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잠에서 깬 나는 여전히 구준회의 품 속이었다. 눈을 뜨고 준회에게 안긴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물끄러미 준회의 가슴팍만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하얀색 반팔티를 입은 준회의 티셔츠 너머로 꽤나 탄탄한 듯한 가슴 근육이 비쳤다.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서 잠깐 그 가슴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준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꼭 감은 구준회의 속눈썹은 생각보다 꽤 길다. 저 속눈썹도 가짜겠지. 여자들이 화장할 때 붙이곤 하는 인조 속눈썹과 같은 걸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준회와 얼굴을 마주볼 수 있도록 몸을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잠깐, 준회가 원래 잠을 잤던가? 물끄러미 준회의 감은 눈을 바라보는데 눈이 아닌 다른 곳에 내 시선이 닿는다. 빠알간 입술. 틴트로 물들여도 나올 수 없는 선홍색의 매끈한 입술.
어째서 내 시선이 그 곳에 닿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꽉 안긴 준회의 품 속에서 겨우 한쪽 팔을 꺼내어 준회의 얼굴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준회의 입술에 닿자 알 수 없는 찌릿한 기분이 온 몸을 타고 전해졌다.
“준회야, 자?”
내 부름에도 준회는 꽤나 깊게 잠이 든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규칙적으로 가슴팍이 가볍게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었다.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준회의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회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훑었다.
“…….”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게 당하고 있는 건 준회였지만, 꼭 누군가가 내게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더 큰 호기심이 마음 속에서 피어올랐고, 그런 호기심을 넘어서서 더 크게 자라나고 있는 것은 두근거림이었다.
“준회야.”
다시 한 번 준회를 불러 준회가 잠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준회의 얼굴 가까이에 있던 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곤 눈을 감은 준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준회의 얼굴 가까이로 내 얼굴을 움직였다.
10cm 남짓하던 우리 사이의 거리.
9cm.
7cm.
5cm.
그리고….
06
급하게 깬 잠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높게 보이는 하얀색 천장,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조금은 따가운 듯한 햇빛에 천천히 내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짧은 질문 하나가 내 머리속을 삼켰다.
“…닿았나?”
설마. 설마 닿았을까. 이 꿈은 대체 뭐였지?
어쩌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잠이 들던 전날 밤 저녁을 떠올려보던 나는 본능적으로 침대 옆을 더듬었다. 준회. 준회의 품 안에서 잠들었었는데. 나를 재워준다던 준회는 내가 잠에 빠진 후 방을 나간 듯 했다.
왠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까지만 해도 쏟아질 듯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그리고, 창 옆으로 걸린 시계에 시선을 옮긴 내 눈이 동그래졌다.
“8시… 40분!?”
미쳤어! 지각이잖아!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올려 묶곤 전날 벗어두었던 옷을 그대로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코트를 한쪽 팔만 걸친 채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토스트를 굽고 있던 준회가 날 바라보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잘 잤어, 주인님?”
“망했어.”
“왜?”
“시계 봐, 8시 40분이 넘었어. 이러다 완전 지각하게 생겼다구.”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 토스트 구웠어.”
“미안, 먹을 시간 없어.”
“안 먹으면 배고플 텐데.”
“괜찮아.”
코트를 마저 입으며 말하자 준회가 토스트를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곤 입을 열었다.
“주인님, 오늘 저녁엔….”
그런 준회의 말을 다 듣지도 못 하고, 옆에 놓여진 차키를 낚아챈 뒤 재빨리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미안, 미안. 나 너무 급해. 나중에 얘기해. 집 잘 지키고 있어, 준회야.”
현관문을 잡은 손을 놓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현관문이 닫히는 그 틈새로 준회가 피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07
종일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피피티를 만들다가도, 보고서를 쓰다가도 문득 문득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꿈 때문에 결국 마우스를 잡은 손을 놓고 그 손으로 머리를 감싸기가 다반수였다. 덕분에 퇴근 시간인 6시까지 끝낸 일은 맡은 일의 겨우 반. 결국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였다.
6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티비를 보고 있던 준회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왔어, 주인님?”
“응.”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좀… 많아서.”
일이 많긴. 꿈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짧게 답을 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목욕 물 받아놨었는데 다 식었어.”
“괜찮아. 내가 받아서 할게.”
“피곤하지, 주인님?”
“조금?”
내 말에 몸을 일으킨 준회가 내게로 다가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나를 품에 폭 안았다. 이번엔 뒤에서 안은 것이 아닌 앞에서. 준회의 품에 푹 안기자 숨이 막히는 느낌에 준회를 아프지 않게 툭툭 쳤다. 놔아, 하는 내 말에 준회가 나를 한 번 꽈악 안았다가 팔을 풀었다.
