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여전히 다정하다]
민석은 스물 여섯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처럼 울었다. 도데체 어디있었냐는 말과, 괜찮았냐는 말을 수 없이 내뱉으며 여주를 끌어안았다. 여주는 그저 그런 민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몇년 동안이나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애쓴 얼굴이었건만, 다시 본 민석의 얼굴은 기억과 훨씬 달라져 있었다. 여주의 기억은 이미 닳아 그 알맹이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둘의 울음이 그치고 민석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코를 한번 훌쩍였다. 이렇게 우는 게 몇년만이었더라……. 민석은 이제야 여주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원래도 살집 없는 애였는데……. 민석은 옷 아래로 드러난 여주의 가는 팔목을 보며 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 마른 몸에, 예전처럼 반짝거리지 않고 지침이 묻어있는 눈, 젖살이 빠져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얼굴과 단발을 고수했던 그때와 달리 길게 늘어트린 머리…….
"어떤 남자한테 납치 당했던 모양이더군요. 정신을 차려보니 봉고차라 했고, 간신히 도망쳐나왔다고 합니다. 여주 학생을 좇으며 욕을 하던 남자와 봉고차도 저 순경이 실제로 봤구요. 일단 집에 가서 안정을 좀 취하시고 내일 낮에 파출소로 다시 와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민석의 옆에서 여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순경 둘은 옅은 미소를 보내며 배웅해주었다. 아, 올때 슬리퍼도 가져와요. 중년의 순경이 농담처럼 말했다. 여주의 하얗고 마른 발보다 한참 큰 슬리퍼가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녀의 걸음 따라 탁탁 소리를 뱉었다. 드러난 흰 발에 그가 붙여준 밴드가 그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선은 우리 집에서 좀 지내자, 너. 좀 먹고, 자고, 그러자."
민석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난 너 다시 너네 집으로 안 보내. 아니, 못 보내. 아니, 넌 그날 이후로 대체 어디 있었던……"
민석이 걱정과 짜증의 중간정도로 말하며 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말 없이 웃자, 민석은 화가 났다. 아니, 애초에 그걸 '집'이라고 할 수도 있어? 넌 배알도 없어? 왜 웃고만 있어. 아까까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며. 아직 무섭잖아. 왜 표현을 안 해? 나한테 의지라도 하던가, 무섭다고 투정이라도 부려주던가…… 민석은 터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을 주워담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널 돕고싶다."
"넌 여전히 다정하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 여주는 낡은 티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입가에 아슬하게 걸린 미소는 곧 꺼질 듯 마지막을 태웠다. 민석은 그런 여주가 안쓰러웠다.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언제나 따뜻함을 담고 있던 그 미소는 이제 온기를 잃어 미적지근해졌다. 긴 머리가 살짝 고개를 숙인 여주의 얼굴을 챠르륵 가렸다. 빨간불에 멈춰선 민석은 여주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넌 머리 긴게 낫다, 야."
그 말에 민석도, 여주도 웃음을 흘렸다. 민석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는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착할 때까지 좀 자. 민석의 말이 주문처럼 스며들어 여주는 눈을 감았다.
[한새빌라 5층 두번째 집]
철호는 늦은 새벽에야 집에 들어왔다. 먼저 자고 있던 아내는 철호가 침대로 파고들자 눈을 살짝 떴다. 늦게 들어왔네? 한치의 의심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걱정에 철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일 때문에. 철호는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아내의 머리칼을 쓸었다. 나른해진 몸은 금새 잠의 수렁으로 빠졌다.
삐-삐-삐-삐--
알람소리가 들리고 철호는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껐다. 눈을 비비고 하품을 크게한 철호는 병원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여보, 일어……! 철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눈이 파진 채로 장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철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니가 넘길라캤던 년이 티끼뿟따."
"……!"
머리를 뒤로 쫙 넘긴 남자가 침대 맞은 편에 둔 의자에 앉아있었다. 철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자신에게 간을 요구한…… 사내였다. 지금쯤 이여주환자의 간을 손 안에 넣고 배부른 미소를 지을 그 남자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그를 쳐다봤다.
"니…… 에이삐형이라메?"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며칠만 기다려주시면,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꼭……!"
"날짜를 맞차야제. 그기 거래라 안 카나."
철호의 눈이 공포감으로 번들번들 했다. 그래 살아봐야 뭐할끼고. 니 처도 뒈졌는데. 남자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해마레이. 내는 원래 곱게 안 보내주니께."
[김종인, 서른살, 백수……?]
종인은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백수라고 점심까지 늘어져 자다, 만화 쪼가리나 읽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극적인 예랄까. 종인은 늘 여덟시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는, 이른바 아침형 인간이다. 점심까지 책을 읽다, 약속이 있으면 나가고, 없으면 계속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고 열시에서 열한시 사이에 잠……이 든다. 잠이라고 해봤자 얕은 잠이라 자주 깨거나 뒤척이지만. 아무튼 종인은 평소처럼 여덟시에 일어나 하품을 하며 피트니스룸에 들어갔다.
삑삑삑삑, 삐비빅
운동 시작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민석이라면 분명 자고 있을 것이다. ……설마 부모님은 아닐테고. 종인은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민석이 한 여자와 함께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여주야, 인사해. 내 사촌형이야. 이름은 김종인."
참고로 서른이야. 민석은 그렇게 덧붙이고 씨익 웃었다. 여자는 아주 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옮기다 종인과 눈을 마주친 여주는 종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종인은 뻔뻔함이라고 해야되나, 얼굴이 두껍다고 해야되나, 아무튼 무덤덤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조차 먼저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야, 김민석. 누구야……?"
