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
[선배?]
“어, 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온 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 같았다. 핸드폰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무슨 높은 분 전화라도 받는 것처럼 몸을 수그린다. 나 진짜 왜 이러지.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버린다. 대답 없이 멍하니 그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자,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리 저리 튀어 삑사리 난 목소리가 예쁘지 않게 튀어나온다. 아씨. 두 눈을 질끈 감고 탄식을 내뱉는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핸드폰을 귀 더욱 가까이 댄다. 목소리 자체가 그렇게 낮은 건 아닌데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쟤 목소리가 언제부터 저렇게 좋았지.
[스피커폰이야?]
“아니, 아니야.”
[왜 답장 안 해줘?]
“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와서.”
[아. 조금만 더 늦게 할 걸.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냥, 뭐. 걱정했다고. 많이.”
바닥에 내리진 발가락이 꼬물꼬물 정처 없이 꿈틀거린다. 옆에 있는 윌슨도 한 번 만져보고. 괜히 옆에 있던 리모컨도 만져보고. 왠지 온 몸이 간지러운 느낌이라 목 뒤를 한 번 긁적인다. 대답이 없길래 이번엔 발을 툭툭 차며 이유 없이 장난을 치는데 이상하리만큼 수화기 너머가 조용하다. 핸드폰을 들고 확인을 하면 아직까지 통화 시간은 가고 있는데 뭐지. 조승연? 이상한 기분에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후- 하는 깊은 숨소리가 들린다.
[전화 빨리 하길 잘했다. 하마터면 이거 못들을 뻔 했네.]
“어? 뭐가?”
[선배,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 나 녹음하게.]
“뭐를??”
[걱정했다고.]
“뭐?”
[아, 잠시만, 잠시만. 아직 하면 안 돼. 아, 왜 아이폰 녹음 안 되지? 형! 형! 잠깐 일로 와봐!!]
해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수화기 너머가 분주하다. 당황한 마음에 동공이 지진한다. 아니, 승연아. 승연아? 조승연? 아무리 불러도 이미 저 멀리 간 승연은 대답이 없다. 아니, 이러면 꼭 내가 진짜 다시 말 해야 할 것만 같잖아. 한 번 말 하는 것도 진짜 용기 내서 한 건데 어떻게 그걸 또 하라는 거야. 애타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여러 번 이어지고, 결국 큰 목소리가 났을 즘에야 그가 다시 돌아와 태연하게 묻는다. 왜?
“그거 말고. 왜 전화한 거야?”
[아, 맞다. 사실 그게 그 촬영, 대표님이 선배 집 찾아가는 서프라이즈 등장 하자고 하셨는데, 선배한테 말도 없이 그러는 건 진짜 좀 아닌 것 같아서. 혹시 주변 어디 괜찮은 곳 있으면 거기서 만나자고 하려고 했지.]
“…촬영? 무슨 촬영?”
[어? 나 혼자 산다 촬영 같이 하는 거.]
“…그게 무슨 소리야?”
[뭐야. 선배 몰랐어?]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굳는다.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승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출연한다고 한 건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매니저 오빠에게 온 연락이라곤 하나도 없다. 승연이 이렇게 말 하는 걸 보면 분명 우리 회사 쪽이랑 승연 쪽이랑 합의가 끝난 일 같은데 도대체 왜.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깨문다. 아마 내가 거절할 까봐 미리 말하지 않은 거겠지.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까. 지금껏 몇 번 겪어왔던 회사의 방법인데도 지쳤다.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자 조용히 생각을 하는 듯 하던 승연이 목소리를 낸다.
[선배, 뭐야. 선배 의견 하나도 없이 이렇게 된 거야?]
“…응.”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야. 어떻게 촬영 당사자한테 말도 안 해주고 이렇게 스케줄을 짜?]
“…그러게.”
[나 안 갈게. 그냥 선배 원래 하려고 했던 촬영하고 나중에 회사 가서 이 일 그냥 넘어가지마. 선배는 그냥 선배가 생각했던 촬영하면 되는 거야.]
