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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206l

사진가 수진 X 요정 슈화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맑았다. 일기예보에서도 오늘 비 소식은 5%. 구름 한 점 없이 말 그대로 높고 푸른 하늘이었다. 수진은 카메라 및 장비들을 챙기고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진은 어렸을 때부터 숲이 좋았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으로 산행이 결정됐을 때에도 교장 선생님 뒷담을 까는 친구들 사이에 끼지 않고 혼자 챙겨가야 할 준비물을 구상하며 즐거워했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매번 갈 때마다 다른 순간을 보여주었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다보면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쉰다는 느낌에 가슴이 박차 올랐더랬다. 이마에 맺히는 땀도, 쿵쾅거리는 심장도. 그리 싫지 않았다. 사진기를 들게 된 건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숲을 찍는 사진가가 된 건 오로지 수진의 선택이었다.


수진은 창문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수진의 머리를 헝크리고 차 안에 잠시 머물렀다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흥겨운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저 멀리 숲이 보였다.

*

저기 도망가는 다람쥐 발견.


숲 입구에서부터 수진은 카메라를 들었다. 비록 다람쥐는 찍지 못했지만 이 사진에 다람쥐가 있던 곳, 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라며 혼자 빈정거렸다.


수진은 동기들이 여는 전시회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하늘 한 장 찍어두고 희망이라니.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 “너무 과장된 거 아니야?” “우린 보이는 걸 찍는 사진가지 없는 걸 만들어내는 현대미술가가 아니야.” 많은 동기들은 수진을 이제 부르지도 않았고, 수진을 조금 생각해주는 이들은 넌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봐.”라며, 사진가 또한 예술가라며 수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사실 수진 역시 알고는 있었다. 전시회에서 그렇게 비정거리고 작품을 비웃는 건 단지 그렇게 전시회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낮은 자존감, 쓸데없이 높기만 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괜찮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한 때는 분명 떠오르는 신예였는데. 수진은 과거에 열었던 전시회를 떠올리며 셔터를 눌렀다. 낙엽 위에서 잠시 날개를 쉬고 있는 참새가 카메라 안쪽에 들어왔다. 귀여워라. 수진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입구에서부터 많이 들어와 있었다.


카메라를 놓아볼까 생각도 했다. 사진 편집 기술도 익혔고, 손도 빠른 편이니 그 쪽으로 진로를 틀어도 되고, 자기가 하는 쇼핑몰 모델이 제발 되어 달라 매번 부탁하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 봐도 괜찮았다. 하지만 왜 카메라를 보면 항상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처음에 억지로 카메라를 들려줬던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그런 수진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네 운명이 그런 걸 어쩌겠니.” 말하고 본인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수진이 태어나기 전 꾼 꿈에서, 숲에 갔다가 큰 뱀을 만나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아마 너인 것 같다고. 숲으로 놀러가길 좋아했던 어린 수진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놓은 나무판자 길을 걷던 수진은 문득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수진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우산도 없는데. 어떡하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면 문제없겠지만 모처럼 큰 맘 먹고 멀리까지 나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웠다. 그래도 모자는 쓰고 왔으니까..... 수진은 모자를 아래로 눌러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 소리, 바람소리. 수진은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사진에 담아낼 수 있을까. 분명 그것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못내 부러웠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재능인 것 같았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재능의 간격이 매워질까? 길지만 또 길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 그건 무척이나 어렵거나, 혹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신은 탁월하지 않았다. 한 때 그런 줄 알고 있었으나...... 많은 범인들이 하는 고민일 테였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수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개울가를 발견하고 다가갔을 때, 수진은 수면 위로 파동이 이는 것을 발견했다. 알지 못했던 사이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손을 내뻗으니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빗물이 섬뜩하게 닿아왔다. 답지 않게 왜 금방 돌아가지 않고 숲에 남은 거지? 수진은 몇 분 전의 자신의 등을 때려주고 싶었다. 괜한 감성에 젖어서. 사진이야 다음에 또 찍으면 될 일인데. 오늘따라 왜 그랬을까. 이렇게 큰 숲은 어딘가 자연인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지어 놓은 별장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젖어드는 옷자락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벌써 11월이다. 이런 가을에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고, 감기에 걸리면 몇 날 며칠을 앓느라 다른 일을 못 하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것 보다 아무 일 하지 않고 누워있는 자신을 타박할 게 뻔한 제 자신이 상상되었다. 부모님께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같잖은 자존심이 손끝부터 천천히 좀먹어갔다.


