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의 하루는 매번 느긋하게 시작하던 반면,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이리저리 총총거리기 일쑤였다. 변경현, 안 일어나? 입술에 치약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칫솔질을 하며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왼쪽 발을 들어 경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백현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똑같이 인상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눈꺼풀을 든다. 폭력의 원천을 확인하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징징징. 나는, 다시 경현이의 엉덩이를 퍽 소리 나도록 또 한 번 찬다. "아이씨 진짜!" "빨리 일어나, 늦겠다." "으으... 늦어도 상관 없는데-" "죽는다, 셋 셀 동안 일어나서 세수해." 셋,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엉덩이를 문지르던 경현이 어기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둘, 들이치는 햇빛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경현의 방을 나왔다. 하나. 기특하네. 입을 헹구고 나와 식탁에 밥공기를 올려놓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변경현! 국 먹어? "아니이."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콩나물국인데." "그래도." "빨리 하고 나오는 길에 변백현도 깨워놔." "아빠는 내가 깨우면 안일어나잖아." 삼촌이 깨워야지. 경현이 여전히 눈을 반밖에 뜨지 않은 채 셔츠 카라에 넥타이를 끼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어 올리고는 반박하지 못하고 수긍하며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야- 너 그냥 계란후라이에 김 싸먹어- "언제는 안그랬던 것처럼 말하지 마, 삼촌." "불만이면 네가 반찬 만들어놓던가." "어른이 진짜 치사하게." 노른자가 덜 익은 계란후라이를 김이 슬슬 올라오는 밥 위에 올리며 타박했다. 옆머리를 누르며 느릿느릿 기어나온 경현이 식탁 의자를 빼 철퍽 주저앉았다. 눈 떠, 임마. 아침부터 바삐 움직인 몸을 쉬게 하기 위해 경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노른자를 비비는 경현의 숟가락질에 맞춰 젓가락으로 김을 한 장씩 꺼내어 수저 위에 올려주면, 경현은 자연스럽게 한 입에 그것을 집어삼킨다. 먹기도 잘 먹는다. 자식, 아빠보다 더 크겠다. "식성도 어째 니네 아빠랑 똑같냐." "아빠 새끼니까." "그래도 니 엄마 안닮아서 다행이다." "내 엄마가 대체 어떤 여자였길래 삼촌이 그렇게 싫어해?" "사실 나도 몰라. 얼굴도 모르는 여자야." 식탁에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김을 집어 올리며 흘린 말에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삼촌, 모르는 사람 그렇게 욕하면 지옥간다. 입 안에 밥을 한가득 문 채 말하길래 경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확 쓸어내리며 잔소리했다. 먹던 거 다 삼키고 말해, 드럽게. 양치를 하러 경현이 화장실로 사라지고, 경현이 깔끔하게 비운 식기를 개수대에 던지듯 처박은 뒤 백현이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는 침실로 향했다. 행거에 걸려있던 남색 코트를 빼내 팔을 끼우며 발로는 백현의 이불을 확 걷어냈다. "변백현, 나 경현이 데려다주고 올게.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설거지해놔." "으응." 