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늘 나에게 말했지.
어리석은 꿈을 꾸지마라,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으니.
그리고 당신은 늘 나를 어리석다고 칭했지.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을 바랬으니.
나는 당신이란 나무에 기어오르기 위해 내 모든 걸 바쳤어.
여물지 않은 마음, 부러지지 않는 젊음, 얄팍하지 않은 내 순정.
손에 생채기가 나고 무릎이 까져 핏방울이 맺혀도 나는 멈출 수 없었어.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리고 한 걸음 물러 나려고 하면, 어리석게도 당신이 나를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거든.
[오백] Lolita
W. 리플(Riffle)
얇은 발목에 그의 손가락이 감길 때면 나는 끓어 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기가, 많이 아파? 새벽 공기와 같은 목소리가 뚝뚝 살결에 떨어질 때면 나는 정신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발갛게 부풀어오르는 살갗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욕정하는 그를 보다가, 무릎 아래에 걷어올린 바짓단을 매만지고서. 나는 한 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조잘댔다.
"몸 어느 한 곳이 고장나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언제든 당신을 볼 수 있을테니까"
내 말이 못마땅한 듯 진한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그를 보며 나는 아이처럼 까르르 웃어버렸다.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나를 등진 너른한 어깨가 보였다.
아직도 부끄러워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됬지 않았나. 주섬주섬 붕대며 가위를 집어넣는 손을 쳐다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제 이런 거로 부르지 마세요. 적어도 붕대 감는 건 스스로 할 수 있잖아"
애 처럼 구는 건 아홉 살에서 끝냈어야지. 그의 목소리는 심해의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다.
잘 깎인 연필처럼 단정한 사람. 풀어져 있던 감정을 움켜 쥐어 상대를 안달나게 만드는 그런 사람.
그리고 그에게 안달을 내는 나. 어스름한 저녁에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어둠을 들이마시며 그는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앞에 주저앉아 잔뜩 벌려 놓았던 가방의 입을 닫는 어깨선이 넘실거렸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들썩거리는 가디건의 주름진 부분을 잡아끌며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푸슬푸슬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으며 나는 입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나 여기가 너무 아픈데. 자꾸 뭐라고 하지 마요, 응? 꺼슬꺼슬한 붕대가 감긴 발목을 가리키며 나는 어느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사이로 매끈해보이는 볼을 찔러도 보고 나와 같이 있자며 팔뚝에 볼을 비비기도 했다.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접고 앉아 눈을 맞추려 고개를 들이 밀었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항상 내 앞에 설 때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경극에 쓰이는 분장을 한 얼굴처럼 표정을 감추려고 급급해하는 사람마냥.
"그러게, 누가 뛰어다니래. 애도 아니고"
"내가 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
"…그만하자"
"뛰다가 넘어진 거 아니야. 알지도 못하면서"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애처럼 굴지 말라는 거야"
변백현. 둥그스름한 그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내 이름 석자가 속절없이 부서져내렸다. 어깨를 꽉 쥐고있던 내 손을 떼어내려 맞잡은 그의 손이 뜨거웠다.
나는 찡그린 얼굴을 펴고 가늘게 눈을 접어올렸다. 철없는 웃음이 입가에 만연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 내가 얼마나….
그럼. 이거 입혀줘. 급하게 벗어던져 바닥에 떨어져있던 교복바지를 움켜쥐며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도 그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릴 뿐 입을 꾹 닫을 뿐이었다.
당신이 아무렇지 않으면 안되지. 내가 어떻게 다리를 다쳐왔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지탱하며 다리를 끌고 방까지 올라온 나를 봤을 때. 신경질적으로 발목을 움켜쥐었을 때의 그의 격렬한 맥박.
"오늘 자고 가면 안되요? 어차피 아빠도 많이 아프잖아, 지금"
당신도, 내가 신경쓰이잖아. 마지막 말을 겨우내 삼키며 나는 예쁘게 웃었다. 볼우물을 잔뜩 패이게 만들었고 그가 흐릿하게 보일만큼 눈웃음을 쳤다.
사탕이 발린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는 내 목소리는 꽤나 위험했다. 짙은 내 눈동자처럼 어두웠고, 울렁이는 내 피처럼 탁했으며, 방 안에 고여있는 공기처럼 나른했다.
그는 내 시선을 맞받아치지 않았다. 나는 이를 갈면서도 짐짓 웃어보였다. 아저씨가 아빠 닥터라면서. 그럼 있어줘야지.
