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빗금
" ... "
" ...뭘 그렇게 봐? "
" (궁시렁궁시렁)아니 저새키는 내가 선물할 때는 곧죽어도 안하더니 뭔 놈의 향수를 저렇게 들이붓냐 진짜 지가 꽃도 아닌게, 아니 꽃은 맞나 아 그 와중에 꽃같이 생겼네 빡치게 아니 옷은 왜 또 저렇게 입었어 진짜 누굴 꼬실라고 미친 귀걸이 뭐야 존나 예뻐 민윤기 하고 싶은 거 다해 아니 하지마 "
" ...응? "
" 우와아ㅏㅏㅏ악!!!!!! "
분노에 차서 궁시렁대던 여주가 곁에서 제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남준의 기척을 뒤늦게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에 더 놀란 남준이 눈을 크게 뜨고 여주를 바라봤다.
" 깜짝아. 왜. "
" 으아니 왜는 무슨 왜에요오! 왜 갑자기 나타나요 사람 놀래게! "
" 나 오분 전에 왔는데? "
" 앞으로 한시간 전부터 제 컨펌 받고 거실 나와요. "
" 굴러온 돌이 뻔뻔도 하네. "
남준이 피식 웃으며 쇼파위에서 고쳐앉았다. 여주도 놀란 가슴을 추스리고 숨을 뱉었다.
여주의 시선 건너,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보이는 윤기의 모습이 보였다. 윤기는 전신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그 날에 봤던, 상기된 얼굴로.
잠시의 침묵 후 여주가 남준에게 물었다.
" 다 들었죠. "
" 유감스럽게도. "
" 들켜버렸네. 망했다. "
" 내가 말했던 그대로네. 아주 미련덩어리였어. "
" 예, 진짜 구질구질하죠. 알아요. 근데 어쩌겠어요. "
" ... "
" 아직 좋아하는걸. "
쇼파에 머리를 기댄 채 여주가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네왔다. 지나치게 담담한 말투에 남준이 가만히 여주를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남준이 진짜 친오빠처럼 편해진 여주였다. 윤기와 호석 외에 둘만 있어도 침묵이 편안한 사람은 남준이 처음이었다.
처음엔 저를 경계하는 듯 했지만 그런 시선도 며칠 후 사라졌고, 남준은 담백하고 다정하게 여주를 대해줬다. 모든 하메에게 그런 것처럼.
가끔 태형이 꼽을 줄 때는 별 말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다른 주제를 던지는 식으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여주는 오히려 그런 남준이 더 편했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무탈하게 기댈 수 있는 기둥같았달까.
지금 이렇게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도 남준은 그저 묵묵히 들어줄 사람이었다. 별다른 해답은 나오지 않겠지만.
" 그래도 걱정하진 마요. 암것도 안할 거니까. "
" 응? "
" 윤기 아프게 안할게요. "
" ... "
" 윤기 아픈 건 제가 더 아프거든요. "
" 참사랑이네. "
남준이 담백하게 대답을 건넸다.
아프게 하지 않는다라. 여주는 사실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뜻이 정확히 뭔지 몰랐다. 맹목적인 상처는 받아도 그걸 되돌려줄 생각따윈 없었던, 윤기 말마따나 돌멩이같던 여주였기에 더 그랬다. '아프다'는 감정이 들 때마다 여주는 그 원인을 자신에게 찾았다.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오답의 흔적은 그대로 여주 스스로가 떠안았다.
가득 찬 빗금들이 이따금씩 뾰족뾰족 제 살을 찢고 터져나오긴 했지만 견딜 만 했다.
여주에겐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그 순간이 지나면 찾아갈 이가 있었으니까.
" 둘이 뭐해요. "
준비를 끝마친 듯 윤기가 열린 문 틈으로 나오며 남준과 여주를 향해 물었다.
오늘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멋있었다. 뒤에 후광이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 어디 가? "
윤기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여주를 대신해 남준이 빠르게 물었다.
" 영화 보러요. "
" 아. 혹시 지난번에. "
" 네. 애프터. "
손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윤기가 무심하게 답했다.
윤기의 시선이 물음을 던진 남준에게만 향해있었다. 그 옆에 있는 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윤기는 전에 소개팅한 여자애에게 애프터 신청을 한 모양이었다. 왠지 향수를 과하게 뿌린다 했다.
