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시리즈 ; 저녁노을 속의 남학생
브금 : Friends - 정성하
특별히 브금선택하는데 공들였어요ㅠㅠ 꼭! 들으면서 봐주세요!
내 고등학교는 상당히 언덕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곳은 재학생들에겐 운동하기 좋은 곳이나 다름없었고, 졸업생들은 언덕을 탈출 할 수 있다며 기뻐했으며 곧 입학하는 신입생들에겐 3년동안 다녀야 한다는 좌절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나는 이 고등학교에 온 이유는 딱히 없었다. 집과 가까웠고 ㅡ그래봤자 버스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야하지만ㅡ 다른 고등학교에 비해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이 많았으며, 교복이 예뻤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 내게 이 고등학교를 추천해준 것은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며 이 곳에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권유이기도 했다. 나는 군말없이 제 1 선택사항에 적어냈고 보란듯이 합격했다. 고등학생이 되고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를만큼 정신없이 치여살았다. 남녀공학이지만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은 되지않았다. 오히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많이 배려해주고, 여학생들도 그렇게 드세진 않았다. 정말 순수하다, 라고 느낄정도로 아이들은 모두 해맑았다. 그 흔하디 흔한 욕도 가끔 들릴 뿐이였다. 허세에 멋들어 사는 아이들도 없었다. 누구나 바라는 고등학교라며 심심찮게 페이스북에 올라오곤 했다. 나는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남색 민무늬 치마에, 하얀색 와이셔츠 그리고 검정색을 바탕으로 하고 노란색으로 V가 들어간 넥타이가 교복이였다.
남학생들을 위한 운동장은 넓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그리고 쉬는시간과 점심시간 때는 이 운동장이 남학생들의 차지가 되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니고 땀을 흘리는 남자아이들은 축구나 농구를 하며 친구들과 친목을 쌓았다. 선생님들은 그 모습을 보고 청춘이라며 잔잔하게 웃거나 가끔씩 아이스크림을 쏘기도 했다. 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러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에 나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보이는 열 댓명의 남학생들이 자주 보였다. 왁자지껄 떠들며 여기로 패스라하는 김지원, 골 먹히기 전에 빠르게 뛰어가는 구준회,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상대편 골키퍼 송윤형, 다가오는 골에 긴장하고 있는 정찬우, 천천히 뛰어오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있는 김동혁, 옆에서 태클을 걸려고 시도하는 김진환, 그리고 우리반이자 지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축구공과의 당사자, 김한빈이 있었다. 정찬우는 멀대같이 큰 키에 마른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엉거주춤하게 공이 오가는 곳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지원에게 패스하고 빠르게 골 근처로 달려나가는 김한빈은 김진환의 방해공작을 피하면서 김지원과의 호흡을 맞춰나갔다. 와, 멋지다. 내 친구는 이야기하던 것도 멈추고 입을 떡 벌리고 쳐다봤다. 김한빈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며 김지원에게 받은 골을 골대를 향해 발로 힘껏 찼다.
골!! 김지원의 큰 목소리가 운동장을 울렸다. 곧이어 우리 옆에서 우하하, 웃는 남자선생님들. 이 녀석들! 잘했다. 초임하신 남태현 선생님이 어색하게 말하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에 맞춰 김지원과 김한빈, 그리고 송윤형은 두 팔을 번쩍들어 같이 흔들었다. 남태현 선생님과 친한 사이로 보이는 송민호 선생님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장난스럽게 화를 냈다. 아이고, 이것들아! 골을 막아야지! 그래도 입은 웃고있는 터라 구준회, 정찬우, 김진환은 헤헤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땀과 더움에 붉게 달아버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웃고있었다. 김동혁은 남자치고 살짝 얇은 미성의 목소리로 소리높혀 말했다. 쌤들! 저희 잘했죠! 그에 남태현 선생님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좀 볼만했어, 오랜만에. 와, 그럼 쌤요! 저희 아이스크림 사주시면 안 될까요? 김지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송민호 선생님은 우리가 사야되는거냐며, 주머니속에 지갑을 꺼냈다. 일곱 명 모두 오오, 하면서 잔뜩 부추기는 목소리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것들아, 우리가 졌어! 아이스크림만 사와라, 딴 거 사오면 뒤지게 혼날 줄 알아! 송민호 선생님은 그들을 향해 지갑을 던지며 말했다. 네에! 힘차게 대답하는 일곱명은 쫄래쫄래 지갑을 줍고 학교 매점으로 달려나갔다. 좋을 때야, 남태현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좋을 때지."
