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지랄하네.”
우리가 스무살이었던 약 7년 전의 여름,
여럿 예능 방송작가들이 머리를 굴리고 굴려 만들어낸 케이블 대 히트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1997>을 보던 스무살의 배주현이 꺄아~ 하며 내게 어떡해! 라며 자신의 몸을 어쩔 줄 몰라했다. 극 중, 오랜 친구였던 윤제와 시원이의 노골적인 감정선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그 씬은, 무려 명장면이라며 페이스북과 온통 많은 기사들로 인터넷에 도배되었다.
어정쩡한 얼굴로 알 수 없는 표정의 성시원이. 그런 성시원에게 욱 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감추어 놓았던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던 윤제가. 왜 자꾸 오버랩이 되는지 몰랐다. 그 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브라운관을 바라보던 김민석이 내 머리를 툭 쳤다.
“왜 또.”
“나 배고파.”
“어쩌라고.”
“밥 줘.”
“선반 위에 라면 있어.끓여.”
“치사한 지지배.”
전지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김민석을 반기는 건 부모님과 여동생의 갑작스런 가족여행이었다. 덕분에 밥도 할 줄 모르는 김민석은 우리엄마의 구제로 일주일 내내 우리집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민석을 부른건 우리엄만데, 녀석의 뒤치닥거리는 내 몫이었다.
나의 매정한 말에 투덜거리던 김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텔레비전 소리에 거슬렸지만, 이미 주인공인 시원이에게 감정이입을 한 내게 들릴리가 없었다.
“야. 김여주.”
“어?”
“그러고 보면 너랑 김민석이랑도 저런 친구 아니냐?”
“그런가.”
“존나 실사판 시원이와 윤제네.”
고등학교 때 부터 줄곧 내 옆자리를 꿰찼던 배주현과 김민석은 같은 대학교에 입학까지 했다. 나름 영어영문학과 여신이라고 불리는 배주현이 자신의 몸을 기지개를 켜며 부엌에 있던 김민석과 나를 번갈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인다.
“남자로는 어때? 김민석. 잘생겼잖아.”
“친구야.”
“나같으면 바로 사겼겠다. 대체 왜 둘이 눈이 안맞지? 아오!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거야.”
“친구는 친구야.”
내 단호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주현과 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소파 위에 있던 배주현을 깔깔대며 웃게 만들었고, 내게는 당혹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친구?”
“...뭐냐, 김민석.”
“지랄하네.”
... 라면 봉지를 들며 장난스럽게 남자주인공 따라잡기에 나선 김민석 때문에.
남자와 친구 03
w.우리망고
회상1. 10대의 끝자락.
“대박. 김여주가 고백을?”
뒤에서 김준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어 내 심기를 잔뜩 건드리고 있었다. 어, 그래. 나 고백받았어. 그게 뭐. 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한 내 앞에는 배주현 때문에 종종 마주쳤던 변백현 녀석이 주고간 사탕바구니였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보며 앞을 달려야 한다는 내게 뜬금없는 봄이라니. 거기에다가 상대는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음악부의 변백현이었다. 옆에 앉은 배주현이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고백 받아줄꺼지?’라고 물어왔다.
글쎄. 어쩌지.
라는 나의 말과 동시에, 땀을 잔뜩 흘린 김민석이 헝클어져 있는 교복을 입은 채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김민석에게 제일 먼저 알은체를 한 김준면이 ‘김여주 고백받았대! 해가 서 쪽에서 뜨려나.’ 라며 먼저 선수를 쳤다. 김준면의 말에 아, 그래? 라며 장난스런 얼굴로 내 옆에 앉은 김민석이 사탕바구니를 하나하나 관찰한다.
“누가줬냐?”
“안알려줘.”
“2학년 변백현.”
“야! 배주현!”
“싫으면 나 주던가~ 난 백현이 웃는거 참 예쁘던데.”
입술에 틴트를 바르던 배주현이 맘에 든다는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아, 난 저 년 저렇게 웃을때마다 소름돋더라니. 괜시리 으스스해진 팔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사탕바구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사탕바구니를 관찰중인 김민석에게 스윽 내민다.
“먹고 싶으면 얘기를 해. 누나가 인심써줄테니깐.”
“나 그럼 이거 다줘.”
“뭐?”
“나 사탕 좋아해. 알잖아.”
그러면서 사탕바구니를 은근슬쩍 자기쪽으로 미는 김민석이었다. 이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김민석을 바라보자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그러더니, 김여주. 라고 내 이름을 부른다. 거기에 왜? 라며 내가 입을 삐죽이자, 김민석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가디건이 내 무릎 위로 덮어진다.
“치마 좀 작작 줄여라. 어?”
“지랄. 남이사.”
큼큼. 거리며 김민석의 가디건을 내 무릎 위에 쫘악 펼치자, 김민석이 사탕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배주현이, 야 어디가냐? 라고 묻자 김민석은 대답한다.
나혼자 사탕 먹게.
라며 어이없이 교실 밖을 나간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놈이다. 진짜로.
* * * * *
“아! 김종인 이 미친새끼가.”
