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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니/온키] For A Moment | 인스티즈   

   

    

 



 

 00

 내가 뭘 본걸까.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직 물기가 가시지 못해 촉촉한 눈가를 문질렀다. 깊은 숲 속으로 펼쳐진 길 아래로 옅은 달빛이 드리웠다. 달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남자의 머리칼이 움직임을 따라 한 차례 옆으로 흩어진다. 내가 뭐랬어? 얼마 전, 남자로부터 건네져왔던 협박 아닌 협박이 귓전을 강렬하게 울렸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 귓등에 바싹 입가를 붙인 채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관능적이었다. 귓바퀴에 살짝씩 닿아오는 달큰한 입술의 촉감도. 섬뜩한 목소리와는 달리 뒷덜미를 주무르는 부드러운 손길도. 셔츠 바깥으로 갈비뼈 부근을 매만지는 가벼운 손놀림까지도. 어디 하나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 너 같은 것들은 가만히만 있어도 눈쌀이 찌푸려지는데.

- 거기에 나서기까지하면 얼마나 흉측하겠어….

- …그러니까.

 

닥치고 가만히 있어.

 

 

 

 

 01

 남자는 고 나이 때 사람들에 비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벼락 맞은 부자라고도 했고, 타고 난 천운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한, 남자는 결코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결코 제 진심을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친절로 둘러싸인 울타리 속에서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바깥의 모든 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할지 몰라도, 속은 비뚫어질대로 비뚫어져 썩은 내가 날지 모르는 그런 남자. 우리는 그를 이름 없이 '그'라고만 불러왔다.

 남자에게 있어 '그'는 일종의 이름이나 다름이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모임의 일원이라고 하나, 그가 실제로 그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은 커녕 남자의 얼굴을 바라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고는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의 태반은 남자의 굳은 인상 때문인 것 같았다. 남자는 확실히 얼굴이 어려보이는 편이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따뜻한 파스텔 톤의 옷을 입은 그를 볼 때면 기범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본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남자는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에 따라 나이대가 달라보이고는 했지만, 기범은 그 것이 비단 사람들의 좋지 못한 눈썰미 때문이 아니라 여겨왔다. 길쭉하니 보기 좋게 찢어진 눈매가 곱게 휘어질 때는 대학생 혹은 고 맘때로 보이다가도, 싹 얼굴을 굳히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권위적이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남자의 그 얼굴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기범에게 왜 그를 좋아하느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기범은 그들이 고심한 끝에 꺼낸 질문이라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선 그 입에 안주나 술잔을 쳐넣어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는데 거기에는 기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취약한 점이 걸려있었다. 기범은 남자의 얼굴을 싫어했다.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고선 제 아래 것들에게 이것저것 할 일을 지시하는 얼굴이 결코 상냥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가하면 기범은 남자의 얼굴을 사랑하기도 했다. 그런 남자의 얼굴이 간혹 환한 웃음을 그리며 휘어질 때에 기범은 그 뒷모습을 보며 남몰래 뛰어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기범이 사랑에 빠진 것보다는 이기심에 눈이 먼 것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 것은 기범과 그가 위치한 상대적인 위치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관계에 쌓여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도 이어져왔다. 누군가는 기범과 진기 더러 2인자와 3인자, 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기범과 진기 더러 영악한 여우와 벙어리라고도 했다. 기범은 그런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 그들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02

 기범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그 뿐이었지, 그에게 있는 감정은 딱히 무언가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미약하기만 했다. 질투도, 분노도, 승부욕도 아닌 애매모호한 무언가. 기범은 남자에 비해 가진 것이 많았다. 그 것은 절대 달라질리 없는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갖추고 태어난 것과, 타고 태어난 것.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미묘한 뒤틀림이 있었다. 겉으로 스치기엔 비슷해보여도 실상은 많이 다르다. 언젠가 누군가 말했다. 태어날 때 집안을 잘 골라 태어나는 것도 천운이라고. 흔히 속설처럼 떠도는 그런 말들이 정말로 맞는 것이라면, 기범은 신께 묻고싶었다. 자신이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가 비단 신의 선택 하나 뿐이었느냐고.