서재의 건너편 넓다란 안방에서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을 사람. 그리고 그의 손발이 되어주는 당신.
작게 한숨을 쉬다가 들고왔던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향해 나는 두 손을 벌렸다.
본능적으로 하얗게 드러난 팔목을 쳐다보는 눈빛에 점점히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안아주세요. 손을 팔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으며 그는 전에 없던 미소를 지었다.
"갈게"
어차피 다리 아프다고 그랬으니까 거기 앉아 있으면 되겠네.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귓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방을 빠져나가는 걸음이 느릿했다. 따라와보라는 듯 그렇게. 나는 멍청하게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내가 쫓아오지 못할 걸 알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다 알고 있었어. 당신의 행동에 내가 밤에 잠을 못 잘 거란 것도. 그리고 바쁘게 움직일 내 손도 떠올렸겠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터질 거란 걸 알고 비웃었겠지.
나는 소리내서 웃었다.
아아, 어떡하지. 당신이 너무 좋아.
*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나와 살을 맞댄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아빠가 심어둔 이.
응접실에서 하얀 찻잔을 들고있던 그의 손을 보고 까마득한 한숨을 내뱉던 나. 우리의 첫 만남.
너가, 백현이구나. 슬리퍼를 소리나게 끌며 다가와 거만하게 나를 내려보던 얼굴에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주머니에 찔러넣은 두 손과 가늘게 빠져나와있던 손가락 두 개.
누구세요. 다 안다는 표정을 뒤집어 쓴 채 그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자주 마시던 옅은 커피향이 풍겨왔다.
나의 열 여덟번째 생일날, 아빠는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리고 생일선물로 받은 당신.
뭐가 그렇게 잔뜩 들었는지 묵직한 가방을 옆에 두고 집요하게 따라붙던 눈길.
그는 나와 먼 나라의 사람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언제 곁에 다가섰는지도 몰랐으니까.
굳이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지 않아도 열 살은 족히 차이가 난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모른 척 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지만.
가끔씩 그가 집에 머무를 때면 끈질기게 시선이 오고갔다.
질척거리는 침이 묻은 것 같기도 하고, 절정에 와 닿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면 분출하던 끈끈한 점액이 묻은 것 같기도 했다.
반듯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을 때면 나는 묘하게 들떠 그를 향해 웃어보이기도 했다. 검은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의 방은 2층의 맨 끝방에 위치했으며 내가 머무르는 공간과 마주보는 구조였다.
그는 나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어느 한 쪽이 끌어당기지 않으면 접점도 생겨나지 않을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경수야. 나 여기 다쳤는데 소독 좀 해주세요"
그의 발끝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내가 있었다. 물론 그는 늘 그래왔듯 눈 한번도 깜빡이지 않았고.
*
오래된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뒷꿈치를 들고 그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종아리에 단단하게 선 근육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입을 틀어막으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건넜다. 내 발목에는 그가 매주었던 붕대가 반 쯤 풀려 있었다.
마주한 문 틈 사이로 어슴푸레한 불빛이 갈라져 나왔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얹고 귀를 갖다댔다. 침범벅이 된 입술에서 색색거리는 숨이 튀어 나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뭇결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나는 슬쩍 주먹을 쥐었다가 피며 천천히 문에서 귀를 떼어냈다. 척추를 타고 땀 한 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뭔가를 이리저리 옮기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다리에 손바닥을 비볐다. 비적비적한 땀이 흥건했다.
그의 방 앞에서 그림자처럼 서있는 나. 나는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돋아나있던 소름을 만지며 부풀어오른 긴장감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그의 방문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한 차례 밝은 빛이 나를 향해 쏟아져내렸다.
아아… 앓는 목소리가 닫혀있던 입을 뚫고 나왔다. 나는 여과되지 못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찡그렸다.
주름이 생긴 미간에 그의 손가락이 와닿았다. 왠 도둑고양이가 문 앞에서 서성거리나 했더니.
"길 잃은 강아지였네"
그는 낮보다 밝게 웃었다. 낯설었다. 그의 미소가.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오고"
그는 비스듬히 비켜서서 문 옆으로 기대어 섰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붕대를 눈으로 헤집어보다가 한 발자국 물러서서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밤이 되면 사람이 변하나. 그렇게 밀어내더니. 나는 쓰게 웃다가 문지방 너머에 발을 두었다. 그가 자주 쓰던 향수냄새가 나를 뒤덮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보다시피"
정리 중. 짤막한 대답과 함께 그는 시트가 구겨져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달그락거리며 구급상자를 정리하는 손등에 불툭 튀어나온 핏줄이 두드러졌다.