여주는 심정이 복잡해져서 윤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 영화만 봐? "
" 밥은 근처에 걔가 좋아하는 데가 있대서 거기 가고. 카페 갈 것 같아요. "
" 카페? "
" 지난번에 형이 말한데요. 마카롱 맛있다는 그 카페. "
" ...마카롱 싫어하면서. "
짐짓 꾹 닫고 있던 여주의 입에서, 돌연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남준과 윤기의 시선이 제 얼굴로 향해있었다.
저와 사귈 적에는 디저트 카페는 곧죽어도 가지않던 윤기였기에 그 때가 떠올라 문득 짜증이 솟구친 여주였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방금까지 남준에게 윤기가 아프면 저도 아프다, 그딴 오그라드는 말을 지껄이며 쿨한 척 했는데. 쪽도 이런 쪽이 없었다.
여주가 줄곧 시선을 내리깐 채 얼굴을 수그리고 있자 윤기가 그 턱끝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조심스럽게 제 턱끝을 들어올리는 윤기의 새하얗고 말랑한 얼굴이 서서히 제 시선에 밀려들어왔다.
" 왜, 혼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가니까 삐졌냐. "
" ... "
" 사올게. "
" ...뭘. "
" 좋아하잖아. 마카롱. "
가깝게 마주한 윤기가 씩 웃었다. 아주 예쁘게.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게.
" 기다리고 있어. "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윤기는 턱 끝의 손가락을 떼고 현관으로 향했다.
벙쪄있던 여주가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깨듯 현관으로 달려갔다. 빠른 속도로 달려와 넘어질 것처럼 제 앞에 안착한 여주를 윤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
잠시 숨을 고르던 여주는 윤기의 오른쪽 어깨를 턱, 짚었다.
" ...사지마. "
" 어? "
" 사지말라고. 내거. "
" 왜. "
" ...나 마카롱 싫어해. "
절대, 네버. 그런 말까지 덧붙이며 사오지말라는 여주를 보던 윤기는 알았어. 무심하게 답하고 문을 벗어났다.
'띠리릭' 여주의 눈 앞에서 윤기가 사라졌다. 한 여름의 햇빛이 들이치는 곳으로.
" 애쓰네. 우리 여주. "
남준이 멀리서 혼잣말처럼 말하곤 방으로 향했다.
현관에 덩그러니 서있는 여주의 가슴에 또 하나의 빗금이 새겨졌다.
마지막으로 제 눈에 담겼던 윤기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햇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묵혀둔 빗금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나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윤기에게 달려갈 수 있을까.
여주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장마가 시작됐다.
초저녁에 가랑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늦은 밤이 되자 그 빗줄기가 굵어져 창문을 꽉 닫았는데도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내내 눅눅한 쉐어하우스에서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한 여주는 쇼파에 기대어 시를 읽고 있었다. 평소에 독서라면 질색하는 여주였지만, 오늘은 도저히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아서 호석이 틈만 나면 읽던 시집을 꺼내든 참이었다. 무슨 시가 이렇게 어려운가 싶었다. 꼼꼼히 읽은 듯 군데군데 책장을 접어놓은 호석의 손길이 눈에 띄었다.
은근히 감성적인 구석이 있는 친구야. 여주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들을 한줄한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얼른 잠이 쏟아지길 바라면서.
윤기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분명히 단톡방에는 가볍게 술 한잔하고 온댔는데, 이미 시간은 '가볍게'의 경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닌 척 문소리가 들릴때까지 쇼파에서 죽치고 있었지만 기어코 한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괜한 조바심이 나고 온갖 생각에 복잡해져서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열한시가 넘자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뒤척이기만 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 여주였다.
거실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째깍, 귀에 선연하게 꽂혀왔다. 눈으로는 기계적으로 글자들을 읽어내려가고 있었지만 머리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예쁜 북마크가 붙어있는 시를 발견했다.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
특이한 제목에 제대로 읽어보려던 찰나, 카톡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재빠르게 시집을 닫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기대와는 달리 쉐어하우스 단톡방에서의 호석의 톡이었다.