"그러게, 우리가 고등학생 때도 재밌었는데."
"수능 준비하는 것 빼곤 다 재밌었어, 영화도 보고."
"그니까, 아-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싶다."
송민호 선생님은 멋드러지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친구는 지겹다고 투덜거렸다. 정작 우리는 지겨운데, 안 그래? 친구의 동의를 얻는 말에 엉겹결에 동의했다. ㄱ, 그러게. 휴,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모의고사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친구는 중얼거리며 발장난을 쳤다. 나는 친구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운동장에 홀로 남은 축구공을 응시했다. 흙에 잔뜩 뒤덮힌 축구공은 뜨거운 열기에 이리저리 치인지 오래. 김한빈의 축구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여학생들이 꺅꺅 거리며 응원할 정도로 그는 우리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축에 속했다. 멋지긴 하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 보면 볼수록 사람이 진국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옆에 있던 친구는 결국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을 짓는 행동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래, 학원을 다녀야겠어. 친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열심히해서, 보란듯이 김진환 이겨버릴꺼야! 김진환은 기숙사학생이였다. 그만큼 친구의 라이벌이기도 했으니까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이 자주 보이곤 했다. 김진환, 고것 진짜 별꼴이라니까. 친구는 투덜거리며 벤치 턱걸이를 탕탕 쳤다. 남태현 선생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왔다. 어어, 거기 있었네? 송민호 선생님도 덩달아 우리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빈이 하는 거 봤지? 남태현 선생님은 팔자눈썹을 자랑하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남태현 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이기도 했다. 그 말은 즉슨 김한빈도 나와 같은 반이고 남태현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축구하는 거 보니까 어때? 설레지 않냐?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친구는 송민호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서 투덜거림을 계속 진행했다. 선생니임- 요번 모의고사 어떡하죠? 왜, 무슨 일 생겼어? 송민호 선생님은 쓸데없이 다정했다. 친구는 그의 장단에 신이 나서 와다다 입을 털기 시작했다. 아니요, 김진환이랑 내기했는데 제가 질꺼같아요. 왜, 진환이가 너무 잘해서? 아이참! 여기서 진환이 성적 말하면 어떡해요, 저 공부하기 싫어진단 말이예요. 친구는 송민호 선생님의 눈치없는 말에 짜증을 부렸고, 송민호 선생님은 뭐가 좋다고 허허 웃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털썩 앉은 남태현 선생님은 이미 다 마시고 난 커피를 짤랑거리며 내 앞에 흔들었다. 오늘 더운데 마실 건 챙겨왔니?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애들이 사오면 너도 좀 나눠주겠다며 다리를 꼬았다.
애들이 사오긴 할까. 나는 삐딱한 마음에 입만 삐죽였다. 선생님은 근처 쓰레기통에 커피잔을 버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여름방학인데 뭐 하고싶은건 있니? 선생님은 음악담당이셨기에 유독 음악동아리에 든 나와 김한빈을 챙겼다. 편애하냐는 말도 가끔 나오긴 했는데 그가 모든 학생들에게 친절한 걸 보면 그런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기타를 배우고싶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손뼉을 짝 치며 자기 친구 중에 기타를 정말 잘 치는 친구가 있다고 기뻐했다. 요번에 가수 지망생인데 너희보고 좀 가르치라고 해야겠다, 노래도 좀 끝내주게 잘하거덩.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려하게 손가락을 놀리기시작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송민호 선생님과 말하고 있던 친구는 이제 자기 담임선생님께 가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송민호 선생님은 나와 친구의 부담임이셨기에 좀더 친근한 걸지도 모른다. 걸어가는 내내 송민호 선생님과 말장난을 치는 친구의 뒷모습이 파스텔 색깔을 섞어놓은 마냥 연하고 예뻤다. 눈을 비비적 거리자 먼지가 들어갔냐며 내게 묻는 선생님.
