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결핍 上
어쩌면 김기범의 인생은,
"기범아, 종현이 마음에 들지? 이제부터 네 형이야."
이때부터 꼬였을지도 모르겠다.
태민은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 '총체적 난국' 이라 칭했다. 구미에 맞지 않게 딱 눅눅해진 옷이며, 사정없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 양말을 적시는 빗줄기며, 취향에 어긋나는 우산이며, 그리고 제 바로 앞에서 숨을 헐떡이는 김기범이며.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태민을 향해 웃어 보였다. 태민은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이 제일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고 씩, 입꼬리를 당길 때 정말이지 없는 귀신이라도 찾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범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정말 바보같이, '좋아해! 좋아해! 김기범이 이태민을 좋아해! 좋아해!' 하는 문구를 얼굴에 다 써붙여 놓고선. 태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남자의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한다. 리드해줄 수 있는 든든한 남자가 이상형인 그에게는, 갓 사랑이란 열병을 앓고 있는 22세 사춘기소년 김기범은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그런데도 귀찮아서 일부러 안 내치고 있었더니만 이런 총체적 난국이.
"저기, 저기, 혹시이……. 이태민. 맞지? 맞죠?"
당신은 내가 잊어버려도 끝까지 내 이름을 기억할 위인이야. 태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끝까지 차도남 코스프레라니.
"아. 다행이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짧게 끝나. 좀 들어줄래?"
"뭔데요?"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숨을 고른다. 심장부근이 세 번 쯤 들썩거렸을 때서야 긴장으로 꽉 막힌 목소리를 내는 김기범이다.
"좋아해! 태민아."
좋아한다구우……. 혹시라도 태민이 못 듣진 않았는지 다시 재차 요점을 말하는데, 그마저도 잔뜩 쳐져 있으니.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손톱을 뜯으며 사랑고백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꼴이, 태민의 이상향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태민아, 이 형아가 널 사랑했어. 사귀자. 오늘부터 1일이다. -라고 말해줘도 모자를 판에 좋아해 태민아. 좋아한다구우. 라니. 기범의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연애의 팡파레가 울리고 있지만, 태민은 정반대로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게 그를 돌려보낼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저기요. 같은……과죠? 그렇죠?"
"어? 어."
"아, 다행이다. 그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네요. 저는 별로 연인 사귈 마음 없었는데……. 죄송해요, 기범씨. 마침 같은 과고 하니까 같이 강의 들으면서 좋은 친구가 되요, 우리."
'좋은 친구'를 특별히 두 번 되새겼다. 그런데…… 그 단어는 기범의 귓속에 들어가면서 이미 삭제되었는지도,
"자기야,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모르겠다.
태민은 총체적 난국보다 좀 더 자극적인 말이 이 상황을 대변해줄 수 있을 거라 중얼거리며 깊게 탄식했다. 비가 내린다는 것도 잊은 채 우산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태민이 아무리 싫어하는 태풍이라지만, 이 남자는 더 싫다. 바보같이 허둥지둥대며 우산을 잡으려 하는 기범을 바라보았다. 답이 전혀 안 나온다. 아아악. 태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기범은 갓 생성된 귀여운 커플이 되고 말았다. 혼이 나간 기분이다.
[허니♥끝나면연락해내사랑잊지말고'-'*밥먹으러가자!]
하트가…… 깜장색이다. 테두리만 남은 흐물흐물한 투명 하트와는 질이 다르다. 내 마음속은 빠릿빠릿 100% 널 향해 충전되어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어둠의 블랙. 기괴한 신음을 내뱉으며 서둘러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오늘은 기범과의 첫-일방적인-데이트가 있는 날. 태민은 넋이 나간 채로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입고 온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바라보았다. 아니 데이트라면 신경을 써야할 게 뻔한데, 태민은 그러질 않는다. 보다못한 민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 이태민. 데이트 아니야? 왜 그렇게 입어? 차라리 내가 낫겠다, 내가."
축구덕후 최민호가 대체 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는지……. 고등학생 때부터 축구를 제외한 것에는 관심을 아무것도 두지 않아 패션에서조차 그 두각을 보이고 있으니. 대학생이 되면 좀 달라질까 싶었는데 이게 웬걸. 그냥 하얀 티셔츠에 무슨 아저씨나 입을법한 갈색 반바지. 이게 모델간지 최민호라서 커버가 되는 거지 그냥 다른 일반인이었다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렸을 거다.