경현의 아침 버릇과 똑같이 인상을 슬쩍 구기며 앓는 소리를 낸 백현이 이불을 도로 끌어올리며 웅얼거렸다. 잘갔다와, 자기야.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을 빼 주머니에 넣고는 허리를 숙여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백현이 애처럼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던 중 현관에서 경현이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 신발을 신으며 크게 나를 불렀다. 삼촌! 연애질은 나 학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하던가! "뽀뽀도 안 봐주냐, 야박한 놈아." "늦겠다고 궁뎅이 걷어차서 깨운 사람이 누구더라." "야, 너 내가 목도리 하고 다니랬지," "갬기걸린대니깨-" "뒤질라고 이게." 경현의 차림새를 보고 방에서 목도리를 꺼내오며 핀잔을 주는 내 뒷말을 얄밉게 따라한 경현의 목을 내리치며 웃었다. 신발장에 올려두었던 차키를 챙겨 문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변백현! 갔다와서 너 안 일어나있으면 밥 없다!" - 학교로 급하게 차를 몰며 쉴 새 없이 아이에게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너 또 교복 풀고 다니지 마라, 매점 빵 말고 급식 먹어라, 수업시간에 잠 좀 그만 자라,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는 후문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던 경현이 한 말에 돌아오는 내내 혼자 피실피실 웃었다. 삼촌, 삼촌 진짜 엄마같다. 물론 경현은 잔소리를 폭격기처럼 퍼붓던 날 향한 비꼼이었겠지만 어떤 의미로던 경현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신발장 앞까지 나와 기다리던 말간 얼굴이 히죽 웃었다. "정확해, 도경수!" "뭐가아." "내가 여기 서서 딱 30을 세니까 네가 들어왔어." "아침부터 너도 참 할 거 없다." "그래도 내가 마중나와있으니까 좋으면서." "그건 그러네." 백현이 신발을 벗고 들어오던 내 어깨에 팔을 척 둘렀다. 무거운데, 그냥, 빼고싶진 않다. 자기야, 니가 시킨 대로 세수하고 밥 먹고 설거지도 다 해놨다, 백현이 웃으며 뿌듯하다는 듯 말하고 나는 어깨에 얹혀있던 그의 팔을 아쉽게 들어 내리며 웃었다. 그럼 이제 내려가서 카페 문 여세요, 변사장님. "아, 머리 세우지 말고." "왜- 난 세워야 잘생겼단 말이야." "그래서 안돼." "질투하는구만. 난 도경수밖에 없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안돼, 다른 여자들은 아니니까. 그리고 경현이는 머리 세우면 잘생겼는데, 너는 머리 세우면 늙어보여." "아무리 늙어보여도 고등학생 애가 있는 애 아빠로는 안보일걸." "자랑이냐, 그게." 키득거리며 머리를 매만지는 백현을 보고 작게 투덜거렸다. 소파에 앉았던 몸을 풀썩 기울여 눕자 백현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도경수." "왜." "햇빛 좋고," "어." "경현이도 없는데 경현이 동생이나 만들어줄까?" "또 나댄다, 백현아. 경수는 임신을 못해요." 백현이 크게 웃었다. 아하하, 하고 온 집안에 깨끗한 음성이 화악 퍼진다. 시원하다. 겨울인데. "도경수 삼인칭 화법 쓰네, 귀여워라." 팔로 눈을 가린 채 누워있던 내 볼을 톡톡 두드린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팔도 함께 주욱 잡아올렸다. 일어나세요, 도사장님, 카페 공동명의인 거 잊진 않으셨겠죠. 백현이 장난스레 존칭을 쓰며 일으키길래 나는 그냥 속절없이 딸려 올라가며 웃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옷이나 입으세요. - 카페의 유리 문을 열자마자 한기가 느껴졌다. 으으, 어깨를 떨며 찬 공기에 몸서리치고 잰 걸음으로 움직여 가장 먼저 히터의 전원을 올렸다. 코트를 벗어 카페 안쪽에 박아둔 못에 걸어올리고는 곧바로 행주에 물을 적셔 모든 테이블을 닦았다. 