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동동 허공에 띄어져 노나니는 것을 보며 진기는 조심스레 웃었다. 귀여운 얼굴 아래 도톰히 살이 오른 하얀 저 볼을. 한번 콕 찔러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 한 쪽이 간질거렸다. 조금은 앞선 마음에 애써 저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은 자세를 유지하던 것도 잠시. 누가 이 동네 말광량이 아니랄까봐 몇 걸음 가지못하고 모래구덩이에 철푸덕 넘어지고 마는 귀분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이고, 저 철부지. 서둘러 주변을 살핀 진기는 기범이 놀이터 안에 없음을 확인하고선 부지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어졌으면서도 스스로 일어날 생각을 않는 게 딱. 누가 그 피를 물려받아 공주님 기질이 다분하다.
" 김귀분! 괜찮아? "
차근차근 한 걸음씩 다가가 귀분의 얇은 팔뚝을 감싸안아 일으키자 모래 범벅이 된 얼굴로 귀분은 기세좋게 울음을 터트렸다. 으허엉. 흐앙. 눈물이 진득하게 말라붙어 후에 세안에도 그리 큰 도움이 될리 없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도 보라는 듯이 기어이 눈물까지 주룩주룩 흘리는 걸 보니 그 속셈이 빤히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진기 스스로도 귀분의 속셈이 무엇인지 빤히 다 알고있음에도 괜시리 불쌍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이 애기를 어찌하나. 혹여나 잘못 만졌다가 깨질까봐, 다칠까봐 무서워 손 대는 것도 두려워하는 진기였다. 그래서 더 귀분에게 조심스러웠고, 귀분에게는 말 한 마디 꺼내는 것도 심사숙고하여 고르고 골라 물었다. 어릴 때부터 들인 버릇이라 그런가 이젠 조금 흩어질만도 한 것들이 여전히 제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귀분이 제게 길들여진 것처럼 (아니, 애초에 길들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까?) 저도 귀분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그 것도 철저히.
정해진 순서가 있기라도 한 듯이 귀분을 일으켜 조막만한 얼굴에 조심스레 손바닥을 가져다댄 진기는 하얗고 몰랑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를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조심스런 목소리로 아팠어? 하고 묻자 앙 다문 입새로 뭉개진 긍정의 대답이 들려온다. 김기범도 어릴 때 이랬나, 얘는 왜 이렇게 자주 넘어지지? 이러다가 정말 큰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왠지 모르게 우려되는 마음에 조금 자리를 움직여 제 엉덩이를 모래사장 바깥으로 붙인 진기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귀분의 팔뚝을 잡아당겨 제 다리 위로 가볍게 앉혔다. 귀분의 얇다란 종아리를 감싼 핑크색의 딸기 스타킹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 여자아이들이 신고 다니면 왜 저런 걸 하고 다니지? 하고 가볍게 넘기던 것도. 귀분이 하니까 한번 더 눈이 가고, 한번 더 눈길이 따른다. 하다못해 귀엽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에 세차게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떨친 진기는 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것에 꿀꺽 마른 침을 삼키다 더욱이 커져가는 귀분의 울음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휘어트렸다. 조심스럽게 볼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음푹 들어간 미간의 양 옆으로 자리잡은 눈가를 툭툭 털어주자 으앙, 악, 하는 귀분의 비명 섞인 울음이 귓전을 세게 때렸다. 얘 돌봐주다가는 내 고막이 먼저 운을 다하겠군. 순진무구한 얼굴로 진기를 이리저리 부려먹는 귀분 탓에 침몰당하는 제 머리가 예견당하는 것 같아 잠시 잘게 부르르 몸을 떤 진기는 고개를 들어 귀분과 눈을 맞췄다. 동그란 눈동자에 비춰진 제 얼굴을 보며 참 바보같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쩌나. 이 공주님은 돌봐주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데 특출난 재능을 지닌 사람인데, 제가 좋으면 (담백한 의미로) 따라줘야지.
" 눈에 모래 들어가겠다. 귀분아, 눈 감아. "
나이 열 넷. 막 중학교 신입생에 발을 들인 진기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는 선생님도, 시험도, 어머니도 아닌. 옆집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열 살짜리 말광량이 김귀분. 현재진행형인 (이라고 하나 정작 당사자인 진기도 모르는) 진기의 첫사랑이자 일명 옆집 공주님라고 불리는. 멋에 살고 멋에 죽는 김기범 여동생 아니랄까봐, 꼭 빼닮아선 벌써부터 멋 부리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 열 넷의 초입에 든 남자아이와, 막 십대에 발을 들인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그 놀이터에 남아있었다.