"아뇨, 그런건 아니예요."
"정말이지?"
"네."
내 대답과 동시에 이 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학생들의 군단목소리였다. 딱 봐도 저음에 크고 바락바락하는 목소리였다. 나도모르게 움찔하고 선생님 쪽으로 아예 몸을 비틀었다. 선생님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얼굴을 덮자 그가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기를 5분, 누군가 내 뒤에서 선생님! 하고 걸어왔다.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아이스크림을 사온 모양이였다. 오냐, 수고했어. 선생님은 지갑을 건네받고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비닐봉지를 갖다준 남자아이와 눈을 잠시 마주치곤 바로 피했다. 흠, 선생님은 짧막하게 목소리를 내고 피식 웃었다. 아이스크림 몇 개사왔어? 비닐봉지를 건넨 구준회가 머뭇거리며 하나둘 숫자를 센다. 하나, 두울, 세엣... 아홉 개 사왔어요. 그는 송민호 선생님은 어디갔냐며 조금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그런 성격인 듯,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얘 친구랑 교무실갔어. 그러자 구준회가 이해했다는 목소리로 아아, 하고 말소리를 줄였다. 이윽고 또 웅성거리며 차례차례 올라오는 남자아이들에 자꾸만 몸이 경직되었다. 와, 선생님! 저희 왔어요. 김지원과 송윤형이 밝은 목소리로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두다다 거리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경쾌했다.
선생님이 뭐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냥 단체로 같은 거 샀지요~ 애교섞인 그의 목소리에 선생님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으이구, 이녀석아! 나는 카푸치노 맛 아니면 안 먹는다고 했지!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송윤형이 죄송하다며 낄낄 웃었다. 다음엔 그거 사올께요~ 송윤형, 너 그 말만 벌써 세번째야, 욘석아. 그래도 선생님은 송윤형이 들고온 비닐봉지에 손을 넣고 하나를 꺼냈다. 차가운 기운이 절로 풍겨오는 막대아이스크림이였다. 그는 시원하다며 잠시 볼에 갖다대고 있었다. 김지원은 선생님 옆에 아이스크림 봉지를 놓고는 자신도 아이스크림을 물기시작했다. 김한빈이랑 애들은 왜 안오냐? 이제 좀있으면 올껄요? 그의 말을 함과 동시에 복잡하게 얽혀오는 남학생들의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거 내꺼야! 하씨, 내가 먹을려고했는데. 오늘 공은 전적으로 김동혁한테 몰아줘야하니까 군말없이 있자, 김한빈. 김진환의 마지막 목소리에 정찬우가 어, 선생님! 하며 아는 척을 해보였다. 오냐, 왔냐! 선생님은 격하게 맞인사를 하며 벤치를 탕탕 쳤다. 일곱 명 다왔네, 오늘 수고했고 다음엔 좀 더 좋은 경기를 보여주도록! 선생님은 훈화말씀을 늘어놓는 것 마냥 엄숙하게 말했다. 일곱 명 모두 킥킥 웃으며 네에, 하고 대답을 했다. 근데 얘는 누구예요? 구준회가 무심하게 나를 툭 쳤다.
