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번호 B7-103 000. 목표물은 오늘 처리한다.
하필이면 왜 너인지 모르겠다. 왜 너와 내가 이런 악연 아닌 악연으로 이어진걸까. 나조차 이런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너는 어떨까. 내가 너에게 총구를 겨누어도 될까. 내가 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도 될까. 하얗게 타버린 머릿속에 너와 나의 지난 날의 시간틀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찰나의 시간동안 너와의 만남부터 지금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생생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준회야"
너의 이름을 입에 머금었다. 너의 이름을 가슴에 품었고, 너의 이름을 단단히 묻었다. 네가 틈을 비집고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단단하게.
"응. 00아"
네가 내 이름을 불렀고, 매우 달콤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나는 네게 한 걸음 다가갔고, 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내게 닿는 너의 시선이 나를 찔러왔다.
"미안해"
난 너를 향해 서늘한 칼날을 세웠고, 차가운 칼날은 곧 준회의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에 대한 죄책감과 나에 대한 증오가 온 몸을 휘감았다. 혼란스러운 감정들 속에서 네 아픔이 곧 내 아픔인건지, 쨍한 고통에 손목이 아려왔다.
준회의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00,아"
네가 내 이름을 흘렸고, 매우 쓰라렸다.
*
"준회야"
네가 메마른 목소리로 날 불러왔다. 너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갈라졌고, 너의 흔들리는 두 눈이 나를 바라봤다. 바들바들 떨리는 네 손에는 파랗게 번쩍이는 짧은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무거운 칼은 네 작은 손에 버거워보였다.
오늘이구나
어두운 문턱을 넘어서는 것보다, 널 떠나야 한다는 게 더 두려웠다. 모든걸 다 내려놓아도 괜찮았지만, 너 하나만큼은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내가 떠나 네가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어떤 곳이던 간에 나는 떠나려 한다.
"응, 00아"
마지막으로 널 불러본다. 최대한 감정은 섞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전부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어떻게 내가 널, 애정 없이 부를 수 있을까. 괜한 생각에 입가에 작게 미소가 걸쳐졌다.
네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온다. 서늘한 바람이 너의 발걸음마다 끌려온다. 서늘한 바람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고, 그것이 꼭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걸 말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너는 짧은 칼을 내게 겨누었고, 그 칼은 정확하게 내 흉부를 향해 있었다. 그래, 죽어도 너의 손에 죽는게 낫겠다. 다른 사람에게 죽으면, 그 순간 너를 못 본다는 게 너무 아쉬울 것 같아. 죽어서도 후회 될 만큼.
마지막으로. 너의 얼굴을 담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아니다.
네 칼이 겨눈건 내가 아니다. 네 칼이 파고든 건 내가 아니다.
너는 내 가슴을 손으로 막았고 너의 차가운 칼끝은 너의 여린 손목을 찢었다.
너는 멈추지 않았다. 붉은 선혈이 네 손을 검게 적셔도, 넌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단단히 내리꽂았다. 짧은 칼날은 너의 손목을 잔인하게 찢어냈고 동맥이 끊긴건지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너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고 나는 그런 너의 손을 잡았다.
바보같은 짓을 했구나 00아.
"000"
나는 다급하게 너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마지막이 아니길. 이런 결말이 아니었잖아 00아. 내가 생각한 끝은, 네가 생각한 끝은. 이런 게 아니었잖아. 손을 뻗어 너의 얼굴을 매만졌다. 하얀 뺨은 점점 창백해져갔고 옅은 분홍 빛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아니잖아 00아.
이 모든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00아"
나의 목소리에 담긴 너의 이름은 너의 얼굴에 내려앉았고, 너의 얼굴에 너의 두 입꼬리가 작은 호선을 그려냈다.
아주 희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