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情交)하다 :: 매우 가깝게 사귀다, 남녀가 연애를 하다.
01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우산이 없어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그런 날이었다. 다른 애들은 우산을 하나 둘 펴가며 학교를 벗어나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책가방이라도 뒤집어쓰고 가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안에는 두꺼운 책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문제집을 다 가져왔다니. 학원에서 내 주는 숙제를 위해서 가져온 문제집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책가방이 무거워져 하굣길에 도움을 주지 못 할 것이었다. 빨리 그쳤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하며 시간이 흘러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원은 어차피 밤에 가니까 시간은 넉넉했다.
아이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듯했다. 친구가 없는 게 이렇게 슬플 줄이야. 초라한 전학생 신세에 친구를 바라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전학을 온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우울했다. 심지어 나는 집도 멀었다. 나와 집 방향이 겹치는 애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하게 될 만큼. 이 우울한 기분을 비가 나를 대신해주는 건가.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듯 점점 깊어져가는 물웅덩이가 야속했다. 오늘 안에 그치기는 할까? 아침에 엄마한테 날씨라도 한 번 물어볼걸. 아님 기상 일보라도 한 번 볼걸. 하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그때였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선생님들은 아직 근무 중이라 나오지 않을 시간에 학교에서 인기척이라니? 혼자 놀라서 - 그러나 덤덤한 척했다. - 뒤돌아 보니 웬 익숙한 애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 어, 전학생? ”
“ …. ”
“ 으, 비 엄청 오는구나. 왜 그러고 있어? 너 우산 없어? ”
“ 어… 그게 …. ”
단정한 머리, 단정한 교복, 다정한 말투. 우리 반 반장이자 내 짝꿍이었다. 학교에서 늘 쓰고 다니던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맨 얼굴을 한 반장은 한 손에는 파일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게 내려오는 걸 보니 선생님이 심부름이라도 시킨 건가 싶었다. 애들이 모두 빠져나간 중앙 복도에서 반장과 내가 마주친 이 상황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생김새로는 말 수가 적은 편인 것 같았으나 반장은 나를 꽤나 살갑게 대해줬다. 같이 밥도 먹어줬고, 이동수업도 같이 해주고는 했다. 반장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대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장은 다정했고, 제 직책에 잘 어울렸다.
본래 다정한 성격인 것인지 우산의 유무를 묻는 그 물음에 자동적으로 긴장해서 멍청한 대답만 늘어놓고 있었다. 대답을 말로 하지 않아도 그냥 고개 끄덕임 하나면 해결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보가 된 것 마냥 말만 더듬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빨개진 얼굴이 부끄러웠다.
“ 집이 어딘데? 많이 멀어? ”
“ 응, 조금 … 걸어서 가면 꽤 걸릴 거야. ”
“ 어디쯤인데? 데려다 줄까? ”
“ 아, 아니! 너 귀찮잖아. 안 그래도 돼. ”
손사래까지 치며 다급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반장은 웃었다. 조용한 학교에서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그 웃음에 내 모습이 창피해져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질 못 했다. 교실에서 봤었던 가볍게 싱긋 웃는 웃음도 예뻤지만 반장이 10대의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해맑게, 크게 웃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을까. 근래 봐왔던 사람들 중에 가장 예쁘게 웃는 것 같았다. 아니,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생머리가 미약한 바람에, 웃는 몸짓에 흔들리며 반장의 순수함을 더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멍청한 표정도 숨기질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반장의 모습에서 눈을 떼질 못 했다.
아 …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느낌이. 소설에서, 시에서 그렇게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가슴이 설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낯선 기분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설렘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 경수 너 되게 재밌다.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요는 없는데. ”
“ …. ”
“ 어, 혹시 내가 웃어서 기분 나빴던 건 아니지 …? ”
“ …. ”
“ 경수야? ”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빠져버리는 게 말이 되는 것이었나. 열여덟의 시간을 겪어오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던 그 말이 튀어나간 것은.
“ 저기, 반장. ”
“ 응. ”
“ 나 우산 좀 씌워줄 수 있을까. ”
“ 그래! 집이 어디야? ”
월담 아파트,인데 조금 멀어서 …. 어, 나도 거기 사는데! 어, 진짜? 응! 경수야, 그럼 나랑 같이 등교할래? 아, 하교도 하자.
