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빙빙바 우현의 마음이 어떻든간에, 5년이란 시간은 무색하게도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성규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4번의 겨울이 지나가고, 이제 곧 5번째의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수 조차 없었던 성규의 죽음은 우현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듯이 우현 역시 성규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명수의 출판사로 서둘러 걸어가던 우현이 걸음을 멈칫했다. 아래를 바라보니 언제 풀려있었는지 모를 신발끈이 풀어져있었다. 품에 안고 가던 서류봉투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풀려진 신발끈을 천천히 동여매기 시작했다. 금방 묶더니 내려놓은 서류봉투를 품에 안고 늦었다,늦었어 하며 바쁘게 달려갔다. " 이번 작품도 훌륭하네. 남우현. " 봉투 안에 있던 종이뭉치를 읽어내려가던 명수는 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성종이 내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던 우현은 그럼,누구 작품인데 하며 베시시 웃었다. 아직 철없던 스무살, 멋모르고 써내려갔던 글을 엮어 명수의 도움으로 책으로 내자 기다렸다는듯 책은 불티나게 팔렸고, 현재 28살의 우현은 책을 냈다하면 금새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멋지게 잘 나가고 있다. 성규의 죽음으로 인한 3년동안의 공백기때문인지 오랜만에 잡은 펜이 어색했지만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좋은 작품을 써내려간 우현이었다. 이번에도 대박나겠다, 곧 출판준비 할게. 수고했어. 명수의 말에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곤 출판사를 빠져나갔다. 출판사에서 나와 올려본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성규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
' 저기요. '
농땡이 부리다가 명수에게 들들 볶여 간신히 기한에 맞춰 끝낸 작품이 담긴 서류봉투를 품에 꼭 안고 바쁘게 달려가던 우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급한데 어떤 새끼ㅇ.. 라는 생각을 하며 뒤돌았다. 흰피부에 얄쌍한 눈매. 붉은 입술은 우현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조차 잊고 성규를 빤히 쳐다봤다. 우현을 불러세운 성규는 아기처럼 베시시 웃으며 우현의 신발코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갑작스런 성규의 행동에 놀란 우현은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신발끈, 풀렸어요. 못 묶나 보네요? 맨날 지나가면서 그 쪽 봤는데. '
자신의 신발끈 마냥 척척 묶던 성규는 또 보자며 우현을 향해 살짝 웃고 뒤돌아 가버렸다. 늦으면 잔소리 마왕마냥 폭탄을 쏘아댈 명수를 잊은채 우현은 마법에 걸린듯 한동안 그 자리에서 성규가 사라진 방향만 쳐다봤다. 그러다가 벨소리에 놀라 전화를 받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후다닥 뛰어간건 비밀.
*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오랜만에 성규와의 첫만남을 회상한 우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현은 아직도 성규의 모든것을 버리지 못했다. 집안 곳곳에는 성규의 흔적이 오래 탄 손떼마냥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명수의 잔소리에 시달리고싶지 않으면 이렇게 여유있을 시간에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게 좋을 듯 싶어 우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재로 들어가 펜과 종이를 책상 위에 준비했다. 의도치 않게, 펜을 쥔 자신의 손은 '김성규' 석자를 적고 있었다. ..편지나 써볼까. 「 성규야 」
그의 이름에 아직도 반응하는 심장은 성규를 처음 본 날 처럼 쿵쿵 뛰기 시작했다.
「벌써 4번의 겨울이 지나갔어. 이제 또 겨울이 오려고 하나봐. 좀 쌀쌀하다. 」
넓게 트인 창 틈새로 조금 쌀쌀해진 바람이 우현의 뺨을 간질였다. 늘 이때만 되면 성규는 가디건을 입곤 했다. 어느날은 선물이라면서 커플 가디건이라며 맑게 웃던 그 모습이 너무 이뻐 눈을 떼지 못한적도 있었는데...