Are you delicious...?
w. 별여울
귀분은 귀여웠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랬다. 진기와 기범의 머릿 속에서 귀분은 열 살, 딱 그만할 때의 아이와 같았다. 예쁘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일렀고, 성숙하다 말하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였다. 늘 귀여운데, 성격은 제멋대로여서 주변 사람을 휘두르고, 근데 막상 또 미워할 수는 없는. 귀여운데다가 미워할 수 없는 아이. 그게 바로 진기와 기범이 여기는 귀분의 정의였다. 어릴 때부터 서로의 얼굴을 질리도록 봐온 두 사람으로서는, 현재 귀분의 상태가 탐탁치 못했는데. 그 것은 기범이 귀분의 친오빠, 즉, 귀분을 관리할 자격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었고. 진기가 귀분의 친오빠 (라고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인이나 다름이 없을) 못지 않은 친분을 지닌 옆집 두부같이 물렁거리는 오빠로서, 귀분을 나름! 관리할 자격을 지닌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은 (나름) 냉철히 판단했다. 그리고 역시. 지금 귀분의 상태가 결코 정상적이지 못함을 판단하고 그에 대한 조취를 내리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살살 구슬려서 귀분의 속내를 캐내보는 뻔한 수법같은 것들?
" 아오, 왜 이런 데에 데려오는데? 나 오늘 친구랑 약속있다고! "
" 강남 클럽에 약속이 있으신가봐요, 김귀분씨? 그 바쁜 몸 데리고 하나 밖에 없는 오빠가 근사한 거 사준다는데. 스케줄 하나 정도는 뺄 수 없으신가? "
" 그럼 그 쪽이야말로 언제적 오빠드립이세요? 포장마차가 근사한 장소면, 내가 끓여주는 라면은 무슨. 뭐. 신라호텔 VIP 뷔페? 뭐 이런 거겠네요. "
그 쪽은 신라호텔 주방장 음식을 몇 그릇이나 쳐드셨는지. 돈으로 환산하면 강남의 클럽 하나는 짓겠네요.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여동생이 좀 일탈을 즐겨보겠다는 데 그게 영 탐탁치 못하신가봐요! 기세좋게 소리를 질러대며 싸워대는 두 남매 탓에 그 사이에 나란히 끼어버린 진기는 귓전을 때리는 강한 진동에 시야가 흐릿해지는 중이었다. 저리 치이랴, 이리 치이랴. 어디 콘서트라도 온 것처럼 스테레오로 빵빵 울려퍼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진기의 귓가를 비집고 고막의 정가운데에 박혀왔다. 정말로, 이 두 사람과 더 생활하다보면 평생 청각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잠정적인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때는 초겨울. 오후 열 한시. 기분좋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기분좋은 상태 그대로 2차를 달리는 사람들로 나뉘는 그 애매한 시간대. 취객과 정상적인 사람들이 반쯤 뒤섞인 거리를 따라 걷기를 얼마나였을까. 주변의 포장마차를 발견한 기범은 저 멀리서부터 줄곧 응시하고 있던 귀분의 목덜미를 낚아채 막 따끈따끈한 상태로 포장마차 입구까지 데려왔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날쌘지 한 마리의 매를 보는 듯한 느낌에 진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범의 새하얀 손가락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끌려온 귀분은 평소 학교에서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림새로 진기를 놀라게 했다. 요즘 귀분이 근방의 클럽을 돌며 남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귀분이 본래 꾸미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정말로 툭 터놓고 말하자면 진기의 생각을 두고 비교해 볼 때 귀분은 가히 충격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단단히 각오하고 가라며 몇번이나 당부하는 기범의 말에 몇 번이나 제 상상을 업그레이드하고, 거기에 각종 부가세까지 덧붙였는데. 귀분은 지금 듣도보도 못한, 아니, 그냥 강남의 클럽문화에 홀라당 빠져버려 제 몸 하나 부지 못하는 여자아이들보다도 못한, 그런 파렴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초겨울에 맞지 않게 훤히 허벅지를 드러낸 미니 스커트와 쇄골을 훤히 드러내는 검정색의 커다란 니트. (니트가 커서 치마를 입은건지 입지 않은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위로 걸쳐진 붉은 색의 남성용 자켓과 비싸보이는 명품백 하나. 작고 얇은 발에 딱 맞는 자극적인 빛깔의 빨간색 에나멜 구두. 날씬하게 빠진 허벅지부터 종아리를 가리는 검은색의 스타킹이 어딜보아도 이건, 나 남자 만나러가요~ 하는 전형적인 노는 아이들의 옷차림이었다.