승연이 마치 자기에게 닥친 일인 듯 나보다도 더욱 열을 냈다. 형, 차 돌려. 승연의 단호한 목소리에 당황한 듯한 그의 매니저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승연 회사측에서 이 스케줄은 공식적으로 모두가 합의한 스케줄일 테니까. 나 혼자 산다 팀들도 물론 승연이 출연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이상한 건 우리 회사, 딱 하나였다. 중간에 하나가 딱 어긋나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들이 꼬여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냐, 그냥 와.”
[어?]
“나 괜찮아.”
[선배.]
“집 주소 보낼게.”
일단 회사 일은 화를 내든 뭐를 하든 내가 끊어야 하는 일이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단호하고 확고한 말에 결국 승연이 알았다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
.
.
[나 그 동안 핸드폰 뺏겨서 연락 못했어. 그 날 속은 괜찮았어? 조절 했었어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미안해. 선배도 많이 혼났지?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해. 근데 선배는 핸드폰 안 뺏겼지? 핸드폰으로 인터넷도 하고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고 한 거지? 다른 사람들이랑 문자하고 전화하고 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전화 한 통을 안 했어?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니까 조금 섭섭하잖아. 나는 선배 연락 없었으면 걱정돼서 계속 연락했을 텐데. 선배는 나 연락 안 되는데 걱정 안 했어? 문자 한 통 있을 줄 알았는데 섭섭해. 사실 뭐라고 하는 거 맞아. 맞는 것 같아. 선배, 나 혼자 산다 촬영 한다고 들었어. 선배도 들었지? 나랑 같이 나오는 거. 대표님이 거기 같이 나오라고 핸드폰도 주셨어. 아무래도 선배랑 내 이야기가 많으니까 같이 나오는 모습 찍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 좀 섭섭한데 선배 본다니까 또 좋아. 이렇게 빨리 볼 수 있을 줄 몰랐거든. 곧 전화할 텐데 놀라지 말라고 미리 문자 해.]
*
“헐, 뭐야, 뭐야. 저거 그 분이죠? 아침부터 원래 이렇게 전화하는 거에요?”
“아, 아뇨. 사실 그렇게 자주 전화하지는 않는데-“
“와 완전 목소리에서 꿀 떨어지네. 우리랑 대화할 때랑 목소리가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아, 아니. 그게 저도 제가 저렇게 전화하는 지 몰랐어요.”
예능에 출연하는 건 진짜 거의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앞에서 돌아가는 수 많은 카메라 앞에서 대본도 없이 대화를 이어가려니 어리버리하게 허둥지둥 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 차례나 위로하는 말들을 들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상 생활을 촬영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 말을 자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내 일상이 담긴 영상을 남들과 함께 보며 그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낯 뜨거운 일이었다.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열기가 가득한 얼굴을 본 다른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보다 승연씨는 왜 저렇게 애타게 부르는 거에요??”
“아, 그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완전 다급한데?”
“그, 녹음을 한다고 자꾸 그래서.”
전화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입으로 꺼내려니 여간 간지러운 대화가 아니었다. 생각 못했는데 우리 좀 재수없게 말하고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이야기 하자, 잘 알아듣지 못한 패널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가슴 부근이 간지러운 느낌이라 괜히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아이폰이 녹음이 안 된다고 다른 핸드폰을 빌리러 가는 것 같아서 다급하게 불렀어요.”
“녹음요? 무슨 녹음을 해요?”
“아, 그. 걱정 했다고. 그거 녹음하고 싶다고 그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힐끗 돌아보자 패널들의 표정이 나쁘다 못해 썩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냥 잘 둘러댈 걸 괜히 사실대로 말 했나 싶었다. 왠지 진짜 닭살 돋는 커플이 된 것만 같았다. 붉어져 있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익어갔다. 심지어 시언님은 끝까지 못 보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래님이 그래도 일인데 끝까지 봐야 한다며 자리에 먼저 앉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다른 분들도 자리에 앉았다. 긴장감에 물을 한 모금 먹고 나서야 다시 영상이 재생됐다.
“어, 잠시만요. 갑자기 분위기 좀 안 좋은데? 무슨 일이에요?”
“잠깐 착오가 있었던 부분이 있어서 당황해서 표정이 굳었어요.”
“아, 그래요? 촬영 관련한 일인 거에요?”