백현은 역시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와 내 모든 행동을 눈으로 길게 좇았다. 보고있진 않지만, 예상은 간다. 어디서 저런 알찬 게 굴러왔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두벅두벅 하며 잠깐 멈춰있던 백현의 구둣발 소리가 다시 짧게 이어지다가, 내 것과 색깔만 다른 코트를 벗어 벽에 걸었다. 포스기와 오븐 등 카페 내 전기기구들의 전원을 켜고 선반에서 커피빈을 꺼내 슬슬 볶는 소리. 순식간에 진한 커피향이 카페에 감돌았다. 청소를 대충 마치고 행주를 개수대에 던져둔 다음 의자를 끌어와 백현의 옆에 앉으며 백현을 멀거니 올려보자 그가 눈꼬리가 주욱 내려간 눈을 힐긋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나 일 못하는데." "이런 각도에서 보니까 또 색다르네." "왜, 더 잘생겨보여?" "응. 반하겠다." "이미 반했으면서." "그런가." 평소였으면 얼굴짝 간지럽다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겠지만 백현의 능글스런 반응에 그저 말끝마다 짧은 웃음이 터졌다. 너는 어디서 굴러온 거지, 연신 실소를 터뜨리며 바라만 보았더니 백현이 아예 내 쪽으로 돌아서서는 검지로 코 끝을 톡, 친다. 경수야, 토스트 구워주라. 통식빵을 꺼내 두껍게 썰었다. 구워달라는데, 구워드려야지. 말랑한 빵이 눌리다가 끝내 갈라졌다. 그걸 고대로 팬에 올려 불을 당기고, 가스렌지 앞을 지키고 서있다보니 하품만 늘어지게 나왔다. 밑바닥이 노릇해지도록 기다렸다가 버터와 꿀을 발라 뒤집었다. 백현이 가장 좋아하는, 하지만 카페 내 메뉴에는 없는 것. 자기만 먹고싶다며 메뉴에 올리는 것을 격하게 반대한 그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상당히 애같았구나. 별별 것에 소유욕을 부린다. 한, 이천원만 받아도 잘 팔릴텐데. 백현의 얼굴을 보러 근처 여고에서도 여학생 손님이 종종 찾아와, 백현이 '이거 맛있어요' 라고 한 마디만 해도 줄기차게 팔릴 것이었다. 돈을 걷어차는구나, 네가. "변백현." "응." "네가 보기에," "응." "경현이, 엄마 많이 닮았냐." "글쎄, 아니." "다행이다." 뜬금없이 툭 던져지긴 했지만 은근히 무거운 질문을, 백현은 여전히 탁구공처럼 톡, 하고 받아쳤다. 도로 나에게 날아오는 무거웠던 의문은 백현의 손을 거쳐 무서우리만치 가벼워져있었고, 나는- 나는 여전히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다행이라고 말한 후로는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경현이의 이름은 애초부터 경현이 아니었다. 내가 한창 백현을 쫓아다닐 적에, 아, 쫓아다니진 않았다. 그는 매일 한 곳에 있었으니까, 쫓아다녔다기엔 그를 따라 다녔던 장소가 너무 적다. 어쨌든. 백현은 모든 것이 의외인 사람이었다. 의외로 어린 남자였고, 의외로 부인-이 있었다. 그의 말로는 나를 만나면서 결별했다고 했다. 믿을 수는 없다. 그가 고2때 여자친구와 사고를 쳐 만든 놈이 경현이었다. 백현은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굉장한 책임감을 가지고 애를 낳아 잘 키우자고 했었나보다. 그리고 그를 철썩같이 믿은 여자친구는 어리고 덜 익은 몸에 경현이를 키워 낳았다. 하지만 백현은, 여자친구와, 안맞았다. 지 입으로 그랬다. 난 걔랑 정말 평생 같이 살 자신이 없었어- 라고 했던가. 틀어진 사이를 아이에게 보여봤자 득 될 것 없다 싶었던 둘은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따라 몸도 서로를 떠났다. 백현은 마지막 양심으로 어린 경현을 그가 품기로 했단다. "그럼 애 엄마는 지금 어디있어." "몰라, 집 나간 뒤로 소식 없다. 찾아보려고 노력도 안했어. 예뻤으니까 어딘가에서 돈 많은 남자 하나 물고 모른 척 잘 살겠지." "개새끼였구나, 너." "나름." 