맙소사. 지금껏 자신이 지녀오던 귀분에 대한 이미지들이 모조리 와장창, 하고 깨지는 것 같아 진기는 처음으로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고동을 울리며 진기의 귓전을 울렸다. 귀분과 기범이 그 앙칼진 목소리로 진기를 톡 쏘아붙일 때까지. 진기의 머릿 속에는 지난 십 년의 세월 동안 봐왔던 귀분의 이미지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올백의 머리로 해리포터같은 안경을 쓰고, 무릎이 톡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어도 예쁘던 귀분이었다. 시험에 폐인이 된 모습으로 기는건지 걷는거지 모를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모습까지도 예뻐보여 측은하기만 하던 귀분이었다. 물론 귀분이가 지금 예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건 좀 다른 방향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막 스무살의 초입에 선 아이가 입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노출이 많은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이미 남성용 자켓을 두른 채로 걸어다니는 걸 보아선 본래의 행선지가 아닌 다른 클럽에서 다른 남자와 이미 한번 정도는 썸을 타고 온 것이 분명한 듯 보였다. 진기 자신도 클럽에 가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진기의 경험상 저런 옷차림을 한 여자아이들 중에 제대로 된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진기는 애초에 그런 부류와는 말도 섞지 않았으므로 그 주장에 대해서는 마땅한 설득력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여동생이나 다름이 없는, 귀분이 저런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진기는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진기, 뭐하냐? 너도 뭐라고 한 마디 좀 해봐! 같은 피 섞인 남매인 것은 확실한지. 쭉 찢어진 눈꼬리로 진기를 응시하며 뱉는 말이 똑닮아있었다. 점차 깊숙이 아파오는 골에 두 손을 들어 남매의 등을 떠민 진기는 얼결에 포장마차에 발을 들여 어리둥절한 눈치의 두 사람을 응시하다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아.. 머리 아파. 점차 정도를 더해가는 두통에 절로 음푹 패여진 미간을 두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처연함에 처한 진기가 내린, 일종의 처방이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밤이 길 것만 같다.
*
내가 클럽에 가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엄마도 허락하셨다니까? 무슨 내가 남자들이랑 사귀기를 해, 아님 더한 걸 하기를 해. 나는 그냥 퓨어하게. 춤 추고, 술 마시는 게 다야. 여자고 남자고 일단 번호부터 알고 가자. 뭐 이런, 오빠의 마인드가 아니라고. 열정적으로 손짓을 해가며 설명해가는 귀분의 얼굴을 보며 기범은 기가 차다는 듯 몇번이나 잔을 비웠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앉은 진기는 딱히 해줄 말이 없이 잔이 비면 술을 따라주고, 안주가 떨어지면 안주를 주문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일에 끼어들어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몇번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노련함이었다. 괜히 한번 끼어들었다가 좋지 못한 꼴을 당하는 것보단, 두 사람이 필요로 할 때 적당히 몇 마디 던져주고 가면 될 일이었다. 진기는 점차 비워져가는 술병을 바라보며 멀뚱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니 오늘도 그렇게 어영부영 끝날 것이다. 물론 귀분의 옷차림을 보아선 그럴 가망이 없었지만.