“갑자기 왜 안은 거야.”
“그냥, 그러고 싶어서.”
“싱겁긴.”
“얼른 씻어.”
방으로 나를 미는 준회의 손길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고 그 안에 몸을 푹 담궜다. 준회, 준회, 구준회.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 꿈은 뭐였고, 준회의 저런 행동을 밀어내지 않는 나는 뭐였고, 준회를 볼 때면 드는 알 수 없는 이 감정마저 이해가 안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눈을 살짝 감는데 욕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에서 딩동, 하는 알람음이 들려왔다. 젖은 손을 걸린 수건에 대충 닦곤 휴대폰을 확인하자 짜증이 목까지 차올랐다.
내일 출근하면 보고서 다시 써서 가져오세요. -팀장님
아, 어째 되는 일이 하나 없다.
목욕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로 밖으로 나왔다.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며 밖으로 나오자, 부엌의 식탁 위에는 조금 전 들어갈 땐 보지 못했던 파란색 상자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케이크?
뭔지 모를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털던 수건을 의자에 걸친 채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진 작은 쪽지 하나로 시선이 머물렀다. 익숙한 글씨로 쓰여진 길지 않은 메세지.
2년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준회가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산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로봇마다 제조일자가 있지만 일년 전 오늘과 같은 날짜에 나는 준회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이 집에 온 날이 네 생일이라고. 네 제조일자가 아닌, 네가 이 집에서 나와 함께하게 된 날부터 진짜 너의 생활이 시작된 거라고.
그제야 떠오른 생각에 읽고 있던 종이를 그대로 케이크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 마른 듯 한 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기며, 준회가 있는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닫힌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응, 하는 준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준회는 책을 읽고 있었던 건지 하늘색 표지의 책을 덮으며 날 바라보곤 피실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주인님?”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걸어오는 준회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준회가 앉은 자리의 바로 뒤 침대에 살짝 걸터 앉았다.
“먹지도 못 할 케이크는 왜 또 샀어.”
“봤어?”
“보라고 올려둔 거 아냐?”
내 물음에 준회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맞아. 그 대답이 귀여워서 피실 피실 웃으며 으이구, 하는 적잖은 핀잔을 보냈다.
“아침에 네 얘기 못 들어줘서 미안해. 오늘이 특별하다고 말하려던 거 맞지?”
“응.”
“너에겐 특별한 날인데 아침에 너무 바빠서 깜빡했어. 미안해.”
내 사과에 준회가 완전히 몸을 돌려 날 바라보곤 살짝 인상을 썼다.
“나에게만 특별한 날이야?”
예상치 못 한 준회의 되물음에 어? 하는 바보 같은 물음과 함께 준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인님은 오늘이 안 특별해?”
“…….”
“이 집에 내가 온 것이, 네가 내 주인이 된 것이 특별하지 않은 일이야?”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준회의 모습에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해 괜히 바닥만 바라보았다. 저 로봇의 눈빛은, 참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꼭 구렁만 같았다. 너무 깊고 깊어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이. 나를 금방이라도 삼킬 것만 같이 깊고도 또 깊은 구멍.
“안 특별하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망설이다 나온 내 물음에 준회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고장낼 거야.”
“뭘?”
“나를.”
“네가 널?”
“응. 고장내고 그 후엔 아주 산산조각을 내버릴 거야. 인간은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고 했어. 내가 사라지면 주인님은 내가 보고 싶을 거야. 이 집에서도 내가 생각날 테고, 누굴 봐도 내가 떠오를 테고….”
길게 이어지는 준회의 답에 인상을 쓰곤 말을 끊었다.
“잔인한 소리 하지 마.”
“이젠 어때, 오늘이 특별한 거 같아?”
“그래. 특별해.”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건지 준회가 그르렁거리듯 작게 웃었다.
“주인님, 피곤하지 않아?”
“피곤해.”
“얼른 가서 자.”
“응.”
대답과 함께 침대에 걸터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준회의 방문 손잡이를 잡으며 문을 열려다 말고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느낌에 손잡이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나가기 싫다. 괜히 뒤를 돌아 다시 준회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다시 책을 읽으려는 듯 제가 엎어두었던 책을 뒤집은 준회가 나를 바라보며 왜? 하고 되물었다.
“너 말야.”
“응.”
“오늘은 왜 같이 자자고 안 해?”
내 물음에 준회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잠을 자지 않는걸.”
