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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해 전체글ll조회 1007l 2


차가운 바늘을 삼킨다.


그들의 시선은 바늘 같아서, 나를 쉬지 않고 찔러댄다.

어린 나는 거부할 힘이 없기에, 그들이 내미는 모든 것을 삼켜 내 속에 켜켜이 쌓아 상처를 낸다.


“그 어린 것이 볼 때면 내 뒷목이 섬닷해져 소름이 돋는 게, 어린 나이에 정신이 나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도 그럴 게 그냥 죽은 게 아니잖어. 어쩜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 있대? 암튼 죽은 지 에미를 제 눈으로 보았으니 갸가 정상이겄어? 에그 안쓰러”

“사람이 죽을라믄 접시 물에 코박고도 죽더라만, 명이 거그 까정인걸 어쩌겠어. 근디 인자 가는 즈 아빠한테 갈란가?”

“모르지마는 그 집 아저씨만 봐서는 차라리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시여. 어찌 사람이 아무리 정이 없다더래도 살붙이고 산게 몇 년인데, 저 마누라 장례식에서 싱글벙글 이데?”


벌건 눈두덩에,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얼굴. 새액- 새액-. 지친 숨소리로 쓰러져 잠든 저 아이를 알고 있다.

장례식에 맞추어 꺼내 입은 낡고 검은 벨벳 원피스는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는지 좀약 냄새가 나지만 이제 그런 사소한 일을 챙겨줄 사람은 이제 없다.

이 소녀가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어린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녀의 친부는 가난 때문에 젖먹이를 고아원으로 보낸 사람이고 친모는 어디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양부에게 양녀란, 제 부인의 적적함을 달래줄 애완견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고 양모는 이틀 전 자택에서 목숨을 잃었다.


운명은 이토록 가혹하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미래를 향해 나는 듯 뛰어가는데, 이 어린 어깨가 부러질 정도로 무거운 짐을 얹어 주고는 달리라한다.

멈출 수도 없어 마지못해 걸음을 떼려는 순간, 잔인하게도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는 기어가라며 등을 떠민다.

그렇다고 운명이 그녀에게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다. 혹은 그녀가 저지른 죄의 대가도 아니다.

그저 일어난 일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운명의 잔인함이다.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산다.

그러나 그 인간들 중에 행복한 오늘을 사는 이는 없다.

누군가는 밝은 내일을 꿈꾸며 낯선 타향에 숨어들어와 죄인처럼 살며, 누군가는 가치 없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책상 앞에 앉아서 어제도 읽었던 그 책을 또 다시 읽고 있다.

혹은 그녀처럼 가치 없는 인생도 있다더라.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인데 막상 내일은 미래가 되지 못하고 다시 오늘이 되는 그런 인생.



**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를 빗어 내린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내 머리를 묶어주며 말씀하셨다.

‘칠흑같이 검고 삼단 같은 머릿결이 마치 선녀처럼 곱구나’

엄마도 어릴 적에 길고 탐스러운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곤궁해진 집안 형편에 따라 잘라서 내다 팔수밖에 없었다는 옛적 이야기에는 꼭 너의 고운 머리가 꼭 나를 닮았으니 혹여 돈이 필요하거든 엄마처럼 머리채를 내다 팔라고 농담하셨다.

그러나 내 손에 다듬어지고 있는 이 머리는 몇 일전부터 빈 통이 되어버린 샴푸대신 사용한 비누 때문에 윤기는 커녕 빗질조차 하기 힘들게 엉켜 있었다.

나는 머리채를 모아 쥐고 가위를 들었다.

이렇게 하나 남은 인연이 몇 천원의 빈곤에 잘려나간다.





갓 잘린 머리는 목덜미를 바늘처럼 찔렀다. 선반에 물건 재고를 채워 놓는 와중에도 간질거리는 게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가서 뒷목과 날선 머리를 만지고 있다.

차임벨이 울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필라 라이트 주세요.”


그의 눈과 손은 작은 스마트폰을 헤집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2700원입니다.”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오천 원과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오늘도 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있었다.


“두 갑 주세요.”

“현금 영수증 해드릴까요?”


그는 내가 내민 동전을 계산대 위에 올려진 저금통에 넣으며 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필요 없는데, 있잖아요.”

“네.”

