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꺼내 불을 구겨넣자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시커먼 연기가 붙어나왔다. 바싹 마른 입술 탓에 담배를 빼어무는 행동에도 벗겨진 입술 사이가 아파만 왔다. 라이터의 끝 부분을 매만지길 한참, 볼이 푹 패이도록 힘껏 숨을 들이키자 담배 특유의 알싸한 향과 텁텁함이 기도를 타고 넘어갔다. 검지손가락의 두 마디 쯤 될까. 비교적 조그마한 크기에 설핏 눈살을 찌푸린 나는 연기를 뱉어내며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밭은 숨에 섞여 나온 그 것들은 노폐물이 마구 떠다니는 주변 공기에 뒤섞여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제 눈앞을 간지럽히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골목 바깥으로 걸어나간다. 손을 한번 휘저을 때마다 손 끝에 달라붙는 것들에는 모호한 경계가 숨겨져 있는 것도 같았다.
" 어! "
입술에 놓아두던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바깥으로 내밀기 무섭게 뭉툭한 손 하나가 따라나와 나와 담배 사이를 갈랐다. 깔끔하고 모던하기 그지없는 손동작이 솜씨좋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끝을 잡아냈다. 골목 바깥으로 빠져나옴과 동시에 저를 덮쳐오는 낯선 빛에 다급히 눈을 내려감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손 끝에서 멀어져가는 담배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눈이 시려왔다. 갑작스런 불빛에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도로 배경에 맞추어지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터였다.
나도, 손의 주인도 그 것을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멈춰진 듯 빳빳이 굳어있었다. 몇날 며칠이 지나도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이젠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매번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오는 손길 탓에 나는 매일 그 날이 그 날인 것처럼 놀랄 수 밖에 없었고 남자는 그럴 때마다 소리내어 웃고는 했다. 어느 새 몇 개월 째 이어지고 있는 계속된 번복에 정말 이게 그 유명한 세뇌학습의 효과인가도 싶었다. 이쯤되니 남자의 성향이 의심되기도 한다. 정말 진지하게 나는 남자의 정강이라도 발로 차버리고 뛰어가버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으으.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슬몃 감았던 눈을 떠보자 저보다 골목 쪽에 치우쳐진 코너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졌다. 역광 탓에 재수없는 얼굴이 시야 사이로 잡혀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셔서 이런 구석진 골목까지 행차하셨는지. 차키가 꽂혀있을 열쇠꾸러미가 주머니 끝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검고 짙은 색의 코트로 몸을 휘어감은 남자는 제 손에 들려진 담배를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다보았다. 평소라면 실없이 비실비실 웃으면서 이상한 농담이라도 던졌을 양반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걸 보면 상층부에서 강하게 깨지고 돌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 내 놔. "
나이도, 직급 따위도 신경쓰지 않고 뱉어내는 나의 말에도 남자는 변화없는 얼굴로 초연히 담뱃불을 바라볼 뿐이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 들어가있던 방금 전까지만해도 유일한 빛이었던 것이, 이젠 번쩍거리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니 조그마한 호롱불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부러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새 보지 못했던 며칠 사이에 머리를 쳤는지, 조금 짧아진 앞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을 찌른다며 실실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땐 오늘처럼 지루한 옷 대신에 깔끔하고 보기좋은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왔었다.
" 내 놓으라니까. "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삼스레 속이 뒤틀려 다 터진 운동화를 질펀한 흙바닥에 대고 문질렀다. 그럼에도 차마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번쩍거리는 구둣창에 대고 진흙을 묻힐 자신이 없어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남자는 잘 웃는다. 그래서 웃지 않으면 제법 차가워보이는 인상인데도 주변에서 친절해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짜증나기에 짝이 없는 무표정과는 전혀 상반되는 느낌이 그 곳에 있었다. 남자는 그 웃는 얼굴이 제 무기라고 생각하는건지, 내가 불퉁한 말을 뱉으며 남자에게 까칠하게 대할 때까지도 마냥 웃기만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이상 남자에게 못된 농담을 던질 수 없었다.
