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4. Mizutamari by 경수 + 종인BGM) Mizutamari(Slow ver.): Kiyoshi Kobayashi딸랑-"어서오세요-"몇 번이고 들어도 참 기분좋은 소리다- 라고 경수는 생각했다.유리문이 열리며 들리는 종소리도, 그리고 무심한 듯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도.학교에서 카페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총총히 걷다보면 어느새 등줄기를 타고 땀 한 방울이 조르륵 흘러내리는,그런 날씨다. 올해도 이제 벌써 여름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었다.학교에서는 이미 고3에게 방학 따위는 없다는 듯 평소처럼 수업이 이어졌다.아이들은 학창시절의 로망은 방학인데 우리는 꿈을 빼앗겼다며, 방학을 앗아간 악독한 대한민국의 입시현실에 대해 통탄해 마지 않았다.보충수업이라는 명목하에 반강제적으로 시작된 이 강행군이 조금은 지칠 법도 했지만, 경수는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가뿐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세훈이 그런 경수를 보고 겉보기와는 달리(?) 속이 해저 구만리처럼 넓어서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아니면 애가 미친 것 같다며 이마를 짚어보기도 했다.사실 고3이 된 이후에도 경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압박감에 크게 시달리거나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세훈이 들으면 재수없는 자식이네, 건방진 자식이네- 툴툴댈 일이었지만, 고등학교 재학 내내 경수에겐 성적이 중요한 일이 아니였다.물론 늘 공부는 열심히 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혹은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해 있는 동안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드리면 '역시 우리 아들은 똑똑하다.기특해- 내 아들.'하며 그 순간만이라도 예전 같은 미소로 환하게 웃어주셨다.그 순간만큼은 엄마를 힘들게 했던 구역질과 피로도,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가라앉지 않던 통증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했다.그런 날이면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경수가 공부하는 모습을 경수 방 침대에 누워, 혹은 병원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엄마가 잠이 들면 경수도 조심스레 엄마의 품을 파고 들어 잠이 들곤 했다.그것이 좋아서 꼬박꼬박 공부했다. 엄마가 입원해계신 동안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엄마가 혹시 깰까 싶어 시트로 불빛을 가린 채 책을 읽기도 했다.워낙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수는 이것이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아무 것도 제 손으로는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 일이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거나,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그저 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성적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가고 싶은 학교나 과를 목표로 잡은 것도 아니었다.얼마 전 담임선생님과의 진로상담에서도 경수는 그저 자신의 모의고사 성적에 맞춰 선생님이 추천한 몇몇 대학의 몇몇 과를 목표로 하겠다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너라면 조금만 더 하면 좀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을거야, 경수야.'라고 조심스럽게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경수는 그저 조용히, 그리고 잠시 웃었다.그 속에 담긴 담담한 거절에 더 이상 담임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그래서일까. 지난 번 카페를 찾았을 때, 자신이 올해 고3이라는 말을 듣고 펄쩍 뛰던 종인의 모습이 왠지 신기했다.대학, 그리고 고3이라는, 일반 사람들에게 듣기만 해도 답답한 주제는 자신에게 큰 무게감이 없었다.그것은 돌아가신 엄마도 마찬가지였다.아버지는...자신이 고3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계실까, 그것조차 의문이었다.주변 친구들 대부분과 선생님은 경수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더 짊어지운다는 것에 어딘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아무도 경수에게 '고3이라고?!!! 너 근데 이러고 있어도 돼?!!!!!'라며 펄쩍 뛰어주지 않았다.가끔 세훈이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며 경수에게 '대한민국에서 고3은 죄인이야. 