[ 지금 안 자는 사람 ] 1:33 AM
[ 지금 우산없어서 마냥 서있는 중 쉐하 앞 대로변 건너 호프집 우산 가져다줄 천사 구함💜 ] 1:35 AM
[ 아니다 혼자 갈게용 ] 1:36 AM
우산을 가져다 달래놓고선 1분만에 혼자 오겠다고 우다다 톡을 보내왔다.
분명히 저녁에 술자리 갈 때 비 온다고 우산을 챙겨줬던 것 같은데. 여주는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호석이 비를 맞고 혼자 오게 둘 순 없었다.
[ 이 누나가 가준다 ] 1:37 AM
그렇게 답장을 보내곤, 여주는 얼른 우산 두 개를 챙겨 집을 나섰다.
*
빗줄기가 꽤나 굵었다. 손에 들린 것 중 제일 두껍고 큰 우산을 썼는데도 빗물이 사방에서 튀겨오는 바람에 잠옷바지의 밑단이 이미 축축해졌다.
쪼리를 신은 발 아래서 빗물이 자유롭게 그 위를 넘실대고 있었다. 떼는 걸음마다 물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덕에 어두운 골목길을 벗어나는 게 조금은 덜 무서웠다. 여주는 계속해서 주머니 속에서 징징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아냐 오지마 ] 1: 38 AM
[ 여주야 왜 확인 안해 안나왔지? ] 1:40 AM
[ 여주야 ] 1:45 AM
[ 여주야 어디야 내가 갈게 ] 1:47 AM
꽤나 다급한 카톡의 느낌이었다. 여주는 그런 호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집이랑도 가깝고 가는 길도 그리 위험하지 않은데 . 하여간 유난이었다.
핸드폰을 다시 넣고 고개를 드니 마침 호프집이 보이는 대로변 횡단보도 앞이었다.
" ...정호석? "
그 건너에, 호석이 장대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신호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게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 야! 정호석 뭐해! "
그 모습에 놀란 여주가 건너의 호석을 향해 소리질렀다. 그에 호석이 저를 쳐다봤다. 횡단보도 사이여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여주는 호석이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몇초가 흐르자, 신호가 바뀌었다. 여주와 호석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가, 횡단보도의 중간지점에서 만났다.
" 야, 내가 온다니까 왜 다 맞고 앉았어! "
" 여주야, 가자. '
" 뭐? "
" 가자, 얼른. "
" 아니 그니깐. "
호석은 뭔가 더 말하려는 여주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고, 힘껏 밀며 직진했다.
그 힘에 밀리듯이 걸어가다가 인도에 도착한 여주가 어깨를 훽 틀며 그 손을 뿌리쳤다. 마주한 호석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제 얼굴을 보는 게 두려운 듯.
여주가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호석위에 우산을 씌우며 걱정스럽게 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미 비에 푹 젖은 호석의 뺨이 차가웠다.
" 왜 안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우산 가져간다니까. "
" ... "
" 가방까지 다 젖고. 이게 뭐야. "
호석의 어깨에 메여있는 백팩은 이미 걸레짝이 된 지 오래였다. 온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석이 여주는 속상했다.
생각해보니 호석은 항상 비 오는 날 미리 우산을 챙겨가도 비에 쫄딱 젖어오기 일쑤였다. 처음엔 자기 물건도 잘 챙기지 못하는 덜렁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반복되자 날을 잡고 혼냈더니 사실은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다른 애들에게 챙겨줬다며 이실직고하던 호석이었다.
결국은 되돌려받지도 못하는 우산을 호석은 계속해서 남의 손에 쥐어줬다. 다음날 콧물까지 달고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면서, 미련하게.
여주는 그 얼굴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 바보야. 너 또 감기 걸리겠다. "
" ...여주야, 얼른 집으로 가자. 나 추워. "
" 알았어. 일단 이거 너 우산. 이것부터 쓰고, "
또 다급하게 구는 호석을 제지하고, 그 손에 남은 우산을 들려줬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맞은 편 호프집에서 나오는 두 인영이 여주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빗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이 희미했지만, 횡단보도 앞에 서자 선명해졌다.
" ...얼른 가자니까. "
호석이 우산을 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주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여주의 눈에는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윤기와, 박희주만 보였다.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소개팅 상대랑 함께 있어야할 윤기가 왜 박희주랑, 대체 왜.