" 야. 김귀분, 우리 엄마가 그 옷 입고 나가는 걸 허락해주셨다고? "
" ...어, 어. "
" 전화드려? 전화 해봐? "
진기가 보기엔 따박 따박 대드는 귀분도,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기범도 잘한 일은 없어보였다. 귀분이 언급했듯이 기범도 귀분을 혼낼 정도로 사생활이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가깝다면 복잡한 쪽에 가까웠겠지 여자관계가 전무한 타입의 사람은 앞뒤 가리고 보아도 아니었다. 사납게 끼워진 피어싱도 그렇고, 왁스를 발라 멋낸 듯 내지 않은 듯 처리한 헤어스타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어도 귀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은근슬쩍 클럽 쪽으로 빠질 생각이었는지 징이 박힌 (다소 촌스러워보일 수 있는) 부츠를 겹쳐 신은 기범은 지금 이 상황에서 보기에 여동생을 단속하러 나온 오빠라기 보다는 어디 클럽에서 한번 진탕 놀고 올 듯한 대학의 노는 오빠가 더 가까워보였다. 귀분을 만나러 올 생각이었다면 면도 자국이 그대로 남은, 푸석한 얼굴로 대충 슬리퍼를 궤어신고 나왔겠지. 왠지 모르게 빤히 보이는 듯한 남매의 심경에 진기가 테이블보에 대고 쾅 머리를 박았다. 머리도 아프고, 술도 안 드는 게.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고 어렴풋이 눈치챘던 아침부터 이 둘을 피해다녔어야 했던거다. 잘못되어도 한참 전부터 잘못됐군. 폐에서부터 오랫 동안 방치되어있던 숨 속으로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진기의 입을 통해 터져나왔다. 이진기, 야. 취했냐? 당황스러운지 꼬치를 먹던 젓가락으로 쿡쿡 어깨죽지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아서는 기범인데, 손짓을 보아선 귀분이다. 아, 진짜.
진기는 순간 시야를 차단당한 지금까지도 자신이 손짓 하나로 그 상대를 알아차린다는 사실에 정말로 기분이 나빠졌다. 애초에 끌려나온 것도 그렇고, 나를 끌고 굳이 이 곳까지 데려온 것도 그렇고. 두 사람과 관계된 일에 긍정적인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자그마치 십년이었다. 십년. 방금 시작되어 막 풋풋한 사랑도 아니었고, 이미 때가 진득히 지나 퇴화한 조그마한 감정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일 없이, 잔잔하게만 유지되어오던 감정이었다. 소소하고, 그냥 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계속될 것만 같은 그런 감정. 그런데. 그런 짝사랑의 상대가 저따위 옷차림을 한 채로 강남 클럽가를 돌아다니는 걸 직접 목격해야 한다는 게. 이도저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끌려나온 것도 제 잘못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꼭..
" ...희망 고문 같잖아.. "
" 야, ..김기범. 이진기 뭐래? "
" 존칭 붙여라. 너보다 네살이나 많거든? "
" 학년은 별 차이 안 나잖아. "
" 넌 어떻게 배워먹었길래 학년으로 번호를 매기냐. "
귓가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남매의 대화를 배경음악 삼아 조금 더 품 속으로 파고든 진기는 급격하게 저를 습격하는 나른함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난다는 것 외에는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만한 어휘가 없었다. 비루한 어휘력이 문제인건지, 아님 정말로 이 단어 외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는지. 진기는 그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조차도 귀찮아졌는지 조금 더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작게 입술을 짓씹었다.
*
귀분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단상 위에 올라선 진기를 올려다보았다. 꼭 저를 닮아 단정한 품새를 지닌 교복이 같은 교복이라고 믿기에 힘들 정도로 우아하고 정갈해보여서 보는 내내 마음이 간질거렸다. 익숙하게 상장을 넘겨받고선 도로 학생들을 향해 인사하고 내려가는 움직임 하나조차도 이진기스러웠다. 단정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런 오묘한 것들. 귀분은 진기를 그렇게 표현했다. 단순한데, 복잡했다. 그리고 진기의 얼굴도 그렇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선들로 이루어져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냉정해보이는 인상이 웃기만 하면 금새 귀엽고 둥근 호선을 그리며 흐트러져서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얼굴이 점차 성장하며 남자다워지는 것을 몇번이나 보아왔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근 1년 만에 다시 만난 진기는 작년의 모습보다 훨씬 더 멋있어져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몇 나오지 않았던 명문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했다. 근 1년만에 입는 교복일텐데도 저리 어울릴 수도 있구나. 정작 열 일곱. 딱 그 당시의 나이인 자신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 교복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는 진기가 참 신기해보이기도 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조금 다리를 까닥이던 귀분은 무심코 대학교 이름을 중얼거렸다. 경영학도 이진기. 왠지 입가에 소리내어 담아보니 진기가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져 속상해진다.