“아, 그렇기는 한데. 진짜 별 일 아니라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촬영이 끝나고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던 부분이라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웃자 다른 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근데 잠깐. 집 주소? 뭐야! 승연씨 집에 오는 거에요??!!”
“와 대박 승연씨 출연해요?”
“저 승연씨 진짜 팬이거든요!”
집주소 얘기가 나오자마자 실내가 난리가 났다. 다들 놀란 얼굴로 흥분한 얼굴을 했다. 촬영 전에는 승연의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나와 팬들을 위한 게 아닌 거짓 예능이 되는 것 같아서 꺼려졌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아까까지 긴장되던 마음도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내 편이 곁을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 없이 웃음 짓자 그 의미를 알아챈 패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승연 하나로 모두가 웃고 있었다.
*
“선배, 나 들어가도 돼?”
우리 집 문 앞에 선 승연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승연은 흰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지 아님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평범한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집 문 앞에 있는 승연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어색한 광경이기는 했다. 긴장되는지 마른 입술을 한 번 깨문 승연의 손에는 커다란 휴지가 들려있었다. 벌써 지낸 지 몇 년이나 지난 집에 들고 오기에는 조금 이질감이 드는 물건이기는 했다. 들어오라고 몇 차례 말 해도 진짜? 진짜? 하며 망설이길래 결국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끌었다. 촬영 전에 치웠음에도 승연이 온다고 한 번 더 치운 집은 나름 깔끔했다. 그럼에도 괜히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눈으로 훑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내게 끌려 집으로 들어오는 승연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 데나 앉아.”
“어? 나 서있어도 되는데. 나 앉아도 돼? 진짜? 진짜?”
“너 그 진짜 한 번만 더 해?”
“알겠어, 알겠어.”
장난스럽게 웃은 승연이 조심스레 소파 위에 앉았다. 탁자 위엔 승연이 내려놓은 휴지 묶음이 놓였다. 집을 둘러보는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왜 저렇게 긴장하지 싶다가도 승연의 집에 갔다면 나도 똑같았을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뭐 마실 거라도 줘야 할 것 같아 집을 둘러보는데, 집에서 뭘 잘 먹지 않아 내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저번에 선물 받은 티가 있어 그것을 줄까 물어보자, 승연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언제부터 혼자 살았어?”
“전향하고 난 뒤에 바로 혼자 독립했으니까, 몇 년 됐지…?”
“아, 그럼 3년 정도 됐겠네.”
“응. 너는 숙소 살지?”
“응. 근데 본가가 가까워서 자주 왔다 갔다 해.”
승연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데 언제 온 건지 뒤로 바짝 다가온 승연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우려낸 캐모마일 티 향과 승연의 향이 어우러져 상큼하고도 좋은 향이 났다. 나만의 공간에 다른 이의 향이 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지금껏 집에 온 이는 끽해봐야 매니저 오빠뿐이라 더 그랬다. 괜히 컵의 손잡이 부분을 매만지며 아무렇지 않은 척 티가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승연에게 하나를 건네자 그가 웃으며 그를 받아 들었다.
“선배는 밥 집에서 해먹어?”
“아니, 밖에서 먹거나 아님 매니저 오빠가 가끔 사다 주기도 하고.”
“그럼 집에 혼자 있을 땐 어떻게 해?”
“시켜 먹거나 아님 그냥 안 먹지.”
소파에 앉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그 뒤를 승연이 쪼르르 따라왔다. 뭐가 그렇게도 궁금한 게 많은지 입이 쉴 틈이 없었다. 그 다음엔 방 구경을 해도 되냐 묻길래 된다고 하니 뽈뽈 거리며 온 집 안을 돌아다녔다. 구석구석 다 다닐 것처럼 신나 보이더니 결국 침실엔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고 묻자 그냥, 이라고 답했다. 돌아선 승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 냉장고 열어봐도 돼?”
“응, 근데 진짜 별 거 없어.”
