임시완을 붙잡았다. "어딜 가는 겁니까?" "김진환 씨 숙면 취할 때 부장님이 회식하자고 연락 넣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오늘 집안의 중대사가 있어서 빠져야 할 것 같……." 임시완이 멋들어지게 자켓을 걸쳐 입으며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먼저 문을 열었다. 그렇겐 못 합니다. 아까 부장님께 비는 사원 없다고 똑똑히 말씀 드린 터라. 그의 이어지는 말에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따지려 했으나 이미 나간 뒤였다. 아 망했다. 나 술 먹으면 투우 전용 소 될 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이번에도 계산 몰빵 당하면, 정말 러시 앤 캐시에 의뢰하는 처절한 인생이 될 지도……. 게다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불길했다. 이번 술자리에서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남자의 촉!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 담요를 벗어제끼자 다행히 휴지 조각들이 건조함에 의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을 챙겨드는데 컴퓨터 화면이 눈에 밟혔다. 보란 듯 완벽하게 줄 맞춰 정리된 서류 안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어. 이게 뭐지. "내가 자다가 썼나…?" 내가 이런 유용한 몽유병을 가지고 있었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빠른 동작으로 임시완을 따라 나갔다. 사회에 지친 일꾼들은 실로 대단했다. 상사들이 주는 술을 빼고는 거의 손도 안 대는 나와는 달리, 술고래 술상어 마냥 입을 200퍼센트 정도 활용하여 알콜 드링크를 해대는 이들을 보아하니 절로 혀를 차게 됐다. 부어라 마셔라 이미 넥타이는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주인의 이마에 묶여 있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회식 시작한 지 십 오 분만에 저렇게 되나. 공교롭게도 악연은 회식 자리에서까지 빛을 발했다. 떡하니 임시완의 반대편에 앉아버린 지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술자리에서도 이렇다니. 주여. 어찌 나에게 이런 시련을……. 믿지도 않은 종교를 부르짖으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임시완은 의외로 주량이 센 듯했다.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며 여유롭게 웃어보이는 꼴이 왠지 모르게 못마땅했다. 뭔가 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술 잘 마시는데.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지. 괜히 오기가 들어 옆을 떡하니 지키고 있던 소주병을 낚아채들었다. 손이 살짝 떨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곤 술잔에 그대로 투하. "김진환 씨. 그거 마시게요? 술 못하는 거 아니었나?" "회식 자린데 뭐 어떻습니까?" 임시완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혀를 차긴 왜 차? 내가 마시겠다는데. 그래. 이왕이면 화통한 성격으로 부장한테 점수도 딸 겸 나는 술잔을 거침없이 집어들고 입 속으로 부어버렸다. 그랬다. 저질러버렸다. - 다음편을 얼렁....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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