“ 그래도 돼? ”
“ 나야 좋지. 집이 멀어서 같이 등하교 할 친구가 없었거든. 아무튼, 같이 하자. ”
“ … 고마워. ”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그녀가 다시 싱긋 웃었다.
9월의 어느 늦여름 날, 비가 쏟아지던 그런 오후였다.
-
시간이 꽤 흘렀다. 날씨가 쌀쌀해졌고 곧 있으면 수능을 볼 날이 오고 있었다. 물론 내가 보는 건 아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점점 와 닿는 기분이었다. 교복을 더 이상 입을 일이 없다던가, 청소년이 아니라든가, 대학생이 된다는 것.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만 나는 여전했다. 한 달 뒤에 있을 기말고사를 걱정하고, 그 후에 있을 축제나 방학을 기다리는. 여전한 열여덟이었다. 반장과 등 학교를 하고, 장난도 치고 같이 웃기도 한다. 이제는 내가 친구가 생겨서 반장과 밥을 먹는다거나 이동수업을 하진 않지만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 아래에서, 나름 잘 지내는 중이었다.
“ 야, 도경수! ”
“ 왜. ”
“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냐. ”
“ 못 들을 수도 있지. 왜? ”
“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반장 없다고 이러는 거지? ”
“ 뭐래. 아니야. ”
백현이는 장난기가 많았다. 왜 타깃이 내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새 백현이의 타깃은 나였다. 그 주제는 반장 앞에서 다른 내 모습 이 대부분이었는데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다지 다르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어서 그냥 넘기고 있던 부분이었다. 여기에 박찬열이나 김종대도 합쳐지면 정말 정신없는데. 그나마 종대가 착해서 덜 괴롭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셋의 조합은 최고였다. 어쩌다 그 세 명이 한 번에 모이게 된 것인지 신기할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장난을 치는 백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대충 밀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음 시간은 문학이었다. 졸려 죽겠구먼 문학은 항상 점심시간 뒤였다.
“ 솔직히 말해. ”
“ 뭘? ”
“ 좋아하지? ”
“ 뭘 좋아해. ”
“ 반장 좋아하잖아. 맞지? ”
화장실에 간다던 박찬열이 돌아왔다. 백현이한테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들이민다. 얘네는 항상 이렇게 장난을 친다. 눈길로 흘끗 필통을 열어보았으나 던질 만한 것들이 없어서 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이미 들켰다고 해도 확신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반장을 좋아하는 건 나만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고백도 못 할 텐데 뭣하러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나 싶어서였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 개와 강아지 같은 둘은 계속 내 뒤에서 나를 괴롭혔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 가서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야겠다. 반장과 자리가 떨어진 것도 짜증 나는데 얘네는 왜 내 뒤야. 발로 차려다가 다리길이로 뭐라고 할 것 같아 금방 그만뒀다. 인정하긴 싫지만 박찬열은 키가 컸다. 변백현은 뭐. 그래. 넌 그래.
“ 좋아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네. ”
“ 경수는 아나 몰라? ”
“ 반장이 우리의 친구 김종대랑 1반부터 12반까지 가정통신문 나눠주고 있는 거 말하는 거야? ”
“ 그래! 맞아! 경수는 모르고 있겠지? ”
“ 둘이서 아주 도란도란 - . ”
담임선생님은 반장에게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선생님은 연세나 연차가 꽤 있으신 분이라 부장을 맡고 계신 분이라 업무 처리할 것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반장이 정말 고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봤자 반장은 군소리 없이 제 할 일이라 생각하며 심부름을 할 것이 분명하기는 했다만. 옆에서 투덜거릴 김종대는 왜 부반장이어서 반장이랑 같이 심부름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걔가 어떻게 부반장이 된 거지? 이해할 수 없음에 짜증이 몰려왔다. 내 속도 모르고 둘은 계속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결혼이라도 한 줄 알겠다. 죄 없는 문학책이 팍! 팍! 펼쳐졌다. 그리곤,
찌이익.
책이 찢어졌다.
