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水彩畵)
Prologue
두 번째 세자빈
/
물오름달(3월)의 중반을 향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끝자락만 남은 겨울이 봄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번 겨울은 꽤나 긴 것 같구나. 새하얀 입김과 함께 입 밖으로 새어나온 혼잣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나무에 애처로이 매달린 나뭇잎을 한없이 바라보던 사내가 몸을 틀어 제 뒤에 시립하고 있던 내관을 지나쳤다. 그에 익숙한 듯, 사내의 운검인 호석을 필두로 한 궁녀들과 내관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걸이가 사내의 성정과도 같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을 휘감은 짙은 남색의 곤룡포가 그의 다리께에서 흔들렸다. 수려한 외모에, 사방으로 위압감을 흩뿌리는 그는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조선의 세자, 태형이었다.
“ 저하, 세자 저하! ”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전으로 향하기는 커녕, 꽤나 엉뚱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태형에 강 내관이 사색이 된 채로 그를 불러내었다. 부르거나 말거나, 어딘가로 향하는 태형의 발걸음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더랬다. 궁 깊숙이 있는, 인기척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전각의 앞에 멈춰선 그가 손을 뻗어 녹슨 문고리를 잡아내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기분나쁜 감촉이 손 끝을 타고 온 몸에 전해진다. 끼이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전각의 모습은 궁의 일부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날이 서있던 태형의 눈빛이, 폐허가 따로 없는 전각의 마루에 가서는 유순하게 풀어졌다.
“ 빈궁. ”
“ … …. ”
“… 빈궁. ”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전각의 마루에 가까이 간 태형이 나지막하게 전각의 주인을 불러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빈궁전의 주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세 달하고도 아흐레(9일)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빈궁전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전각을 매번 마주하면서도, 해사히 웃으며 전각에서 나와 그를 맞이하던 이령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거미줄이 사방에 쳐진 전각을 허망히 바라보던 태형이 이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 이만 돌아가자꾸나.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풀죽은 표정을 하고 걸음을 옮기는 태형의 어깨가 축 처진다.
“ … 세자 저하? ”
“ 무슨 일이냐. ”
“ 소인은 대왕대비전의 황 내관이라고 하옵니다. 대왕대비께옵서 세자 저하를 뫼셔오라고 하셨사옵니다. ”
“ … 안 간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
“ 억지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사옵니다. ”
꽤나 단호한 어투에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왕대비가 그를 부르는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세자의 재혼. 조선 왕실의 대를 잇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었고, 더군다나 죽은 세자빈과 세자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기에 대왕대비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빈궁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재혼이라니. 대왕대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태형은 언짢기 그지없었다. … 앞장서거라. 씹어뱉듯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 명령에 황 내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왕대비의 거처인 자경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대왕대비마마, 세자 저하를 모시고 왔사옵니다. ”
“ 들라 하게. ”
황 내관의 언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왕대비의 허락이 굳게 닫힌 창호 너머로 들려왔다. 두 개의 문을 지나고 마지막 문이 열리자 대왕대비 박씨가 찻주전자와 찻잔이 가지런하게 놓여진 다도상 앞에 놓여진 것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무미건조한 태도로 고개를 까딱인 태형과 달리 옅은 웃음을 입가에 띄운 대왕대비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 세자. ”
“ … 네. ”
“ 앞으로 닷새(5일) 후, 조선에 금혼령이 내려질 것입니다. ”
금혼령이 내려진다는 말에, 무심하던 태형의 눈빛이 날을 세웠다. 금혼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짓씹듯이 내뱉은 말에는 형형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금혼령이 내려진다는 것은, 필시 새로운 세자빈을 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터. 어느정도 예상하고는 있었건만 … 이리 빠를 줄이야. 굳어진 표정을 한 태형을 지그시 바라보던 대왕대비가 제 앞의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웠다. 뭘 그리 날을 세우십니까. 세손을 낳아 왕실의 대를 잇는 것이, 세자의 임무 중 하나라는 것을 영특한 세자께서 모르실 리는 없을 것이고.