 두 사람을 분류하자면 기범은 갖춘 편에 속했고, 진기는 타고 태어난 편에 속했다. 정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범은 위로 두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그리고 호적 상에는 없었지만, 그 위로 네 살 터울의 형도 존재했다. 그를 형이라는 이름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을련지 모르겠으나, 기범의 유년기에서 진기는 '큰 형'으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 증거로 기범이 진기더러 형아, 큰 형아, 라고 부르던 영상도 존재했다. 지금 기범이 성인의 나이를 훌쩍 넘어 그 당시를 회고하기에, 진기는 그런 기범을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기범은 아직도 기억했다. 자신의 뒷머리를 복스럽다며 쓰다듬어주던 따뜻한 체온을. 기범의 생명이 고스란히 뛰고 있는 손목의 생명선을 따라 부드럽게 입술을 묻던 행동도. 그리고 그 뒤로 눈부시게 흩어져내리던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도. 그러나 이제와서 무엇하리. 누가 뭐래도 지금 기범과 진기는 상대적인 관계에 처해져있었다.

 확실히 진기는 기범은 이길 수 없다. 진기와 기범이 현재 서로를 뜯어먹지 않고는 설 수 없는 위치에 서 있 듯, 과거의 둘은 명백한 한 집의 식구였다. 핏줄이 다르고, 두 사람이 쓰는 욕실도, 거실도, 침실도. 모든 것이 다른 환경이었지만 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기는 상냥했고, 또 그만큼 기범에게 거짓없이 대했다. 어린 기범이 철 모르고 성인이나 되어서 갈 법한 유흥가를 들락날락거릴 때도 끝까지 그런 기범을 기다려주었던 건 진기가 유일했다. 찬란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한 기다림이었다. 그래, 이제 여기서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확실히, 진기는 기범을 이길 수 없었다.

 왜냐, 진기는 기범의 집 처마 아래에서 자란 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03

 기범은 이제와서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지나버렸다고 했다. 것도 그런 것이, 기범과 진기는 이미 한 식구라는 범위 안에서 흩어진지 오래였다. 나이가 차고 점차 몸과 마음이 커져가는 진기는 집 안 사람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어린 나이의 기범도 또렷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마음의 크기는 컸다. 간혹 진기가 머물곤 하던 침실은 오물로 얼룩져있기도 했고, 진기가 주로 담당하던 축사는 새로 들여온 아이에게로 역할이 분담되었다. 진기는 막 성년에 다다른 어린 나이에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쳐해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기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집 안의 천덕꾸러기 기범이었다. 사내아이답지 않게 고운 얼굴을 하고선, 표정 변화 하나없이 상스러운 욕설을 뱉어도 예뻐보이는 아이. 그게 기범이었다. 그리고 기범은 그 것이 누구도 아닌 당사자인 만큼 그 사실을 잘 알고, 또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기범은 진기를 도왔다. 설레이에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던 가슴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끝없는 우울의 나락 속으로 떨어질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으로 추락하려던 마지막에 그 손을 붙잡고 설핏 웃었다. 우울과, 절망. 괴로움으로 얼룩진 그 손바닥을 예수가 불쌍한 이들을 구원하듯 정성스런 손길로 매만져주었다. 굳은 살이 꼼꼼히 박힌 손등을 더듬으며 눈가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 아이의 손을 잡고 도망치라고. 이 아이를 업고 자택 너머로 사라지라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그렇게. 그리고 마침내 진기의 손에 남겨진 것은. 기범도, 집도, 돈도, 진기의 동생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아무 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약탈당해야만 했던 아랫처녀였다. 기범을 짝사랑하고, 기범만을 바라보던 순진하기에 짝이 없던 시골집 소녀. 기범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기꺼이 그녀의 선의를 받아주었다. 앞에서 말했 듯 기범은 영악한 기질이 있었다. 제때 치고 빠지기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치마를 들추고, 그 사이로 숨결을 앗아갔다. 그녀가 괴로워 할 것을 알았지만 애써 그녀를 매도하며 그녀의 손 옆에 진기를 딱 붙옂었다.