“그쪽 머리 좀 묶는게 어때요. 지저분하네.”


그리고는 바람을 일으키듯 빠른 발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오늘은 유독 밤이 빨리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 하루가 빨리 지나가지는 않았다.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던 시간이 이런 순간에는 참 느리게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가씨 내가 여기 사장이랑 친구라니까? 내가 아까 전화로 돈 좀 꿔간다고 말했다고 몇 번을 말해”

“사장님이 친구 분한테 돈 안 빌려준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냥 친구가 아니라니까? 보통사이가 아니라고.”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카운터를 두드렸다.


“진짜 이렇게 할래? 너 내가 그 친구한테 한마디만 하면 너 짤려, 알아?”


한 달에 두세 번씩 있는 일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이러시면 진짜 경찰 부를 수밖에 없어요”


남자는 얼굴이 벌개져서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야이 베라먹을년이 어디서 협박 질이야! 불러봐! 불러 이 젊은 년이 낯짝도 안변하고 협박 질이네. 허!”

“이봐요!”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릴 것처럼 길길이 뛰던 남자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그는 젊고 키가 커서 남자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 경찰 부를까요? 그만하세요.”


남자는 말없이 시큰덕 거리다 걸쭉한 가래침을 바닥에 뱉어내고는 나가버렸다.

사라져가는 남자의 뒤통수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가끔씩 담배를 사러왔던걸 기억하지만, 이렇게 마주보는 상황은 처음이다.

그는 항상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자판기를 사용하듯 기계적으로 주문하고 계산하고 나가버렸다.


고개 숙인 얼굴이 아닌 정면에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고운 귀티가 흘렀다.

준수한 외모만이 아니라, 윤이 나는 피부와 잘 정돈된 머리는 나와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필라 라이트 두 갑이요.”


그의 음성은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5400원입니다. 현금 영수증 해드릴까요?”


며칠 전처럼 오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아뇨. 근데 그 머리 누가 자른거에요?”


문득 내 속 깊숙이 잠들어있던 수치심과 자존심이 일렁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는 그가 넝마주이 같은 나에게 한 질문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장 빛나야 할 청춘의 소녀를 한번 뒤흔들었다.


“제가 자른거에요”

“아, 어쩐지”


소녀는 부끄러워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는 짧은 탄식과 함께 사라졌다.





밤늦게 돌아온 고시원의 작은방.


얇은 벽은 아무런 방음을 하지 못한다.

옆방에서는 젊은 남자 하나가 소리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인생은 왜 이래,왜. 항상 이렇게 힘들고 되는 것도 없고.

개 같은 인생. 개 같은 세상 .

아니, 아니야. 그냥 내가 인거지. 등신 같은 새끼.

이러려고 태어났냐? 왜 사냐, 넌. 엄마. 미안해. 정말로.


그는 한참을 어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흐어어엉, 허어엉. 어,엄마-, 나 너무 힘들어. 허어엉.


엄마를 애타게 찾는 그 남자는 내가 알기로 이제 서른 줄에 들어가는 만년 고시생이다.

그 나이가 무색하게 애처로운 울음이 그를 세 살배기 어린애로 만들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엄마를 그려요.

얼마전에 머리를 잘랐어요, 엄마 말대로 내다판 건 아니고요.

머리가 길면 샴푸도 많이 들고 그러니까, 말리기도 힘들고 한 번도 단발해본적이 없으니까 한번 해봤어요.

사실은요.

돈이 없어서 잘랐어요. 샴푸가 다 떨어져서 비누로 감았는데, 잘 감아지지도 않고 머리도 다 엉켜버려서, 그래서 잘랐어요.

고시원 근처 마트에서 파는 샴푸가 세일해서 삼천오백원이라고 붙어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잘랐어요.

시간이 지나면 이 머리는 다시 길게 자라나겠지만, 저는 머리를 자른 게 아니라 엄마를 잘라낸거 같아요.

저, 엄마가 기억나지 않아요. 배은망덕한 불효녀라고 욕해주세요. 엄마가 해주던 밥이나 포옹은 생각이 나는데, 엄마 얼굴이 생각이 안나요.

목소리는 그 옛날에 잊었어요.

할머니 집을 가던 날, 고집을 부려서라도 엄마 사진은 하나 들고 올걸 그랬다는 후회를 지금도 해요.