넌 그래도 공부 잘하니 좋겠다, 건방진 자식아'하고 툴툴거릴 뿐,아무도 경수를 일반적인 고3처럼 대하지 않았다.특별히 자세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그저 고3인데 괜찮냐고 묻는 종인에게 조용히 웃어보이는 경수를 보고 종인이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뒷목을 뽁뽁 긁어대던 종인은 어쩌면 경수를 꿈 많고 고민이 많아 방황하는 몇몇 섬세한 고3 학생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아니면, 여느 고3생들이 그러하듯 밤늦도록 학원과 과외를 다닐 수 없는, 가난한 고학생이라고 생각하고 동정한 것일수도......그러면 왠지 조금은 슬플 것 같지만.어쨌든, 종인은 그렇게 뒷목을 뽁뽁 긁다가 경수에게 앞으로는 학교가 끝나고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여기로 와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잘은 아니라도 자신도 고3 시절을 보낸 적이 있으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쪽팔리는 일은 조금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그...오, 오후에는 손님도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고, 나도 그런 시간에는 뭐.. 그.. 영어공부 같은 거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도 저기.. 심심하기도 하고 또...." 라며몇 번을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중한 눈빛으로 말하는 종인을 잠시 바라보던 경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종인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그런 종인의 얼굴이, 무표정하고 어딘가 아주 조금 무섭기도 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소년의 것처럼 풋풋해보인다고 경수는 생각했다.야자를 의무적으로 하지 않는 경수네 학교 특성상, 수업이 끝나고 카페에 오면 문을 닫을 때까지 꽤나 넉넉한 시간이 있었다.카페로 들어서면 늘상 그렇듯 유리문이 열리면서 울리는 종 소리와 함께 '어서오세요-' 하는 어딘가 나른한 목소리가 경수를 반겼다.둘 사이에는 요란한 인사가 없었다.손님이 있든 없든, 종인은 경수가 들어서면 입꼬리를 한 번 올려 씩 웃었고, 그런 종인에게 경수는 작은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경수가 늘 앉는 제일 구석자리로 가서 앉으면,종인이 어느새 스윽 다가와 무심한 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이블에 무언가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두고 돌아섰다.어느 날은 시원한 아이스커피, 어느 날은 레모네이드-한참을 그렇게 공부하다 에어컨 바람이 직접적으로 오지 않는 자리임에도 서늘한 느낌에 무심코 팔을 쓸어내릴 때 쯤이면,따뜻한 밀크티나 허브티 같은 것들을 한 잔 슥 밀어놓고 가기도 했다.저녁은 보통 가게에서 팔다 남은 샌드위치나 토스트, 케이크 같은 것들로 간단하게 떼웠다.워낙 저녁은 잘 챙겨먹지 않는 터라 이렇게 먹는 것조차 경수에게는 낯설었다.하지만 '한창 잘 먹어야 하는 고3인데 밥을 못 먹이고 이러고 있으니 안되겠다, 대책을 세워야겠어...'라고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는 종인의 모습이어딘가 우습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사실 처음 종인에게 이러한 융숭한(?) 접대를 받았을 때 경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안그래도 첫 만남부터 신세를 졌는데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종인의 모습에 첫 며칠은 먹은만큼 돈을 지불하겠다며 나서 둘이 소리없는 신경전을 펼쳤다.왠지 아직은 어색하고 서로가 조심스러운 둘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시선을 마주치고 실랑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사건이었다.말없는 눈싸움이 계속 이어지다가,'이러시면 부담스러워서 저... 여기 이제 안 올래요.' 라고 경수가 한숨같은 한 마디를 던졌었다.결국 매일 카페를 마칠 때나 잠깐씩 쉴 때 가게 정리를 함께 도와주거나 카페 안 화분들에 물을 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사장 형이 가게 안의 화분들을 엄청 아껴서 이름까지 붙여주고 애지중지 하는데, 자신은 당췌 저게 어디가 예쁜지 정이 안가서 못 챙기겠다며 종인은 투덜거렸다.무슨 생각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리고 늘 음악이 흐르고 있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까-스스로가 참 대책없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카페는 늘 쾌적하고 조용해서 좋았다.종인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생각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대부분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만을 틀어두었고가끔 드나드는 손님 덕에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가 종종 버릇처럼 멍해지는 경수를 깨워주어 오히려 차분히 공부할 수 있었다.