마지막 종착지는 냉장고였다. 별 생각 없이 열어도 된다고 하자 승연이 손에 힘을 줘 냉장고를 열었다. 촬영을 하기 전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도 버리고 깨끗하게 정리 했으니 별로 더럽지는 않을 텐데 승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냉장고를 빤히 바라보는 얼굴이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니라 불안한 마음으로 승연의 옆으로 걸어갔다. 내가 안 치운 게 있었나? 머릿속엔 이미 마지막으로 봤던 냉장고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번에 먹고 남은 배달 음식들도 다 버리고 깨끗하게 닦았는데 왜 저러지. 옆에 서서 냉장고 안을 보니, 내 눈엔 깨끗해 보였다. 힐끗- 괜히 승연의 눈치를 보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봤다.
“선배, 맥주만 먹고 살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승연의 눈빛 끝엔 내가 좋아하는 맥주 종류가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음식점에서 흔하게 파는 종류는 아니라 미리 저렇게 많이 사두고는 했는데 그에겐 그게 문제였나 보다. 괜히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 같아 붉어진 얼굴로 그를 봤다. 술만 먹고 사는 애로 찍히면 어떻게 하지. 괜히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는데 승연이 냉장고 문을 탁- 하고 닫았다.
“장 보러 가자.”
“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결심한 듯 단호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리기에, 결국 웃음이 터져 웃어버렸다.
*
“승연씨가 선배라고 불러요?”
“아, 네.”
나를 선배라 칭하는 승연의 모습에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기에 괜히 멋쩍은 얼굴로 목 뒤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남들이 보기엔 사귀는 사이일 텐데 ‘선배’라는 단어가 어색하긴 한가, 싶었다. 괜히 주변에 연애를 하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나이 차이가 나도 장난스레 이름을 부르거나 자기, 여보 등 입에 담기 간지러운 말들로 서로를 애칭하고는 하던데. 우리는 나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딱딱한 단어로 서로를 불렀다.
“에이. 그래도 연인인데 다른 애칭 같은 건 없어요?”
“선배가 애칭인 걸 수도 있죠.”
기안84님의 말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했는데 나래님이 한 발 빨랐다. 나래님의 말에 생각해보니 그게 애칭처럼 보이나, 싶기도 하고. 괜히 기분이 좋았다. 승연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날 선배라고 부를 때 마다 기분이 좋으니, 그럼 애칭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대담한 생각도 들었다.
“맞는 것 같아요. 좋거든요. 승연이가 선배라고 불러주면.”
나를 불러주는 그를 떠올리다 보니 웃음이 났다. 웃는 낯으로 그리 이야기하자 다들 닭살 돋는다며 팔을 매만졌다.
“저러다 갑자기 이름 부르면 난리 나는 거에요. 심장이 아주.”
“아니, 누가 보면 네가 승연씨랑 사귀는 줄 알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다른 패널들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내 이야기가 나올 땐 질색을 하더니, 서로 연인과 어떤 애칭까지 불러봤나 하는 질문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까지 튀어나왔다. 달링, 허니. 경악할 만한 말을 하는 그들을 보며 난 곧 죽어도 저렇게는 못하겠다, 싶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젖는 내 모습에 패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승연씨가 여주씨 집에 처음 온 거에요? 조금 어색해 보이네요?”
“네. 아예 처음 온 거에요.”
“진짜 딱 처음 사귄 그런 느낌 나요. 풋풋하고.”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하.”
“서로 많이 좋아하는 게 느껴지네요.”
“에이. 마음에 안 들어.”
툴툴거리며 뱉는 목소리로 끝이 났음에도 그 전 말이 자꾸만 기억에 남았다. 서로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 그 말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찝찝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도 나를 어쩌면. 근데 그 마음이 같은 것일까, 확신이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일까, 아님 동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일까. 확실한 대답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선배, 이거, 이거. 이거 담자.”
“승연아.”
“오! 선배 이것도!”
“조승연.”
승연과 근처 마트에 왔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는 않아 눈길이 쏠리지는 않았다. 승연은 신이 난 것 같았다. 이해는 됐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점심 메뉴는 닭 볶음 탕으로 결정이 됐다. 승연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카트를 너무 끌고 싶다고 하기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카트를 끌고 왔는데, 그것은 모두 승연의 계획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승연이 빠르게 돌아다니는 사이 카트는 빠른 속도로 채워져 갔다. 둘 먹을 음식을 사는 거라고 믿을 수 없게 많은 양이었다. 카트가 가득 찼는데도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음식을 고르는 승연을 불렀다. 푹 빠져 몇 번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손을 들어 팔을 붙잡았다.