옆방에서는 고시생 하나가 엄마를 부르는데, 나는 부르면서 그리워할 엄마가 없어요.


죄송해요.

엄마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슬픈 게 아니라, 제가 부르고 싶은 사람이 없어진 게 더 슬퍼요.

그래도 사랑해요. 엄마.




하루가 하루같이 흘러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제하루처럼 흘러간다.

고시원에는 매일 밥이 제공된다.

정말 밥만 주는 고시원도 있지만, 여긴 몇 가지 마른 반찬이 대량으로 구비되어있다.

다만 그 반찬은 한 달에 한 번씩만 더 넣어주기 때문에, 월말에는 오늘처럼 간장에 밥을 비벼먹을때가 있다.

나에게 간장 밥이란, 가난의 상징이고 지독한 현실을 눈앞에 들이미는 악동이다.

질척한 수분감에 짭짤한 간이 입속을 배회할 때면 세상에 나보다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 고민해봤다.

매년 겨울만 되면 종을 울리는 사람들도, 카운터 옆에 천천히 차오르는 저금통도 모두 불우한 이웃을 돕자고 하는데 나는 그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언제나 혼자 기어가면 기어갔더랬지 누군가 나에게 저런 도움을 준적이 없는걸 보면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었나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었어. 어째서지.

더부룩해진 배에 시원한 물 한잔을 붓고 나는 오늘도 일을 하러 간다.





한두 달사이로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필라 라이트”

“2700원입니다.”


삼천 원을 건네받고 삼백 원을 돌려주자 그는 어김없이 계산대 위 저금통에 잔돈을 넣었다.


“저기요”

“네.”

“왜 머리 안 묶어요?”

“..그냥 버릇이에요”

“아하”


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깨에 닿을만치 길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만지면 손 끝에 박힐듯 날카롭던 머리끝도 적당히 무뎌져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에 그린 듯 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거면 머리는 왜 잘랐어요?”


비스듬하게 내려 보는 그의 눈길에서 차가운 의도를 읽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린 아이들이 무고한 개구리를 찔러 반응을 보는 것처럼 나를 찔러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던 그 시절처럼 바늘을 삼켰다.


“..그냥, 껌이 붙어서.”

“흐응”


재미있다는 듯 새치름하게 뜬 그 눈에는 악의는 엿보이지 않았다.

어느 누가 한낱 개구리가 미워서 묵직한 돌멩이를 그 까뒤집힌 허연 배에 올려두겠는가.

다만 잔인한 호기심과 무정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 돌멩이의 무게에 개구리의 배가 터질지언정 악의는 없다.


“제 이름은 타쿠야에요”

“네.”

“다음에 또 봐요”


아니, 오지마라. 악의가 없다고 죄가 아니더냐.

나는 네 질문에 짓눌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너는 노을 진 석양을 향해 걸어가 버리나.

가더라도 이 돌은 치우고 가거라.




초등학교 3학년에 가게 된 할머니댁.


처음으로 마주보는 진짜 혈연이었다.

나는 그래, 슬픈 그 와중에도 조금은 기대했다.

그녀는 엄마처럼 나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도 늙어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내 얼굴을 더듬는 노인은 몸을 일으키기도 버거워 집에만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런 할머니라도 살아만 있어주면, 하고 바랐지만 늘 그렇듯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약밥을 한 덩이 샀다.

입맛이 없다며 오늘 아침 상을 물리던 모습이 선연했다.

언젠가 지나가듯 좋아한다고 했던 말 한마디가 왜 그리 생각나던가.

장에 들러 식어빠진 약밥 한 덩이와 모서리가 다 으스러진 두부 한모를 들고 돌아간 그날에 나는 잠든 것처럼 고요히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주하였다.

어린 손녀가 손에 물 묻혀가며 삶에 찌들어 가는 모습에 늙은 자신이 부담이 될까 혼자 속으로 삭혔던 병에 그렇게 가셨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십시일반 모여 어떻게든 시체를 염하는 모습에도 어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19살, 나는 그 날에 내 눈물이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변기통을 붙들고 머리를 박았다.

우우욱, 케욱. 켁.

저녁으로 먹었던 편의점 도시락 속 어설픈 소스의 시큼한 맛이 침과 섞여 역겨운 잔향이 입 안을 맴돌지만 이 속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타쿠야.