카운터 쪽을 슬쩍 바라보자 종인도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를 잘근거리며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한창 집중해 있는지 가볍게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유도 없이 가슴 한쪽께가 슬금슬금, 간지러움을 타는 것처럼 웃음이 났다.요 근래,웃음이 참 헤퍼졌다.어쩌면 몇 년만일지도 모르겠다고 경수는 생각했다....한참을 책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던 경수의 밤톨처럼 동그마한 머리꼭지가 들리는 것을 보고 종인은 얼른 시선을 피해 카운터 위에 놓아둔위장용 토익 교재 위로 파고들었다.괜히 빈 공간에 끄적끄적 밑에 있는 문장을 따라 써보며 집중하는 척 미간을 찌푸렸지만, 카운터 밑에서는 한 쪽 다리가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쟨 너무 말랐어. 이대로는 안돼.조금 전 에어컨도 조금 줄이고(대외적인 이유는 석유 한 방울 안나오는 이 나라의 전기를 아끼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경수가 자꾸 팔을 쓸어내리며 어깨를 움추리는 것 같아 서둘러 줄였을 뿐이다.) 따뜻한 허브 티도 한 잔 가져다 주었고-내일은 마트에 들러 무릎담요를 하나 살까- 하고 좋은 생각을 떠올린 스스로가 기특하다 싶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자신이 고3이었을 때, 종인의 어머니는 진심 자신을 살찌워서 5일장에 팔아먹으려고 하는 소장수를 떠올리게 했다.마치 공부를 배로 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좋다는 것은 다 사다 먹이셨다.어떤 날은 이전에 먹은 밥이 소화되기도 전에 또 눌러넣고, 또 눌러넣어 결국 손을 딴다 소화제를 먹는다 난리를 치기도 했지만,공부든 뭐든 뱃심으로 한다는 어머니의 지론은 변하지 않았다.그 의견에는 아직 완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저렇게 조그맣고 마른 녀석이 여태껏 저녁도 잘 챙겨먹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조심스레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사실은 종인 스스로도 제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딱히 말로 설명하기는 뭐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제가 손을 달달 떨며 전해준 레모네이드 잔을 받고 해사하게 웃는 녀석을 보았을 때,웃는 얼굴만 보면 잊혀질 것 같았던 녀석의 그렁그렁한 두 눈이, 애처롭게 젖어있던 두 뺨이, 흐느낌을 삼키던 작은 어깨가 다시 떠올랐다.그 지독한 외로움이 저에게까지 전해지는 느낌에, 종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좀 더... 좀 더 어린애처럼 웃어도 되잖아.너- 아직 어린 녀석이 뭐가 그렇게 지치고 힘드냐.조금은 편안하게,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가고 경수가 자신이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밝혔을 때도종인은 이 조그마한 녀석이 자신과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어머니의 손에 살찌워지며 '난 사육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고3이라 그렇게 힘들어하고 지쳐보였나...? 하지만 그렇게 결론짓기엔 이 녀석은 어딘가 좀 더 처연하고, 뭔가 좀 더-슬퍼보였다.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덜컥 '여기 와서 공부해!'라고 제안해놓고선, 뱉어놓은 말은 주워담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금 후회했다.자신이야 워낙 학원이니 뭐니 하는 것들과 맞지 않아 집에서 고3시절을 보냈지만(물론 대신 누나의 악독하고 피눈물이 지금도 맺히는 개인과외가 있긴 했다),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원에도 가고 과외도 받고, 또 얘네 집에서 일단 고3 아들내미가 그렇게 '카페에서 공부하고 올게요'라고 해서 받아줄리가......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잖아...자신을 조금 놀란 눈으로 깜빡깜빡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속으로 1000번쯤 '괜히 말했나, 괜히 그랬나,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미쳤지'를 중얼거리던 종인은,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경수의 모습에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갈 듯 뿌듯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아까 후회하던 것은 거짓말처럼 잊고, 말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자신은 이 가게에서 알바생 나부랭이일 뿐이라는 사실 따위, 이미 종인에게는 잊혀져 있었다.