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나는 지금 당신을 만날 시간적 여유가 없고..." 이런식의 이별통보를 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여기 이 자리에 앉아 녀석의 새빨간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나말곤. 저와 내가 헤어져야 할 이유를 순서까지 매겨가며 나열해나간다. "둘째. 나는 변화가 필요해." 보통 변화가 필요하면 머리를 자르거나 하는게 예사가아닌가? 아무리 예사롭지 않은 일 이라해도 대체 어느 누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애인을 갈아치우나? "셋째,당신은 남들과 다를게 없어." 아,이 말은 좀 아프다. 내내 입술만 향해있던 내 시선이 녀석의 거뭇거뭇한 눈으로 향했다. 이 얼굴은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다.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더라, 수수한 민낯으로 오빠-하고 어깨에 기대왔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럼 이만 갈께" 지고지순한 로맨스 드라마 대본으로 예습이라도 하고 온건지 빛 바랜 커플링을 커피잔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또각또각. 종아리에 알이 바짝선게 보인다. 녀석이 남기고간 진한 향수냄새가 옹골차게 코속을 채웠다. 커플링이 빠진 커피를 휘저으며 멍하니 있다가 컵에 묻은 립스틱 자국에 화들짝 깼다. 비상등이 켜진 듯 그제야 지금이 위급한 상황임이 상기된 나는 커피 에 빠진 커플링을 건져내어 소매자락에 슥슥 닦았다. 왜? 따위의 시시껄렁한거나 따지고 있을 시간은 내게 없었다. 그저 녀석이 없는 나를 애도하는 차원에서 머릿속에서라도 녀석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까페 특유의 포근한 분위기에 자꾸 맥이 풀렸으나 이내 정신이 갠 나는 나의 뇌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녀석들 중 내가 아는 녀석을 찾아낸다. 역시나 달랐다. 아까 그 여자는 대체 누구였는지 모를만큼 딴판이었다. 순수했던 미소며 풍기는 향기며 하다 못해 날 대하는 태도까지도. 줄곧 차이점만 죽 늘어놓던 나는, 문득 한 가지 '누'로 인해 뇌에서 튕겨져 나왔다. 번뜩 눈이 뜨였다. 한가지의 '누'. 그게 뭐지? 대체 뭐가 날 튕겨내었나? 의구심을 품은 나는 다시 한번 뇌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어지러히 널린 파편들을 헤치며 그 때의 녀석을 찾아 온갖 시냅스를 배회했다.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내 어깨를 따뜻하게 데워 내가 자각하게 만드는것 같았다. 굳이 헛기침 하지 않아도,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의 온기만으로도 난 느낄수 있었다.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녀석이, 녀석의 '누'가, 눈이. 자리에 일어났다. 이번엔 녀석에게로 걸어간다, 달려간다. 난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까 그 여자에게도 따뜻한 '누'가 있었다는 걸, 변한건 녀석이 아니라 나였다는걸. 나도 그렇고 녀석도 그렇고 남들과는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난 녀석이 남들과 달라서 좋아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미 녀석은 남들과 다른 것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나는 녀석이 있었고, 녀석은 내가 있었다. 난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벅차올랐다. 뇌에서 빠져나온 나는 거리에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나는 결국에 구석진 거리 어딘가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만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녀석이 타는 버스 정류장, 녀석이 자주가던 공원, 녀석이 자주 들르던 서점...들를곳은 다 들렸건만 여전히 난 혼자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활개를 치던 날개마저도 점점 떨어져 나간다. 순간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벤치에 앉아있는 그 '누'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아무렴 상관 없다. 이번엔 내가 녀석을 바라본다. 이제는 내가 내 시선으로 녀석의 어깨를 데운다. 이내 날 돌아볼 너에게 외치고 싶었다. 응,나는 그런 네 모습까지 모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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