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드레스룸 문을 열고 들어가 수많은 정장들이 걸려있는 옷장을 열었다.
검은 정장들이 옷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검은색 사이에 튀는 색들의 정장들이 오늘따라 유독 지훈을 유혹했다.
새빨간 정장자켓을 몸에 대어보고 거울앞에 선 지훈이 피식 웃었다.
세화그룹과 타미그룹 공동 프로젝트 파티라 괜히 신경을 쓰는게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다.
왠지 그곳에서 태일을 마주칠것만 같았다.
지훈은 빨간 정장자켓을 다시 걸어놓고 무난하면서 형식적이지 않은 남색 정장을 골랐다.
지훈은 항상 차고다니는 롤렉스 시계를 손목에 차고
새것같이 잘 닦인 검은 구두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가자."
회사에서의 태일을 향한 수근거림은 이곳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샹류층 사람들이 태일을 힐끔거리며 저마다 떠들어댔다.
화려하고 넓은 파티장에는 따가운 눈초리들과 메아리치는 아픈 말들 뿐이었다.
태일 자신도 얼떨떨해 하루종일 멍한 상태였다.
자신이 이 파티에 올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자신의 신분이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실까, 라는 생각을 수천번도 더한 태일이었다.
지호는 그런 태일을 살피며 가만히 옆에 서있었지만
지훈이 발을 들이자마자 눈썹을 움찔거렸다.
"우리 요즘 자주만나네요.
앞으로도 자주 만날거같은데."
지훈이 지호를 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지훈이 말없는 지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태일이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않고 앉아있었다.
나름 단정하게 한다고 한 머리가 잘 빗은 바가지라니, 지훈은 그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나왔다.
피식거리는 소리에 태일이 고개를 들었고
처음으로 태일이 먼저 고개를 까딱, 지훈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파티홀 안 불빛이 점점 사그라지더니 커다란 스크린이 켜지고 태일의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안색이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예의를 갖춰 정장을 입고 하얀 벽을 배경삼아 카메라를 응시하고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세화그룹 이태준입니다.
직접 자리에 서지 못하고 이렇게 영상으로 인사드리는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화그룹과 타미그룹의 중요한 공동 프로젝트를 계약하는 날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신 여러분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것이 하나 있는데, 저의 둘째아들, 이태형을 세화그룹 책임자로 임명하려 합니다.]
회장의 입에서 엄청난 얘기가 나오자 파티장은 태일이 입장했을때보다 더 큰 파장이 일어났다.
태일조차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입을 떡 벌리고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고
지훈만이 혓바닥을 내밀고 천천히 입술을 핥으며 재밌다는듯이 웃고있었다.
[저의 첫째아들이 후계자로써 수업을 받는동안 둘째아들도 업무를 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큰 프로젝트에 제 뜻대로 모든걸 하려는게 아닙니다.
믿기때문에 하려는것입니다.
아들이라서가 아닙니다.
제가 여기있는 모든 여러분들을 믿고 따라주었던것처럼
여러분들도 저를 믿고 한번만 따라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태일은 그 뒤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땡 하고 울리고 지끈지끈 아파왔다.
[만약 프로젝트 실패시, 프로젝트에 쓰인 비용은 세화에서 전액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엄청난 말에 파티홀이 소란스러워졌고
태일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전액 부담을 하게되면 세화가 가지고있는 주식을 반 이상이나 처분해야되는 값이었다.
자신이 프로젝트를 망친다면 세화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 아닌
불씨가 거의 꺼져가는 그저그런 모닥불이 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불을 찾아 떠날것이다.
태일은 프로젝트 망칠것을 걱정하였지만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것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지훈이도, 회장도, 아무도 알지못했다.
그날밤 이태형 이라는 이름은 처음으로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사람 반병신 만든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태형은 쉽게 사람들 입에 올랐다.
태일은 그런 기사들과 악플들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그 시각 지훈은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위해 회장의 병실을 찾았다.
"아주 재미난 제안을 하셨더라고요?"
지훈이 의자를 끌고와 침대에 기대어있는 회장 곁에 앉았다.
지훈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지훈과 같이 온 남자가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냈다.
지훈은 문서를 열고 회장이 보낸 계약서를 다시 한번 읽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추가하고싶은게 있지만 이것마저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될것 같아서 아직 추가 안한 내용이 있네."
회장이 지훈이 했던것처럼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뭐, 어렵지 않은것이라면. 저도 어제 회장님 덕분에 즐거웠으니 보답이라도 해야죠."
지훈이 웃자 회장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태형이를 그쪽 일에 발들이게 하지 말게."
회장의 말에 지훈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습관적인 휘파람을 휘익 하고 불었다.
"태형이는 그쪽일은 절대 안된다.
난 태형이를 사업을 시키려고 이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한걸세.
태형이가 책임자 자리에 있는한 뒷거래 혹은 치사한 수를 쓰는 일은 없을걸세."
"한쪽에서만 잠잠한다고 되는일은 아닐텐데요?
다른곳에서 세화를 노리고 태형씨를 공격한다면 어쩌시려고요?
싸움은 어떻게든 나게 되어있습니다, 회장님."
"우리쪽에도 싸울 사람들은 충분히 있다.
그저 태형이가 제 발로 싸움에 끼어들어 피튀기는 싸움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세.
총질을 하며 계약을 받아내는짓, 협박과 싸움을 통해 원하는것을 받아내는짓,
이런것을 할 경우, 계약을 어기는걸로 알겠네."
지훈이 흠-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곤란한데.
"이런 큰 프로젝트를 뒷거래 없이 깨끗하게 성사시킬수 없는건 아시죠?
회장님 아프시다더니 뇌가 아프신가?
이 바닥에서 깨끗하게 사업해서 잘되는거 보셨나?"
지훈이 쓰읍- 숨을 들이쉬며 팔짱을 꼈다.
회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지훈이 회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팔짱을 풀었고
손가락을 튕겼다.
"좋습니다. 추가하도록하죠."
지훈은 이 모든게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보스, 회장님께서 아시면.."
지훈을 따라나온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지훈이 상관없다는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계약서야 뭐, 싸움이 있으면 상대방이 먼저 쳤다고 하면 되는거고.
총질하지 말라- 라고 써있으면 칼질을 하면 되는거고
마약하지 말라- 라고 써있으면 본드를 하면 되는거고.
이쪽 일 처음해보냐? 융통성있게 좀 살아라."
계약서따윈 상관없다 이거야-
지훈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