그 다음날부터 아이는 정말 학교가 끝나는 시간쯤 카페로 찾아왔다.처음에는 머뭇머뭇 조심스레 들어와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고 앉길래, 에어컨 바람이 잘 닿지 않으면서도 쾌적한, 알바생으로서 자신만 아는 명당 자리에 끌어다앉혀주었다.어차피 물장사가 남는 장사다- 라고 하니까, 비오던 지난 밤 결국 추가근무수당을 더 주지 않은 준면에게 복수하는 셈 치고 이것저것 서비스 삼아 마실 것이나먹을 것도 가져다주었다.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굳이굳이 돈을 내고야 말겠다, 쪼끄맣고 매사 조용한 녀석이 나름대로 강단있게 시선을 마주하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틈틈이 가게 정리를 도와주고 화분을 돌봐주는 것으로 타협도 봤다.워낙 작은 가게이기도 하고 종인 역시 좀 더 신경을 쓰다보니 특별히 경수가 나서서 할 일은 없었지만, 녀석도 나름대로 이것저것 챙기는 것 같았다.한참 공부하는가 싶던 녀석이 어느새 벌떡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거나 눈에 띄는 빈 잔들을 치워주기도 하고 빈 냅킨통을 채워넣기도 했다.'어쩐지 작은 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아...'다시 동글동글한 머리꼭지를 보이며 책 속으로 파고드는 경수를 흘끔 바라보던 종인이 생각했다.아주 어렸을 때, 병아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종인이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던 길, 교문 앞에서 병아리 파는 아저씨에게 제 가방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주고 사 온 병아리는 너무 작고, 보송보송하고, 또 귀여워서-그 당시 엄마에게 동생 낳아달라고 떼를 쓰다 니가 키울꺼냐며 등짝을 한 대씩 후려맞던 종인에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주었다.소중하게 병아리를 품에 안고 돌아온 종인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썩소를 지으며 꿀밤 한 대를 먹인 엄마는, 네 동생이니 네가 잘 키우지 않으면 시골 할머니댁에 데려다줘버린다며 겁을 주었다.한창 순진했던 때라 그 말을 다 곧이 곧대로 들은 바, 그 날부터 꼬꼬마 종인의 세상은 병아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같이 축구하고 게임도 할 수 있는 남동생이 꼭 갖고 싶었던 종인은 그 날로 병아리에게 '종만이'라는 다소 답이 없는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 돌보아주었다.매일 뭐든 맛있고 몸에 좋은 것이 생기면 다 종만이에게 주려고 들고 가다 엄마에게 뒷덜미를 잡히기도 했다.엄마는 뭐든 과하면 독이라며 종인이 종만이를 주겠다며 들고가던 소갈비 그릇을 빼앗아들었다.모이통에 매일 새로 뜬 시원한 물을 갈아주고, 날이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집에서 제일 보송보송하고 촉감이 좋은 수건이나 옷을 가져다 덮어주고, 날이 덥다 싶으면 부채를 들고 상감마마 모시듯 부채질을 해주고...그러다보니 어느새 종만이는 노랗고 작은 병아리의 모습을 벗어나 누가봐도 닭의 새끼가 분명한 모습으로 자라났다.아름다운 추억인 것 치고는 결말이 좀 많이 슬픈데, 무럭무럭 자란 종만에게는 더 이상 집에서 키우는 우리가 비좁았던 모양이었다.어느 날 종만이가 제 우리를 탈출해 밤 늦게 불꺼진 집안으로 들어서던 누나에게 달려들어 누나가 기절한 사건을 빌미로 종인은 종만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 했다.시골 할머니댁으로 보내진 종만은 그 댁으로 간지 2주일만에 겁없이 옆집 큰 개 앞에서 알짱거리다 하늘나라로 떠났다.그 충격적인 결말에 종인은 3일이나 제 방에서 앓아누워 울다 잠들기를 반복했다.지금 제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종만이를 키우던 그 때 같다는 생각에 종인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자꾸만 신경이 쓰였다.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신경쓰던 놈이었나 싶을 정도로-이젠 자식놈들 둘 다 대학 보내놨으니 다시는 고3 엄마 노릇은 안하고 살꺼라며, 엄마는 누나와 종인을 사육하기 위해 사들였던 고3 수험생을 위한 각종 보양식이며머리가 좋아진다는 차, 음식들과 관련된 요리책을 모조리 묶어 창고에 넣어버렸다.그런데 이제는 종인이 인터넷을 뒤지며 고3 수험생에게 좋은 음식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있다.녀석이 작은 손으로 펜을 꼭 쥔 채 노트며 책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자꾸만 마음이 뿌듯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제가 준 음료며 차를 조심스럽게 들고 한 모금 머금는 것만 봐도 제 입 안이 다 달달해지는 느낌이다.서늘한 곳에 오래 있어서인지 녀석이 어깨라도 한 번 움츠리고 팔이라도 한 번 쓸어내릴라치면 반사적으로 얼른 에어컨 바람을 줄였다.무더운 여름날씨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손님이 그런 종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기도 했지만 본 척 만 척 했다.참, 지극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다.