“ 와 도경수! 도경수 선수! 짜증을 못 이겨 책을 찢습니다! ”
“ 아주 빠른 손놀림이었는데요! 도경수 선수! 대단합니다! ”
“ 야 - . 역시 반장을 향한 사랑이 절대 식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오늘따라 정도가 심했다. 약 올리는 건 지난 두 달 남짓하던 시간동 많이 있던 일이기는 한데, 제 마음을 어떻게 눈치챈 것인지는 몰라도 둘의 장난이 속도를 붙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참자, 참아야 해. 도경수. 조금 있으면 예비 종이 울릴 것이고 늦는 것을 싫어하는 반장은 예비 종이 오기도 전에 일을 끝내고 교실에 들어올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이 끝나자 나는 화가 몰려와 빨개진 얼굴을 숨기고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내 찢어진 부분을 복구시켰다. 뒤에서 들려오는 짖어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더 이상 상대를 해주면 끝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역시 도경수는 삽.계.한. 이지. ”
“ 그게 뭐냐. ”
“ 삽질은 계속되어야 한다! ”
한계였다. 다시 되돌아간다면 창피해서라도 다신 그렇게 행동하진 않을 거지만.
“ 안 좋아해! 안 좋아한다고! ”
“ … 도경수? ”
“ 안 좋아해. 장난 좀 그만해. ”
나 때문에 조용해진 교실 안으로 내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반장과의 등교로 기분이 좋았었는데.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게 되어 짜증이 났다. 난 왜 남자애가 이렇게 속이 좁냐. 평소와 다르게 화를 낸 나를 본 당황한 둘의 눈빛을 뒤로하고 다시 몸을 돌려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나와 그다지 친분이 두텁지 않은 반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소란스러워졌고 두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것이 미안함을 담고 있는 침묵인지 아니면 당황을 담고 있는 침묵인지는 몰라도 어느 것이건 기분은 좋지 않았다. 곧이어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예비 종이 울렸다. 돌아온 것이었다. 그에 맞게 나는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래, 인정하자면 모든 건 나에 대한 화였다. 관계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도, 두 녀석에게 별것 아닌 일로 화를 낸 것도. 모두 나를 자책하게 되었다.
“ 뭐야, 경수 왜 이래? ”
자리로 돌아온 종대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경수 아파?라고 묻는 것도 같았다. 차라리 열이 나서 조퇴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은 교시를 들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종대는 둘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는지 나를 살짝 건드렸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종대는 눈치가 빨랐다. 녀석이 부반장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좋은 녀석이었다. 쨌든, 그 일은 다른 사람은 다 들었어도 그 애가 못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대가 이렇게 묻는 거라면 그 애도 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수업 종이 쳤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내가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수업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평소처럼 50분의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엎드린 몸을 일으켜 벽에 머리를 기댔다. 생각해보니 쪽팔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크게 반응할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 늘 있는 장난이었고 질문도 비슷했다. 아무래도 흑 역사로 남을 것 같았다. 너무 큰 소리로 말 한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미치겠다. 반장의 친구들이 나에 대해 말을 늘어놓으면 어떡하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아님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친해진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를 피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볼 만한 강철심장은 아니었다.
차렷, 경례.
수업이 시작되었다. 복잡한 속과 다르게 나른하게 울리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잠이 몰려왔다. 그래도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 문학은 반장이 가장 좋아하는 수업시간이었다. 시와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너는 알까, 네 덕에 책을 읽는 나를. 억지로 책을 읽던 시간들과 다르게 이제는 진심으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너는 알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네게. 나는 너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고. 예전에 비해 무뚝뚝한 성격도 많이 나아졌고, 책에 버릇도 들이고, 잠들었을 문학 시간에도 꿋꿋이 버티고 수업을 듣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너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 반장이 오늘 배울 시 좀 읽어볼까? ”
“ 네. ”
단정한 긴 생머리가 흔들거리며 네가 일어선다. 나보다 앞자리에 앉아 뒷모습 밖에 못 볼테지만 그래도 좋다. 문학 선생님은 시를 반 애들에게 종종 읽게 했는데 반장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제일 많이 읽은 것은 그 애였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내가 문학 시간에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좋았다. 이별을 말하는 시든, 광복을 외치는 시든. 반장의 목소리를 타고 나오면 그저 좋게 들렸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반장이 시를 읊기를 기다렸다. 큼큼,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고 반장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지난번보다 시가 길었다. 잔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개꽃을 안고서
어떻게 말할까 망설일 때
나보다 안개꽃이 먼저
떨고 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너는 가리라.
햇살이 이슬같은 너를 깨워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 말리라.