아, 얘는 우리반 학생이야. 예쁘지않냐? 선생님은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며 소리높혀 웃었다. 구준회는 엑- 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아니, 예쁘다 아니다는 둘째치고 왜 스킨쉽하는 건데요? 구준회의 목소리에 선생님은 뭐가 불만이냐며 그의 팔을 주먹으로 장난스럽게 때렸다. 악! 선생님! 아프다니까요! 선생님의 손맛은 꽤 매운편이였다. 나는 선생님 팔 속에 갖혀서 이게 뭔 상황인가를 되짚어보고있었다. 괜히왔나. 나는 치마를 꽉 쥐고 다리를 슬금슬금 모았다. 너희가 몰라서그래, 얘가 얼마나 착하고 순한데? 선생님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갑자기 넥타이가 불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김동혁이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아청아청하다는 드립을 날렸다. 그에 선생님이 너 태도점수 깎는 수가 있다며 협박을 해대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동혁, 까아불구 있어. 선생님은 별거아니라는 듯이 으스댔다. 눈을 요리조리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아이스크림을 든 손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서 팔의 주인을 보니 다름아닌 김한빈이였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한 번 흔들었다. 이거 먹어.
"..."
"안 먹어?"
"엑, 한빈이 형. 그럼 형은 뭐 먹게요?"
"오, 김한빈. 왠일이냐? 아이스크림을 다 나눠주고?"
선생님과 정찬우가 차례차례 물어왔다. 나는 자꾸 은근 재촉하는 그의 손짓에 얼결에 두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김한빈은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나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들고있던 작은 페트병을 땄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따지는 페트병을 짤랑짤랑 흔드는 그는 뭔가 여유로워보였다. 이거 마실려고. 아이스크림 안 먹어요? 정찬우의 질문에 김한빈이 대답했다. 엉, 오늘은 안 끌린다. 곧이어 김동혁이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반박을 넣었지만. 형, 아까 아이스크림 사러갈때 제일신났던 게 형인데 그래요? 아니 이게 말이여, 방구여. 김동혁은 혀를 쯧 차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무는 소리를 냈다. 츄릅, 하고 그의 입에서 달큰한 소리가 났다. 김한빈은 묵묵히 물을 마시며 김동혁의 말을 무시했다. 가만히 있던 김진환이 김한빈을 툭 쳤다. 김한빈이 김진환을 한 번 쳐다보고나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 물을 문 채로 웃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였다. 나는 주저하다가 아이스크림 봉지를 까고 다시 눈을 요리조리 굴렸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였다. 먹자하니 좀 눈치가 걸렸다. 나도 사람이니까.
결국 나는 김한빈의 손목을 잡고 그의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오올, 하고 김지원의 바람넣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기에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이 확확 들었다. 김한빈은 내가 다시 돌려준 행동에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뭐야?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한참동안 버벅거리다가 아이스크림을 쥐어준 손을 슬쩍 떼며 말했다. 너꺼잖아. 그러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괜찮다니까, 너 먹어도 돼. 그의 말에도 나는 완강하게 다시 받지않았다. 지금 더울텐데 빨리 먹어. 나는 한술더떠서 그에게 말했다. 구준회가 옆에서 동의하며 부추겼다. 그래요, 형. 형 지금 물로가지고 안 되는거 다 알거든요? 빨리 먹어요, 녹을라. 김한빈은 내 얼굴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멍청하게 아이스크림이랑 물통을 들고서.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꾹 참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김한빈은 결국 한숨을 푹 쉬고 물병을 내게 건넸다. 또 마시라는 건가? 속으로 내뱉을뻔한 말을 겨우 삼키고 그를 다시 올려다봤다. 김한빈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내 손에 물병을 쥐어줬다. 일단 갖고있어. 그건 왜 주는거야? 김동혁이 옆에서 은근슬쩍 물어왔다.