시선을 내려 남자와 나 사이를 내려다봤다. 구둣코가 반짝이는 고급스런 남자의 구두와는 달리 내 운동화는 초라하기에 그지 없었다. 서 있는 곳차도, 진흙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골목과 깔끔하게 닦여진 인도 사이라 그 차이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듯 했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동자를 살살 굴려가며 신발 한짝을 다른 쪽 너머로 숨겼다. 밑창이 다 까져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들어찼어도, 나름 의미있다며 꿋꿋이 신고 다녔던 나였는데도. 남자 앞에 서니 그 가치를 잃고 처참히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 내 놓으라고! "
" 피지 마. "
다시 한번 힘주어 내뱉자 남자가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 제 뒷편으로 가져다 숨겨버렸다. 내가 얼마 남지도 않은 담배 끝을 잡을 리가 없는데. 남자는 이상하게도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퉁해진 표정으로 이를 악 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 남자는 그런 나에게 시덥잖은 농담도, 위로도, 격려도. 그 어떤 것도 건네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방관하기만 했다. 그 행동이, 애초부터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듯 해서 순간 작게 욕을 뱉을 뻔 했다. 평소에도 들쑥날쑥하던 감정의 그래프는, 평소와는 달리 하락직선을 그리며 땅을 친다.
" 내가 피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
치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어른스러운 얼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도로 내 눈을 마주하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분명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와 남자 사이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나의 얼굴이 조금 심할 정도로 멍하다는 것 정도는. 굳이 보지 않아도,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나와 눈을 맞추던 남자는 이내 졌다는 듯 눈을 내려감으며 뒷짐을 져 숨겼던 담배 끄트머리를 도로 가져다댔다. 평소에 지지리 없이 웃기만 해서 웃을 줄 모르는 건가 싶기도 했었는데, 그 외의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을 보니 새삼 그와 나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 이토록이나 작은 것이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 …담배 몸에 안 좋아. "
" 허, 꼭 누군 안 피는 것처럼 말하네. "
나는 가만히 서서 독기 품은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반쯤 도발적인 내 물음에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런 대화는 별로 달갑지 않다. 남자의 손에 반쯤 걸쳐져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담배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뒤로 가리는 남자의 행동이 마치 내가 저 담배 없이는 살 수 없는 중독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죽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담배를 눈 앞에 대고 마주하게 되니 상황이 또 달랐다.
이건 또 내가 중독자라고 인정하는 꼴 같잖아. 이젠 관리고 체면이고. 무엇이든 무참히 짓밟힌 종이같은 내 심정에 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잽싸게 손을 놀려 남자의 손에 들려진 담배를 집어들려는데, 그 짧은 순간에 용케도 움직임을 알아챈 남자가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남자의 손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 내 손아귀에는 횡한 겨울 바람만이 일었다. 어느 새 내 담배는 남자의 입에 물려있었다.
마치 전의 나를 회고하는 듯, 볼이 깊게 패이도록 연기를 들이마신 남자는 나지막히 숨을 뱉어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 나 담배 안 펴. "
나는 순간 울고 싶어졌다.
-
남자와 나는 거리를 걸었다. 나의 손에는 여전히 담배가 들려져 있었고, 그는 무표정인 채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넓게 파여진 옆의 도로와 상반되도록 좁다랗기만 한 인도 위에는 커다란 가로등 하나가 빛의 전부였다. 달라진 것은 내 손에 들려진 담배가 전의 것이 아닌 좋은 브랜드의 상품이라는 점과, 불이 붙여져 있지 않다는 것이 다 였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꾸욱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헤어졌을 우리인데도, 남자는 어딘가 불편한 곳이 있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를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황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꾸준히 이어지는 일들 중에서도. 그나마 익숙해졌다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의 농담을 받아치는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지니 모든 것들이 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 …. "
그래서 나는 조금 능동적인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잽싼 뜀박질로 이 길을 벗어나는 거였다. 남자는 전에 없던 상황에 당황스러워할테고, 결국엔 할 수 없이 따라와 내 뒷덜미를 움켜쥘 것이다. 그럼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툭툭,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 어색한 상황도 어느 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 나는 왠지 모르게 들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타이밍을 셌다. 점차 느려지는 남자의 발걸음 템포를 따라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싸늘한 한 겨울의 바람이 귓전을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 남자는 붉어졌을 나의 동그란 귓볼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남자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길 기다렸다. 그가 더 이상 나를 잡을 수 없도록, 남몰래 발 끝에 힘을 주어 뒤에 있을 격렬한 달리기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려감은 눈꺼풀 사이로 어렴풋이 빛줄기가 비춰지는 것을 바라다보며 나는 웃었다.