이봐요, 거기 누님- 쟤를 한 번 봐요- 여긴 지금 고3 수험생이 있는 곳이라구요.저렇게 쪼그만한 애가 입시 준비하느라 저렇게 열심히 애를 먹고 있는데 당신 지금 덥단 말이 나와?!이런 매정한 사람 같으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애다, 진짜-죄없는 사람들을 모두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현대인으로 매도하며 종인은 뿌듯하게 에어컨 바람을 더 더 줄였다.사실은 카페 안의 음악도 다 꺼버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건 자신의 로망이자 유일한 즐거움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라 조금 망설였다.다행스럽게도 종인이 틀어둔 음악소리 덕분에 더 집중이 잘 된다고 경수가 말해준 덕에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대신 종인은 선곡에 좀 더 신경을 썼다. 잔잔하고 마음이 편안해질법한 곡들을 메인으로 모두 깔아두었다.오늘은 집에 가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클래식 이런 걸 좀 검색해볼까. 클래식은 조금 내 취향과 어긋나긴 하지만- 왠지 좋은 생각 같다."저기... 형.""응??"턱을 괴고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종인은 어느새 카운터 너머에 선 경수의 부름에 삐끗, 하고 미끄러져 카운터에 턱을 박을 뻔 했다.민망한 상황에 큼큼 목을 다듬으며 바라보니 경수가 좀 전에 나간 손님들의 빈 잔을 들고 서 있었다.'어, 어- 그래. 고맙다.' 라며 얼른 받아드는 종인의 가슴 속에 천천히 따뜻하고 간지러운 기운이 퍼졌다.형.처음에는 부르기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경수가 자신을 보고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 흐뭇하고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정체불명의 행복감을 주체할 수가 없다. 처음 녀석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 때, 종인은 손끝부터 알 수 없는 전율 같은 것이 느껴져 얼른 뒤로 돌아섰었다.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학교 선배들에게 자신이 '형-' 하고 불렀을 때 그들도 이렇게 기분이 좋았을까?자꾸 실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남몰래 나무라며 잔을 건네받는데, 잠깐 맞닿은 경수의 손끝에서 서늘한 한기가 묻어났다.좀 전까지는 한창 풀어지던 종인의 표정이 금방 거짓말처럼 심각해진다. 미간에 주름도 세 개쯤 뾱뾱 생긴다.역시... 당장 내일 아침 마트가 문을 열자마자 무릎담요를 사러 가리라.이 참에 장갑도 하나 살까..? 그건 좀 심하게 오버인가...그렇게 엉뚱한 생각에 빠진 채 자리로 돌아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종인은 아까부터 계속 갈등하던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아무리 봐도 안되겠어. 쟨 너무 말랐어. 이건 고3의 모습이 아냐."너-""...네?"뜬금없는 부름에 아이가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최근 며칠 새 알았는데, 무표정하게 있으면 어딘가 나름대로 날카로워보일 것도 같고 대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긴 요 녀석이 그렇게 매사 귀엽기만 한 이유는말을 걸 때마다 동그랗게 뜬 눈과 살짝 벌어진 채 다물줄을 모르는 저 입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불렀는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뎅글뎅글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귀여워 종인은 저도 몰래 지어지는 아빠미소를 애써 억눌러야 했다.아... 근데 진짜 귀엽다. 귀여워."너,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음식이요?""응. 먹는 거."