그를 떠올리자 눈가가 촉촉하게 달아올랐다.



내 몸 깊숙한 곳에 고여 있는 호수가 바다처럼 일렁였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아니구나.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젊은 여자가 목 놓아 우는 소리였다. 아침 10시, 답지 않게 늦잠이다.


이게 뭐야. 왜 그런 거야, 오빠, 일어나-


창밖에서 울리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해지고, 곧 여러 사람의 구둣발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옆방의 고시생 방 앞에는 교복을 입은 앳된 소녀가 쓰러져 통곡하고 있었다.

그녀가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반찬통이 보니, 고시생을 뒷바라지 하던 본가의 동생인가보다.

그날이었을까.

커다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날에 목을 매었다고 나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했다.

밖에서 실성한 듯 왜 그랬냐고 웅얼거리는 소녀에게 묻고 싶다.

정말 왜 그런지 몰라서 묻느냐고.


아마 그는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돈 버는 일 없이 오로지 모든 시간을 사법고시 준비에 올 인했다.


공부도 잘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미래는 밝은 내일인 것 같았고,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빛나는 그곳으로 갈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미의 유충처럼 이 어두운 고시원에서 견뎌내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절망한 이유.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라며 품속에 고이 간직하던 미래를 막상 꺼내고 마주본 순간, 더 이상 빛나지 않음을 깨달아서.

찬란한 내일만을 그리며 살던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의무적인 손길로 그가 내민 지폐 세장을 받았다.


“저기요”

“네”

“내 이름 기억나요?”

“네, 기억나요. 타쿠야씨”

“차갑네요. 왜 그쪽 이름은 안 알려줘요?”


나는 내 가슴께 붙은 명찰을 흘낏 훑어보았다.


“저는 항상 명찰을 차고 있어요.”

“흐응, 그래요. 뭐 그게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타쿠야는 그날처럼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뭐해요?”

“알바합니다.”

“남자친구 없나봐요. 에이, 그럼 가족이라도 같이 보내지 그렇게 재미없게 보내요? 그것도 싫으면.”


그럼 나는 어때요? 나도 혼자인데.

나랑 그날 데이트 할래요?


이 남자는 나에게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개구리의 터져버린 상처를 헤적여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아니요”

“나는 그쪽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틀렸나봐요”

“네.”


나는 나에게 가장 길고 커다란 바늘을 건네어 삼켰다.

가득 차버린 속안으로, 다른 바늘들을 헤치며 한가운데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박혔다.


깊숙이 가라앉아있던 말을 헤집어 그중 무엇이 그에게 쓰라린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신중한 마음으로 골랐다.

그리하여 꺼내는 말들은 내 속을 한가득 채우는 바늘들 중 가장 날카롭고 아픈 바늘들이었다.



저는 천애고아입니다.

남자친구는커녕 이 하늘아래, 가족조차 없어요.

나는 누군가를 만날만한 돈도 시간도 없습니다. 저는 가난하니까요.

얼마나 가난하냐고요? 봐요. 이 머리. 당신이 그렇게 지적해대던 이 머리.

나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어요. 이 몰골이 얼마나 웃긴지도 알죠. 그렇지만 난 내가 스스로 잘라야해요.

왜? 가난하니까!

내가 지금 당장 병에 걸린다면 부디 이 몸이 병을 이겨내길 바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못한다면, 할머니처럼 속으로 피를 삼키면서 죽어가야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내가 얼마나 진창으로 살아가는지!

관심도 없지.그저, 그냥 찔러나 보는 거지.

이 거지같은 계집애가 오늘은 어떤 몰골을 하고 나올까! 어떤 삶을 살면 저렇게 살까!


나는 그래서 당신이 여길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녀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쉼 없이, 소매로 닦아냈다.

당신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을 보면, 내 밑바닥이 보여.


이 모든 말을 삼킨다.


나는 그의 검고 형형한 눈을 마주 보았다.

눈 아래에서 뜨거운 열이 올라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지만, 나는 기어코 감지 않았다


“저는, 타쿠야. 당신이 싫어요”


눈물 한 방울이 개구리의 단말마가 되어 굴러 떨어졌다.

귓가에 소녀의 비명 같은 울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모든 사람이 바라볼 정도로 엉엉- 큰소리로 울어대며 걸어갔다.