수진은 달렸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



많은 것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한때는 저 나무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는데. 작은 풀들의 이름도. 두꺼운 식물 사전을 선물 받은 후, 매일 매일 그 책에 빠져 살았을 때 얻은 교훈이 있다면 이 세상에 이름 없는 것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다시 말해 이름이 있다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수진은 방 안에 있던 인형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토끼 인형은 래램, 강아지 인형은 도기, 곰 인형은 베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이름들을 진심으로 여겼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까 이름을 붙여줄게. 인형들을 모아두고 호기롭게 외쳤던 건 좀 부끄러운 과거긴 하지만.....


..!”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수진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세상이 느리게 움직였다.


*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수진은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온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얼마나 세게 눈을 감았는지 눈을 뜨자 갑자기 들어온 빛에 잠시 어지러웠다.


여긴 어디지.


상체를 간신히 일으키고 둘러보니 내내 걸어왔던 나무판자 길 위가 아니었다. 빗줄기가 굵어져 옷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수진은 코를 훌쩍였다. 이거야 원. 감기 확정이다.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곳곳에 쓸리고 부딪히고 생채기가 나 있었다. 손등에 흐르는 얇은 핏줄기를 닦아내려다 손이 더러운 걸 보고 포기했다. 혹시 감염이라도 나면 안 되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이미 이렇게 푹 젖은 상태에서 조금 더 일찍 돌아간다 한들 달라질 게 없었다. 따끔거리는 손등에 입김을 불며 일어나려는데, 상태가 수상하던 발목이 심각했다. 수진의 표정이 조금 더 심각해졌다.


어떡하지.”


퉁퉁 부어오른 걸 봐서 인대가 늘어난 것 같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 몇 번 더 발목을 움직여보려던 수진은 그냥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내 신세 같아.


수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예 드러누웠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하얀 얼굴에 까만 눈 두 개. 긴 머리카락, 빛이 나는...... ?


귀신.......?”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하얀 존재가 입 꼬리를 들어 올리고 가득 미소 짓는 것을 본 후 그냥 기절하고 말았다.



수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 처음 인식한 건 온 몸에 덮인 이상한 풀들의 이상한 풀 냄새였다. 수진은 오만상을 지으며 눈을 떴다.


뭐야..?”

일어났어?!”

우렁찬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니 쓰러지기 직전 봤던 귀신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수진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그렇게 잠자다니! 너무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수진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거기다가 다치기까지 하다니! 충격 받았어! 너도 다칠 수 있었어?”

나 알아요?”

허물없이 자신을 대하는 귀신에 수진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말이지. 사람이 예의라는 게 없나? 죽어서 그런 건 따지지 않는 건가? 수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구세요?”

.......”

귀신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다시 활짝 웃었다.


장난치지 마~ 깜짝 놀래켜 주는 거 이제 안 통해! 난 이제 똑똑해!”

장난 아닌데.”

.......”


귀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수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닌가? 아닌데. 맞는데. 맞는데 왜 그러지? 나 진짜 몰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부담스러워져 수진은 고개를 돌렸다.


. 몰라요. 좀 떨어져 주세요.”

왜 몰라?! 나 슈화잖아!”

모르겠는데요.”


귀신과 접점이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 보고,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어요.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편하게 말 놓지도 마시고요.”

거짓말!!!”


그리고 귀신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슬쩍 다시 돌아보니 귀신의 눈에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진과 눈이 마주치자 귀신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 지어준 게 너잖아! 왜 모른 척 해? 나 진짜 착하게 기다렸는데!”


우는 사람 달래기는 질색인데. 수진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다.


귀신도 울어요...?”

나 귀신 아니야! 요정이야!”


수진이 나름대로 달래기 위해 꺼낸 말에 귀신, 아니 요정은 눈물을 그야말로 펑펑 쏟으며 오열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수진도 울고 싶어졌다.


요정은 한참 후에야 눈물을 멈췄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 숲에 사는 빛의 요정이고, 이름은 슈화고. 그걸 내가 지어 줬단 말이죠?”

!”

난 당신 처음 보는데.”

아닐걸?!”

아니, 진짠데...”

진짜야!”

수진은 다시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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