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시리즈 - 야상곡
(야상곡-tete)
하얀, 또는 옅은 분홍빛을 띄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제 몸을 푸른 물 위로 흩날리던 날이었다.
그 빛이 희면 어떻고 분홍빛이면 어떤가. 어떻게 피어있으면, 어떻게 날리면 또 어떤가.
바다의 색이 푸르면 어떤가. 반대로 생명을 잃은 탁한 빛이면 또 어떤가.
이제 그 아이는 그리도 좋아하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데.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어떠한 예고도, 언질도 없이, 우리의 설레이던 소풍은 떠나는 길에 너무나도 이른 끝을 맺었다. 더불어 신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의 대가인지, 신은 우리의 목숨을 그대로 둔 대신 그 아이의 빛을 앗아갔다.
한적하지 않은, 사람 많은 대로였기에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도착하여 우리를 구해냈다. 다만 그 아이의 빛까지 지켜내진 못했던 것이지.
그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사고가 난 순간에 충격으로 인해 조각난 유리조각이 그 아이를 덮쳤다. 그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그들도 어찌 손쓸 도리가 없는 불가피한 것이었을 테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내 눈에 들어온 마른 몸은 운전석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조수석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고, 자잘한 유리 파편으로 엉망이 된 얼굴은 눈을 가지런히 감고 있었다. 반면 나의 얼굴은 옅은 생채기를 빼면 깨끗했다.
그 때 나는 직감했다. 이 아이는 나를 지켜내고 제 눈을 바친 것이다.
나는 약간의 타박상과 정강이뼈 골절로 그쳤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사랑스러운 연인, 김한빈은...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고 나온 한빈의 갸름한 얼굴은 부드럽고 하얀 붕대로 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다. 이마께에서 시작한 매듭은 눈을 지나 콧등을 덮으며 마무리되었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연인의 손을 잡고 나는 울음을 참아냈다. 설움을 삼켜냈다.
그리도 힘들게 살아온 우리인데, 사회의 질타에도 두려울 것 없다며 마주보고 웃어온 우리였는데, 거리의 시선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입맞추던 우리였는데, 그래도,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왔고, 사랑해왔는데...
- 김지원?
이틀 쯤 지난 것 같다. 손등의 뼈가 도드라진 가느다란 손을 부여잡고 선잠에 들었던 나를 의식 밖으로 이끌어낸 건 네 목소리였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소년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네 목소리. 스스로 그리 맘에 들지 않아하던, 그러나 들을 때마다 나를 기분좋게 했던 네 목소리.
- 지원이형?
- 깼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터라 꽤나 잠긴 내 목소리를 듣고 한빈은 살짝 웃음지었다.
- 형,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 오늘이... 화요일이네.
- 우와. 나 이틀이나 그냥 잔 거야?
- 그렇지. 잘 잤어?
- 모르겠어, 몸이 찌뿌둥한데. 운동 좀 해야겠어.
한빈은 제 눈을 가린 흰 직물이나 팔뚝에 꽂힌 굵은 바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의 나처럼 한빈 역시 직감한 것일까. 나도 모르게 한빈의 손을 고쳐잡았다. 어느 동화에서 공주의 기나긴 머리칼을 부여잡는 탑 아래의 남자처럼.
- 김지원.
- 응, 한빈아.
- 손 좀 놓지? 힘은 무식하게 세가지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을 하는 한빈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떤 불안함도,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
- 형, 나 눈.
- 아, 너 눈, 어... 그게, 조금 다친 거야, 맞아! 조금 다친 거라 수술한 거야. 며칠 이따가 푸르면,
갑작스레 눈 이야기로 말문을 연 한빈에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나를 가만히 기다리던 한빈은 다시금 미소지으며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얹었다.
- 그러지 마, 형. 괜찮아. 알아.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뭘 알고 있다는 것일까. 제가 젊은 날 사랑의 대가로 치르기에 너무나도 큰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 다 알아, 알아. 괜찮으니까,
너무나도 의연하게, 되려 내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한빈의 모습에 나는 그만 눌러왔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김한빈은 제 손을 꽉 쥐고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내는 내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괜찮을 거라고, 알고 있노라고 속삭였다.
어른이었다, 김한빈은.
한빈이 붕대를 풀기까지 며칠동안, 우리는 외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마주할 감각의 상실을, 비극의 예고를 조금이라도 잊고자 애써 발버둥쳤다.
우리는 전보다 더욱 달콤했고, 또 더욱 격정적으로 사랑했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 한빈아, 포도주스는 없대서 오렌지로 사왔는데,
병실 침대 머리맡에 위치한 창밖을 향해 앉아있는 한빈의 뒷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른 몸에 적당히 벌어진 어깨, 결 좋은 까만 머리칼.
붕대가 없었다. 작은 머리를 감싸고 있던 하얀 붕대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 아이가, 내 연인이, 어른이 되어버린 김한빈이 새카만 제 세계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형, 이제 와?
단정한 두 눈이 나를 담았다. 곧게 뻗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은 너무나도 다정했다. 한빈이 나를 보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 보고 싶었어.
- 한빈아,
- 그 쪽에 있는 거 맞아? 보고 싶었는데, 보이진 않네.
검푸른 바다같았던 한빈의 눈은 이제 그 생명을 잃고 바랜 빛을 띄고 있었다. 다만 애정으로 가득한 눈은, 분명하게 나를 담고 있었다.
한빈을 위해 사온 주스캔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좀 무섭다. 형, 거기 있는 거 맞지? 이리 좀 와봐.
씨익 웃어보인 한빈이 팔을 뻗었다.
한빈의 바다에 푸른 빛을 잃고 바랜 바닷물이 가득 차올랐다.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뺨을 베어내듯 쓸어내렸다.
한빈은 울고 있었다. 애처롭게도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입술을 깨물고, 비어버린 눈을 힘겹게 뜨고. 그저 숨을 죽여 울고 있었다.
아픔은 순간이라던 어느 노랫말이 무색하게도, 한빈은 깊고 긴 슬픔을 담은 바다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바랜 빛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눈 역시도 곧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 나 좀 안아주라, 형.
주저없이 그 앞에 다가가 작은 머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옷감은 금새 바닷물을 빨아들였다.
제 연인의 가슴팍에 묻힌 바다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바닷물을 쏟아냈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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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다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