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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Blood Meridian) 

(BGM: 장세용 -이상기억)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것. 

 

 

 

폐허. 빛도, 어둠도 아닌 어떤 애매한 지점이다. 의식과 현실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으레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곳. 장소가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장소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차원이 더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낯설고 이질적이기만 하다. 손에 잡히는 부스스한 것들은, 만약 여기가 지구라면, 분명 모래일 것이다. 까끌까끌하지만 시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드럽기도 하다. 그 안에 묻혀 있는 손을 결코 빼고 싶지 않다. 

 

 

 

종인은 모래로 추정되는 입자들 속에 파묻힌 손을 움직여 그 입자들을 한 움큼 쥐어보았다. 유일하게, 감각에 익은 것이었다. 그 익숙한 감각을 시작으로 조금씩,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고 생각이 가능해진다. 종인은 우선 이곳에 사람이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도, 장소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 사람만 있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이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조차 하지 못한 채. 

 

 

 

사람. 눈코입이 있고, 머리카락이 있고, 사지가 있는 사람. 거기다가 한국말이나, 못 해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왕 둘만 존재할 거라면 여자로.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인류를 번식시키려면 여자가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도 문득 종인은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에 인류의 번식을 걱정하다니. 상황 파악도 참 잘 된다. 

 

 

 

불현듯, 필요한 것이 생각난다. 필요한 것.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에다가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필요하다'는 것뿐이었다.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면 여기는 후생일까. 그렇다면 나의 전생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 이곳에 환생했을까. 만약 내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나는 움직일 수 있을까. 종인은 슬쩍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분명 움직이고 있는 다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 다리가 아니라 제가 조종하고 있는 로봇의 다리마냥 어떠한 감각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어찌됐든 종인은 일어섰다. 두 다리로 모래인지 뭔지 모를 입자들을 밟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목을 좌우로 슥슥 돌려보았다. 돌아가는 목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담는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여전히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 공허함도 언젠가 한 번은 겪어본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 전생에 꿈에서 겪어봤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상상해 불과했는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종인은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세계라면 무엇이든 있을 것이고, 또다시 이곳을 헤쳐나가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여전히 제 신체에 붙어 있는 성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나 분명 귀는 제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머리에 들어 있다. 

 

 

 

종인은 지금까지 느꼈던 바를 모두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우선, 생각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세 번째, 비록 불완전하나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 세 가지를 통하여 종인은 자신이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사람이면 된다. 종인은 자신이 적어도 그 조건에는 합당하다고 믿어 보기로 한다. 

 

 

 

"나, 는."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인 한국어(라고 생각되는)로 문장을. 소리내어 보기로 한다. 

 

 

 

"종, 인." 

 

 

 

자신의 이름일 것이었다. 나는 종인. 저것만 말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그래, 그거면 된다. 충분하다. 어차피 이 곳에서 그 이상의 언어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경…." 

 

 

 

그런데, 자신의 입이 말하고 싶어하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종인은 눈을 감고 의식을 떨어뜨리려 애쓰면서 자신의 입이 할 말을 하도록 모든 것을 내어 맡긴다. 

 

 

 

"경…수." 

 

 

 

경수. 종인은 자신의 입이 방금 내뱉은 그 단어를 곱씹어본다. 경수, 경수, 경수. 과연 그 단어는 뭘까. 무슨 말일까. 대체 무엇이길래 뇌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입이 기억하려 하고 있을까. 

 

 

 

"경수." 

 

 

 

경수. 의미도 모를 그 단어가 자꾸만 입에서 빠져나온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종인은 제 입 하나도 통제할 수 없을 상황이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의식마저도 흐려지는 기분이 든다. 경수. 그 단어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경수…."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처음에 느껴지던 그 모래와 같은 입자들이 또다시 손에 잡힌다. 손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그 알갱이가 아까 전보다 훨씬 시리다. 세상은 다시금 빛도, 어둠도 아닌 어느 애매한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종인은 그 흐린 경계 속에서, 

 

 

 

"…경, 수…." 

 

 

 

저 혼자서 색깔을 가지고 빛나는 누군가를 보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독자1
헐 ㅠㅠㅠㅠㅠㅠㅠ신알신 하고 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분위기 좋아여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됴뤠이린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9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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