그래. 요 며칠 무릎담요보다, 장갑보다 더 중요할만큼, 종인이 고민하고 있던 것은 이거였다.카페 내에서는 뭔가 시켜먹기도 조금 그렇고- 그렇다고 자리를 비우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시락을 싸오거나 하는 건 더 귀찮고...게다가 밥이라면 갓 지은 따끈따끈한 쌀밥을 좋아하는 종인은 식어서 찬 떡처럼 수증기가 맺힌 도시락 밥은 도대체 먹고 싶지 않았다.워낙 빵 종류를 좋아하는지라 원래 처음부터 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저녁은 그냥 팔다 남은 빵이며 케이크, 샌드위치들로 알아서 떼우겠다 준면에게말했었다. 어차피 남으면 다 버려야 하는 것들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생각외로 이 곳의 빵들은 맛이 좋았다.이런 작은 동네 카페에서 팔기에는 조금 아까울 정도였다.모두 준면이 종인이 오기 전 오전 시간에 만들어놓고 가는 것들이었는데, 여느 유명 베이커리들보다도 맛이 좋은 편이라 종인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그래서 일단은 경수도 자신과 함께 이런 것들로 저녁을 떼우기로 하고 지내왔다.종인이라고 이런 걸 먹이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서,'저녁은 집에 가서 먹고 오는 게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하지만 '원래 저녁은 잘 안 먹어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던진 녀석의 대답은 종인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엄마... 배가 불러서 숨이 막혀...' 하고 헥헥대며 바닥을 기어다닐 때까지 먹이고 또 먹이던 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무럭무럭 자랄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더 잘 먹고 더 커야할 것만 같은 조그마한 녀석이 저녁도 먹지 않고 다닌다니, 이건 말도 안된다 싶었다.
'집에 엄마 안계셔? 부모님 다 직장 나가시나?' 라는 종인의 말에 아이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시선을 떨구는 모습에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요즘 대부분의 집들이 그렇다고 하듯 부모님이 모두 맞벌이를 하시거나 해서 녀석을 잘 챙기지 못하는 듯 싶었다.사범대생으로서 미래를 향해 자라나는 새싹을 이렇게 방치해둘 수야 있나!! 라는 정의감에 불타 그럼 자신과 함께 여기서 저녁을 간단하게라도 떼우자- 라고제안했지만, 제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빵들을 아무리 준다한들 새싹에게 중국산 영양제를 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어딘가 찜찜했다.어떤 메뉴를 주든 군말없이 꼭꼭 잘 먹는 걸 보면 특별히 가리는 것도 없을 것 같긴 한데..녀석 또 생긴 것만 보면 입이 엄청 짧게 생겼단 말이지.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던 종인이 이참에 큰 맘먹고 경수에게 직구를 던진 것이다."먹는 거요...? 어떤 먹는 거...""밥 같은 거 말이야- 뭐 그런 거 있잖아, 고기가 좋다, 생선이 좋다- 갈비찜, 삼계탕, 전복죽- 이런 거."읊다보니 결국 메뉴는 자꾸 보양식 쪽으로 기운다."그냥.... 그냥... 아무거나 먹는데..."눈을 도로록 도로록 굴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이 썩 마땅찮다.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아무거나 그냥 먹는다는 건 말이 안돼!!"하나만 딱 집어봐, 하나만- 니가 만일 뭐... 무인도에 갔다! 그 때 뭐가 제일 먹고 싶을 것 같아??"...뭐냐, 이 초딩들도 안 쓸 것 같은 거지같은 예시는.... 또 한 번 스스로의 머저리같은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종인은 다시 한 번 좌절하고 있었다.엄마. 왜 절 이렇게 낳으셨어요.다혈질에 터프한 종인의 어머니가 들으면 헤드락을 당할법한 소리를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종인 앞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경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스..... 스파게티....?""...스파게티...?"끄덕끄덕-스파게티라. 스파게티. 그- 토마토 갈아넣은 소스에 밋밋한 면이 들어있는- 돌돌 말아먹는.. 그- 스파게티...?