“평소엔 같이 자자고 그랬잖아.”
“늘 거절했잖아, 주인님이.”
준회의 답에 문고리를 잡은 손을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작게 말을 이었다.
“같이 자.”
“어?”
“오늘은 같이 자.”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야?”
“말 그대로야. 같이 자.”
“갑자기 왜?”
준회의 물음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잠깐을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추워서.”
잘 때 추워. 날씨도 안 좋은 게 금방 비가 쏟아질 거 같아. 게다가 네 몸은 생각 외로 따뜻하잖아. 그래서. 정말 그래서야. 변명을 하듯 나온 내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준회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추워서 그런 거 맞아. 정말이야, 정말이라구.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겨우 잠재우며 나는 그래서 준회와 함께 자고 싶은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08
구준회는 꽤나 글을 잘 쓰는 로봇이었다. 집 안에서만 착용하는 안경을 낀 채로 준회의 방문을 예고도 없이 열자, 글을 쓰던 준회는 나일 줄 알았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 바라보며 피실 웃음을 흘렸다. 책상에 앉은 준회의 뒤로 가서 준회의 침대에 털썩 걸터 앉자, 책상 위의 컴퓨터로 시선을 두고 있던 준회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방해할 건 아니었는데.”
“방해 안 했어, 괜찮아.”
“이번 글은 어떤 글이야?”
“궁금해?”
준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평소엔 늘 어떤 주제다, 하고 알려줬었는데, 이번 건 아무런 말도 없었잖아.”
내 대답에 준회가 글이 반쯤 채워진 창을 마우스를 움직여 내리곤 말했다.
“비밀이야.”
“에? 로봇에게도 비밀도 있어?”
“우리도 비밀같은 걸 만들 권리가 있어.”
“그런 권리는 누가 정하는데?”
“우리가. 아냐, 정정할게. 내가.”
준회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이곤 걸터앉은 몸을 일으키자 준회가 날 바라보다가 피실 웃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주인님, 하고 나를 불러왔다. 준회의 부름에 왜? 하고 준회를 바라보며 묻자, 준회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봐.”
준회의 부름에 준회를 향해 다가가자, 더 가까이, 하고 날 부른 준회는 나와 몇 cm 떨어지지 않은 채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꼭 꿈에서, 그러니까, 뽀뽀를 할 때 처럼.
“왜에.”
싫지 않은 칭얼거림을 뱉으며 준회와 얼굴을 마주하자, 준회가 손을 뻗어 내 눈 위로 씌어져 있던 안경을 벗겼다. 순식간에 사라진 눈 앞의 안경과 함께 잠깐 맞지 않던 초점이 준회와 마주치자 준회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주인님은 안경 없는 모습이 더 예뻐.”
“뭐야.”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피실 웃자 준회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웃는 것도 예뻐.”
갑작스러운 준회의 말에 마주친 눈을 피하자 준회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웠던 얼굴을 피해 구준회에게서 몸을 조금 떨어트리자 준회가 쓰고 있던 노트북의 화면을 끄곤 내게 물어왔다.
“배 안 고파?”
“고픈 것 같기도 하고.”
“밥 먹자. 뭐 해줄까, 주인님?”
“글쎄…. 스파게티?”
내 답에 준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스파게티 같은 건 살쪄서 안 먹는다며?”
“내가 그랬나?”
“응.”
“아, 모올라.”
안녕! uriel 입니다
저번 화에 너무나 답글이 달고 싶었는데 다음 글 들고오느라 못 달았어..♡ 휴머노이드 05~08은 꼭 달 예정이에요요! 오랜만에 제 이쁜이들과 소통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떨린당 *_* 헤헤
실은 오늘도 음주티즈.. 음주 한 잔 걸치고 쓰는 글은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제대로 글을 쓰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노트북 끄면 그대로 꼴깍 잠에 들 것 같은데..♡
제가 돌아왔다고 울고 울고 해주시는 제 이쁜이들 덕분에 정말 기분 좋았어요 ㅠ_ㅠ 완전히 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저를 기다리고, 제 글에 기분 좋아 해주시는 제 이쁜이들..♡ 몇 명이 되었든 제 이쁜이들은 한 분 한 분 제게 참 소중합니다! 알고 계실까요? ㅎ_ㅎ
휴머노이드 준회가 주인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어요, 느껴져야 할 텐데.. 여튼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구요!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오늘도 좋은 글이 되었길!
사랑해요 ♡ 그래서 제 이쁜이들 학교 생활은 어떻다구요?! 궁금하다규.. 말해달라규.. (하트)
사랑해요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