"바빠."
"바쁘다고 그렇게 입어? 대박. 천하의 이태민이."
"비켜."
"귀요미 이태민이. 패션간지 이태민이."
"꺼져."
"……이렇게, 변하다니."
데이트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으로 불쌍하다며 끌끌 혀를 차는 최민호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당장이라도 의자를 엎고 아구를 치고 싶었으나, 어제의 태풍같은 고백으로 인해 이미 K.O 상태가 되어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이나 하룻밤사이에 피폐해진 이태민은, 아무리 절친한 최민호라도 같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아으으으으."
태민은 짐승의 소리를 내며 풀썩 엎드렸다. 정말 얘가 어디 아프나…….
김기범과 이태민의 첫 번째 데이트의 첫 번째 코스는 바로 영화.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카페도 가고……. 하고 싶었던 게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 기범의 흥분한 목소리는 "그럼 그냥 영화부터 보죠." 하는 태민의 축 쳐진 기운으로 인해 살짝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화를 볼지 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냈다. 그냥 깜깜하고 편안한 데 앉아서 한 한두시간 즈음 아무말도 안하고 멍하니 쉬고 싶은 태민의 작은 바램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지는 소리가 났다. 연인의 정석은 바로 팝콘이라며, 팝콘 라지사이즈를 바리바리 싸들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팝콘이나 쳐먹는 괴에무울……. 태민의 작은 입은 기범이 보이지 않는 데서 신랄하게 놀려지고 있었다.
영화는 예상 외로 재미있었다. 이로 인해 이태민은 김기범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까지는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미술로 꽤나 이름을 날렸다던데, 그게 진짠가, 싶기도 하고. 아니. 이 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대체 왜 이딴 얘들만 모아놨느냐고. 분명 태민은 정신연령이 높은 모범생 스타일의 문학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국어국문학과를 꿈꿔왔고. 그런데 축구덕후 최민호와 예술가의 소울을 가진 김기범은 대체 왜! 여기에 들어왔느냐는 말이야. 예체능이었을텐데 공부를 많이 했나? 태민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골똘히 고민했다. 그럼에도 정작 제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해서 아무나 쉽게 들어가는 대학교를 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이구. 딱 좋다.
더웠는데 에어컨은 빵빵하지…… 주위는 조용하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 풍선이 다시 휘익 불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소르르 오려는 순간, 손잡이에 밀착되어 있던 손은 미끄러져 팝콘통 안에 들어가버렸다. 그 바람에 열심히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즐기던 김기범의 피부와 맞닿아 버렸다. 그렇다. 김기범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팝콘 사이에 싹트는 연애감정.
"어……. 저기, 태민아?"
스크린에서는 마침 '손만 잡고 자자.' 라는 흔하디 흔한 여자의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맞춰 남자가 입술을 맞춰온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역시 로맨틱 코미디를 선택하기 잘했다. 기범은 자신의 선택에 심하게 흡족해하며 잠에 취에 늘어진 태민의 마른 손에 깍지를 끼었다. 힘을 꽉 쥐었다 피기를 몇 번, 앙칼진 반응을 예상했었으나 상상과는 다르게 척척 맞아 떨어지는 러블리한 분위기에 기범은 혼자 숨죽여 킥킥댔다. 태민이는 지금쯤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내가 좋지만 싫은 척 하는거야. 그만 츤츤대고 네 진심을 보여, 태민아! 숨길 필요 없어!
기범은 끝까지 제 사랑스러운 연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나르시즘 쩌는 성격이 그가 받을 상처를 덜 받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났다. 스트레칭을 하고선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빛을 좆아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태민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아. 팝콘이나 쳐먹는 괴물이다. 괴물 김기범은 요정 이태민의 손목을 잡고 박력있게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기범도 태민의 옆에 있어서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치고는 비리비리한 체형이라, 악력은 센 편이 아니었다. 사실 태민은 좀 설랬다. 기범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사람 많으니까 계단으로 가자."