백현은 그렇게 몇달동안 아이를 혼자 키우다가, 나를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스스로 그에게 잡혀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백현이 완전히 총각- 총각이 맞긴 했지만-인줄 알았다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날 올려보는 변백현 주니어에 뒤통수를 망치로 쳐맞은 듯 멘탈이 나갔다. 사귄지 넉달만에 그의 집 현관을 밟았는데, 그 길로 백현의 뺨을 거하게 후갈기고 집을 나왔었다. "난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뺨이 얼얼하다, 경수야." 요즘도 오징어 다리짝처럼 가끔씩 씹히는 안줏거리였다, 그 때 얘기는. 그럴 때마다 백현이 실없이 웃으며 던지는 말이었다. 볼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어쨌든 그렇게 집을 나오고, 나는 근 두달간 그와 연락을 일체 하지않았다. 애도 있는 놈을 내가 좋아했다니, 애도 있는 놈을! 혼자 베개를 끌어안고 울분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뭐, 뻔하게도, 실패했다. 나는 정확히 두 달 하고 열흘만에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두드렸다기보단, 마구 걷어찼다. 그리고 울면서 아이의 개명을 요구했다. 어떤 년인지, 그 여자 흔적을 모두 지우라고 하기엔 애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녀와 지었을 이름을 바꿔버리라고. 백현은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의 이름과 백현의 이름을 조합해 새로운 이름을 아이에게 부여했다. 내가 그토록 고생하던 두 달 열흘이 애초부터 없었던 시간처럼, 우린 자연스럽게 다시 붙었다. 모든 것이 내가 그의 집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에 해결된 일이었다. 그 때가 벌써 14년 전이었다. 세살이었던 경현이는 커가면서 제 아빠가 둘이라는 사실에 슬금슬금 충격을 먹기 시작했고 나중 가서는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야 남들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나. 남들 시선 걱정까지 해주다니 기특하면서도 더이상 경수아빠-라는 앳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에 가슴이 저몄다. 그리고 생각해봐, 삼촌이라는 사람이 아빠라는 사람이랑 진득하게 키스하는 거, 남들이 보면 더 욕먹어, 근친이라고. 어린 경현이의 순수한 정신세계를 위해 뒷말은 눌러담았다. 외적인 면으로나 내적인 면으로나 경현은 그의 아버지를 90퍼센트 정도 닮아갔다. 난자를 제공한 여인의 유전자는 그리 빛을 보지 못했던가. 그래도 백현보다는 덩치가 조금 더 크다. 목소리도 조금 더 낮나. "애 엄마가 키가 컸나보지," "응, 나만했어." "그럼 경현이 키 큰 건 엄마 닮았나보다." "나머진 다 나 닮았으니까 괜찮아." 깨끗하게 닦은 접시에 다 구운 토스트를 올려 백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종종 이렇게 아무 감흥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내는 백현이 놀랍다. 생각보다 너무 무정해서. 나는 그래서 안심한다. 온전히 나만을 향해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옹졸한 방법으로 나는 안심한다. 경현이가 세 살 이전의 일을 기억 못해서 다행인가, 나는 백현의 앞에 앉아 작은 나이프로 빵을 자르며 물었다. 다행이지. 백현은 계집애처럼 예쁜 손가락을 테이블에 도르륵 굴리며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지. 그래도 내 덕에 경현이가 엄마의 빈 자리 뭐 그런 게 없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아이를 길러냈으니까. 백현은 그런 나를 인정이라도 하는 듯이 더 이상 말을 아끼며 묵묵히 정갈하게 잘린 토스트를 먹는다. 점심때 즈음 되어서야 손님들이 종종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이력서를 쓰던 취업준비생이 조금씩 시끄러워지는 주변에 이어폰을 꽂았다. 