" 쟤가 왜 윤기랑. "
그 순간, 두 인영이 겹쳐졌다.
채 끝맺지 못한 여주의 혼잣말이 빗 속에 묻혀 떠내려갔다.
# 박희주
박희주. 어느 학교에서나 있는 청순가련형 퀸카. 고3 3월, 여주가 본 희주의 첫인상이었다.
희주는 단연 어디에서나 눈에 뛰는 아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애였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희주는 꼭 호석을 보는 것 같았다. 가끔은 친절이 과해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웃기게도 무용특기생인 희주는 종종 호석과 커플로 엮이는 아이기도 했다.
5월, 학교 축제가 열리던 시기였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인해 여주의 반에선 카페를 운영하기로 했다. 그 기획팀을 꾸리던 중 여주는 희주와 의상담당을 맡게되었고, 꽤나 귀찮은 단체티를 준비해야했다.
" 내가 할테니까 여주 너는 아무것도 안해도 돼. "
단체티 문제로 단 둘이 방과후에 남았던 날, 희주는 여주를 향해 그런 말을 해왔다.
안그래도 귀찮았던 차에 그럴까 싶었지만 문득 그 모습에 호석이 떠오른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 아냐. 둘이 하는 건데 어떻게 너만 해. "
" 괜찮아. 나 이런거 익숙해. "
" 왜 굳이 손해볼라 그래. 같이하면 되는 걸. "
" ...손해? "
" 너 가만보면 자꾸 과하게 친절하게 굴더라. 너만 손해잖아 그런 거. "
희주에게서 자꾸 호석을 찾던 여주가 평소 그에게 말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희주와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여주에겐 호석에 대한 염려의 잉여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 방긋 미소를 짓고 있던 희주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져있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에 여주의 등이 서늘해졌다. 저를 보는 희주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그 때부터가 아마도, 희주가 자기를 싫어하게 된 시점이지 않았을까. 뒤늦게 여주는 생각했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호석이 여주를 보러 오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자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됐다.
그 날은 사물함에 전날 애들이 먹고 버린 과자봉지가 잔뜩 들어있었다. 진짜 유치해서 못봐주겠네, 여주는 혼잣말을 하며 소매를 걷어 부쳤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물함에 장난을 쳐놓으니 정상적인 등교시간에 맞춰오면 몰래 처리할 수가 없어서 30분은 일찍 등교하던 여주였다.
" 뭐야, 싱겁게. "
그 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가 뒤돌아 확인하니 희주가 서있었다.
" 사람이 괴롭히면 좀 쪼는 맛도 있어야지, 왜 그렇게 싱겁게 굴어. 재미없게. "
희주가 가까이 걸어와 시선을 맞췄다. 그 눈에서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괜히 속이 메슥거렸다.
저를 괴롭히는 주동자가 희주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 의도가 의뭉스러워서 여주는 미간을 좁혔다.
" 왜 정호석한테 말 안해? "
희주가 대뜸 물었다. 고작 저런 걸 물어보려고 자길 드러낸 건가. 여주는 희주가 영악하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 정호석은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
" 이런 걸 걔한테 왜 말해. 내 문젠데. "
" 하, "
" 그리고 말해봤자 괜히 착한 널 모함하는 나쁜 년 될 게 뻔하잖아. "
여주가 굳이 호석에게 괴롭힘당하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괜히 그에게 제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희주와도 친하게 지내는 호석에게 굳이 말해봤자 자기만 바보되는 걸 예상해서도 있었다.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뿐일 자신은 호석에겐 덜어내도 기별도 가지 않는, 그 정도의 무게를 지닌 사람일테니까.
여주는 마지막 말을 꺼내면서도 가슴 한 켠이 아팠다. 이미 여주에겐 호석은 덜어낼 수 없는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이를 까득 물었다. 어차피 이 괴롭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여주는 알고 싶었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는지.