머쓱해진 종인이 민석에게 물었다. 민석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여주를 소개했다.
"이쪽은 이여주. 내 친구. 얘는, 그…… 일이 좀 많아서……, 음……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냈으면 하는데."
"뭐? 김민석, 너 미쳤……"
"여주야, 잠시만 저기 쇼파에 앉아있어!"
너 미쳤냐고 따지려던 종인의 입을 민석이 급하게 틀어막았다. 그리고 여주에게 좀 앉아있으라하고 종인을 근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민석은 문을 닫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민석은 조심스럽게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부탁 좀 하자.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까, 여주 좀 돌봐주라."
"뭐? 너 미쳤,"
"형. 큰 소리 내지 말고. 많이 원하는 건 아니야. 그냥 옆에 좀 있어주고, 밥 좀 먹여주고, 말 좀 해주고…… 그런 것들이면 충분해. 쟤…… 상처 많은 애야. 원래는 되게 밝고, 성격 좋고, 둥글둥글한 그런 앤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많은 일이 있었나봐. 내가 쟤한테 받은게 많아서, 보답 좀 하고 싶어서 그래. 응?"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데려오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진짜 미안, 형. 그래도 남는 방 하나 있었잖아. 부탁할게. 제발……."
민석의 눈꼬리가 급하게 쳐지자 종인은 머리를 헤집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종인의 그 말에 민석은 활짝 웃는다.
"아, 진짜 고마워. 그럼 나 학교 가기 전까지만 좀 잘게. 너무 피곤해서~. 그동안 여주랑 좀 친해져 봐."
종인은 무책임하게 방을 나가는 민석이 어이 없어 허,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거실로 나가니 잔다던 민석은 안자고 여주가 쇼파에 누워자고 있었다. 민석은 그런 여주를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고. 종인이 한참 동안 그 꼴을 보고 있었다. 곧 민석은 여주를 안아 자신의 방으로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자신의 방에서 나온 그는 쇼파에 누워 방에서 가져 온 담요를 덮었다.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춰 놓고 민석은 잠에 들었다. 이 집에서 온전히 깨어 있는 건 자신 뿐이라는 사실에 허탈해진 종인은 다시 피트니스룸으로 향했다. 입술 끝으로 민석의 욕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김치볶음밥]
약속? 오늘은 없고. 딱히 할 일도 없고. 종인은 여유롭게 현관 밖에 놓인 신문을 주워다 눈으로 읽는다.
"손녀를 찾습니다? 이 할아버지 금강그룹 회장이잖아? 몇십년 전에 딸 죽고 아무도 없었는 줄 알았는데……."
종인은 1면 한쪽에 크게 낸 광고를 보고 경악했다. 광고는 금강그룹 회장이 자신의 손녀딸을 찾는다는 내용과 함께 딸과 손녀딸이 함께 찍은 듯한 사진이 실려있었다. 종인은 이거 마케팅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신문을 접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책이 끌려.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에서 종인은 대충 끌리는 책을 집었다. 모모. 종인이 초등학교 때에 읽은 책인데 정말 재미있어, 몇년 마다 한 번씩 꾸준히 보는 책이었다.
"오랜만이네, 이거……."
종인은 쇼파에서 자고 있는 민석을 슬쩍 보고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은 LED등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다. 종인은 커텐까지 치고 자는 민석을 위해 가장 어두운 불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기, 종인……씨?"
얼마쯤 지났을까, 책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다. 귓바퀴를 끈적하게 햘퀴는 듯한 미성에 종인이 고개를 벌떡 들었다. 여주는 그런 종인의 행동에도 동요 없이 종인을 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아까……."
"일어나면 말을 하던가 하지. 놀랐잖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됐어. 다음부턴 그냥 말 걸어도 돼."
네……. 여주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일랜드로 향했다.
"밥 줄까?"
"네? 네. 근데 저, 민석이는……."
"김민석? 몰라, 책 읽느라 못 봤는데. 나갔나보지."
"아……."
종인은 말 없이 김치를 꺼내 턱턱 썰었다. 납작한 팬을 꺼내 위에 얹을 달걀프라이를 하고, 오목한 팬을 꺼내 김치와 베이컨, 밥을 넣고 볶았다. 매콤하면서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뒤덮었다. 종인은 플레이팅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 보았다. 여주가 자신이 읽던 책을 가져가 손으로 쓸고 있었다.
"읽고 싶으면 읽어. 만지고만 있지 말고."
종인이 계란프라이를 올린 김치볶음밥을 여주 앞에다 놓아 주었다. 여주는 아, 네……하고 답을 흐렸다. 종인이 그런 여주를 보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여주가 책을 건내자 그 책을 받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혹시 제 행동 때문에 화나거나 불쾌하면 바로 말해주세요. 사람들이랑 오래 있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거든요."
종인은 그렇게 말하는 여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여주는 느릿하게 깜빡이며 그와 눈을 맞춰왔다. 마치 고양이 키스같은 행위였다. 종인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나 원래 인상이 그닥 좋지는 않아."
"……."
"그리고 잘 안 웃어. 말투도 퉁명스러운 편이고. 근데 화는 잘 안내. 너 싫지도 않고."
"그러면 왜…… 저랑 밥 같이…… 안 먹어요?"
여주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종인의 앞에는 커피 한잔만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여주가 먹을 분량만 만든 것도 있고. 종인은 여주가 꽤나, 귀엽게 느껴졌다. 종인이 턱을 괴고 말헀다.
"대신 너 먹는 거 봐주잖아."
종인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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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모닉!
부릉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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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솜
징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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