나도 살고 싶어.

남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내일도 보고 싶어.

촌스러운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거리 곳곳을 누비고 싶어.

낡고 빛바랜 청바지가 아닌 짧고 예쁜 치마도 입고,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를 내며 힘차게 걸어가고 싶어.

엄마한테 안기고 싶어.

아플 때면 안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손가락에는 연인이 주는 반지를 끼고 싶어.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

그게 타쿠야라는건 싫어.


아니.

타쿠야였으면 좋겠어.


내 인생은 왜 항상 밑바닥 진창이야.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좋아하는 사람 하나 바라보지도 못해?

뭘 하겠다고 한것도 없잖아. 그냥 보기만 한다잖아.

내 입으로 그 사람한테 싫다고 거절해야할만큼 개 같은 인생아.

일어나지도 않을 일마저 깨부숴야 그 속이 시원하니?

다들 이렇게 아프게 사는 거니?



다시 아침은 밝는다.

어젯밤 풍성하게 내린 눈은 길거리뿐만 아니라 가느다란 전깃줄 위에도 내려 앉아있다.

길거리는 밝은 대낮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통행으로 복작이고 있었다.


편의점을 향해 가는 길에 나는 내가 미쳐있음을 실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라곤 검은 머리통뿐인데, 그 희미한 형체만으로도 걸어가는 그 행인이 타쿠야라는 것을 확신했다.

모두가 흑백이 되고 그 하나만 빛나는 것 같았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턱 바로 아래까지, 숨이 차오른다.


발작하는 심장과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피맛, 숨 한번 쉴 때마다 쥐어짜는 것 같아도 흉통에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타쿠야가 서 있던 그 자리에 도착하고서야 뜀박질을 멈췄다.

나는 지친 걸음걸이로 인도의 난간에 주저앉았다.


없어, 그는 갔어. 사라지고 말았어. 울지 말자.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야.


그렇게 나는 침몰했다.



**


나는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의 이질적인 시선은, 세상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을 때에도 상처가 나지 않는 완충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릴 적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엄격하고 무뚝뚝한 아버지.

순종적인 모습으로 그런 아버지를 따르는 어머니.

나의 양손을 잡고 있는 어린 동생들.

그들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언젠가 내가 장남이라는 이름아래 지치는 그 날에 그들을 미워하게 되리라고.

이 어린 손들을 매정하게 내치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갈 것이라는 상상은 (그러나 곧 현실이 될 상상이기에 예지라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했다.) 상처가 겹겹이 쌓인 심장위에 소금처럼 뿌려졌다.


그래서 나는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추레했다.

옷이나 물건도 그랬고, 그 얼굴과 표정도 세월에 닳고 닳은 낡은 석상을 떠올리게 했다.

비가 얼굴을 얼룩지게 만들어도 가만히 감내하고, 날아오는 돌멩이도 피하는 요령이 없이 이리저리 깨지고 깎인 모양새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갓 세상위로 떨어져 이리저리 부딪히고 달려가는 20대의 청춘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익숙해서 더 이상 아무런 자극이 되질 못하는 무력한 노인을 닮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소녀처럼 보이는 날이 있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거리를 헤매는 청춘들처럼 빛이 나는 한때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저 낯선 이방인일 뿐인 나를 볼 때.

이름도 모르는 남자인 나를 볼 때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아주 작은 별이 되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힘도 없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분명히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기보다는 처량해보였다. 나에게 그녀는 오직 어설픈 동정심을 자극하는 불편한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거친 풍랑처럼 제멋대로 파도치고 뒤집히는 변덕쟁이라는 것을 배웠다.

손질 한번 안한 것처럼 덥수룩하게 자라난 머리였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여자였노라, 너희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외치는 꽃처럼 아름다운 청춘의 소녀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짧아진 머리를 보았다.

목덜미에서 제멋대로 잘려나가서 정돈되지 못한 머리가 따가웠는지 목덜미는 붉은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거친 삶에 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했던가.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어 했던 여자라는 이름을.


“그럴 거면 머리는 왜 잘랐어요?”


잔인한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눈에서, 그동안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의 마지막 흔적을 보았다.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

코끝에 소독제 냄새가 맴돌았다.


“정신 차렸어요?”


눈을 뜬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은 병원비. 아르바이트.