그리고 뛰었다. 힘껏. 새빮간 벽돌 위에 새하얀 마찰자국을 남기며 발돋움 했다. 곧이어 당황한 건지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것마저도 얼마가지 않아 내 발걸음에 묻혀버렸지만. 나는 내 귓전을 빠르게 스치는 바람소리에 다리에 힘을 실어 달리기 시작했다. 뒷편에서부터 남자가 기범아!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남자의 고급진 코트와는 다르게 너덜거리는 야상 끝이 바람에 펄럭였다. 허기가 져 담배연기로라도 배를 채우려던 나였는데. 막상 이렇게 달리기 시작하니 그 죽을 것 같던 추위도, 배고픔도 모두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마침내 코너를 돌아 반대편 도로로 진입하려던 그 때, 내 어깨를 쥐어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남자의 손은 힘있게 내 어깨를 잡아채며 인도 쪽으로 나를 밀쳐냈다.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아있던 한적한 도로 너머로 쌩하니 고급차량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목격한 것은 반짝이는 차제의 일부와, 쌩하니 내 앞머리를 풀썩이게 만드는 재빠른 속도 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느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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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처음부터 이런 이상한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간단했다면 간단했지 이렇게 얽히고 섥힌 사이는 아니었다. 간략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초라한 이음줄. 그 것이 두 사람 사이의 다였다. 그는 나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나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가난한 집안 형편에 공부를 이어가는 학생이었다. 재단의 어린 사장과 달동네 아이라니. 한번 이어붙여 생각해보기에도 부끄러운 사이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했다. 그저 내가 열심히 하고, 또 불쌍하니까 주는 장학금인가 싶기도 했다. 집안사정이 어려워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아이라니. 요즘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냐며 사람들이 바람 빼듯 웃고는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져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보란듯이 악착같이 공부했다. 나를 놀려먹는 학우들더러 이래도 놀릴 수 있겠느냐고 당당히 말하기 위해 공부만 했다.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연필을 움직였고, 교과서를 뒤적였다. 그러나 그 것도 한 때였다.
그는 나에게 철저히 가려진 사람이었다. 나는 몇 년 째 내게 결코 적지 않은 양의 돈을 지원해주고 있는 사람의 이름도 몰랐고, 흔한 주소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선생님들을 통해 지급되는 돈을 받아들며 거듭 부탁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론 그 걸 알게 되기까지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그가 누군지를 알아냈다.
그는 명확히 말하자면 나의 형제였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그런. 그러면서도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여있지 않은 사이. 이 것도 다 우리 가족사가 복잡한 가능한 이야기였다. 나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의 준 부인이었다. 그 것도 좋게 말해서 준 부인이었지, 실상 파헤쳐보면 바람 상대에 지나치지 못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 난 자식이었고, 그는 그의 아버지와 결혼한 정 부인이 데려온 아이였다. 그는 거의 입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말도 배우지 못한 어린 나이에 집 안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그의 아버지의 피가 섞여있었고, 그는 아버지의 부인과 누구인지 모를 외간 남자의 피가 섞인 아이였다.
그러니까 우리 나이가 이렇게 차이나지. 세상에 여덞살이나 차이나는 형제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남자와 나의 사이를 명확히 정의할 수 있게 되어서야 도망쳤다. 그가 찾지 못하도록 먼 곳으로 도망쳤다. 내가 도망친 곳은 내가 전에 살던 달동네보다 훨씬 못한 저렴한 산길목의 초라한 동네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가며 나를 찾아와 매번 맛있는 피자나 치킨 따위의 것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 이진기. "
" 왜. "
버릇없는 내 말에도 남자는 나무람이 없었다. 그저 따뜻한 손길로 내 머리춤을 가볍게 쥐었다 쓰다듬어주는 것이 다 였다. 그런 행동의 태반은 대부분 그가 기분이 좋거나 평소같을 때가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반면에 그가 울적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날에는, 산중턱에 올라가 해가 뜨는 것을 같이 감상하고는 했다. 그 것이 우리 둘이 공유하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더 울적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조금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이진기의 쭉 찢어진 두 눈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버릇없이 대꾸했다가도 한참 시간이 지나면 내 행동이 후회되고는 하여 나는 함부로 남자를 대할 수 없었다. 아니, 함부로 대하기는 했지만 내 친구들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는 주인없는 강아지들에게 하는 것처럼 모질게 대하지는 못 했다. 아마도 이진기의 웃는 얼굴 때문이리라.
" 넌 왜 자꾸 날 찾아와? "
" …. "
내 물음에 이진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제가 앉아있는 돌계단의 끄트머리를 툭툭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앉으라고 손짓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 호응해주며 벽에 기대있던 등을 찬찬히 떼어내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남자의 옆에 앉으며 소리없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못한 일들의 반복에, 나는 어쩌면 내심 즐거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 남자의 옆구리를 툭, 팔꿈치로 내리쳤다. 남자의 검다란 코트자락이 구겨들어가다 도로 원상태로 복귀되는 것이 보였다. 이진기 나쁜 놈. 도와줄거면 이 낡은 야상도, 밑창이 다 거덜난 이 싸구려 신발도 좀 바꿔주지. 이진기는 정말 눈치가 지지리도 없었다.