“어? 선배 왜?”
“닭 볶음 탕 한다며.”
“응.”
“근데 소고기를 왜 사.”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 들려있는 소고기를 뺏자 순순히 그를 놓아준다. 얼굴엔 물음표를 가득 달고 있다. 선배 근데 소고기가 좋은 거 아니야? 승연아. 닭 볶음 탕이 ‘닭’ 볶음 탕인 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제야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저으며 그가 지금까지 신나게 들고 왔던 것들을 자리에 돌려 놓는다. 도대체 아보카도는 왜 들고 온 거야. 당황한 얼굴을 하자, 몸에 좋으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선배, 그럼 메뉴 소 볶음 탕으로 바꾸면 안 돼? 소가 더 건강에 좋은데.”
“소 볶음 탕이 어디 있어.”
“그래도 나 선배 몸에 좋은 거 해주고 싶단 말이야.”
그제야 지금껏 그가 담아왔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저 쓸 데 없는 것들 담아왔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다 몸에 좋다는 것 투성이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던 조금 전의 내가 창피해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승연아.”
“응?”
“소 볶음 탕 먹자.”
“어? 진짜? 근데 선배 나 생각해서 그러는 거면-“
“아니, 아니. 맛있을 것 같아서.”
“진짜?”
“응. 지금 생각해보니까 꽤 맛있을 것 같아.”
사실은 아니었다. 푹 끓어져 질길 소고기를 생각하면 아깝기도 하고 그랬는데, 뭐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승연이 만들어준 것이라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난 승연이 밝은 얼굴로 다시 소고기를 들고 왔다. 돌려 놓으려고 꺼냈던 아보카도도 다시 카트에 넣었다. 뭐, 아보카도도 토마토도 승연이 원한다면 다 넣어버리면 돼지. 그런 생각이었다. 승연이 원하는 것을 모두 넣은 카트가 그렇게 계산대에 올랐다. 계산까지 그가 한다고 하기에 그를 재빨리 막았다. 음식까지 얻어 먹으면서 돈까지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단호한 얼굴로 내가 계산을 하겠다고 하자, 승연은 안절부절 하면서도 그를 막지 못했다. 승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뚱한 얼굴을 했지만,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장을 다 본 뒤, 차에 음식들을 넣고 주변을 조금 걷기로 했다. 신이 난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밖에서 이렇게 신나게 돌아다니지 못할 텐데 오늘이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 승연과 거리를 걷다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서로 마실 음료를 받아 날씨가 좋기에 밖으로 나왔다.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제야 그의 졸린 눈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고 흥분한 얼굴을 하더니 피곤함을 참고 있었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의 그룹은 지금 활동기였다. 빡빡한 스케줄에 스케줄 하나가 더해진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 노곤하게 만드는 햇빛까지 더해지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선배, 단 거 좋아한다더니 음료도 진짜 달게 먹네.”
“그거 맛있어?”
목소리도 잠에 취해있으면서 괜히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려는 게 훤히 보였다. 자꾸 고개를 세게 이리저리 흔들길래 결국 모자를 벗어 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작은 머리에 모자가 쏙-하고 들어갔다. 승연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잠깐이라도 자.”
“아, 아니. 선배 나-“
“지금 안 자면 나 소 볶음 탕 안 먹어.”
강하게 나오자 그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려는 기미가 안 보이길래 찌릿- 잠깐 노려보자 또 뚱한 얼굴을 한다.
“선배, 나 진짜 안 자도-“
“5분 안에 잠 들면 소원 하나 들어준다.”
“어? 진짜?”
“응. 지금 벌써 30초 지났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얄미운 얼굴로 웃자 그가 씩씩거리는 얼굴을 한다. 나를 보던 얼굴이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그대로 고개가 뚝- 떨어진다. 자려는 것 같아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따뜻한 햇빛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승연을 본다.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에 턱을 괴고 고개를 틀어 그의 잠든 얼굴을 본다. 봄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따스한.
*
김여주 비주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