그 다음에서야 몰아치는 감정에 이성을 잃었던 나에 대한 분노였다.


포기했잖아. 네가 잘랐잖아. 아플 만큼 아프고도 맨발로 가시밭으로 뛰어드는 미련한 계집애야.거길 왜 뛰어가니. 멍청한 것, 아둔한 것!


머리맡에서 나를 바라보는 타쿠야가 너무 아팠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통속적인 표현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의 하얀 빛과 타쿠야의 그림자와 살구빛 얼굴이 하나의 얼룩이 되어 뭉개졌다.


“어, 어떻게, 어떻게 나를 본 거에요”


아주 오래전에 잊혀졌던, 살결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가던 길이었어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나의 손톱을 매만졌다. 굴곡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왜 거절했어요? 절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는 더듬거리고 느리지만, 의미만은 또렷했다.


당신은 내가 꿈꾸던 남자에요. 소위 말하는 이상형이죠.

나는 현실에 파묻힌 여자에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내가 부유한 자들의 삶을 상상해보듯, 그들이 상상하는 가난일 뿐이죠.가난의 로망.

나는 당신의 상상보다 더 속물적이고 자본주의에 목메는 가난한 돈의 노예에요.

내가 아는 것이라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외의 것을 포기해야 해요.

비참하지만 내가 배운 건 이게 다에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이렇게 커다랗게 우리 사이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좋다고 할까요?

나는 지금 딛고 있는 땅을 보는 것만 해도 숨이 차는데, 타쿠야 당신과 함께 한다면 저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뒷모습만 보다가 제자리에 멈춰설거에요.

당신과 내가 이어진다는 것,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에요.


타쿠야는 그 고백에 침묵했다. 나는 물었다.


“그러는 타쿠야, 당신은 왜 나에게 묻나요? 나와 당신은 서로 모르는 사람일 텐데. 아는 게 무어라고 나에게 연연하나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흔들렸으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그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달싹였으나, 결국 허공에 흩어져 한줌의 한숨이 되고 말았다.



타쿠야는 말없이 나를 돌려 앉히고 탁자위에 놓인 가위를 들었다.

나의 목에는 그의 스카프가 널찍하게 둘러져 있다.

길고 아름다운 그의 손에 어울리지 않은 아기자기한 분홍색 완구용 가위.

나는 살포시 눈을 감자,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가끔 목덜미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응급실과 우리를 갈라놓는 커튼은 고요한 공간이 되었고, 사각-사각- 가위소리는 우리 사이에 속삭이는 어떠한 말보다도 은밀하고 달콤한 밀어가 되었다.




그들이 응급실을 나왔을 때 사위는 어두워지고 눈은 한참 쌓이고 있었다.

밟으면 발목까지 올라올 만큼, 그렇게 소복이 쌓인 눈길 위로 두 개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이 날 아침처럼 하얗고 포근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그들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손끝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지만 타쿠야도, 그녀도 놓을 생각이 없다.

눈 내리는 밤.


그들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이 걸어간 이 길은 하얀 눈 위에 남아있다.

-完-

이룰 수 없던 어린 시절. 현실에 파묻힌 여자

천진하고 잔인한 소년. 허공을 떠도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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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독방에서댓단정이야.. 글잡으로왔구나ㅠㅠ 글잡에글써줘서고맙고신알신할께!♡
9년 전
암울해
엩ㅋㅋㅋ신알신 해줘서 고마워요!
9년 전
독자2
내가 긴글 싫어하는데 다읽었당 ㅎ
9년 전
암울해
에헤헤 나도 이렇게 긴 글은 처음 써봐 읽느라 수고했어!
9년 전
독자3
이거 비지엠뭐야? 글분위기랑 진짜 잘어울린다ㅠㅜ
9년 전
암울해
음...일본어라서 잘 기억은안나는데 나중에 집에가서 알려줄게 ㅋㅋ
9년 전
암울해
Toshiaki Matsumoto(마츠모토 토시아키松本俊明) 06. 消えた約束 (사라진 약속)
9년 전
독자4
고마워!쓰니야ㅠㅜ신알신하고 갈께~
9년 전
독자5
한 편의 문학작품 같아요. 감사합니다.
9년 전
암울해
문학작품이라고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읽어주고 댓글도 달아줘서 감사하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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