진기가 졸업하기도 전에 명문대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귀분으로서는 진기의 명문대 합격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한편으론 슬픈 일이기도 했다. 기숙사 학교라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았고,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서 진기가 짐을 챙기고 서울로 떠나는 걸 봤으니까. 기범이 나와서 인사를 하라고 그리 이야기를 했는데도 부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창문이라는 방패막에 서서 2층에서 진기를 내려다봤다. 교복이 아닌, 깔끔한 크림색의 가디건을 입고서 기범과 반가운 듯 이야기를 나누던 진기는 짐 몇 개를 트럭에 싣더니 그대로 떠나버렸다. 한번만이라도 올려다봐줬으면 그렇게 섭섭하지도 않았을텐데. 사실 진기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걸 기대한 걸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그냥. 이별이 다가오니까 괜한 생각만 더불어서 커져버려서. 당연히 진기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쪽을 올려다볼 줄만 알았다.
그렇게 좋은 데를 가버리면 내가 따라갈 수가 없잖아. 진기를 태운 트럭이 동네를 벗어나는 것을 바라보기 싫어 사춘기 소녀처럼 침대에 앉아 팡팡 쿠션을 두드려대던 귀분은 왠지 속에서 불꽃이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 같아 잇새를 악물었다. 멋지고, 드높은 학교에 가서 더 좋은 남자가 되어 돌아오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자신조차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내가 완전히 독점할 수 있는 사람. 이진기는 그래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남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남자. 얼굴도 훈훈하고, 공부도 잘 했고, 목소리도 좋았다. 거기다 노래도 잘 하고 가끔은 무드있게 피아노 협주곡도 근사하게 칠 수 있는 남자였다. 여학생들의 이상형, 그 자체이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상형의 근본적인 틀이 되어줄 그 사람이 바로 제 옆에 있었다. 근데 그렇게 떠나버리면 왠지. 진기가 훨씬 더 멋져지고, 잘 생겨져서. 자기보다 훨씬 더 예쁘고 도도한 여자를 품에 끼고 돌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진기는 말하지 않아도, 귀분은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버린다면 자신이 먼저 포기하고 혼자서 마음을 삭일 거라는 걸. 겉은 도도하고, 떽떽거려도 속은 더위나위할 것 없이 여린 귀분이었다.
*
" 야, 이진기이. "
취한 척 한번 팔뚝도 만져보고.
" 야아아, 너어.. 지금 나 무시하냐아? "
어깨에 기대도 보고.
" 이야, 이진기. 이거 마-아니 컸다. 그으치? "
의심할까봐 다른 곳으로 널부러져보기도 하고. (새로 산 구두가 아깝긴 하지만)
" 아, 야! 숙녀가 넘어졌으면 일으켜세워줘야 할 것 아니야! "
안아주지 않을까 무서워, 떽떽거리면서 소리도 질러보고. 조심스럽게 팔뚝을 잡고 일으키는 손길에 놀라 움찔하면서도 아닌 척 홱 돌아서 이진기의 얼굴도 올려다본다. 얄쌍한 턱선. 예전에는 볼살도 있었던 것 같은데 군대 다녀오더니 살도 쫙 빠졌다. 왜 이래. 진짜. 급격하게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스러웠는지 웃느라 가려진 눈에 당황한 빛이 서려있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애써 담담한 척 손을 올려 이진기의 팔뚝을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처음에는 진짜 취한 척만 하려고 몇 모금 마시던게. 어쩌다보니 양이 점점 불어나서 이젠 슬슬 머리춤이 아파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진기를 올려다보며 해죽 웃었다. 평소에는 내 웃는 얼굴이 이진기에 비해서 너무 못나보일까봐 무서워서 잘 웃지도 못 했는데. 기어이 알코올에 푹 빠졌는지 방향감각도 상실하고 휘청휘청.