……없었네.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자기가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벽으로 몸을 밀치는 것 따위의 이벤트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한숨을 푸욱 쉬며 기범의 뒤를 쫒았다. 아까 자서 그런가, 몸이 제대로 따라주질 않는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귀에서는 자꾸 듣기 싫은 목소리가 앵알앵알.
"태민아. 영화 재밌었지? 김귀분 완전 예쁘지 않았어? 아니지, 아니지. 우리 태민이가 더 예쁘지. 그런데 거기 나오는 이태연이라는 얘 너 닮았더라. 근데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래."
"-우리 이제 영화도 봤으니까 어디 갈까? 밥 먹고 쇼핑가는게 나으려나? 쇼핑하고 밥 먹을래? 클라이막스로?"
"…몰라."
"그나저나 우리 이제 뭐 먹을까? 나 능력 있는 남자야. 알바비 벌어서 빕스같은데 갈 수 있어. 빕스? 아웃백?"
마음대로 해, 라는 태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범의 타박이 이어졌다. 태민은 짜증나는 기분을 한껏 누르려고 노력하며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그의 하이톤은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알바라니. 분명히 말하지만 그의 이상형은 수트가 평상복인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멋진 커리어맨. 나 알바해서 능력있는 남자니까 무리해서 빕스 가자, 따위의 말은 집어치우고. 그냥 조용히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주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기범은 내 취향이 아니야.
"좀 더 비싼 거 사 줄수 있는데에."
"이것도 충분히 비싸. 그리고,"
더 비싼거 사면 내가 너한테 양심의 가책을 느끼잖나. 영화도 밥도 네가 내면 뭔가 좀 뒤끝이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범가는 연인의 사고를 할 수 없기에, 더치페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굳게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기범이 내니…….
"그리고. 그리고 뭐?"
"아무것도 아니야. 와, 새우 맛있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눈에 가는 아무거나 말했더니만. 새우는 실제로 토실토실 살이 올라 한 입 베어물자 바다의 맛이 가득 났다. 토마토 소스도 신선한 축에 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태민도 만족시킬 만한 토마토 해산물 스파게티다. 새우가 맛있다는 말에 기범도 제 그릇의 새우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그런데 표정이 존나 구려. 똥들었냐?"
"아니, 나 새우 못 먹는데."
아니 그런데 왜 처먹어. 팝콘이나 쳐먹지, 괴물새끼가. 태민은 신경질나는 얼굴로 면을 포크에 감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에, 기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스테인리스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너 먹는거 나도 똑같이 먹고, 너 마시는거 나도 똑같이 마시고 싶어."
"와 난 괜찮은데요 김기범씨. 네가 스테이크를 먹는게 더 나을 뻔했어. 뺏어먹게."
"그리고 완전히 못 먹는것도 아니고, 해산물. 먹을 수는 있어. 형이 좋아해서 밥상에 자주 올랐거든."
"형씨 참 나랑 입맛 똑같수. 나 완전 해산물 덕후거든. 언제 나한테 회 사줄래?"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확연히 났다. 귀를 찢을 듯한 난데없는 소음에 일제히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한 연인이 물컵을 양탄자에 깨트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장면이 있었다. 직업의식 투철한 서비스맨이 달려와 유리파편을 치울 때까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흐르질 않았다. 잠시 주위가 환기되고 나서 전에 했던 말들은 무시한 채 밥 먹기에 열중하는 태민이다. 그런데도 김기범은 왜 자꾸 깨작대는거야, 신경 쓰이게.
"내가 지방대 국문학과 다니잖아."
"와, 먹다가 사레 들릴 뻔했다. 너랑 나랑 같은 대학교야 병신아."
"우리 형은 서울대 나와서 지금 삼성 다닌다. 웃기지?"
"형씨 딱 내 이상형이네. 해산물 좋아하고 능력있고. 차라리 횟집을 인수해서 나랑 같이 신혼집을 차리자고 하자."
"그런데 난 왜 이 모양일까, 태민아."
문득 씹은 홍합살의 맛이 좋지 않다. 상했나.
"이 모양일까, 태민아……."