“ 할마마마.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저는 세자빈을 다시 맞이할 생각이 없습니다. ”
“ … 혹,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그 아이 때문입니까? ”
대왕대비의 서릿발과 같은 말이 정확히 태형의 심장을 관통했다. 대왕대비의 질문을 끝으로, 대왕대비전 안에는 꽃잎이 띄워진 찻잔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차 향기와 함께 몇 초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이령의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태형의 수려한 얼굴에 일순간 균열이 생긴다. 세자의 약점을 찌른 셈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대왕대비가 손을 뻗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쥐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히 차를 들이킨 그녀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잊으십시오.
“ … 할마마마! ”
“ 어줍짢은 사랑놀음에 빠져 본분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세자. ”
“ … … . ”
“ 일국의 왕세자에게는,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
“ … … . ”
“ 잊어버리세요. 그것이, 이 나라 조선의 법도입니다. ”
이만 나가보세요. 나긋한 어투로 말을 끝맺은 대왕대비가 태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나가보라는 대왕대비의 말에 태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인사를 한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겨내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에서 옅은 향기와 함께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대왕대비전을 나서는 태형의 뒤로 호석을 포함한 궁녀들과 환관들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동궁전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선 태형이 한껏 굳어진 목소리로 강 내관을 불러내었다. 강 내관. 그의 부름에 뒤에서 궁녀와 환관들을 이끌던 강 내관이 빠르게 태형의 곁으로 다가섰다.
“ 잠행을 나갈 것이니, 채비하도록 해라. ”
“ … 예? 허면, 호위는 … ”
“ 운검만 대동할 것이다. ”
잠행을 나가는데, 세자익위사를 대동하지 않으신다니? 강 내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하, 그래도 익위사는 대동하셔야 …. 강 내관의 말에 고개를 두어번 저은 태형이 동궁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로 걸음을 옮기는 태형의 얼굴빛은 마냥 어둡기만 했다. 대왕대비가 저리 강경하게 나온다면, 금혼령이 5일내에 내려지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한다면 하는 여인이었으니. 태형의 아비인 왕 또한 동의를 하였으니 대왕대비가 통보식으로 태형에게 말을 전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따라, 제 허리에 둘러진 금색의 옥대가 무겁게 느껴져 태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궁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여 잠행을 나온 것이건만, 바깥에 나와서도 태형의 한껏 굳은 표정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법 어둠이 짙게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운종가 한복판은 수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태형은 사람들과 부러 부딪히지 않기 위해 담벼락을 따라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내었다. 어느 기와집의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갓끈을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태형의 코 끝에 미약한 복사꽃 향기가 스친다. 그 향기는 태형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 빈궁? 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발이 멈춰서자, 호석 또한 그림자처럼 태형의 뒤에 멈춰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낮게 속삭이는 호석의 옆으로, 짙푸른 초록색의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지나간다. 아까와 같은 복사꽃 향기가 아까보다 더 진득하게 태형의 코 끝에 머물렀다. 그 향기에 태형이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흔하디 흔한 복사꽃 향기였지만, 왜인지 따라가야만 할 것 같았기에.
“ 저하,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것이옵니까! ”
차마 소리를 내어 태형을 크게 부르지도 못한 호석은 그저 태형을 뒤쫓아 갈 뿐이었다. 호석을 신경쓰지 않은 채로, 태형이 여인을 쫓아 도착한 곳은 한양 최대의 기방인 명월관이었다. 명월관임을 알리는 홍등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던 태형이 이내 굳은 결심을 한 듯 발을 내딛을 때였다. 저하, 아니되옵니다. 이곳은 기방이 아닙니까? 단호한 입매를 한 채, 호석이 검을 쥔 손을 뻗어 태형을 제지했다. 비키거라. 호석의 손을 저 옆으로 밀어낸 태형이, 기어이 명월관의 대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까 저를 지나친 여인이 마당으로 내쳐진 것은.