이진기의 팔뚝을 지지대삼아 서 있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손에 쥐여진 단단한 팔뚝을 물렁물렁 주무르다 해, 웃었다. 아, 평소에는 죽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을텐데. 정말 취했나보네. 그럼 아까 내가 취한 척했던 게 아니고, 진짜 취했던 거구나. 뒤늦게 올라오는 반응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진기가 내 앞에 있어서 그런건가. 아니면 내가 술을 먹어서 그런건가. 굳이 가려내고 이 밤에는 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며 이진기로부터 벗어났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으면 이진기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였는데. 정작 고마워해야 할 당사자는 놀라서 내가 쥐고 있던 단단한 팔을 들어 손목을 쥐어잡는다. 어디가, 귀분아. 이런 내가 당황스러운지 나를 조금 가까이로 끌어당긴 이진기가 눈을 흐트러트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손길에는 부드러움이 배여있는 게. 이진기의 몸에는 본능적인 매너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진기가 나한테 그런 걸 해주는 걸 보면, 나를 여자로 대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한데. 막상 생각해보면 다른 애들한테도 이럴 것 같고.. 뭐어. 뭐! 근데 이상하게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막 그러네. 이진기는 술자리마다 여자면 후배, 선배, 동기 가리지 않고 다 배려해주겠지.. 아직 가져보지도 못한 술자리의 모습이 뻔히 눈 앞에 그려졌다. 뒷처리하고, 술에 취한 것 같다 싶은 사람에게는 물잔도 하나 만들어주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던 독점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진다.
" 귀분아. 집에 가자, 응? "
" 싫어! 싫어! 2차! "
"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다. "
" 오늘 엄마 집에 없거든? "
" 그럼 집에 도둑들겠다. 빨리 가자. "
" 괜찮아, 김기범 있어. "
" 오빠한테 김기범이 뭐야. 김기범이. "
살살 나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말투에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이진기한테 못볼 거 되게 많이 보여주고, 나쁘게도 많이 대했는데. 이진기는 매일 매일이 나한테 다정하고 그래서. 왠지 나만 작아지는 느낌. 이진기를 따라서 무작정 공부하다보니 어정쩡하게 서울권 대학에 붙기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와서 봐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이진기가 나를 대하는 방식도, 내가 이진기를 변하는 방식도. 그 어느 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둘 중 어느 사람이라도 조금 태도에 변화를 주어야 관계의 진전이 있을텐데. 이젠 이 질긴 싸움을 끝내려는건지 내 손목에서 팔뚝을 향해 이진기의 다부진 손이 한번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왠만해선 고만고만 끌려가주었을텐데 오늘따라 설움에 목이 받쳐와 울컥 울음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꾹 억눌려놓고 있던 것들이 꾸역꾸역 기도를 타고 올라와 이제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까지 남겨진 절차는 내가 입을 여는 것 밖엔 없었다. 나조차도 어떤 말을 할지 몰라 마냥 놀라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그런데 이진기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이진기의 품에서 빠져나와 대롱대롱 손목만 붙잡힌 채로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입도 앙 다문 탓에 잔뜩 불퉁한 표정이 되었지만 나도 모를 말들을 술김에 짓껄이는 것보다는 이 것이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이 편이면 이진기랑 이 관계라도 유지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걱정과 안쓰러움이 한데 섞인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진기의 몰랑몰랑한 볼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영 쉽지가 않다. 저 멀리서부터, 거리 어딘가에서 시작돼었을 캐롤소리가 귓가를 쟁쟁 울렸다.
" 으으, 진짜아! "
" 왜 또. "
" 이건 음모야! "
" ...그래. 뭐가? "
" 그럴 리가 없어! "
" 응, 그러니까 뭐가? "
"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에! 내가! 남자 하나 없이! 거리를 나뒹굴고 있을리가 없다구... "
" .... "
" 내 로망이었어! 작년 오늘에 내가 다짐했단 말이야.. 올해는 꼭 멋진 남자친구 팔짱끼고! 돌아다닐거라고! "
" ...아이고. "
" 근데 이게 뭐야? 친구들은 다 남자 만난다고 연락이 안 되고. 하나 밖에 없는 오빠는 여자 만나겠다고 나갔는데! "
" 기범이 오늘 집에 있다며. "
" 걔가 외박 하겠어? 오늘 집에 들어오겠다는 얘기였지. 아무튼간에! 지금 나만! 나아마안! 솔로라고! 솔로! 솔! 로! "
무슨 여생도라도 되는 것처럼 우렁차게 나뭇가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진기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끼자마자 뛰어가서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정말 짜증이 났다. 이진기라는 이름을 남자친구로 자체 필터링을 해서 말하는 것도. 근데 이진기는 내가 그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원래 무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적도 안되서 전교권 축에도 못들던 내가 대학 따라오겠다며 밤낮없이 코피와 함께 공부에 몰두하던 때에는 이진기가 어렴풋이 내 마음을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내가 이진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고서는 그럴 리 없었으니까. 이진기는 무심하긴해도 머리는 비상하니까 알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서울로 상경한 뒤로부터는 이진기가 아무 말이 없길래 나와 그대로, 그냥, 친구도 오빠동생도 아닌 그런 애매한 관계로 남기를 원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새해소원을 올해는 꼭 고백하기,라고 적어놓았던 열 아홉과 스무살 사이의 나를 데려와 안아주고 엉엉 울기라도 하고 싶었다.