빵은 좋아하면서 또 나머지 입맛은 지극히 한국남자스러운 종인이 몇 번 먹어본 적 없는 스파게티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누나가 땡기는데 혼자 먹으러 가기는 싫다며 자신을 몇 번 질질 끌고나가는 바람에 먹어본 적은 있다만-확실히 자신이 무인도에 갔을 때 제일 먹고 싶을법한 건 영 아니긴 한데...면 종류라면 스파게티니 하는 것보다는 된장을 솔솔 풀어 끓인 칼국수가 입맛에 맞는 종인은 역시 그냥 평범한 토종 한국남자였다.사실은 녀석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게 있으면 엄마에게 등짝 몇 대 후려맞는 한이 있어도 싸달라고 졸라댈 생각이었는데-스파게티라면 집에서 나올 때 엄마한테 싸달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메뉴 같은데...하지만, 저 녀석이 포크에 돌돌만 다홍빛 스파게티면을 오물오물 먹는 모습은- 꽤나 잘 어울릴 것도 같다.다시 한 번 곰곰히 고민에 잠겼던 종인이 이내 크게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고 경수에게 당당하게 말했다."너!! ...토요일에 뭐하냐?""네...?"...고3이 토요일에 공부하겠지 뭐하겠냐 이 멍충이... 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 눈빛이었지만,종인은 경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 왠지 그런 생각이 최소 2% 정도는 섞여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이 녀석 앞에선 제가 왠지 팔푼이가 되는 기분이다....그렇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니까."토요일에도 집에 아무도 안계셔?""...네.""그럼- 이번 토요일날 요 옆 학교 앞에서 만나자. 12시. 오케이?"일요일은 가게가 문을 닫고 토요일은 아침부터 내내 준면이 가게를 보다가 오후 6시에 일찍 문을 닫는다.즉, 평일알바인 종인은 주말에는 가게에 나올 일이 없다.그런 종인이 느닷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혼자 약속을 잡아버리자 경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이 썩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미소를 지은 종인이 어서 가서 공부하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스파게티라... 스파게티...자리로 돌아가 앉아 책을 펴는 경수의 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은 다시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스파게티라고 하면 누나가 참 좋아하긴 하는데...그거 만들기 어려운가...?엄마에게 굽신굽신해서 장을 좀 보러 가자고 해야겠다, 생각하는 종인의 마음에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주저리 주저리 ...급작스럽게 제가 종인이를 내조의 여왕으로 만들었다는 기분이...-_-;;;
Mizutamari는 우리말로 '물웅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쿨렐레 연주하시는 분들에게는 기타의 '로망스' 같은 곡이라고 하는데-
뭔가 평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지 않나요:) ...나만 그런가;;
이번 편은 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짤막하게 큰 주제도 없이, 사건도 없이 그냥 물웅덩이 하나 폴짝 건너듯한 기분으로 썼달까요-
더 이어 쓰기에는 뭔가 길이도 좀 너무 길어질 것 같고, 그럴 기운도 또 없고;;;
해서 짤막하게, 그리고 심심하게 올라갑니다- 이제 왠지 이런 진도도 안나가는 전개에 슬슬 질리실 때쯤 되시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허허;;
에피소드가 하나 하나 쌓일 때마다 이전에 제가 깔아놓았던 소소한 설정들이 이제 점점 헷갈리기 시작합니다...ㅋㅋㅋ...
언제 어디에서 천재적인 어느 분께서 '어!!! 이거 지난번에는 이랬는데 말이 바꼈다!!'하고 발견해주실지 모르겠어요...허허...
그래도 늘.. 디테일은 슥-슥..>_<;;;
드디어 즐거운 불금이네요-
태풍이 스리슬쩍 왔다가서 그런가 오늘따라 집 인터넷 상태가 메롱메롱...;; 언제 끊길지 몰라서 맘이 급합니다;;
새벽 1시, 몰래 살짝 짤막하게 한 편 이렇게 올려두고 전 불금을 맞이하기 위해 떠나야겠어요..:) (어디로...?)
읽어주시는 여러분, 모두모두 늘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감사드리는 것.. 아시죠-?
제게 큰 힘이 되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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