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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샤이니 온앤오프
l조회 713l

[슈숮] 낙엽 위에서

요정 슈화 X 사진가 수진


슈화는 놀란 눈으로 수진을 바라봤다.


넌 생각이라는 게 없어?”


아직 오지 않은 겨울바람 같이 매서웠다. 슈화는 새끼 사슴처럼 조심스레 수진의 얼굴을 살폈다. 찌푸린 눈썹,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눈, 주위 근육이 팽배하게 당겨진 채 다문 입술, 이를 악 물어 딱딱해진 턱. 슈화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숲지기야.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데.”

그거야 나는 몰라.”

어린 요정아. 슈화야. 난 지금 화 난거야.”

화났다고?”

네가 내 소중한 친구를 괴롭히고 사과도 하지 않잖아.”


그 때 뭐라고 대답했지? 슈화는 배웠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지 알고 있다.

슈화는 수진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수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수진이 그게 조심스럽지 않다 생각할 줄은 모르고.


그런데 너 그러니까 진짜 옛날이랑 똑같아. 또 지어주면 안 돼?”


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긋지긋해.”

?”


그렇게 말을 씹듯 내뱉은 수진이 슈화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췄다. 슈화의 눈이 크게 띄어졌다. 입술을 떼어낸 수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만족해?”

.... .....”

계속 날 빌어먹을 내 사랑이라고 생각했잖아. 이제 됐냐고.”

, 나는......”

치료해준 값이라고 생각해. 어쨌든 덕분에 살았으니까.”


슈화는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수진의 시선에 몸을 떨었다. 온 몸이 발게 벗겨진 기분이었다.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너어...!”

새빨개져선. 좋았나봐?”

숲지기는 안 이랬어!!!”


슈화는 제 입술을 손으로 막으며 외쳤다. 슈화에게서 나오는 빛이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수진은 한 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건 의외네.”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쁘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너무해!!”


슈화는 수진을 밀쳐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 자신을 보고 또 무어라 할지도 몰랐다. 빈정거리거나, 짜증내거나, 또 아까처럼, 그런 짓을....


홀로 남은 수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게 먼저 뽀뽀하고 껴안고 별 지랄을 다 하더니 정작 키스는 안 했다고?”


웃기네. 중얼거린 수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돌렸다. 놀란 눈의 뱀이었다. 한 바탕 성질을 부리고 난 뒤라 그런지 보이는 게 없어졌나. 무서움도 가셨다. 수진은 턱을 치켜세우고 뱀을 향해 말했다.


뭘 봐?”


뱀은 움찔 떨더니 빠르게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슈화는 폭포 주위를 서성거렸다. 물을 참방거리기도 하고, 돌탑을 쌓기도 하고, 밤알을 까서 다람쥐에게도 줬다. 모두 예전의 수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했던 놀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그 아련함과 그리움과 설렘과 친숙한.. 뭐 그런 좋은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수진과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만이 생생했다. 그리고 수진의 빈정거림도. 슈화는 괴성을 지르며 나무를 껴안았다.


이게 뭐지? 수진은 나한테 왜 그런 거야?”


나무는 가지를 흔들어 낙엽을 슈화의 머리 위에 떨어트렸다. 슈화는 울상을 지었다.


너도 숲지기를 잘 알지. 그치? 수진은 숲지기가 분명한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달라졌지?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답 좀 알려줘!”


슈화는 나무를 마구 흔들었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졌다.


너도 모른다 이거지? 알면서도 안 가르쳐주는 건 아닐 거라고 믿어! 진짜! 믿는다!”

슈화는 이번엔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 쪼르르 몰려든 뱀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쭈그려 앉아 신세를 한탄했다.


그치, 그치! 너희도 느꼈지! 숲지기가 이상한 거! 숲지기 맞지? 자기가 자꾸 아니라고 해도 맞는 건 맞는 건데. 그치?”


예전에는 수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뱀들이 꼴 보기도 싫었는데 이젠 동변상련을 느끼는 동지이자 전우이자 친구였다. 전우가 뭐더라? , 전쟁을 함께 치룬 동료! 맞다. 이 뱀들은 전우가. 숲지기가 없는 시간이, 그를 그리워하던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했던가. 슈화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뱀들을 껴안았다. 뱀들은 그건 싫은지 슈화의 품에서 곧바로 빠져나갔다.


너무해! 너희가 받은 사랑을 주란 말이야! 나 지금 내 사랑 숲지기와의 추억이 필요해!!”


