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떠난 교실은 고요하고 쓸쓸하다. 창문 너머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방학을 맞아 한 달 간 보지 못 할 교실을 훑어보며 아까부터 계속 울린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 3건. 문자 7통. 카톡 18개. 나에게 온 연락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남자친구가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드문드문 부럽다는 내용의 연락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게도 정작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연인 행세를 하고 있는 나와 김진환의 관계는 서로 모르는 관계만 못했다.
"왔어?"
"응. 많이 기다렸어?"
"별로. 나도 이제 막 왔어."
정문에 몸을 기대고 핸드폰을 하던 진환이가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움도 잠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저 웃음도 결국은 우리 주변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연인 행세를 하자고 제안한 건 난데 속상해하는 것도 나였다. 내 모순된 모습에 한심함이 밀려왔다.
"너 학교는? 방학한거야?"
"넌 남자친구가 방학했는지도 몰라? 섭섭하네."
"어.. 아니.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진환이의 말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한거야. 어색한 적막을 없애기 위해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은 입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말을 했는데.. 무마하긴 무슨. 더 이상해졌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황하면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나는 이런 내 손을 보이지않기위해 등 뒤로 숨겼다.
"알아. 알고 있었잖아. 근데 왜 이렇게 당황해."
당황한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환이가 살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스하고 조심스러웠다. 미안함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진환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는 아까 내가 말실수를 했을 때보다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은은하게 웃고 있을 줄 알았던 진환이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이 습관은 아직도 못고쳤네."
진환이가 손을 뻗어 등 뒤로 감춘 내 손을 감쌌다. 손이 잡히자 힘이 빠져서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스르르 펼쳐졌다. 펼쳐진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숙이 나있었다. 내 상처 난 손바닥을 살펴보던 진환이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비쳤다. 아프잖아. 중얼거린 진환이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고쳐잡았다.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고치라고. 손에 상처 나잖아."
좀처럼 보기 힘든 엄한 표정을 지은 진환이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진환이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 밖으로 무슨 말을 내뱉을지 알 수 없었다. 묻고싶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서 마음을 주게 하는지. 왜 자꾸 너를 욕심내게 하는지.
"이제 가자. 바래다줄게."
묻고싶었다.
*
겨울의 낮은 밤보다 짧았다. 햇빛이 없어져 어둑해진 방 안에 멀뚱히 누워있었다. 나는 요즘 들어 자주 과거를 돌이켜봤다. 사실 회상이라기보다는 진환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이곳에 이사를 오고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이 진환이었으니까. 어렸던 나에게 갑작스러운 이사는 심란함을 안겨주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무엇 하나 익숙한게 없어 예민했던 나에게 먼저 다가온 건 진환이었다. 진환이는 또래 남자애들과 달리 짖궂은 장난을 치지않았다. 다정하고 상냥했다. 모든게 천성인 것처럼.
[바보야, 내가 우산 챙기라고 했잖아.]
그래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진환이의 천성은 무방비했던 내 마음에 갑작스레 찾아들었다. 그때가 그랬다. 학원이 끝나고 삼삼오오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던 내게 네가 찾아온건. 구름 한 점 없이 까만 하늘 아래 촘촘히 떨어지던 빗방울 사이로 나타난 너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부모님도, 오빠도 아닌 네가 마중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얼떨떨했다.
[이리 와. 집에 가자.]
너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너의 손은 내 발목에 맺힌 빗방울과 달리 따뜻하고 포근했다. 비좁은 우산 아래 너와 함께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떨림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마주 잡은 너의 손을 따라 전해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너무 늦었다. 빨리 들어가서 자.]
[으응. 너도.]
기어코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준 네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차마 너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나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옅은 웃음소리를 낸 네가 몸을 틀어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네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너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일 즈음 너를 완전히 볼 수 있었다. 너의 젖어버린 한 쪽 어깨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그 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너의 어깨가 젖어갈 때 내 마음도 젖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이 나를/김경미
예전부터 쓰고싶었던 글을 드디어 쓰네요(뿌듯)
뜬금없지만 저 시 때문에 이 글을 쓰게됐어요!
다정한 진환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취저 당함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