나는 그제서야 카페에 잔잔한 노래를 틀었다. 나와 백현이 매일 밤 머리를 맞대고 고른 노래들을. 점심을 먹고 커피를 즐기러 나온 직장인들, 아니면 커피 심부름을 맡은 말단 신입사원들이 목에 사원증을 달랑거리며 저들끼리 종알거렸다. 백현은 그들을 보며 가끔 하소연했다. 나도 그냥 회사 다녔으면 경현이 키우기 좀 덜 힘들었을까, 하고. "그랬겠지만, 날 못 만났겠지." "그러네. 그럼 회사 안 가길 잘했다." "어차피 가지도 못했을텐데 무얼. 애 딸린 고졸이라는 스펙을 어느 회사가 좋아한대." "네가 좋아해줬잖아, 애 딸린 고졸 변백현을." 이럴 때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괜히 웃으며 카페 바닥을 물걸레로 닦는다. 내가 회사냐, 멍청아.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었어도, 어떤 괴상한 스펙을 달고 있었어도 널 받아주고 좋아해줬을텐데. 이 말은 그냥 꼭꼭 씹어서 목구녕 아래로 넘겨버린다. 변백현 버릇 나빠질라, 하고 스스로 타협하면서. 순식간에 목이 텁텁해진다. 백현아, 나 라떼. 긴 손가락이 말이 끝나는 동시에 새하얀 머그를 꺼내든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았다. 다섯시 쯤 경현이 책도 없으면서 각은 칼같이 잡힌 가방을 둘러메고 카페에 들어왔을 때도 이미 밖은 불그죽죽한 주황빛이었다. 늘 그랬듯 카페 구석 소파 자리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은 경현이 테이블 위로 주욱 뻗었다. 오자마자 삼초온, 나 배고파아, 하며 애같은 소리를 한다. "석식 안먹었어?" "으응." "돈이 썩어나냐, 왜 기껏 돈 냈는데 안 먹어." "맛 없어서. 삼촌 빵이 더 맛있는데." 테이블에 턱을 찍고 엎드린 경현이 립서비스를 할 때마다 나는 거짓부렁인 걸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토스트기에 식빵을 두 장 끼운다. 하여튼 입만 산 것도 아빠 닮았다. "변경현, 오늘 성적표 나왔다며. 가져와." "아 경수 삼촌 진짜 엄마야, 아주." "내가 엄마 노릇 해야지, 누가 해." 경현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든 것도 없는 가방을 괜히 소리내어 뒤적이다가 구깃한 종이를 꺼내들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에 성적표를 올려두고는 손을 엑스자로 교차해 제 가슴팍에 댄다. 보고 때리지 마, 나는 그 말에 또 한숨을 토한다. 등수 더 떨어졌구나. 거기서 더 떨어질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 "넌 어째 이런 쓸데없는 구석까지 아빠를 닮아서 성적이 이 모양이냐." "그럼 나 말고 아빠를 탓해야지," "이미 네 아빠는 수천번도 더 욕했어." "경수야 나 다 들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변백현." "우리 경수 너무하네. 그치 경현아." "토 나와, 우리 경수라니." "삼촌이 토 나올 지경인데 나는 어떻겠어." 경현의 팔뚝을 퍽 소리 나도록 한 대 때리고, 아프다며 징징대는 것에 또 한 번 더 때렸다. 넌 맞아도 싸. 경현은 장난스레 우는 시늉을 하며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고는 영어가 빼곡한 프린트 뭉치를 두 개 꺼내, 한 쪽 보고 다른 쪽에 옮겨적는다. 참 나. 부모-앞에서 저리도 뻔뻔하게 숙제를 베끼다니. 달려가서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그래도 베껴서라도 해가는 게 어디인가 싶어서. 백현이라면 아마 헤벌쭉한 얼굴로 경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넓적한 채소를 물에 씻어 탁탁 털어내고, 짙은 갈색으로 색을 바꾼 식빵 사이에 끼운다. 어차피 다 먹었다며 돌아온 접시에는 고대로 채소들만 남아 돌아올테지만, 나는 매번 이런 식으로라도 일분 일초 새로이 커가는 청소년에게 채식을 강요한다. 슬라이스 치즈 한 장. 햄 한 장. 