"칠칠맞은 건 여전하네"
다리를 다쳐가지고 들어오지 않나. 붕대를 풀어 헤치고 다니지 않나. 그는 허리를 숙여 저만치 가방을 밀어두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다리를 끌어 침대의 끝에 조심스레 앉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틀어 벽지에 시선을 두다가 따끔거리는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다리 올려봐"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두 다리를 끌어올렸다. 무릎을 세운 채 그의 앞에 다 드러난 맨 다리를 내밀었다.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무언가 갈구하듯 내 발목을 잡아챘다. 볼품없이 끌러진 붕대를 보다가 그는 쯧, 혀를 찼다. 나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급하게 마른 숨을 삼켜냈다.
"안 풀어지게 꽉 묶어야겠다"
"아, 아! 너무, 그러면 아픈데…"
투박한 손길에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왔다. 칭얼거리는 말투에 바람 빠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방은 고요했다. 까마득한 어둠으로 물든 집에서 깨어있는 건 우리 둘 뿐이었다.
"경수야"
아저씨. 내 부름에도 그는 묵묵하게 붕대를 동여맸다. 두 갈래로 나뉘어있던 끝을 리본 모양으로 묶는 모습에 나는 슬쩍 다리를 흔들었다.
"왜"
"아저씨는 내가 싫어요? 나 안 예뻐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생각없이 내뱉는 말에도 그는 다 됬어, 여분으로 남은 붕대를 끌어 모으기 바빴다. 자꾸만 안달이 났다. 나를 봐주지 않는 당신이 너무 궁금해서.
"다들 나 예쁘다고 그러는데. 응? 아저씨 보여주려고 이렇게, 바지도 안 입고 왔잖아"
질질 늘이는 말꼬리에 그는 별안간 고개를 쳐올렸다. 백현아.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뒤에서 나는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넌 좋아하니"
그에게 발목이 잡힌 발목.
"난 아니란다"
그리고 그에게 붙들린 내 두 눈.
*
그는 내팽겨치듯 발목에 있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곤 내 앞으로 다가와 잡아먹을 듯 내 어깨를 잡아눌렀다.
하얀 시트 속으로 파묻혀가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는 싱긋 웃어보였다.
올곧은 그의 속눈썹 아래로 붉은 입술이 보였다. 그가 내 턱선을 훑으며 내려와 목덜미는 물어뜯을 때마다 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오직 그의 귀에만 들릴 수 있도록.
따끔거리는 느낌에 나는 그의 뒷머리를 잡았다. 빨갛다 못해 퍼렇게 멍이 드는 것만 같은 느낌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파, 아파, 아파요.
잔뜩 깨물고 잡아당긴 터라 얼얼한 감각 위로 그는 혀를 갖다댔다. 느리게 글자를 써내려가는 생경한 기분에 나는 꺽꺽거릴 뿐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얗게 드러난 목 주변을 보여주며.
헐떡거리는 내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주름이 진 와이셔츠를 내려다보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힘이 빠져 뒤로 늘어지는 등을 받으며 나를 안아들었다.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 그의 손이 단단하게 내 허벅지를 잡아왔다.
그는 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내 얼굴 곳곳을 눈에 담았다. 노골적이고, 끈적거렸다. 손으로 가리려고 하면 그것마저 끌어내려 아무것도 남지 못하게 했다.
"백현아 넌 예쁘지 않아"
코 끝을 살짝 깨물곤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을 들이밀었다. 매력도 없고, 귀엽지도 않아.
"그나마 봐줄만 한 건"
벗고 있는 다리 정도. 그의 손길은 뜨거웠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했다. 수증기처럼 흩어지는 미소에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는 나와 함께 웃고 있었다.
당신은 늘 나에게 말했지.
어리석은 꿈을 꾸지마라,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으니.
그리고 당신은 늘 나를 어리석다고 칭했지.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을 바랬으니.
나는 당신이란 나무에 기어오르기 위해 내 모든 걸 바쳤어.
여물지 않은 마음, 부러지지 않는 젊음, 얄팍하지 않은 내 순정.
손에 생채기가 나고 무릎이 까져 핏방울이 맺혀도 나는 멈출 수 없었어.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리고 한 걸음 물러 나려고 하면, 어리석게도 당신이 나를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