태민은 잠시 입을 오물거리는 행동을 멈추고 제 딴에는 형식상으로만 연인인 김기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렌지빛 조명에 비춰진 얼굴이 놀랄 만큼 일그러져 있어, 그만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은 당최 벌려질 줄을 모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경을 날카롭게 할 만큼 주절댔으면서. 마치 배터리가 다 된 장난감처럼 기범은 그렇게 꼼짝없이 앉은 채로 몇 분을 흘렸다. 눈 앞의 식어가는 음식도 무색케 할 만큼 엄숙하고 고요한 시간의 흐름이었다. 태민 또한 입맛을 잃고 정적을 유지했다.
"……내가 봐도 반할 만큼 멋지단 말이야."
"……천하의 김기범이가 열등감을 느낄 만큼 멋지고 잘생기고 완벽하고 박력있으면, 그게 어디 인간이게? 인형이지."
"차라리 인형이고 싶다."
"사람이 인형을 좋아하면 그게 바로 오타쿠야, 김기범아.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거야."
제가 말해놓고도 낯부끄러워 열기와 맛을 잃은 스파게티 면을 헤집는 척을 했다. 어색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먹어봤더니. 맛있다.
"와, 인제 드디어 반했네. 이태민, 분명 '천하의 김기범이가 열등감을 느낄 만큼' 이라고 했지? 그게 바로 나 아니냐, 김기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가게의 단골이 될 것 같다고, 태민은 생각했다.
[천하의김기범이가이태민이보고싶대♥]
느즈막한 오후. 깨끗이 빈 노트에 그림자가 져 거무튀튀한 무채색으로 변했다. 소리나게 커버를 닫으며 태민은 기분좋게 기지개를 폈다. 민호도 북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급히 침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신체는 강의실에 있지만 정신은 콩밭에 있는 지루한 강의였다. 휴대폰 진동의 원인을 확인하자 태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요 며칠 사이 엄청난 저기압을 몰고 다녔었기에 민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붙잡았다.
"뭐냐, 이태민. 여자친구 생겼냐? 그나저나 전에 그 꼴로 데이트 나가서 안 쪽팔렸냐?"
"깜장하트는 내가 휴지만 두르고 다녀도 좋아할 위인이야, 솔로 최민호야."
잔뜩 들뜬 얼굴로 민호의 얼굴을 푹 누르고선 급히 강의실을 뜬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때늦은 봄바람이 살랑인다.
그나저나 깜장하트는 참 밝히는 여자임에 틀림이 없군. 하긴, 이태민처럼 야들야들한 얘가 휴지만 두르고 다니면 나도 홀리겠다.
이제는 축구와 결혼한 최민호에게도 봄의 기운이 깃들었으면!
"나 아까 강의시간에 잤지 뭐야. 어제 너랑 같이 카톡하느라 피곤해서 그랬나봐."
"그래서, 이제부터 나랑 카톡 안 하시겠다?"
"아니. F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에 두 시간은 꼬박꼬박 하고 자야지."
자, 이제 어디로 갈까? 카페? 쇼핑?
지옥에 가자고 해도 좋아, 태민아.
"씨발, 오글거려 김기범아."
어느새 그들은 스무디킹의 야외 테라스에 각자 키위 스위디를 시켜놓고 늦은 담소를 즐기는 중이었다. 미끌미끌한 키위의 맛이 혀천장에 닿아 달콤한 향으로 태민을 가득 감쌌다. 소소하고 평범한 학점 얘기에서부터 같은 과 동기의 뒷담화까지. 블록버스터한 대화는 점점 형에 대한 이야기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본디 외동으로 태어났기에 태민은 기범의 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형에 대한 주제는 거의 다 흉으로 끝나기에, 맞장구 쳐 주기만 했다. 그가 누구보다도 열등감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아…… 형한테 이 미모도 발린단 말이지……. 후으으응. 샘나."
"아니, 형 사진좀 찍어서 보내줘 봐. 난 살면서 너처럼 잘생긴 얘 못 봤다."
"그치? 역시 이태민은 항상 옳아. 근데에…… 오늘 아침으로 뭐 나왔는지 아냐? 꽁치조림. 그거……비린내나는 거어…."
"꽁치조림. 아, 진짜. 그 맛없는 걸? 부모님도 참 보는 눈 없으시지. 천하의 김기범의 진가를 못 알아 보시고."
"후으응……."