“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 ”
“ 나으리! 진정하십시오! ”
“ 기생 주제에, 정절을 지키겠다고 내빼는 것도 한두번이지. 어디서 지금 …. ”
땅바닥에 내쳐진 것이 아픈 듯, 여린 아랫입술을 악문 채 마당 한복판에 주저앉은 여인의 어깨가 사내의 폭언에 잘게 떨렸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둥근 이마선과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콧대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어 태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진다. 분명, 제가 아는 사람의 얼굴이다. 태형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제 기억의 편린을 헤집을 때, 무슨 일인가 싶어 버선발로 뛰쳐나온 기생어미의 손에 들린 등의 불빛에 여인의 얼굴이 여실히 드러났다. … 그대가 왜 여기에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태형의 망막에, 또다시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들어올리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 … 이쯤에서 그만두지. 보는 눈도 많은데. ”
“ 넌 뭐야!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거 안 놔? 니가 이 년 기둥서방이라도 돼? ”
여인에게로 내려꽂히려던 사내의 주먹을 잡아챈 태형이 서늘한 눈빛을 한 채 사내를 쏘아보았다. 잘 벼린 칼날과 같은 눈빛 사이로 언뜻 스친 중압감에, 고래고래 악바리를 지르던 사내의 목소리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저하. 그만두십시오. 잡힌 손이 아팠는지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호석이 태형에게 낮게 속삭였다. 저하께오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보는 눈이 많습니다. 호석의 말에 사내의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은 태형이 아직 주저앉아 있는 여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일어나시오. 꽤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여인의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제 앞의 태형을 물기어린 눈으로 바라본 여인이 태형의 손을 잡고 바로 섰다. 제 손을 감싸고도 남는 큰 손의 온기가 제 손에 가득 들어찼다. 이내 태형의 손이 거두어지고, 한 켠에 서있던 기생어미가 여인을 끌어당겨 제 뒤에 세우고는 태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 송구하옵니다. 저하께서 예까지 어인 일로 …, ”
“ 이 여인은 내가 데려가겠다. ”
“ … 예? ”
“ 자네 뒤의 그 여인, 내가 데려가겠다고. ”
일절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세자에 놀랄 틈도 없이, 그는 이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그 말에 명월관의 주인이자 기생들의 우두머리인 은영이 곤란한 듯이 고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예서 이야기할 주제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따라 오시지요. 너도 따라오거라. 제 뒤에 서있던 여인에게도 따라오라 지시한 은영이 명월관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술이 필요한 자리는 아닌 것 같으니, 차를 내오라고 하겠사옵니다. 은영은 문 앞에 서있던 시종에게 다도상을 내오라고 이르고는 문을 닫았다. 그래서, 정말로 이 아이를 데려가실 생각이시옵니까? 은영의 속살거림과 같은 물음에 태형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하오나 저하, 이 아이는 막 명부에 이름을 올린 기생이옵니다. 천한 신분이란 말입니다. 주상 전하께오서 아시는 날에는 …. ”
“ 상관 없다. 동궁전 소속 궁녀로 궁에 들일 것이니,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
… 감히. 나직하게 뇌까린 태형이 입술에 삐딱한 미소를 건 채, 은영의 옆에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앉은 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택은 네 몫이다. 따라가겠느냐? 제게 주어진 갑작스러운 질문에 여인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세자로부터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질문의 형식을 띄고 있었으나, 그것이 내포한 것은 명백한 명령임에 틀림없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당황한 듯 뺨을 붉힌 여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조만간 사람을 통해 서신을 보낼 터이니, 그 때 입궁하도록 하거라. ”
제가 원하던 답이 나오자, 한결 편해진 표정의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궁으로 돌아가려는 듯, 흐트러진 도포 자락을 갈무리하고 갓을 고쳐 쓴 태형이 문을 나서려다 말고 문 옆에 선 여인의 앞에 멈춰섰다. 곧이어 길게 뻗은 손가락이 여인의 조막만한 얼굴을 집요하게 훑는다. 여인의 붉디 붉은 입술을 어루만지는 엄지 손가락은 왜인지 모르게 조심스럽고, 온기가 가득했으며, 애틋했다. 이령과 닮아도 너무 닮은 탓이었다. 그럼, 궁에서 보자꾸나. 갑작스러운 세자의 접촉에 놀랄 틈도 없이, 손을 거두고 무릎을 굽혀 저와 눈높이를 맞춰 오는 그에 여인의 흰 볼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세자의 두 손가락이 여인의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가 금세 거두어진다. 방을 나서기 전, 제게로 눈꼬리를 휘며 다정히 웃어보인 태형에 그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
여주와 석진의 혼례 일주일 전, 갑작스럽게 세자의 가례도감이 설치됨과 동시에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졌다. 그로 인하여 한양의 내로라 하는 사대부가의 여식들은 꼼짝없이 처녀단자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헌부의 우두머리 격인, 대사헌 김수혁의 여식인 여주도 이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정식으로 석진과 혼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초간택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레(7일) 후. 아이러니하게도, 서른 명의 참가자 중 재간택에 참여하게 될 여섯 명의 여인 중에는 여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여주의 집안 사람들은 재간택에서 탈락하게 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더랬다. 허나, 불행하게도 삼간택에 올라가는 최종 후보에도 여주의 이름이 들었다는 소식이 궁에서 들려오자, 집안의 분위기는 급격히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 도저히 불안해서 못 참겠네. ”
삼간택을 하기 전날의 야심한 시각. 방 안에 틀어박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서책을 읽고 있던 여주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간택에 제가 후보로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그녀의 부모는 하루도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혹시나 하고 올린 처녀단자에 이 사단이 날 줄이야.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고민들이 한숨이 되어 그녀의 입 밖으로 빠져나온다. 세자빈으로 간택받지 못한 두 명의 여인들은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한다. 세자의 눈길이 자신들에게로 와 닿길 바라며. 부모의 어두운 낯빛과 깊은 한숨이 그것을 어렴풋하게 의미하고 있어 그녀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 뜯던 여주가 이내 결심을 한 듯 방 밖으로 향했다.