" 이왕 네가 먼저 말 꺼냈으니까 나도 한 번 물어보자. "
" 해봐. "
" 나 왜 괴롭혀? 혹시 호석이 좋아해? "
" 뭐? "
" 그래서 이러는거면 굳이 안그래도 돼. 걔랑 난 그냥 친구사이야. "
" 삼류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같다 너? "
" 뭐라고? "
" 네가 무슨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 마냥 얘기하네. 날 그딴 저질악녀취급하고. 존나 열받게. "
희주의 얼굴에서 격렬한 분노가 떠올랐다.
" 있잖아. 난 걔한테 아무 감정없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
" ...근데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
" 지금처럼 네가 특별한 애처럼 구는거. 그게 좆같잖아. "
" ... "
" 정호석이랑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지. 꼴같잖게. "
가까이 다가온 희주의 입매가 저열하게 올라갔다.
" 그래도 주제는 알아서 다행이야. "
" ... "
" 걔한테 넌 전혀 특별한 애가 아니라는 거. "
다른 이의 입에서 듣는 사실은 꽤나 아팠다. 여주는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희주를 바라봤다.
섬뜩한 모습에 뒷목이 쭈뼛 서면서도 여주는 어딘가 그녀가 딱했으니까.
# 방해자
" 으아... "
" 늦게 일어났네. "
동이 터올 무렵까지 잠에 들지 못한 여주가 시체처럼 거실로 나오자 윤기가 쇼파에서 여주를 맞이했다.
윤기는 결국 아침이 되서야 쉐어하우스에 들어왔다. 명백히 외박이었다. 그것도 박희주랑.
여주는 피곤한 와중에도 지난 새벽 윤기의 모습이 떠올라 그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 어. "
그래서 무심하게 답하고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 목이 타서 물만 마시고 들어갈 작정으로 냉장고로 향했다.
물을 꺼내려고 냉장고를 열자마자, 정중앙에 놓인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반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는 박스 안에는 마카롱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어제 윤기가 간다고 했던 카페 이름이 예쁘게도 적혀 있었다.
" 맛있길래. 종류별로 샀어. 먹어. "
박스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주를 보던 윤기가 말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여주는 속 깊이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자기가 먼저 타버릴 것만 같은 뜨거움이었다.
여주는 냉장고 문을 쾅, 크게 닫고 뒤돌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습에 윤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주방으로 걸어왔다.
" 왜그래. 어디 아파? "
윤기가 달아오른 이마를 짚자, 여주는 그 손을 뿌리쳤다. 윤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 뭔데. 왜 갑자기 짜증이야. "
" ...왜 사왔어. "
" 뭐? "
" 사오지 말랬잖아. "
갑작스러운 여주의 분노에 윤기 또한 표정이 굳었다.
" 내가 분명히 싫댔지. "
" 너 한달전만 해도 나한테 마카롱 노래 부르던 애야. "
" ... "
" 너 생각해서 사줬더니 왜 난린데. "
" 네가 왜 내 생각을 해. "
" ...뭐라고. "
" 왜 내 생각을 하냐고, 네가. "
윤기를 향한 여주의 말투가 격해졌다. 뒷목이 경직되고, 숨이 가빠지고, 온 몸이 떨렸다.
공연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박희주랑 있었으면서, 내내 그 애랑 있었으면서 제게 하는 말이 저렇게 다정하면 안됐다.
결국 윤기가 아침에 들어오는 시간까지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낸 여주였다. 동이 트고 날이 밝자 들려오는 문 소리에 모든 회로가 멈추고, 내내 소란했던 머릿 속이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정말이지 억겁같던 시간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 때마저도 새벽의 윤기를 채 지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정하고 무탈한 모습이라니. 역정이란 걸 알면서도, 여주는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주의 말에 윤기의 미간이 좁아졌다.
"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
" ... "
" 갑자기 왜 나한테 그딴 말을 하냐고. "
" 듣기 싫으면 쓸데없이 내 생각하지마. 열받으니까. "
" 야. "
" 내 생각한답시고 이딴거 사와놓고 뻗대지마. "
" 김여주. "
결국은 윤기의 언성이 높아졌다. 소리치듯 여주의 이름을 뱉은 윤기도 화를 참을 수 없는 듯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듯 윤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여주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봤다.
흐트러진 윤기의 눈이 고요한 여주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기는 화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인해 가슴이 꽉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눈앞의 여주가 알 수 없었다. 눈만 봐도 전부를 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모든 모습이 생경했다.