일단 나 아이스크림을 먹어야하고, 또 나중에 간단하게 뭐 먹고싶으면 말해. 사줄께. 그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었다. 한 박자 늦게 이해한터라 멍 하게 물병을 들고 있자 뒤에서 남태현 선생님을 포함한 일곱 명이 오올! 하고 큰 소리로 바람을 심었다. 김한빈, 왠일이야? 이거이거 그린라이트구만? 김지원이 촐싹거리며 김한빈 옆에 섰다. 김한빈은 가볍게 무시하고 아이스크림을 퍽퍽 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햐, 좋겠다. 김한빈을 부려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아, 선생님. 그건 아니거든요. 김한빈이 삐죽빼죽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부려먹는다는 말은 좀 하지마세요. 듣는 사람이 오해해요. 선생님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은 뒤에 기지개를 폈다. 쭉 뻗은 그의 팔다리가 시원하게 펴졌다. 아, 잘 쉬었다. 다음시간 5교신데 너희 수업시간 뭐냐? 선생님은 친숙하게 일곱명에게 물었다. 가장 고령자인 김진환ㅡ복학생이다ㅡ이 헛기침을 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화학이요. 그러자 같은반인 김지원이 으윽, 하고 괴로워하는 소리를 냈다.
"김진우 선생님한테 배우러가는거지?"
"네. 그 선생님은 너무 조심스럽게 가르쳐요."
"사람마다 가르치는 방식은 다르단다."
선생님은 어쩔수 없다며 킥킥 웃었다. 김지원과 김진환은 같은 반이였다. 김동혁과 구준회는 같은 반 동급생이였고 정찬우 혼자 다른 반이였다. 김한빈과 나는 같은 반이였고 송윤형도 다른 반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은 우리학교에 6반 뿐이였다. 그 중에 3반은 문과, 3반은 이과였다. 김지원과 김진환은 문과였다. 송윤형과 김한빈은 이과였다. 선택사항에 아직 들지않은 김동혁과 구준회, 정찬우는 1학년이였다. 김지원과 김진환은 때마침 가봐야겠다며 멋쩍은 인사를 건넸다. 오늘 재밌었다, 다음에 또 이기자. 김지원의 말에 정찬우가 울컥하며 소리쳤다. 아오! 형! 안돼요! 다음엔 저희가 이길꺼예요! 그러자 김지원이 낄낄 웃으며 맘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곤 유유히 사라졌다. 김동혁과 구준회도 아이스크림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고나서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정찬우는 가장 막내답게 애교섞인 웃음을 지으며 김한빈과 선생님께 인사를 건네고 건물안으로 뛰어갔다. 송윤형도 아이스크림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긴 후에 사라졌다. 순식간에 3명이서 남아버린 공간에는 어색하기만 했다. 김한빈은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고 선생님을 쳐다봤다.
우리, 다음 음악인데요. 그러자 선생님이 그렇냐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에도 꼭 이겨야한다? 선생님은 은밀하게 속삭이며 조용히 웃었다. 당연하죠. 김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툭툭 쳤다. 같이 들어갈래? 그의 말에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치마를 탁탁 털고 김한빈 곁에 가까이 섰다. 선생님은 김한빈을 힐끔 보고 소리죽여 웃는 시늉을 했다. 한빈아, 힘내. 선생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한빈을 힐끔 보니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 아오. 선생님! 그냥 가세요! 김한빈은 뭐에 찔린 사람마냥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선생님은 알겠다며 손사례를 치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나와 김한빈만이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멍 하니 입구만 바라보고 있는데 김한빈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축구 처음부터 봤냐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더라, 너. 그러자 김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어릴때부터 좋아했어. 응, 그렇구나. 나는 김한빈과 말이 처음이였기에 뭐부터 말을 해야할지 버벅거리고 있었다. 김한빈도 더듬거리며 말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일단 반에 가자. 오늘 많이 더운데 아이스크림 안먹어도 괜찮겠어? 나는 그의 넘치는 배려에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으, 응. 괜찮아.