「그거 알아? 나 이제 신발끈 혼자서도 잘 맨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나름 잘해. 리본도 잘 묶고.」
어렸을 적부터 신발끈을 유독 못 묶던 우현에게 성규는 매일매일 묶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자꾸 까먹고 헷갈려하는 우현 때문에 성규는 두손 두발을 들고 못하겠다 니가 알아서 해! 하고 결국 신발끈이 풀릴때마다 우현의 신발코 앞에 쭈그려 앉아 묶어주곤 했다. 질리고 짜증났을 수 도 있었을텐데 성규는 늘 웃으며 묶어주었다. 이럴때 남우현은 애기같다고 하면서. 신발끈 하나 제대로 못 묶는 남자 누가 데려가나~ 내가 데려가야지 뭐~ 하고 장난스레 투덜거리던 성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직도 풀려진 신발끈을 묶으려 주저앉다가도 고개를 들면 성규가 자신의 앞에 쪼그려앉아 묶어주던 모습이 환상처럼 보여서, 모든게 멈춘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들때도 있었다.
「너가 자주하는 말투 중에 그거 있었잖아. ~하고 좋네요. 란 말투. 옛날에 그거갖고 놀렸던거 기억나?」
별것도 아닌일로 삐진 성규는 입을 툭 내밀고 남우현 때문에 기분이 참 괜찮고 좋네요. 라며 툴툴거리던 성규가 귀여워 입술에 쪽 하고 뽀뽀했더니 하얬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 마냥 빨개져 고개를 푹 숙여버린것이 더 보고싶어서 성규의 얼굴을 잡고 눈에도 쪽, 코에도 쪽, 양 볼에도 쪽쪽, 입술에도 쪽, 하다가 진한 키스로 이어졌다. 성규가 숨 막히다는 듯 우현의 허리춤을 쿡쿡 찌르자 그제서야 놓는 우현이었다. 해맑게 웃던 우현의 눈웃음은 성규의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나도 몰랐는데, 어느새 네 말투를 내가 따라하고 있더라. 그게 싫어서 말을 줄여보려고 했는데, 역시 안되는거 있지?」
명수와 만났던 날이었다. 명수가 가벼운 농담을 쳤고 우현은 헐 존나 어이없고 좋네요 라며 맞받아쳤다. 내뱉고 깨달은 우현은 아, 내가 아직도 김성규를 못잊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날 명수와 거하게 한 잔 했다. 한 잔이 아니라 여러 병이었다는게 문제였긴 했지만. 덕분에 다음 날 하루종일 변기통을 붙잡고 정신을 못 차렸었다.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잘 지내. 라고 쓰려고 했던 우현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느새 울컥 치솟은 눈물은 종이 위로 하나 둘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였던 펜은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 쓱쓱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못지내. 너가 없는 지금이 익숙해도 여전히 낯설고,」 「버텨지긴 해도 힘든건 여전하고,」 아직도 집안 곳곳 남아있는 성규의 흔적 때문일까.
「너를 놓아버린 듯 해도 여전히 넌 내 손끝에 닿아있어.」
아니면 책상 위에 올려진 성규와 우현이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 때문일까.
「성규야.」
뼈에 사무치던 그리움은 우현의 눈물을 더욱 흐르게 만들었다.
「널 지워낸 듯 하지만, 여전히 넌 내 안에 가득해.」
평생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기분이 안좋다고 그날 너에게 짜증내는게 아니었는데. 비가 오는 날이었고 그날따라 기분이 최저였던 우현은 괜히 성규에게 틱틱대고 짜증냈다. 아무말없이 받아주던 성규의 태도가 더 짜증났던건지 우현은 더욱 더 짜증을 냈다. 참던 성규도 한계에 이르자 우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성규에게 괜히 울컥해 우현 역시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말싸움을 하다가 이제 그만해야겠다란 생각이 든 성규는 우현을 조용히 안아주려했지만, 우현은 괜한 자존심에 성규의 손을 뿌리쳤다. 동시에 발이 미끄러져 성규의 몸은 삐끗했고, 우현이 성규를 잡을세도 없이 성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맘에도 없는 말들로 그렇게 널 보내는게 아니었는데.」 「장례식 날 너의 꿈을 꿨었을때 엄청 무서웠어. 멀어지는 니 뒷모습이,..」
나를,
떠나는 것 같아서.
너는 환히 웃고 있는데.
난, 난 너를,
쫓아갈 수 가 없어서....
「기억해?」 「또 다른 겨울이 찾아오면 모든게 다 잊혀질 거라고 했던 그 말.」
「성규야.」
펜을 쥔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우현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더 이상, 못 쓸거 같아.
성규야.
또 다른 겨울이 찾아와도
난 너의 모든 것을 잊지 못하고 있어.
사랑해. 남우현은, 김성규를 사랑해. 사랑한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