슈화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이번엔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 지금 숲지기는 이상해. 너무 이상해. 나를 기억 못하고 예전과는 다른 행동을 해! 다시 보내준다고 약속했잖아. 그것만 믿고 나는 기다렸다고!”


하늘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슈화는 팔을 축 늘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수진이 맛있는 거 준다고 돌아다녀놓고 수진이가 위험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급하게 달려가느라 아무 것도 챙겨주지 못했는데. 수진이 배고프겠다. 슈화는 쭈그려 앉아 땅에 수진의 얼굴을 그렸다. 삐뚤빼뚤한지라 지나가던 산비둘기가 보고 비웃었지만.


내 사랑아아아-....”


슈화는 구슬프게 울었다.


*


슈화는 침울하게 수진이 누워있던 자리를 쓰다듬었다. 어제는 여기서 같이 잠들었는데. 수진이 먼저 안아주기도 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네....


너무... 슬퍼...”


분명 아까 눈물을 쏟을 대로 쏟았는데 다시 눈물이 쏟아지려한다. 슈화는 눈을 벅벅 닦았다. 분명 수진은 미운 짓을 하고 갔는데 왜 자꾸 이렇게 생각나고 그리운지. 왜 계속 입술의 감촉이 생생......


아악!”


슈화는 엎어져 몸을 굴렸다.


그만 생각나!”

요정의 기억력이란 찰나의 시간도 영원토록 간직할 수 있는 어쩔 땐 축복이고 어쩔 땐 저주가 되는 능력이었다. 입을 맞출 때 눈을 크게 떴기에 더 잘 기억났다. 수진의 긴 속눈썹, 눈 아래의 점, 추위에 살짝 발개진 귀와 차가운 피부. 하지만 따뜻하고 말캉했던 입술... 수진은 왜 점 하나까지 예뻐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거지? 슈화는 다시 눈물을 뚝뚝 떨구다 자신이 수진에게 나갈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왜 이제야 기억나느냐 한다면 요정의 기억력이란 편리해서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뇌 한 구석에 박아놓고 나중에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라 그렇다.

슈화는 벌떡 일어났다.


수진이 위험해!”


그리고 수진의 향이 나는 곳을 찾아 뛰었다.


*


슈화의 동물적인 직감이 맞았던 걸까. 슈화는 수진이 앞에는 강이 있고 뒤에는 땅이 있는 진퇴양난의 길에서 짜증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는 걸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수진!!!”


수진은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슈화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내가 널 책임졌어야하는데 미안해. 무서웠지? 걱정 마. 슈화가 왔어!”

뭔 소리야?”


슈화는 몸을 떨어트리고 수진의 요모조모를 살폈다. 상처 없고 눈물자국 없고 시름 자국 없고 짜증만 있다! 언제나의 수진과 같다. 슈화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하다. 다쳐서 쓰러진 수진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뛰지 않는 심장이 있더라면 그 때 아마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슈화는 다시 수진을 끌어안았다. 찬바람에 식었지만 따뜻한 체온이 한 가득 들어온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나만 믿어. 수진아.”


나긋한 슈화의 말에 수진의 구겨졌던 얼굴이 더욱 더 구겨졌다. 수진은 슈화를 밀어냈다.


네 친구놀이에 맞춰줄 생각 더는 없는데.”

하지만 수진! 네가 아무리 뭐라 해도 넌 내 소중한 친구고, 오래 전 숲지기고, 내 사랑이야. 이건 정말 변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변했다 하더라도!”


수진은 턱을 치켜들었다.


네 그 소중한 친구는 죽었잖아. 얼마나 오래 전인 진 모르지만 흙먼지로 돌아가지 않았어? 친구 이름을 부르려거든 땅에 대고 외치는 게 더 맞을 텐데.”


슈화의 눈이 아래로 쳐졌다. 예쁜 입에서 못된 말만 나온다.


아니야. 네가 맞아. 넌 다시 태어난 숲지기야. 수진아.”


슈화는 팔을 벌려 숲 전체에 뻗었다.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 이 모든 게 사랑스럽지 않았어? 넌 숲에서 태어났던 아이야. 숲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 내가 그런 널 보러 찾아갔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더라도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다시 태어나더라도 태초의 너는 변하지 않아.”


슈화의 맑고 깨끗한 눈이 수진의 눈과 부딪혔다.


난 그런 널 기다린 거야.”

“...... 네가 빛의 요정이든 내가 숲지기든. 난 그런 거 몰라. 내게 강요하지 마.”

아니야! 알아야 해!”


굽어지지 않는 고집스러운 눈이었다.