그 때부터 김한빈은 나를 알게모르게 챙겨주곤했다. 체육시간 때 실수로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체육복이 내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비가오는 날에 우산이 없어서 쩔쩔매고있다가 지나가던 김한빈이 우산을 억지로 건네고 가곤했다. 그리고 그는 음악동아리에서 자리를 내 옆으로 옮겼고 슬금슬금 내 마음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알게모르게. 그는 젖은 종이에 분홍빛 파스텔톤 물감을 뿌려놓은 것 마냥 그렇게 내 마음에서 번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순식간에 나는 김한빈이란 남자아이에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완전히 쳐다보진 못해도 옆태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일상이 되버렸다. 반에서 자리도 내 앞이였기에 나는 수업시간을 핑계로 그의 뒷모습을 실컷 볼 수 있었다. 김한빈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건지 챙겨줌이 일상화가 되어서 여자아이들을 뒤로하고 내 안색을 먼저 살폈다. 어디아파? 그는 내 이마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싸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볼 때 얼굴이 그만 새빨갛게 변해버려서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이 달아났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모의고사가 있었다. 반 아이들은 급하게 채점을 돌리고 대충 점수를 적어낸 뒤에야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와, 놀자! 반에서 가장 잘 놀기로 소문난 남자아이가 반장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고 먼저 뛰쳐나갔다. 그를 시작으로해서 반 아이들이 슬금슬금 점수표를 내고 도망치듯이 반을 나간건 비밀. 나는 가장늦게 점수를 매기고 반장에게 건넸다. 반장은 내 점수표를 받으며 물었다. 오늘 공부하고 갈꺼야?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적당히 하라며 장난섞인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열심히해. 반장도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서로 좋은 경쟁자가 되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 반장이 오늘 당번이 학교 대청소에 모두 집합했다며 같이 하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알겠어, 근데 오늘 당번이 누군데? 내 질문에 반장은 인상을 찌푸리고 기억을 되뇌이고 있었다. 음, 오늘이 몇 일이지? 6월 12일. 아, 그래? 12번이랑 같이 하교해! 반장은 핸드폰에 전화를 걸며 대충 대답했다.
반장이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듯 공손하게 말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맞인사를 해주며 반장을 보냈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않자 가방에서 얇은 문제집을 하나 꺼냈다. 가장 약한 과목인 수학이 부족해서 오늘 모의고사를 많이 망친건 사실이다. 어떡하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필통에서 샤프를 꺼냈다. 풀려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시간을 보니까 30분만 공부하고 갈까,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 잠시 고민했다. 수위아저씨가 들리는 시간은 6시고 지금은 5시를 가르키고 있었기에.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이어폰을 꼽고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어제 6번 틀렸는데 6번부터 다시 풀어야겠다. 휴, 이걸 어떡하냐. 벌써 마음은 모의고사 시험지 OMR카드에 집중이 되있었다. 9월에도 기회가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건 마인드컨트롤만 하면 된다. 이어폰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눈은 오로지 문제집에만 고정한 채 샤프를 천천히 움직였다. 흑연이 흩날리면서 내가 적어놓은 샤프가 문제집에 써지고 있었다. 아, 헐. 이 문제 아까 비슷했는데.
아, 어떻게 풀지. 결국 몇 문제 못가고 샤프를 입에 문 채 초조하게 눈만 움직였다. 진짜 최악이다, 수학. 정말 제일 싫어. 과학이 제일 쉽단말야.
"야!"