 기범은 그저 그 것 밖에 하지 않았다. 어지러운 듯 걸음걸이를 휘청이며 쓰러져가는 여자아이의 허리를 받친 진기는 영문도 모른 채 기범에게서 멀어져가야했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쁘게 상황을 훑으면서도 끝없이 식은 땀을 흘려대는 아이의 눈가를 매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고 난 성품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핏자국과 비릿한 액체가 눌러붙은 다리 사이를 곱다랗게 덮은 치마자락이 바람이 펄력였다. 진기는 근처의 바위에 여자아이를 앉히고선 그 옆에 앉아 여자아이의 눈가를 문질러주었다. 식은 땀인지,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기범아, 연이가 왜 이러는거야?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기범을 올려다보던 그 눈매를 아직도 기범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진기의 손을 매정하게 내치고는 웃었다. 진기가 좋아하는 선한 미소로 두 사람을 안정시켰다. 자신에게 내려질 판정을 기다리는 듯 잠자코 앉아있는 진기를 향해 기범은 사람들이 내려올테니 어서 집을 빠져나가라고 당부했다.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됐는지 여자아이 못지 않게 더운 낯빛을 한 진기는 뒤돌아 자택으로 돌아서는 기범을 향해 물었다. 무엇을 하러 가느냐고 묻는 그 얼굴에 대고 차마 진심을 말할 수 없어 기범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막으러 가. 어줍잖은 변명이 통할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진기는 어렸고, 또 상황은 긴박했다. 진기의 품에 안겨진 아이는 게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며 시름시름 누워가고 있었고. 먹구름으로 가득 메워진 하늘에서는 봄날 답지 않게 추적추적 비를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멍청하게 저를 믿고 있는 저 청년도, 그 옆에 거추장스럽게 매달릴 처녀도,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단순하게 만드는 이 우울한 날씨도. 멀쩡한 사람을 망치는 것 만큼 쉬운 일이 없었다. 

 기범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고 있었다. 기범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그래서, 했다. 진기와 연이를 뒤에 둔 채로 자택으로 달려가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을 열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를 향했다. 기다란 무채색의 복도를 걸으며 수없이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지금껏 자신이 진기와 행했던 일들이 빠르게 눈 앞을 스쳐갔다. 마침내 서재의 문이 열리고 어렴풋이 들리는 빗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매만졌을 때, 기범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눈을 꿈벅였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고 입을 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서글프고, 간절한. 괴로움이 만연히 드러난 눈짓으로 그에게 말했다. 진기가 소녀를 약탈했노라고.

 

 

 

 04

 진기는 그 날로 집에서 추방당했다.

 

 

 

 05

 그 이후 진기가 처음으로 나타난 건 기범의 아버지가 대선 출마로 자주 집을 비우던 어느 겨울 날이었다. 매섭게 몰아치는 눈바람을 피해 집에서 꼼짝않고 TV 시청에 여념이 없던 기범은 새롭게 국회를 메울 의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어내는 아나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새를 훑어내는 눈빛이 건조했다. 두터운 이불을 끌어 발 끝까지 덮어낸 기범은 주섬주섬 소파에 자리를 잡더니 무성의한 표정으로 마저 TV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자유통합당 박선웅 의원. 자본선진당 신정호 의원…. 아나운서의 깨끗한 음색을 타고 들려오는 이름들은 어려서부터 자주 대해왔던 아버지의 최측근들이었다.

 재미없어. 괜히 볼 것도 없는데 시간만 낭비한 건가. 새삼 차오르는 후회에 설핏 웃었다. 사실 이 채널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방송국에서는 이와 같이 개표현황을 알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즉, 이 채널이 아니더라도 기범은 강제로라도 그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허전해진 귓가를 손가락으로 비벼대며 이불 속에 조금 더 몸을 파묻었다. 음소거라도 해두고 잠을 청할 작정이었던 기범은 서툰 손길로 이불 속에 파묻힌 리모콘을 찾았다. 한참을 찾지 못하고 주변만 배회하던 손 끝에 딱딱한 리모콘의 끝이 걸리자 갑작스레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끊기고 정적이 감돌았다.

 뭐지? 급작스레 찾아온 적막함에 놀라 고개를 들기 무섭게 소름끼치리만큼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띄어졌다. 서울특별시 무소속…. 마지막으로 근 십 년만에 탄생한 최연소 국회의원의 이름이 불리었을 때 기범은 멍청하니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매몰차게 내버렸던 그가. 약하고 멍청해 남을 이용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해보이던 그가. 말끔해진 모습으로. 승리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06

 기범은 지금 이 상황이 기묘하고도 불편하다고 느꼈다. 숨 막힐 듯 고요함만이 감도는 실내에는 깨작깨작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길을 따라 기범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마찰하는 소리만이 유일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라리 웨이터라도 들어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방금 전까지만해도 줄기차게 열을 지어 들어오던 서빙메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문 밖으로는 기척 하나 없었다. 테이블의 맨 끝에 앉은 기범의 아버지는 그런 기범을 보고 눈치를 주었지만 정작 기범, 자신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개의치않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알 수 없는 자만감과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도취감 때문이고. 두번째는 일을 당하는 당사자가 도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치 못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치졸한 복수 따위의 것들이 저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그저 손에 묻혀지는 더러운 것들을 훔쳐내며 남몸래 사람을 해하는 행위에서부터 얻는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생각은 커녕,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범죄자가 그러하듯 기범 또한 그러했다.