이진기는 그랬다. 말랑말랑한데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맺고 끊음이 확실했으니까. 스무 살이 된 나는 겁쟁이가 된건지. 십대 당시의 자신감이 반으로 확 줄어든건지 이진기에게 십년 간 묵은 마음을 고백하고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하느니 평생 이진기에게 '친했던 옆집 동생'으로 남는 것이 더 좋을거라 생각했고. 실레로 그 것을 실천에 옮겼다. 이진기와 같은 대학교라고 해도 이진기는 경제경영학 전공이었고, 나는 시각디자인 전공이라 서로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신입생. 이진기는 군대까지 다녀온 적당히 친절하고 훈훈한 복학생 오빠로 낙인이 찍혀있던 참이었으니 부딪힐만한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었다. 이진기는 타고난 성격 덕에 주변에도 워낙 사람이 많았고, 십대 당시까지만 해도 나도 그 무리 중에 한 사람으로 포함되어있었으나 막 이십 대가 되어 겁을 잔뜩이나 집어먹고 난 뒤에는 나 홀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늘 이진기가 있는 걸 멀리서나 지켜보고 지나가고, 가끔씩 오빠를 통해 만날 때만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근데. 그랬던 내 첫사랑인데. 이렇게 고백도 못하고 멍청하게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됐다니 너무 억울했다. 억울하다 못해 눈 자위가 붉게 달아올라서 뜨겁게 불에라도 타는 것 같았다.
남몰래 상상하고는 했다. 크리스마스날, 이진기와 나를. 그래서 고백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던 저번까지만 해도 혹시 크리스마스 날에는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 한 켠에 기대감을 두고 있었다. 그건 점차 스멀스멀 자라났고, 기어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부풀어올랐던 풍선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 듯이 끝에 남은 찌꺼기들은 비참함, 실망 따위의 온통 어두운 것들밖에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내서 울고 싶었는데. 술에 취한 상태에도 주변의 눈이라는 게 무서웠는지 쉽게 소리내어 울지는 못 했다. 그게 내가 작년과는 많이 달라진 어른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눈물줄기가 더욱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 그럼. "
갑작스레 훅 다가온 이진기의 체취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적당히 담백하고, 적당히 초연한. 딱 이진기를 닮은 그 향기는 바람을 타고 내게 몰려와 내 몸을 살포시 감싸안았다.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소매깃으로 닦아내며 고개를 들자 무릎을 굽힌 채로 내게 다가온 이진기가 있었다. 멋진 남자친구는 아니어도, 나랑 다니자. 무릎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흙이 묻은 내 바지와 등줄기를 털어준 이진기는 내 어깨를 조심스레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기 힘들면 말해. 내가 일어남과 동시에 다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진기는 내 손을 쥐어잡았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친 것 같았다. 훌쩍이며 이진기를 올려다보는데 누가 보면 홀딱 빠질 듯한 웃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뒷머리를 한 차례 흐트러트린다. 내 어깨를 감싸안은 이진기는 사람들 사이로 뒤섞여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부터 들려오는 캐롤송들이 마구 뒤엉켜 귓전을 은은하게 울렸다. 어디갈까? 뭐 먹을래? 아니, 술 먹었으니까 해장? 끝에 장난스러운 농담까지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는지 이진기는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살풋 웃었다. 내 손과 맞닿은 이진기의 단단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단단하고, 담백하다. 가슴을 뭉근히 데우는 향기가 코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
막 집에 돌아와 양치를 하던 중이었다. 평소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여져있던 힐이 보이질 않길래 오늘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오는가 싶어 고개를 한번 기울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도 정말 들어오지 않았던건지. 주변 그 어디에도 김귀분의 신발이라거나, 가방같은 소지품이 보이지 않길래 기분이 어딘가 이상해졌다. 부모님이 아시면 치를 떨텐데. 언젠가 김귀분이 늦게 들어오던 날 골프채를 들고 동네 떠나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잘게 몸을 떨며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무섭게 아래서 초인종이 울렸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고요함을 깨웠다. 아, 이런. 입가에 묻어있는 거품들을 대충 닦아내 화장실로 뱉어낸 뒤, 재빠르게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디뎠다. 김귀분 얘는 비밀번호를 알면 비밀번호를 눌러야지. 비밀번호를 뭐하러 알려준거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 궁시렁거림과 함께 잔뜩 짜증난 얼굴로 문을 확 열어제끼니. 어라, 이게 누구야.