*


오래 전, 사랑스러운 친구가 말했다.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 모르고 싶어도 알아야 하는 일이 있고.”

그게 뭔데?”

겨울을 맞이하는 일.”


친구는 주름 진 얼굴로 조금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네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


지금보다 더 어렸던 요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정에게 이별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잠들었던 개구리가 다시 깨어나고, 강을 거슬러 올라온 후 죽은 물고기는 알에서 다시 태어난다. 낙엽을 떨구고 눈이 쌓였던 나무에게선 다시 푸르른 싹이 돋는다.


난 이별을 알아.”

아니, 너는 몰라. 작은 요정아.”


슈화는 늙은 인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네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아. 약속해. 널 기다릴게.”


숲지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뻗어 슈화를 끌어안았다. 슈화 역시 숲지기를 오래도록 끌어안았다. 신이 그의 생명을 거둬갈 때까지. 신은 슈화에게 말했다. 그를 다시 보기 원하니?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슈화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긴 시간을 기다렸다.


*


먼저 눈을 피한 건 수진이었다. 수진은 낙엽 위로 시선을 던졌다.


난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여기서 하면 되잖아!”

안 돼.”


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슈화는 입을 오물거리다 다시 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수진은 카메라 줄을 매만졌다.


“..... 사진.”


슈화는 수진이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학부생 시절, 그나마 친해졌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내비쳤던 때 이후로 입 밖으로 뱉은 일이 없었다.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을 설득시킨다.

수진은 슈화를 만나고 나서 한숨이 더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하기 싫은 말은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 왔는데. ... 지금도 눈이 부시게 빛나는 요정 앞에선 뭘 숨길 수 없었다. 원래 하던 것처럼 말하는 데 끼어들어서 딴 소리나 하진. 수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어. 사진을 찍을 때면, 그걸 느껴. 요즘은 그것도 잘 안 되지만. 어디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아.”

난 널 묶지 않을 건데..!”

아니. 넌 그럴 거야. 계속 그랬잖아. 날 과거에 묶으려하고, 지금 네 옆에 붙여 놓으려 하고.”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난 답답한 건 질색이야.”


슈화의 눈에 다시 눈물방울이 매달렸다.


내가 답답해...?”

미안하지만 그래.”

인간은 빨리 죽어.. 네가 빨리 죽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그래도?”


수진의 찌푸려졌던 눈이 풀어졌다. 빨간 눈으로 또 밀쳐질까 수진의 옷자락을 잡고 싶어 하는 손을 다른 손으로 마주잡고 훌쩍거리는 하얀 요정을 보고 더 짜증 낼 재간이 없었다. 수진은 또,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날 책임질 필요 없어.”


수진은 강가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슈화가 놀라 붙잡으려하자 수진은 됐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 앞에 세웠다. 물을 찰박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간 수진은 슈화를 돌아보았다. 물은 발목에서 맴돌았다.


위험해보여?”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수진을 비추었다. 슈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진은 어깨를 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난 괜찮아.”


여전히 수진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자존감은 낮고, 비관적이며 할 줄 아는 거라곤 다른 사람 작품을 비웃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은 걱정 많은 요정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살면서 저를 책임져주겠다 말하는 이가 존재할 줄이야.


물이 차가울 거야.”

그것도 괜찮아.”

이번처럼 다치면 누가 도와줘?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슈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속삭였다.


그럼 이번에도 널 기다리는 건 될까..?”

아니. 안 돼.”

왜 안 돼?!”

네가 불쌍해서.”


더 이상 과거에 엉켜있지 마. 수진은 마지막으로 슈화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무리 달이 비추더라도 어두운 숲속 길을.


슈화는 발을 동동 굴리다 수진이 가야 할 길에 먼저 가서 몇 몇 돌에 빛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떠나는 수진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


어느 겨울. 수진은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제목은 이었다.


숲에서 돌아오고 많은 변화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수진의 작품에 격을 더해줬고, 한껏 날카로워졌던 모난 성격임에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자신의 전시회를 돌아다니던 수진은 풀로 만들어진 이불을 찍은 사진 앞에서 멈췄다. 잘 지내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때만큼 감정의 변화가 심했던 적은 없던 것 같았다. 수진은 제 입술을 매만졌다. 내가 키스를 왜 했더라. 감촉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애가 따로 없다.


이건 어디서 찍은 거예요?”


옆에서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옆을 돌아본 수진은 낯익은 눈과 마주쳤다. 맑고, 순수한. 하얀 얼굴에 선한 눈매를 가진 여자는 한가득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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