급하게 뛰쳐나온 탓에 신발을 신지 못한 그녀의 오른발에서 피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미처 그것을 자각할 새도 없이 내달리던 여주의 눈 앞에, 익숙한 석진의 집 담벼락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돌부리에 걸렸는지 휘청거리던 여주는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 … 아! ”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 줬지만, 그녀는 이내 발목을 붙잡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넘어지며 발목을 접질렀는지 발목에 미약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울상을 지은 여주가 일어나려고 애를 쓴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리고 그토록 보고싶었던 석진이 바깥으로 나왔다. … 낭자? 제 집 담벼락 앞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여주를 발견한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낭자, 예서 무엇을 하는 겁니까.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제게로 그림자를 드리운 석진을 바라본 여주의 동그란 눈동자가 놀란 듯이 팽창되었다. 일어날 수는 있겠습니까? 그의 걱정섞인 물음에, 주저하던 여주가 이내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발목을 접질러서 ….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너른 품에 여주를 안아올린 석진이 대문 안으로 향한다.
“ … 어어, 나으리,”
“ 어쩔 수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긋 웃어보인 석진이 혹여라도 그녀를 안은 손을 놓칠까봐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난향이 은은하게 그녀의 코끝을 찔러온다. 시간이 늦어 석진의 집 마당에는 시종 두어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사랑채에 들어간 석진이 푹신한 이불 위에 여주를 조심스레 앉히고는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 석진의 품에서 나던 난향이 온 방 안에 퍼진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두 볼을 바라보던 석진이 여주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낭자. 다정스럽게 저를 불러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 무어가 그리 서러우셨습니까. ”
“ 그것이, 발이 …. ”
얼버무리는 여주의 말에, 석진이 손을 뻗어 치맛자락 아래로 언뜻 보이는 그녀의 오른발을 붙잡았다. 흰 버선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엉겨붙어 엉망이 된 버선을 벗겨내자, 상처가 가득한 발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발을 하고, 예까지 온 것입니까.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상처를 바라보던 석진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방 바깥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붕대와 젖은 헝겊이 들려 있었다. 다시 여주의 앞에 앉은 석진이 제 무릎에 그녀의 발을 올려놓고,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헝겊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따갑고 쓰라린 느낌에 여주가 움찔거리며 발을 빼려고 하자, 참으라고 나직히 말하고는 피를 마저 다 닦아낸다. 곧이어 여주가 움직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끔 붕대를 동여맨 석진이 이내 나비매듭을 지어 붕대를 감는 것을 마무리했다.