케첩을 뿌리려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뿌렸다가는 경현이 또 빵을 한 입 베어물고나서 입속으로 어떤 욕을 함께 씹어삼키며 내려놓고는 다시는 빵을 입에 대지 않을테니까. 백현이는 케첩 잘 먹는데. 그건 엄마를 닮았나. "이거 경현이 성적표?" 진한 초록색 바탕에 흰색으로 카페 로고가 찍혀있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백현이 느긋하게 걸어나왔다. 픽업대 위로 아무렇게나 놓인 종잇장을 집어올린 그가 열거된 숫자들을 말없이 읽어내려가다가, 이따금씩 픽 픽 웃는다. 애 성적이 재밌냐, 그딴 식으로 받아왔는데. "이딴 식으로 받아오니까 재밌지. 딱 19년 전 나인데, 완전?" "알면 후회 좀 해, 그때 공부 좀 할걸- 하고." "충분히 하고있어." "그런 얼굴이 아닌데." "들켰네." 나는 또 웃는다. 역시 경수,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다 알고 대단해. 경현이의 성적표를 반의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백현이 덩달아 웃는다. 착하게 내려앉는 눈꼬리. 눈꼬리와 입꼬리에 인력이 작용하듯 주욱 내려가고, 주욱 올라간다. 모습을 드러내는 정갈한 치아들까지. "안 멋진 구석이 없네, 변백현." "이제 알았어?" "매일 새삼스럽게 느끼는 중이야." "오늘은 좀 늦게 알았나보네." "그러게. 매일 아침에 너 자는 얼굴 보면 바로 알아챘는데." 거기, 사장님들, 애정행각은 집에서 하세요! 경현이 손가락을 오무리며 소리친다. 오글거려서 펜을 못잡겠네! 하고. 그에 나와 백현은 동시에 작은 웃음소리를 터뜨린다. 접시에 올린 토스트를 백현의 손에 얹어주며 엉덩이를 토닥인다. 이거, 아들한테 배달. "경수야. 우리 카페 확장공사 해야할까봐. 좁으니까 경현이가 우리 말하는 것도 다 듣네." "돈이나 벌고 그런 말 해, 꿈도 커라." "넌 맨날 그렇게 현실적이지." 그래서 좋아, 나는 매번 꿈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얼마나 잘 어울려. 천생연분인가? 아직도 어린애같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여 어린애같은 말들을 잇는다. 그와 똑 닮은 다른 어린애같은 입술은 저기 구석에서 빵가루를 묻힌 채 우물거리는 중이다. 똑 닮은 고운 손가락이, 이젠 점점 마디가 굵어지긴 하는 중이지만, 늘 그랬듯 빵 사이에서 양배추를 주욱 빼낸다. 에라이, 새끼. 좀 먹으라니까. "삼촌, 나 양배추 안먹는다니까." "양배추 갈아서 네 입 안에 부어버리기 전에 입 닫고 좀 먹어." "싫어싫어싫어!" "너 그거 안먹으면 앞으로 토스트 안구워준다." "와 진짜 다 큰 어른이 참 다양한 방법으로 치사하네." "억울하면 다 먹던가." 경현이는 입술만 댓발 내밀고 다시 손가락 끝으로 숨이 죽어 추욱 늘어진 양배추를 집어든다. 야 무슨 걸레짝 집냐. 나를 한번 팽 노려보고, 싫은 티 팍팍 내며 양배추를 입 안으로 우겨넣는다. 그래도 이젠 헛구역질은 안하네. 참 소소한 구석에서 기특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애 키우는 재미는 아직 단물 빠지지 않았나보다. 경현이는 순식간에 양배추 없는 토스트를 해치우고 접시를 반납했다. "아빠." 픽업대에 허리를 숙여 기대선 경현이가 나지막히 백현을 부른다. 나는 괜히 날 부르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고개를 돌린다. 왜, 아들. 백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우유팩을 뜯으며 답한다. 그게 조금은, 얄밉다. "다음주에 학부모 상담이라는데, 올 수 있어?" "우리 아들이 오라면 아빠는 카페 문 닫고서라도 가야지." "한참 걸릴텐데." "왜, 네가 나 몰래 사고 친 전적이 많은가보지?" 그런 게 아니고오- 경현이 눈썹을 긁으며 머쓱하게 받아친다. 우리 담임이 말이 좀 많단 말이야. "네 아빠도 만만찮게 말 많으니까 둘이 잘 맞을 걸." "그럼 두 배로 오래 걸리겠네. 난 싫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삼촌이 교문에서 기다릴테니까, 담임이랑 수다 떠는 아빠는 버리고 얼른 기어나와." "오랜만에 삼촌이랑 데이트 하는 거야, 그럼?" "이쁜 말 골라 하네. 