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그 사람이 깨어났다. 다른 방을 소개하며 코너를 도는 순간,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고는 픽 쓰러져 버렸다. 이건 정말 연약한 공주들의 전개이거늘.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디가 갑자기 안 좋아진 건 아니겠지? 119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몸이 안 좋다고 했으니 그냥 일시적인 걸지도 몰라. 난 일단 그를 침대로 옮겨보기로 했다. 역시 좀, 가벼웠다. 엉거주춤, 쪼그린 상태에서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당겨 내가 업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리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옆 방을 헥헥 거리며 걸어갔다. 침대가 눈에 들어오자, 모든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그를 확 놓았지만, 비싼 침대여서 인지 그는 폭신히 침대 위로 안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그를 바르게 눕혀주었다.
일단 눕히긴 했는데 뭘 해야할지 몰라서 발을 구르다, 그냥 스탠드 책상 옆 작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 힘들다. 가벼워도 남자는 남자구나. 의자에서 살짝 엉덩이를 떼어 이불을 손으로 정리하며, 팔을 이불 밖으로 빼어내 주었다. 길고 흰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 곱다. 손도 얼굴만큼이나 깔끔함이 묻어났다. 눈이 가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 찰나, 그가 또 다시 신음을 낸 것이었다.
"아, 괜찮아요?"
"......"
그는 말 없이 천장을 향하던 고갤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옆 머리가 살짝 내려와 있었다. 나를 보던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고갤 살짝 숙여, 한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며 전개를 살피는 듯 했다. 난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또 다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내가 방을 보여주다가..."
"아, 아.. 괜찮아요!"
"처음 놀러오자마자 추한 꼴을 보여줬네요."
"정말 괜찮아요!.. 뭐... 조금 무겁긴 했지만. (웃음)"
난 뒷목을 살짝 긁적였다. 어쩐지 조금 전에 손을 뻗으려던 내 자신이 약간 부끄러워졌다.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순수한 그의 앞에 선 내가 조금은 찌들었다 느꼈다고 해야할까, 무튼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난 손사래를 치며 살살 웃을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꽤나 미안했는지, 살짝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를 조금 진정 시킬 겸,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빈혈이에요?"
"아... 네. 뇌빈혈이라네요."
"음... 어렸을 때부터 안 좋았던 거예요?"
"글쎄요..."
그는 우왕좌왕 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앉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겠어요. 그치만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음... 유전적인 거예요?"
"아뇨, 병원에서는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증상이 지속되자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고..."
"음.. 그렇구나... 그럼 약은요?"
"약은 그냥 어지럼증을 잠시 억제해주는 건데, 이렇게 갑자기 쓰러져버리면 소용이 없는 거죠. (웃음)
게다가 면역이 생길 테니 늘 복용할 수도 없는 거고..."
"......"
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특별히 별 생각은 없이 그냥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힐끔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덩달아 웃음을 새어내며 그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
"아... 미안해요. (웃음) 그냥 갑자기 심리치료사가 방문한 것 같았어요."
"어, 심리치료사가 오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어쩐지 받는 질문들이 그런 류인 것 같아서요. (웃음)"
내가 우스웠던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상황이 재밌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즐거운 웃음을 보였다. 나도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우리는 그 방에서 더 나가지 않았다. 방 소개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아마 이 때부터였나보다, 그 '집' 자체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였을 때가...
"그런데 왜 벌써 돌아가세요?"
"네? 아... 아무래도 학생 신분이다 보니... 돈이... 하하."
"...그럼 시간적 여유는 있으신 거예요?"
"...네? 아... 그야 뭐... 방학인지라..."
난 그렇게 대답하고는 테라스에서 가져온 비스켓을 하나 물었다. 음, 고소하고 맛있다. 역시 이거 무슨 해외 과자겠지? 그런데 이런 건 어디서 가지고 오는 걸까?
"저 혹시..."
"...?"
"이런 건 직접 나가서 사오세요?"
난 손에 든 과자를 보이며 물었다.
"아뇨, 이쪽으로 와주시는 분이 계세요. 제가 심심하지 않게끔 과자나, 그런 걸 두고 가시죠. (웃음)"
"아~! 집사!"
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런 집엔 역시 집사지!
나의 반응이 또 웃겼는지, 그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표현이 웃겼던가? 아무래도 한국에서 집사라고 하면 조금 어색한 표현이니까. 그는 나를 따라 비스켓을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물고는 웃음을 살짝 머금고 대답했다.
"네, 집사."
우린 웃었다. 하얀 침대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을 텐데도 마냥 좋아했다. 난 그의 비스켓을 먹는 옆모습을 조금 바라보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 지금 몇시죠?"
"지금... 1시 15분이네요."
"아.. 친구들한테 잠깐 나갔다 온다는 얘기도 안하고 나왔는데, 걱정할 지도 모르니까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아...."
난 부스러기가 조금 묻은 손을 털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한 발자국 딛으려는데, 그가 뒤에서 내 손목을 잡았다.
"점심... 먹고 갈래요?"
"...아...."