" 어? 이잉이. 어 여이어 모해? (어? 이진기. 너 여기서 뭐해?) "
" 보시다시피. "
이진기가 어깨를 으쓱이며 드러내는 뒷편의 인영을 보자마자 뒷골이 강하게 당겨오기 시작했다. 나 술 퍼먹었어요. 하는 뉘앙스를 이마에 떡하니 붙힌 채로 이진기의 등에 붙어 반쯤 수면상태에 취한 김귀분이 설마. 이 시간에. 이진기와 함께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차라리 친구 집에서 자고 오면 자고 오는 줄 알았는지 떡이 될 정도로 술을 먹은 상태로 시내를 돌아다녔을 줄이야. 콧방귀를 뀌며 입가에 담겨져 있던 칫솔을 빼낸 뒤, 슬리퍼를 신고 마중을 나갔다.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넘겨지는 귀분이의 얇은 어깨를 보며 숨을 뱉었다. 얘 술 무지 먹었어? 마저 집 안으로 들어가 소파 위로 대충 김귀분을 던져놓은 다음 뛰어나와 물었는데 이진기의 표정은 묘해보였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것이 꼭 어딘가 잡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 근데 김귀분은 어떻게 만난거야? 너 오늘 약속있다며. "
" 아, 그냥 오다가 만났어. 근데 술에 무지 취했는지 몸도 잘 못 가누더라. 꿀물 타서 조금만 먹여줘. 고생 많이 했을거야. "
" ...오다가 만나는 게 가능해? 네 오피스텔이랑 우리 집은 방향부터가 다른데. "
"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아. 집으로 가던 게 아니었고, 빵집 들려서 집에 보낼 케이크 찾으려고 가던 중이었어. 여기 근처 빵집이 그렇게 맛있다며. "
" 아... 응. 그렇긴 하지. 아, 미안하다. 김귀분 얘가 알다시피 좀 술 먹으면 제 앞가림을 못 하잖아. "
" 아니야, 미안하긴 뭘. "
기범이를 향해 대꾸해주며 가볍게 웃었다. 사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게 아니고, 공주님 호출을 받고 달려갔던거지만. 술에 잔뜩 취해 열이 오른 채로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을 귀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설핏 웃음이 났다. 보면 볼 수록 귀여운 구석만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욕심이 난다. 오늘은 옷차림도 과하지 않고, 딱 예뻐서 다행이었지. 혹시라도 제가 늦게가다 누가 한창 꽃 피우는 여대생 잡아갈까 무서워 과속하지만 않을 정도로 엑셀을 밟고 달려왔었다. 달려온 뒤에는 거의 거리에 널부러지다 시피 한 상태였지만, 그리 취한 상태는 아니었는지 구토를 하거나 주변에 큰 피해를 준 건 없어보였다. 그래서 따라나와계시던 아주머니께 술값을 대신 지불해드린 뒤, 무작정 귀분이를 깨우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소파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발끝을 바라봤다. 하얀색 발바닥이 동글동글해서 귀여웠다. 문득 기범이 발바닥도 그런가 싶어서 시선을 내리는데 김기범은 그 시선을 어떤 의미로 생각했는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난다. 음, 왜 그러지? 당황스러움에 놀라 홱 고개를 들자 녀석도 놀라서 흠칫 뒤로 몇 걸음 물러난다. 아무튼 수고했다며 어서 나를 돌려보내려고 하길래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인사를 뒤로 한 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계속 거기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도로 차에 몸을 실은 채, 시동을 걸다 옆에 놓여진 조그마한 초콜릿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주려고 샀던 건데. 정작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존재를 잊고 있었다. 뭐, 그래도 오늘은 손 잡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