그럴까?" "어!" 경현이 제 아빠 닮아 맑게 웃는다. 옆에서 끼어들지 않고 말 없이 듣던 백현도 덩달아 김 새듯 웃는다. 이게 어린 변백현한테로 갈아타려고 그러네. 얼굴이 똑같으니까 나이 한 살이라도 더 어린 게 좋다 이거지? 백현이 접시를 닦는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놀린다. 경현이 상상만 해도 싫다며 몸서리를 치는 게 눈에 선하다. 새끼야, 나도 싫어, 변백현 닮았어도 변백현이 아니잖아 너는. "그래도 내가 아빠보단 잘생겼지." "웃기시네, 너 그 잘생긴 얼굴 내가 물려준 거야, 인마." "그렇게 잘생기신 아빠랑 똑같이 생긴 데다 난 키도 더 크잖아! 다리도 더 길어!" "나같은 얼굴은 아담해야 어울려!" "둘 다 시끄러!" "삼초온!" "뭐, 왜 뭐." "내가 더 낫지?!" "네 아빠가 내 눈엔 최고지. 내 보기엔 변백현이 원빈도, 강동원도 다 썰어먹는단다, 얘야." "너무 주관적이야, 삼촌은. 십사년을 같이 살았다면서 콩깍지는 언제 뺄 건데?" "평생 빠질 예정 없다, 렌즈삽입수술 같은 거야." 백현이 내 말에 입꼬리 끝으로 승리의 미소를 한가득 싣는다. 귀에 걸리겠다, 아주. 너 입 찢어지면 너랑 안 만나줄 건데. 조커같고, 징그럽잖아. 경현이는 연신 투덜대며 커피머신들이 줄을 선 카페 안으로 쏙 들어온다. 제가 패배한 것이 맘에 안 들고 자존심 상하는지, 입술을 비죽 내밀고 기계만 툭툭 건드리며 화제를 돌린다. 아빠, 나 커피 만드는 거 언제 가르쳐줄거야? 하고. "안타깝지만, 너 졸업하고, 대학 붙으면." "대학 붙으면 취업 할 준비 해야지, 왜 여기서 커피를 배워 그럼." "그럼 배우고싶으면 지금 학교 때려치던가. 고졸 아빠에 중졸 아들이면, 변씨 집안 학력칸 정말 파리 날리겠다." "자퇴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자식아. 영어 숙제 그만 베끼고. 너 그렇게 해서 어디, 네 이름이나 영어로 제대로 쓰겠어?" "쓸 줄 알거든, B-Y-U-N-K-Y-U..." "알았네요, 그만해. 아빠는 영어 몰라서 알파벳만 들어도 토가 쏠리니까." "아빠도 나랑 수능 공부해서 대학 같이 가자, 그럼!" "낭만적인 소리 한다. 등록금은 누가 벌어?" "아 삼촌 또 찬물 끼얹어-" "이번엔 삼촌이 맞는 말 했어." "맞아. 내가 맞는 말 했어." "이씨.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푸흑, 나는 참지 못하고 비웃어버린다. 아- 변경현 자존심에 쩌억 하고 금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경현이는 괜히 내 등어리를 퍽 치고 나가버린다. 변백현은 늘상 그렇듯 나와 경현이가 투닥대는 걸 마치, 어린 애 싸움 보듯 흐뭇한 얼굴로 관람만 한다. 좀 말리지, 애 버릇 이상하게 드는데. 한가로운 오후 시간대가 지나고, 또 저녁때 쯤 되면 손님들이 복작복작해지기 시작한다. 거의 오픈 직후부터 창가에 눌러앉아있던 취업준비생이 노트북을 접어 가방에 넣고, 한숨과 함께 인사하며 나간다. 가만 보면 쟤도 참 잘생기고 인물 좋은데, 왜 아무도 안데려갈까. 우리 형편 좀 나아지면 쟤 우리 카페에 취직시켜줄까? 백현이 유리문을 밀어 여는 취업준비생 손님을 보고 소근댄다. 그건, 고려해볼 만 하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러면 백현이도 배실배실 웃는다. 카운터에는 경현이가 바쁘게 주문서들을 받는다. 돈을 받고, 지폐를 세어 건네주고, 영수증을 떼어 주고, 마지막으로 깨끗하고 친절하게 웃어준다. "내 새끼 착하게 일도 잘 해요." "아 궁디 때리지 마아." "왜, 쁘띠첼같고 좋은데." "삼촌 진짜 변태야." "그래도 너보단 변백현 궁디가 낫다." "어련하시겠어." 주문이나 받으세요, 사장님들아. 줄지어 나열된 메뉴 이름 옆에 간단하게 체크되어있는 주문서를 내 손에 착, 올려놓은 경현이가 앞치마를 벗는다. 넌 커피 만드는 것도 아니면서 앞치마는 왜 입고있었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눌러담는다. 또 삐칠 거 뻔하니까. 카운터 밖으로 나가고, 구석에 놓았던 가방을 다시 챙겨서, 다시 픽업대 앞으로 온다. 