누가 내 책상을 덜컹 건들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쳐다보니 김한빈이 책가방을 어깨에 맨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별걸 다 본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기에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 오늘 당번인데. 그가 그렇게 말하고 시계를 가르켰다. 지금 5시 30분이야, 가자. 김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내 문제집을 덮고있었다. 지금 안 가면 812번 버스 놓쳐, 너 보니까 나랑 집 같은 방향인거 같은데 잘 됐다. 그의 왼쪽 손에는 축구공을 담은 가방이 들려있었고 약간 쾌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뭐하고 왔어? 내 질문에 김한빈은 민망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모의고사 끝난 기념으로 애들이랑 축구 한 판 땡기고 왔지, 오늘은 너가 일찍 간 줄 알았는데 반에 있어서 좀 놀랬긴 했다. 김한빈은 어찌됐던 간에 서둘러 가자고 나를 끊임없이 쪼아댔다. 아, 어. 얼결에 대답을 하고 굼뜨게 샤프를 필통에 느릿느릿 넣었다. 성질이 많이 급한지 김한빈은 내 책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주는 배려까지 베풀었다. 너 원래 이렇게 느려? 그의 질문에 솔직히 조금 울컥했다. 아니거든, 너가 있을줄 몰라서 그랬어! 갑자기 누가 와서 책상을 건드는데 누가 안 놀래냐? 내 울컥한 말에 김한빈은 호기스러운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겠어, 그리고 그는 씨익 웃었다.
"그래도,"
"..."
"지금 해 지고있는데 빛이 직광으로 들어와서 너를 비췄거든."
"아, 그래서 뜨거웠구나."
"몰랐어? 붉은색 빛이 그대로 너 머리에 비췄는데."
"아, 당연히 알았는데 무시했ㄱ,"
"예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천천히 헝크러뜨렸다. 다시한번 마주친 김한빈의 웃음도 포함해서.
머리묶고 다니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지는 내 머리카락이 느껴져서 나도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묶으면 못생겼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긴 머리카락은 사치였지만, 나는 그래도 머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김한빈은 어이없다는 웃음으로 음료수를 한 입에 털고는 내 앞에 섰다. 아직도 넘어가는 저녁석양이 강렬해서 눈이 부셨다. 김한빈은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머리끈을 하나 꺼냈다. 야, 이거 어디서났어? 도무지 여자에 관련된 물건을 갖고다닐것 같이 안생겼는데. 그러자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내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내 동생이 여동생이여서 하나쯤은 갖고다니는거야. 준비성이 철저해보인다는 내 말에 그가 바람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머리묶어줄께, 뒤 돌아봐. 그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손가락으로 빙- 두르는 시늉을 했다. 내가 묶을께. 아냐, 너 또 슬쩍 넘어가려는거 누가 모를줄알고?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빨리돌라며 머리끈을 흔들었다. 아, 진짜 안묶어줘도 되는데. 잘할 수 있거든? 날 믿어봐.
"...예쁘네."
"김한빈 거짓말 좀 치지마."
"진짜야, 예뻐. 머리묶고다니면 안돼?"
순간 김한빈의 뒤로 석양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보라색빛과 빨간색이 묘하게 어우러진 조합이, 마치 김한빈의 낯선행동에 대한 내 마음처럼 차차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옹다옹 싸우는 동안 시간은 여전히 달리고있었고, 우리는 그 공간안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다. 김한빈 뒤로 붉은색의 끄트머리가 하늘하늘 없어지고 있었다. 근데, 그게 또 너무 잘어울려서 김한빈의 석양을 뒤로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는 넋을 놓고 김한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한빈은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본 채 입가에는 웃음을 띄고 있었다. 머리, 묶고 다닐꺼지? 그는 재차 물으며 책가방을 고쳐맸다. 솔직히 아름답고 어우러진다는 말 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였으니까. 김한빈은 모를 것이다. 내가 그 아이스크림을 준 날부터, 지금까지 쭉 보고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예쁘다는 말로 나를 현혹시킨다는 것에 알면서도 넘어가고 있는 내 자신이 낯설고 새로웠다. 한빈아,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눈썹을 살짝 들며 내 부름에 반응했고,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머리 묶은거 안 이상해? 그러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예쁘다, 진짜."
평생 머리나 묶고다닐까요.
사실 바로 위에 김한빈 짤 진짜 김한빈이 예쁘다, 진짜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설렜ㅇ〈-〈
s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