" 저번에도 말해줬잖아. "
" 우리 엄마가 불쌍해서? "
속삭이는 듯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결국엔 우리 집이 불쌍해서 도와준다는 거잖아. 새삼 여기서 나와 이진기의 지위 차이가 극명히 갈리는 것 같았다. 하긴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재단 하나를 설립한 남자에 나는 비할 급도 되지 못했다. 괜시리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아 묵직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곳에는 며칠 전 이진기가 들렸다 하사해준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 더미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지가 산타인 줄 아나. 해가 진다하면 찾아와 끝없이 선물 공세를 퍼붓는 이진기의 행동은 몇날 며칠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하고 생각하며 사탕 하나를 꺼냈다. 부산스레 손을 움직이자 부시럭 부시럭하는 소리가 고요한 동네를 채웠다. 나는 입 안에 톡, 하고 동그란 사탕을 굴려넣고 혀로 햝아냈다. 사탕껍질을 들어 반대쪽 주머니에 대충 구겨넣고 이진기의 반응을 살폈다. 괜히 나 혼자 먹는 것 같기도 해서, 이진기에게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진기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반쯤 해가 뜨기 시작하는 저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다볼 뿐이었다.
-
이진기와 나의 짧은 만남은 하루의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오면 이진기는 늘 그렇듯 찾아와 밤새도록 나를 놀아주었고, 해가 뜨는 어스름한 새벽이 되면 비서가 끌고 온 차를 타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는 했다. 하도 오랫동안 딱딱한 곳에 앉아있어서 그런가. 벌써부터 배겨오는 허리에 나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새 어스름히 햇볕이 비춰지고 있었다.
" 이진기. "
" 응. "
"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
척 보아도 좋아보이는 차량을 앞에 두고 선 채 물었다. 차의 운전석에는 익숙한 얼굴의 운전기사가 앉아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이진기는 구겨진 코트자락을 몇번 정리하더니 빠앙- 하고 클락션이 울릴 때 쯤이 되어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깊게 파여진 눈두덩 사이로 어렴풋이 드러난 눈동자가 깊게 울렁였다.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 꾸욱 입술을 다물고 있던 이진기는 마침내 내게로 다가와 따뜻한 손을 들어 강아지 다루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하고 뱉는 목소리에 무언가 꽉 막혀있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 있었는데, 기범이 만나서 괜찮아진 것 같아. "
너는 어째서 상냥한 웃음 하나없이도 그런 따스한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십 구년을 살면서 나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는 한다. 나는 그 것에 명백한 패배감이 들었다. 가만히 서서 이진기의 손길을 받기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그래서 부러 불퉁한 표정으로 이진기의 손을 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기는 마음에 상함이 없는지 소리없이 웃음짓기만 했다. 오늘, 아니, 어제 만난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그 재수없는 웃음이었다.
알량하기에 짝이 없는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어서 가라고 중얼거렸다. 이진기가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아주 조그마한 소리였는데도 이진기는 그 말소리를 용케 잡아내고선 고개를 끄덕인다. 응. 다음에 보자. 하고 건네는 말엔 형태없는 햇볕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차도를 타고 넘어가는 매끄러운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느 새 산등선 위로 떠오른 해가 어스름히 햇볕을 뿌려대고 있었다. 마침내 내 피부로까지 와닿는 것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야상 모자를 덮어썼다. 이진기는 또 연락없이 불쑥 나타나 나를 놀래킬 것이다. 그 걸 알기에 나는 열 두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 되어서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겠지. 나는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걸으며 도로 담배를 꺼내들었다. 라이터를 들어 그 사이로 불을 붙인 채 입에 물었다. 볼이 패이도록 깊게 숨을 들이쉬며 골목 사이를 가로질렀다. 이진기보다 먼저 집에 가서 보란 듯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이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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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식은 땀이 가시고, 남은 것은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 뿐이었다. 간헐적으로 뱉는 말엔 어머니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 거친 숨소리가 베어있었다. 기, 버아. 이젠 발음마저도 불명확해져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의 이름 석자와 어머니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 다 였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어머니의 마른 손을 매만지며 푸욱 패인 상처들을 쓰다듬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을 차마 멈출 수 없었다. 그 것은 조그마한 단칸방에 갇혀 어머니를 돌보아야하는 나에게 비춰진 유일한 탈출구이니 다름이 없었으니. 그 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면 나는 이미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구멍이 뚫려 제 할 일도 하지 못하는 바가지의 겉에 대충 양면테이프를 구겨 붙였다. 중간 중간 찢어지고 손톱 자국이 남기는 했어도 나름 제 역할은 해주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집 바깥으로 나가 이어지는 상수도 시설에 대고 차가운 물을 받았다. 파란색 바가지 표면에 닿을 때마다 차갑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이 자꾸만 살갗 위로 와 닿았다.