지방에 가 계시는 아빠한테 간 엄마가 열쇠를 김종인에게 남겨주고 나가셨는데, 김종인 이새끼는 외박을 하려는 건지 도통 연락이 되지를 않는다. 한껏 짜증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문을 쾅! 하고 발로 차보지만, 그런다고 열릴리가 없다. 아, 진짜 내가 이래서 도어락 달자고 한건데! 옆집도 앞집들도 다 도어락인데 왜 우리집은 다음달에나 한다고 했던건지. 밤이라서 어두컴컴해서 싫은데. 짜증나는 마음에 들고 있던 수능 문제집들을 내려놓고는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김민석의 이름을 치고는 통화키 버튼을 누르자, 낮게 깔린 김민석이 전화를 받는다.
“자냐.”
[ 자려고. 왜? ]
“집에 민규있어?”
[ 아니. 나빼고 할머니네 내려갔어. 왜. ]
“잘됐다.야, 나.”
[ 엉. ]
“니네집 가도 되냐?”
워낙 어렸을 때부터 왔다갔다 했던 집이었지만 지금 시각은 밤 11시였다. 김종인 이새끼는 분명 어디서 잠이 든게 틀림 없었다. 밖에서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때문에 살짝 젖은 교복 와이셔츠가 잔뜩 찝찝했다. 오라는 김민석의 말에 냉큼 아랫층으로 내려가 똑똑 거리자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밖에 비와?”
“응. 아, 짜증나. 다젖었어. 남는 옷 좀.”
“아오, 김여주. 진짜.”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제집을 쏟아 내리고는 우리집인 것 마냥 뽈뽈대는 내 머리 위로 큰 타올형 수건이 덮어졌다. 그리고는 내민 김민석의 옷을 가지고 재빠르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능숙하게 팔에 걸려있던 머리끈으로 앞머리를 질끈 묶고서는 세수를 하고는 찝찝한 부분을 대충 씻고는 김민석의 옷을 입었다. 받았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하게 보니 중학교 때 지가 입고 다니던 축구부 유니폼이다. 다 버렸다더니 가지고 있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교복을 대충 잡아서는 나왔다.
“다 갈아입었냐?”
“응. 야 김종인한테 전화 없었지?”
“아무것도 안왔던데. 종인이 또 놀러나갔냐?”
“어. 걔 요새 미쳤어, 아주..”
뒤늦게 놀이바람이 난 김종인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다. 고삼되봐라. 나 처럼 뼈빠지게 공부하겠지. 소파 위에서 만화책을 보던 김민석 밑에 착. 하고 앉았다. 그러자 힐끔 나를 내려다보던 김민석이 다시 입을 연다.
“너 요새 왜이렇게 공부열심히 하냐?”
“대학가려고. 나는 너처럼 유달리 잘하는게 없어서.”
“어디가고 싶은데?”
“oo대.거기가 신문방송학과는 알아주더라.너는?”
“...나도”
“어?”
“나도 oo대 갈꺼라고.”
심드렁하게 대답을 한 김민석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하긴 거기 축구부도 유명한 것 같기도 하더라. 라고 중얼거리는 내가 소파 위로 올라가서, 김민석 옆에 착석했다. 아, 우리집처럼 편한 이 느낌. 주말 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독서실에 있었더니 온 몸이 노곤했다. 야, 민석아. 나 어깨 좀 주물러줘. 라는 내 말에 김민석이 나를 발로 민다. 밑으로 좀 내려가. 라는 말에 아 왜 발로 밀고 그러냐. 하며 투덜거리며 다시 소파 밑으로 내려가자 김민석이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다 놓는다.
안그래보여도 악력이 엄청나게 쎈 김민석의 안마를 받고 있으니 괜히 졸음이 다시 쏟아진다.
“야, 김여주.”
“응?”
“너 변백현 고백 받아줄꺼냐?”
“그건 또 갑자기 왜.”
반 쯤 감긴 눈으로 김민석의 말에 대꾸를 하던 내가 김민석의 안마가 멈추자 뒤를 돌아 김민석을 바라보았다.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김민석이 이내 내 머리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어루만졌다.
“너 머릿결 되게 좋다.”
평소와는 다른 김민석의 행동에 뭐하냐. 라고 대꾸를 하려던 내 말을 막은건 중얼거리는 듯한 김민석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말 없이 김민석을 바라보자, 김민석의 그 큰 손가락 사이로 내 길고 긴 머리카락들이 흩어진다.
“여주야.”
“..응?”
“너 저번에 생일쿠폰 준 거 있잖아.”
지난 달, 용돈이 없어 허둥지둥 만들어낸 쿠폰을 겨우 머릿속에 떠올린 내가, 갑자기 그건 왜. 라며 작게 김민석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거기에 첫번째 장에 있던거 기억해?”
“뭔데?”
“화 안내기 쿠폰.”
“...”
“나 그 쿠폰 지금 쓸래. 화 내지마.”
그게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나를 향해 김민석이 소파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던 손이 내 뒷통수에 가 안착했고,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천천히 김민석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침을 꿀꺽 삼키던 내 입술에 닿은 낯선 감촉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내게서 입술을 뗀 김민석이 자신의 남은 한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진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주야.”
라며 애절하게 부르는데, 나도 뭐에 홀리듯이 어..? 라고 입을 뗐다. 그러자, 다시 빠르게 다가온 김민석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얽히고 또 얽히는 그 혀끝의 감촉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다.
그렇게 10대의 끝 자락에 서 있던 열 아홉의 봄에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