어쩌지. 거절하기가 조금 힘들다. 보통 같으면 친구들과 먹겠다며 거절하겠지만, 어쩐지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가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난 조금 뜸을 들이다가 그에게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 말만이라도 전하고 올게요. 밖에서 먹고 오겠다고."
"..네, 기다릴게요."
기다린다... 어쩐지 조금 아련하게 들려왔다. 내가 너무 심취했던 걸까? 그 집의 분위기에...
그가 자연스럽게 놓아준 손목을 확인하고 그의 맞은 편에서 뒤를 돌아 꾸벅 인사를 했다.
"과자 잘 먹었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얼른 다녀올게요."
그때의 난 또 다시 어디를 놀러가는 것처럼 조금 신나있었다.
...
다시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니들이 그렇지... 걱정은 무슨. 다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다. 난 오늘을 위해서 술을 그리 마시지 않았지만, 녀석들은 그런 것 따윈 없었으니 무지하게 마셔댄 것이다. 으휴, 이래선 깨면 해져 있겠다. 난 소파에서 뒹굴며 잠들어 있는 친구를 발등으로 툭툭 두어번 치다, 행동을 그쳤다. 어쩐지 점심을 먹고 온다고 하면 이 오지에서 어디를 갈 거냐고 물을 것이고, 그럼 저 집을 가르키게 될 것이고, 이것저것 더 캐물을 것이 뻔하다. 그냥 쪽지에 한두마디만 써놓고 가야지.
불쌍한 영혼들이여. 나는 멋진 곳에서 멋진 사람과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올 것이야.
'나 잠깐 산책 좀. -티-'
"와... 스파게티!"
이 집의 분위기와 잘 맞는 메뉴다. 게다가 레시피도 간단하고, 조리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으니 정말 딱이다. 센스까지 겸비했다. 정말 왕자님?
"사실 요리를 잘 못해요. (웃음)"
"아녜요! 저 스파게티 좋아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잘... 아, 보통 혼자 계시면 이렇게 드세요?"
"음... 좀 자주 먹긴 해요. 우리 집사님께서 제가 라면 먹는 걸 싫어하시거든요. (웃음)
그래서 덕분에 이렇게 피클도 직접 만들어주신 걸로 먹고 있죠."
"우와... 그럼 이젠 진짜로, 잘 먹겠습니다!"
조용한 집에, 내가 면을 흡입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음, 너무 큰소리로 먹었나. 달콤한 토마토 소스가 입 안에 퍼지자, 피클을 집었다. 역시 직접 만든거라 훨씬 아삭하고 상큼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여긴 분명 천국이다. 아니, 여기가 지옥이라도 거부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조용했다. 난 스파게티를 먹다 천천히 시선을 올려다봤다.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웃음) 불쾌하게 만든 건 아니죠?"
"네. 그런데... 안 드세요?"
"...수경 이모말고 누군가랑 마주 보고 밥 먹는 게 오랜만인 것 같아서요."
"..수경 이모요?"
"제 집사님이요. (웃음)"
그리고 그제서야 그가 포크를 들었다. 아, 그럼 그분이 오시지 않는 날엔 이 넓은 식탁에 혼자서 밥을 먹는 구나. 왠지 자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가 나올 무렵, 그가 문득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포크가 있었네."
"....푸흡."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가 몇 번이나 왜 웃느냐고 물어봤지만 난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진짜 가야겠네요.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또 오세요."
"음... 내일 일찍 출발만 안하면 또 들를게요."
"......"
"그럼..."
내가 살짝 고갤 숙여도, 그는 말 없이 날 지켜볼 뿐이었다. 난 살짝 갸웃했다. 아쉬운 걸까? 그치만 어쩔 수 없는 걸. 나도 내 생활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집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어제처럼 또 그 하얀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 역시 멋지다. 그리고 시선을 내렸지만 오늘은 그가 서있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으려나. 또 혼자서 쓰러져있진 않겠지. 난 잠시동안 멈칫하다, 다시 걸음을 떼었다.
...
"야, 무슨 산책을 그렇게 하다 와?"
"내가 언제 나간지 알고."
"그래도 우리 깨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몰라. 꽃사슴이랑 놀고왔다, 왜."
오두막집에 도착한 나도 어느 새 피곤해져 있었다. 음, 역시 저 언덕길을 세번 오르는 건 힘든 일이야. 내가 터벅터벅 2층 계단을 오르려는 그때, 오두막집의 전화가 울렸다. 음? 부모님이려나? 난 올라가려다 말고 가만히 서서 그 전화의 주인을 기다렸다.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네. 네? 아... 정말요?"
응? 무슨 일이지? 가족이면 존댓말을 쓰지 않을 거고... 여기 주인이라도 되는 건가?
친구는 곧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허공에다 몇 번 주먹을 쥐고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더니 기쁘게 말했다.
"야, 여기 주인이 며칠 더 있어도 괜찮대. 아직 예약 손님 없다고."
"에???????"
그건 내게 기회처럼 둘려왔다. 어떤 것에 대한 기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를 쉽게 놓치지 말라는 의미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