키위에 흥분하는 물질이 있던지, 스무디에 알코올을 탔던지. 둘 중 하나라고 태민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연인을 띄어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최대한 감정이입해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좋아하던 해산물도 역겨워할 지경이 되었다. 꽁치조림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이내 지워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기범이 불쌍해 미치겠다. 이름도 모르는 그 '형' 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나르시즘에 어쩔 줄 모르는 김기범이 열등감을 느껴, 응?!
첫 데이트 이후, 어이없게 끼어버린 콩깍지는 형이란 사람의 잘난 점보다 기범의 매력을 좀 더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바보 이태민은 그게 싫지많은 않다. 이상형도 점점 그냥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 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키위 스무디를 반쯤 비웠을 즈음 김기범은 갑자기 이태민의 손을 붙잡았다. 유리잔에 얼마나 손을 대고 있었는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차갑다.
"난 형이 너도 뺏어갈까봐 무서워, 태민아……."
키위는,
백 번 생각해도 김기범에게 딱 어울리는 과일이다.
종현은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눈두덩이를 꾹 누르니 붉은 잔상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어둠은 빙글빙글 돌고 잔상은 새빨간 불꽃이 되어 이리저리 튄다. 머리도 아파오는 것 같고……. 마른세수를 하며 긴 숨을 뱉어냈다. 빈 속에 젠창 비즈니스용 술만 마셨더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시원한 무언가가 잔뜩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어떻게 차를 몰고 집에 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가 된 종현은 쇼파에 기대 어둠 속에 자신을 묻어갔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종현이 섞인 어둠에 밝은 빛이 한 줄기 새어 들어왔다. 왜 불을 끄고있어. 무미건조한 목소리와함께 어둠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적응되지 않은 눈동자에 눈물이 난데없이 한 줄기 흐른다. 아파오는 눈을 애써 손으로 문지르며 동생을 반겼다. 동생과의 거리는 당최 좁아질 줄을 모른다. 저가 먼저 다가가며 말을 걸어도, 잔뜩 움츠러든 눈빛으로 밀어낸다.
'기범아, 종현이 마음에 들지? 이제부터 네 형이야.'
처음 기범을 본 순간, 그 자신만만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스무 살의 패기가 자신에게도 전염되는 듯.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재결합으로 뒤늦게 생긴 동생이다. 짧은 기간이라도 살가운 관계를 원했으나, 어째서인가 기범은 날이 가면 갈수록 생기를 잃기 기작했다. 하루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다 밥 먹을 때가 되서야 집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진 얼굴로 밥을 깨작거린다. 그리고 다시 외박. 이 년이나 지난 지금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왔어, 기범아? 형 배고프다. 뭐 먹을까?"
"저 저녁을 먹고 와서요."
단칼에 거부하는 말투는 분명 새어머니의 것을 닮았으리라, 종현은 생각했다. 괜스레 머쓱해진 종현은 와이셔츠를 정리하는 척 하며 자연스럽게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기범도 겉옷을 벗고 있다. 패션이나 예술에 관심이 많다더니, 역시 범상치 않은 디자인의 스키니가 드럼세탁기의 원형 미닫기에 끼어져 있다. 칠칠맞기는. 대충 구겨 넣으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세탁물들도 던지고- 시작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저기, 그거!"
"어?"
"그거……손빨래하는 거에요. 저 바지, 저 주세요."
몇 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활짝 웃으며 농담을 건네도 바지만 받을 뿐, 표정은 풀어질 줄 모른다.
'형, 돈 잘 벌죠?'
영악하고 차가운 내 동생은 어째서인가 적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아. 또 엄마한테 비교당하겠다.'
그게 새어머니의 양육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쏴아아아. 팍팍팍. 난데없는 소음에 들려와 화장실 쪽을 바라보니 열린 문틈 사이로 열심히 손빨래를하는 기범이 보였다. 이런 거엔 또 열심히지. 그런데 이 늦은 밤에 몽정하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빨래를 할 이유는 없어 뒷짐을 지고 장난스럽게 걸어와 말을 걸었다. 샤워기로 열심히 비누칠을 벗겨내다가 깜짝 놀라는 꼴이 영락없는 고양이를 닮았다.
"아직 깨끗한데. 더 입지?"