 

- 조만간 만날 기회가 있을거다.

- 누굴요?

- ….

- 박 의원님이요? 하지만 박 의원님의 자제 분과는 저번에 이미 식사를 했는걸요.

- 박 의원이나 김 실장같은 사람이 아니야.

- 예?

- 이 의원을 만날거다.

- …이. 의원이요?

 

 그 말을 듣고도 기범은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눈 앞에 드리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대한민국에는 정치계 인물이 많았고, 그 중에서 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도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 중 기범과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무늬만 정치가문의 아들이었지 바로 위의 형에 비하면 사람들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었던 기범이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당측 역시 자신보다는 자신의 형인 기준을 더 탐내는 듯 보였고, 기범 역시 그 것에 반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면 좋아했지, 그 것에 반대하고 나서거나 형에게 시비를 거는 행동은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랬던 아버지가 왜 저를 데려가는 것일까. 왜? 왜, 하필 나를. 나보다 훨씬 총명하고 대외적인 마찰도 능숙하게 나서 처리할 줄 아는 형이 있는데. 어째서.

 

- 왜 형을 두고 저를 데려가시는 거죠?

 

 능숙하게 도로를 타고 미끄러지는 차제 안에서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굳은 표정으로 창 밖만 응시하고 있던 기범의 아버지는 한번 기범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 놈이 있어야 잘 걸려들 것 아니냐. 아버지는 늘 그리 말했다. 미끼가 좋아야 물고기도 좋은 놈이 잡히는 법이다. 어린 날의 기범을 향해 언젠가 뱉던 말을 십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자신이 어떤 미끼가 될지, 미리 그 바늘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버리는 미끼가 될지, 대어를 낚는 데 이용될 진짜 미끼가 될지.

 태연자약하게 뱉는 말에는 기범만이 알아차릴만한 가시가 수도 없이 박혀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새롭게 정재계에 등장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진기에게 눈독을 들이고 제 당으로 진기를 영입할 거라는 것도. 머지않아 그 일이 다가올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 수단에 제가 가담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가 새로운 정치계의 얼굴로 떠오르는 중인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이상한 거였다.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무소속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높은 개표율로 당당하게 명단에 이름을 올린 남자. 선한 얼굴 뒤로 어떤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를 남자. 기범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제 앞에 앉아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저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섬뜩해보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숙여진 진기의 얼굴을 살폈다. 전과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얼굴이었다. 십년에 육박하는 긴 세월을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치 당장이라도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 같은, 그 당시의 얼굴.

 

- 기범아, 인사해라.

- ….

- 어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한번 떨궈진 고개는 더 이상 받쳐줄 힘이 없다는 듯 힘 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진기가 먼저 손을 뻗어 인사를 청할 때가 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든 기범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다잡아가며 진기와 손을 맞잡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군데군데 굳은 살이 박힌 단단한 손등이 느껴졌다. 그 안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가락도. 더 이상 진기는 기범의 손을 꽈악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어가며 환히 웃지 않았지만 기범은 순간 저가 십대 때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큼 진기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보였다.

 

 

 

 

 


달별꽃

죄송합니다...! 일하는 남자들 중편은 아직 작성 중입니다ㅠ 거의 다 작성했는 줄로만 알았으나 어디엔가 써놓고 위치를 잊어버려서 그만 다시 쓰고 있는 중이라서..ㅠ   

아이고, 귀하디 귀한 온키에 떡손을 얹어서 괴상한 글이 만들어지고 말았네요. 혹시 그러실 분은 없으시겠지만, 혹여나 기다리실 분들을 위해 작게 써놓았던 글을 잘라 올려봅니다.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중편으로 찾아뵐게요..!   

 

    

   



 
독자1
ㅓㄹ...저 너무 좋아서,,소름 돋았잖아요 작가님..어서 다음글으류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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