모든 공기가 사라진 듯 둘 사이에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윤기는 알고 싶었다. 왜 이렇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는 여주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여주의 눈동자를 헤집어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윤기가 여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 여주야. "
그 때 호석의 방에서 나온 남준이 여주를 불렀다.
" 호석이가 너 불러달래. 가봐. "
여주는 잠시 윤기를 노려보다가 호석의 방으로 향했다.
혼자 덩그러니 놓인 윤기의 눈동자가 희미한 색으로 탁해졌다.
*
" 혀엉...정말 괜찮아요? "
잔뜩 울상인 표정으로 지민이 호석의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도 잔뜩 붙어있었으면서, 여주가 끼어들 듯 말했다.
" 아니, 그래두... "
" 얼릉 가, 지민이 알바라매. "
" 그렇긴 한데... "
" 형 괜찮으니까, 얼른 가. 또 점장님한테 혼나겠다. "
호석이 얼른 가라며 재촉하자, 지민은 내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호석을 돌아보다가 겨우 걸음을 뗐다.
방문이 닫히자 호석이 숨을 푹 쉬며 다시 침대헤드에 등을 기댔다.
" 가끔 보면 쟨 새끼강아지같애. 너 겁나 따르는 거 보면. "
" 내가 개여서? "
" 엉. "
무심한 여주의 대답에 호석이 웃었다. 그런 호석을 여주는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호석은 기어코 감기에 걸려버렸다. 비 맞으면 무조건 감기 걸리면서. 여주는 열때문에 볼이 잔뜩 빨개진 호석의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뜻뜨미지근한 게 아까 먹인 해열제가 좀 돈 것 같았다. 제 손길에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있는 호석을 가만히 보다가, 아프지않게 이마를 밀쳤다.
고개가 뒤로 밀린 호석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여주를 바라봤다.
" 너 앞으로 우산 딴 놈한테 줘봐. 진짜 죽어. "
여주가 협박조로 말하자 호석이 알겠다며 끄덕였다. 하지만 여주는 알았다. 또 똑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호석이는 그런 애니까.
머리는 잔뜩 부스스해선 약기운이 돈 듯 눈이 반쯤 멍한 호석이 어쩐지 귀엽고 가여워서 여주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더 해달라는 듯 여주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창가에서 밀려 들어온 햇빛이 호석의 침대위에서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제는 그렇게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한낮이었다.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느슨한 침묵 사이, 호석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 괜찮아? "
쓰다듬던 여주의 손길이 느려졌다.
" 아니. "
어느덧 고개를 올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석에겐 염려가 가득했다. 감기때문에 잔뜩 열이 오른 새빨간 얼굴로, 저에게 괜찮냐고 묻는 호석이었다.
여주는 그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남에게 우산을 줘버렸다곤 해도 결국 감기에 걸린 건 자기때문인데.
윤기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호석의 카톡은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의 것이었지만, 집에 들어와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다가 깨달을 수 있었다.
호석은 아마도 우산얘길 꺼낸 후 윤기를 발견했고, 제가 온다는 말을 보곤 곧바로 호프집을 튀어나왔을 것이었다. 우산도 없으면서. 비 맞으면 꼭 감기에 걸리면서.
" 호석아. "
여주가 위로의 말을 찾고 있던 호석을 불렀다.
" 나 방해한댔지? "
" ... "
" 앞으로 열심히 방해해주라. "
" ... "
" 내가 더 바보같이 굴기 전에. "
여주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애써 웃고 있는 얼굴에서 감정들이 정처없이 떠도는 게 보였다.
호석은 그런 여주의 손을 잡고 답했다.
" 응. "
*******
오늘은 전체적으로 좀 다크하군요...이거 캠퍼스물...맞는데....
다음엔 좀 더 밝은 분위기로 가져올게요ㅋㅋㅋㅋ
쓰다보니 호석이 시점은 또 밀린 건 함졍...
근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저 어남() 사실 70:30정도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는데 여러분 댓보니까 요즘 60:40이 되어가고...뭐 그러네요...?;;;;
여튼...여러분 어남땡 열심히 앓아주세요! 고 재미로 연재하고 있는 요즘입니당
모쪼록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도 빨리 써서 돌아올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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