키위가 묻어서요.
"노릇노릇한 노르웨이 고등어 먹고 열심히 회사가서 일해, 우리 아들."
어머니는 숟가락에 생선 살을 발라 종현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금새 종현의 입으로 들어간 살점에 기범의 시선이 끊기질 않는다. 밥그릇을 들고선 투정하는 아이처럼 '어무니, 나 돼지고기 먹고 싶은데.' 라고 말했다 '그럼 너도 형처럼 돈 벌어와. 아주 차돌박이를 사서 입에 직접 넣어줄 테니까.' 라는 공격이 들어와 입을 다물었다. 기범은 아침부터 괜스레 위축된 기분이 들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다 먹고 가."
"점심 많이 먹을 거야."
"같이 먹을 사람 없잖아."
"아, 진짜아!"
"어머니. 그만하세요. 기범이 활발하고 귀여운 얘에요."
형의 입에서 나온 활발하고 귀엽다는 단어는 마치 반쯤 살이 비워진 접시 위의 노르웨이 고등어가 아구를 벌려 말한 듯,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아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서둘러 신발을 꿰고 문을 열었다.
"여자 생겼냐?"
그러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잠깐 스톱. 뭐라고 토를 달려다가 쉬지않고 들려오는 엄마의 설레발에 잠시 스톱.
"늦게늦게 들어와, 기범아! 공부를 못하면 여친이라도 있어야지. 예쁘냐?"
엄마보다 훨씬 더 미인이야! 라는 말은 기도에서 꽉 막혀 버렸다. 마치 죽어버린 고등어가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왜ㅐ강ㅢㅇ앉ㅎ듨어오ㅏ?♡]
민호는 태민이 치는 문자 내용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화, 시계 말고는 키패드도 두드릴 줄 몰랐던 이태민이, 특수문자까지 사용하며 연인에게 문자를 보내신다. 점심마다 달콤한 연애질을 하시느라 나랑은 같이 밥도 안 먹고. 날이 가면 갈수록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이태민의 모습에 기가 막힌다. 살이 오르면 오를수록 볼의 홍조는 점점 더 붉어진다. 강의도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자꾸만 자꾸만. 그러다 어쩌다 깜장하트놈이 같은 과 동기 김기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못 아는 게 더 신기하다.
"남자한테 하트 붙이니까 참 좋구나, 태민아."
"부러우면 만들던가."
"아니, 난 축구공이랑 결혼했으니까 사절."
딱 잘라서 거절하고 책을 꺼냈다. 태민은 주위에 기범이 있는지 살피다 둘밖에 없는 텅 빈 강의실에 금새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같이 듣는 수업인데 대체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나도 안 보고 강의도 안 들어오는 거야아……. 나쁜 김기범. 김기범이가 바람이 났단다. 이태민아, 연애질 그만하고 엉아랑 위닝이나 하러 가자. 민호가 농으로 던진 말에도 날카로워진 성질을 잔뜩 곤두세우며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최민호,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나 지금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씨발, 김기범은 대체 왜 전화도 씹어?!"
"어이구, 깜장하트한테 문자가 왔네요."
어느 새 커플셀카로 맞춰놓은 휴대폰 액정에 새 문자 알림이 떴다. 아, 왔다! 금방 싱글벙글해져 잠금해제를 꾸욱 눌렀다. 민호는 그런 태민의 표정변화를 보며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라 느꼈다. 즐거움에서 화남, 화남에서 설레임. 이제는 설레임에서…… 당황함.
"이태민, 갑자기 왜 그래. 깜장하트가 뭐래? 못 온대?"
"……민호야."
"봐봐바."
"……민호야아."
그것은 짧고 굵은, 연인들에게는 외로움의 굴레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네 음절. 헤어지자. 아이고, 이태민이 마음고생 좀 하겠는걸. 친구로써 당장 위로해 주어야 할지, 솔로로써 복귀를 축하할지. 민호는 어떻게 태민을 다룰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태민의 다음과 같은 말에 결국 전자로 마음을 굳혔다.
"나, 오늘은 깜장하트 써주려고 했단 말이야아……."
자아.
오늘은 바로 이태민의 두 번째 총체적 난국이다.
-ing. 下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