“ 낭자. 아무리 급하셔도 …, ”
“ … 네. ”
“ 신은 신고 다니셔야 합니다. 발에 상처가 나지 않습니까. ”
걱정이 가득한, 부드러운 말투에 여주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보아하니, 그런 듯 한데. 제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석진에, 여주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 혹, 세자빈 간택 때문에 그런 겁니까? 나긋한 목소리로 제게 조용히 건네어진 질문에 여주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표정에 석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 팔을 벌렸다. 낭자, 이리 오시지요. 그에 울상을 지은 여주가 그의 품을 파고들자, 으레 그랬듯이 석진이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간택되실 겁니다. 낭자는 항상 뭐든지 잘 하지 않습니까. 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석진의 손길에 경직되었던 여주의 표정이 점점 풀어진다. 나으리는 어찌 그리 저를 잘 아십니까. 느른한 한숨과 함께 여주의 입 밖으로 새어나온 말에 석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 온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그에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던 여주가 저 또한 웃음을 흘려냄과 동시에,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애기씨, 여주 애기씨! ”
소곤거리며 여주를 찾는 몸종의 목소리에 석진이 여주를 안은 것을 놓지 않은 채 제 옆의 촛대에 놓인 초의 불을 불어 껐다. 방 안을 밝혀주던 불빛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어둠이 들어찬다. 아, 여기 안 계신 건가. 도대체 어딜 가신 거야 …. 거의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몸종의 목소리가 사랑채에 점점 가까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갑작스러운 제 몸종의 등장에 당황한 듯 여주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다. 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멈추지 않는 딸꾹질에 여주가 울상을 짓고는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들킬 것 같은데. 곤란한 듯이 미간을 찌푸린 석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여주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 아무래도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 무엇을 말씀하시는, ”
달싹이던 여주의 붉은 입술 위로 석진의 입술이 나비처럼 살포시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그녀가 숨을 들이킨다. 멈추려고 애를 써도 멈추지 않던 딸꾹질이 점점 잦아든다. 잔뜩 경직된 여주가 귀여웠던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운 석진이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많이 놀라신 겁니까? 제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이는 석진에 뒤늦게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이제 간 것 같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몸을 기울여 방 밖의 낌새를 살피고는 제게 싱긋 웃어보이는 석진에, 머뭇거리던 여주가 이내 결심한 듯 그를 끌어당겨 그의 볼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제 볼을 스치는 부드러운 촉감에 놀란 석진이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꽤나 대담하게 볼에 입을 맞춘 것과는 상반되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잔뜩 내비치는 여주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작게 웃은 석진이 이내 팔을 뻗어 제 앞의 작은 여인을 끌어 안았다. 날 때부터 정해진 혼약이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여주를 연모했다. 한순간에 깨져버린 혼약일지라도 아직 그녀는 제 정인이었으니, 오늘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부려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또 한 번의 입맞춤은 매사에 원칙을 철처히 지키는 그의 허용범위에 아직 있는 것이었다.
“ 실례합니다, 낭자. ”
나긋하게 말을 내뱉은 석진이 여주의 뒷목을 조심스레 끌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느릿하게 제 아랫입술을 물어오는 석진에 여주가 그의 뒷목에 팔을 두른다. 서투르게 제게 맞춰주는 그녀의 행동에 석진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진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더이상 제가 설 자리가 없다. 당장 내일 마주할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져 속이 쓰려왔다.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저 제 정인에게 연모한다는 마음을 제가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내보여 주는 것만이 지금으로써는 가능할 뿐이었다. 집요하게 여주의 입술을 탐하던 석진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여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석진이 손을 들어 짙은 붉은빛으로 물든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어루어 만진다. 이윽고 그녀의 발그레한 볼을 손으로 감싼 석진이 입을 열었다.
“ 하마터면 입맞춤도 못할 뻔 했습니다. ”
“ 나으리 …. ”
“ 낭자, 제가 …, ”
“ … …. ”
“ 그대를 많이, 사모하였습니다. ”
말을 끝마친 석진이 눈이 휘어지도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삼간택이 치루어지기 전날의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오랜만이에요! 금방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해가 바뀌고 나서 들고 오게 되었네요.
1년만에 수채화를 쓰는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제가 예상했던 전개대로 써보려 노력하겠습니ㄷㅏ,,
프롤로그에 월혜와 세자의 에피소드를 넣는 것은 예전 프롤로그와 동일하게 했지만 내용은 첫만남으로 바꿨어요.
어떨 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세자가 월혜한테 왜 꽂혔는지 보여드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서 기존의 구성은 그대로 가되 내용을 바꿔봤어요!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미흡한 부분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쓰다보면 예전의 감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ㅋㅋㅋㅋㅋㅋ
예전에 썼던 수채화는 금일 오후 세시에 전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암호닉 신청은 새로이 받을게요. 예전에 신청해주셨던 분들 또한 다시 신청해 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