에이씨. 자그맣게 신음하며 허름해진 티셔츠 소매를 들어 물방울이 진 자리를 거듭하여 닦아냈다. 물론 그 특유의 따가운 감각은 끊이질 않았다. 몇날 며칠 동안 반복되는 일이니 이제 진저리가 날만도 하건만, 이 몸뚱아리는 점점 일에 적응해가는지 처음엔 따갑고 짜증나기만 했던 차디 찬 물줄기들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예전만해도 벌겋게 불어오르던 팔뚝 살이 이젠 약간 붉어지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일정선 너머로 물이 채워지자 서둘러 수도꼭지를 잠군 뒤, 삐걱거리는 문고리를 쥐어잡았다. 억센 손길로 잠궈서 그런건지. 단단한 수도꼭지과 부딪히며 느꼈던 얼얼함이 남아있는 손 끝으로 찬찬히 그 것을 어루어만졌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우리 집의 문고리가 맞았다. 새로 갈았던 것이 분명한데도, 금새 허름해진 그 것은 곳곳에 잦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기분 나쁘네. 나는 순간 수리공들이 집안 사정도 봐가면서 대충 대충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만 했다.
차가운 금속 표면이 굳은 살이 배겨 단단해진 손바닥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가슴 깊숙한 곳을 메우는 흡연 욕구를 발견했다. 그렇다고 이미 물도 받아놨는데, 여기서 피울 수도 없는 일이다.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사이에, 이 온도가 더 내려가기라도 하면 어머니의 이마에 벌겋게 불어오른 자국이 남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확신은 없지만- 나는 문지방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롤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문지방 너머로 항상 그래왔듯이, 익숙한 풍경이 보여졌다.
이진기가 오는 날이었다면 지금쯤 아마 나는 바깥에 있었겠지.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나도 모르게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뒷편의 풍경과 마주했다. 따사로운 노을과 땅거미가 반 반쯤 섞인 그 것은 벌써부터 상가의 간판 아래까지 닿아와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수도가 끊길테니 움직임을 더 재촉해야만 했다. 진짜 되는 일 없네. 나는 괜시리 기분이 나빠졌다.
골목 사이로 내리쬐는 찰나의 노을빛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혀를 내어 바싹 마른 입술 끝을 훑어냈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놓고 어머니가 누워계신 침대로 다가가던 그 짧은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숨결이 가빠져있었다. 본디 가쁘고, 두서가 없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가슴팍의 움직임은 분명 어머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이 뻗쳐 식은 땀이 흐르는 어머니의 이마로 향했을 때, 나는 줄곧 앉아 생각하던 나이 행동들이 부질없는 행동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당황했었을 상황에서도 나는 침착히 대처했다. 바퀴벌레 따위의 벌레들이 기어다닐 듯 흉측한 형태를 한 바닥에 떨구어진 어머니의 손을 주워 도로 배에 올려둔 채, 바가지를 바닥에 내려두고, 물수건을 갈았다. 벌겋게 땀이 내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낸 뒤, 이마에 새로운 물수건을 놓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힘껏 뛰쳐나갔다. 튕겨나가는 반동으로 바가지에 담겨있던 물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문지방에 몸이 크게 부딪혔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골
목 사이사이를 내질러 달리며 살갗 위로 와닿는 차가운 밤바람을 느꼈다. 티셔츠 밖에 입고 나오지 않아 목덜미와 팔뚝 사이로 휑 하니 차가운 바람이 스쳤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골목길이 질릴 즈음이 되어서야 나타난 큰 길가를 가로질러 나는 맞은 편, 주정뱅이 이씨 할아버지 집 대문을 발로 시원하게 밟아버렸다. 쾅. 쾅. 쾅. 규칙적인 소리가 나며 철제로 된 대문이 힘없이 휘청였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대문 너머로 부시럭거리며 할아버지께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뉘여. 하는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옴을 확인하고 나는 대문에서부터 몇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두 손을 입에 동그랗게 모아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비록 그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력을 잃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등을 부드럽게 이루만지는 듯 했다. 밭은 숨을 뱉음과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머니가 옳지, 기범아. 하고 웃어주실 만큼 전에 없던 큰 목소리로. 고요한 밤이 내려앉은 동네가 떠나가라 그렇게.
사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암호닉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