나는 경현이가 빠져나간 카운터를 보느라 바쁜데, 자꾸만 자기 학원 간다며 빨리 인사해 달라고 한다. "아 아빠 삼촌, 나 학원 간다니까." "잘 갔다 오라니까! 아, 네, 카페 모카, 시나몬 모카 하나..." "빨리 인사뽀뽀해줘, 삼초온." "너 나이를 생각해. 한 달 뒤에 18살 되는 사내자식이 뭔 뽀뽀야. 징그럽지도 않아?" "삼촌 완전 변했어." "원래 남자 마음은 갈대야." "아빠라도 해줘! 아빠!" "내 새끼 잘갔다와," 블렌디드 주문 때문에 얼음을 가느라 바쁜 백현이는 손가락을 입술에 찍어 경현이에게로 날린다. 경현이는 투덜대면서 그거라도 받고, 내 대신 나한테로 손키스를 보내준다. 삼촌, 빠빠이! 하면서. 내가좋아할 줄 알았다면, 정확히 봤네. 나는 매번 경현이 애교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딸랑. 경현이가 나가면서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린다. 버스를 잡으려는 뜀박질에 맞춰 가방이 등어리에서 흔들리고. 골목 밖으로 사라진다. "주문하신 마키야또, 요거트 블렌디드 나왔습니다-" 청량하게 터지는 음성. 트레이에 올린 유리잔과 머그잔을 손님에게 건네며 감사합니다, 하고 마무리짓는 것까지. 한산해진 카운터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나는 변백현이 이 일 아니었으면 뭘 하고 있으려나 생각한다.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직장인들이 주르르 빠져나가고, 과제를 하는 대학생,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저들끼리 까르르 웃는 여고생들, 커플들만이 남는다. 그래도 개인 카페에 이 정도 손님이면 꽤 성공하지 않았어? 하고 물으며 백현이가 내 어깨에 턱을 올려놓는다. 슬그머니 허리께를 둘러오는 손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성공했지. "경수야." "으응." "야경 좋고," "응." "경현이도 없는데 경현이 동생이나 만들어줄까?" 귓가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그게 간지러워 목을 틀어 피하면, 백현이는 찰거머리처럼 내 뒷목에 코를 묻고 배시시 웃는다. "응? 만들어줄까, 여보? 만들어주자," "여기서 만들어 줄 거 아니잖아." "오늘 좀 일찍 닫지, 뭐." "제멋대로야, 아주." "내가 사장인데 어쩔거야." 보채기는.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대신, 커피머신들의 전원을 내린다. 백현이는 내 행동을 눈으로 길게 쫓다가, 말갛게 웃으며 앞치마를 벗는다. 카운터를 빠져나가고, 손님들의 테이블을 일일히 찾아가며, 양해를 구하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문 앞까지 배웅해주기까지. 그가 수거해온 잔들을 헹구고, 닦아서 거꾸로 뒤집어 찬장에 올려두면, 백현이는 이미 벽에 걸었던 코트 두 벌을 빼내어 남색인 것을 나에게 건넨다. 그런 변백현이 귀여워 소리내어 웃으면, 변백현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갉작대다가, 슬그머니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당기고, 내 앞머리를 살짝 매만지고, 고개를 숙여 코 끝에 입맞추면, 나는 턱을 들어 먼저 그의 아랫입술을 문다. 백현이는 다시, 입었던 코트에서 팔을 빼낸다. 카페 안의 불을 내리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면, 완벽히 우리만의 공간이 형성된다. 커피 향 가득한 곳에서, 진한 커피 색 머리칼을 흐드리며, 오늘도 가장 완벽한 우리만의 엔딩을 장식한다. 경현이는, 잠시 잊기로 한다. *** 마무리가 굉장히 요상하지만ㅋㅋㅋㅋㅋ큐ㅠ 질질끌고싶지않았어요@_@ 메모장에 있던 단편중에서 그나마 제일 긴 조각인뎈ㅋㅋㅋㅋㅋㅋㅋ헼ㅋㅋㅋㅋㅋㅋㅋ 읽어주신 모든 백개분들 감사함니다 복받으실거예요 하하 댓글... 댓글을 제게 주시고 포인트 돌려받아가세용!♥ 배또 겨론해 쿵짝쿵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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