맑은 물방울같은 너의 마음
시냇물 강물에 섞여
내가 닿을 수 없는 바다로
흘러가고 말리라.
말하자, 지금
지금 말해야만 한다.
햇살보다 먼저 바다보다 먼저
그러나 안개꽃에 둘러싸인 장미처럼
나는 언제까지나
얼굴만 붉어지고 있었네.
-최옥, 고백
네가 나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네게 속마음을 들키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은 느낌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나는 고민한다. 너를 향한 나를. 관계를 지키고 싶어서 아등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누가 보면 한심하다 말한다 해도 아무 말 못하고 듣고만 있을 것이다. 반장, 아무래도 나는, 나는 아무래도...
널, 더 오랫동안 좋아하게 될 것 같다.
-
“ 경수야! ”
이번 주는 청소를 하는 주였다. 대충 귀찮아서 A조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우리 조는 학교 쉬는 날도 거의 없고 단축수업을 하는 날도 적은 주에만 걸렸다. 신 나서 먼저 가버린 세 명을 생각하며 걸레질에 속도를 붙였다. 내가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칠판이나 닦겠다고 할걸. 후회를 하면서 청소를 하니 반장이 날 부른다. 아, 또 설레잖아. 왜 맨날 성을 붙이지 않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들고 반장을 쳐다봤다. 왜? 무심한 듯한 목소리는 덤.
“ 여기 걸레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
“ 아 …. ”
“ 힘내! ”
반장은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곤 다른 애들한테 걸음을 옮겼다. 반장은 애들이 청소를 하면 이것저것 봐줘야 했다. 반장과 부반장인 김종대가 한 주씩 번갈아가면서 하는데 이번 주는 반장이 걸린 주였다.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보다 걸레질에 집중했다. 나 때문에 반장이 집에 늦게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같이 갈 생각을 하면 웃음이 먼저 나오지만 그래도 티를 낼 수는 없으니 애써 생각을 접으며 청소를 끝냈다. 아, 집에 간다. 집에 가자마자 숙제행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 반장, 집에 안 가? ”
“ 응, 지금 가! ”
내 물음에 서둘러 애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마무리를 하는 반장이었다. 교실을 쓱 둘러보다 엉망인 청소 도구함이 눈에 들어와서 빗자루며 쓰레받기 따위를 정리해 넣었다. 쾌쾌 묵은 먼지 냄새가 나서 속이 울렁거렸다. 으, 이상한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청소 도구함을 닫았다. 먼지가 올라오는 것 같아. 괜히 손을 털고는 줄을 맞추고 있는 반장을 보다 돕기 위해 4분단으로 향했다. 삐뚤빼뚤한 책상을 맞추고 있는데 쿵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장이 책상을 옮기다 올려진 의자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인지 당황한 반장의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그나저나 다친 곳은 없으려나.
“ 으, 미안. 놀랐어? ”
“ 아니. 다친 덴 없고? ”
“ 응. 근데 이거 네 책상이네. ”
“ 내 자리 알고 있어? ”
“ 당연하지. 나 반장이잖아. ”
또 웃는다. 키도 작아서 올려다보면서 웃는데 ... 변백현의 언어를 빌려 쓰자면 심쿵이라고 해야 할까. 반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말투가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 나 네 친구들 자리도 다 알아. 백현이랑 찬열이랑 종대랑 다 붙었잖아. ”라는 뒷말은 좀 별로였지만. 반장은 사람들한테 늘 친근하게 대해서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가장 기분 좋았다. 간질거리는 그 느낌이 좋았다. 나에게 있어 반장은 그런 존재였다. 고마우면서도 좋은 사람. 셋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던 것도 도와줬고 새 학교에 적응할 기간도 줄여준 사람이었다.
“ 이제 가자. ”
“ 응. ”
교실을 나와 복도에서 반장을 기다렸다. 가장 늦게 청소를 끝낸 것인지 조용하고 한산한 복도였다. 석식을 먹는 애들만 몇몇 있는 것 같았다.
“ 무슨 생각해? ”
“ 어? 아, 아무것도. ”
“ 뭐야, 내 생각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
반장은 내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 이 기분은 …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것 같은데,
“ 빨리 와. 먼저 간다? ”
“ …. ”
“ 도경수 - . 나 진짜 가? ”
“ 아, 같이 가! ”
… 두근거린다. 그것도 심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