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onette
생각보다 따듯한 기류가 흐르는 집 안, 달달 떠는 경수가 초점없는 두 눈으로 허공을 이리저리 짚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네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다니, 세상은 너무 잔혹해. 종인은 낮게 중얼거리며 이불을 끌어당겨 경수에게 덮어주었다. 진득한 정사로 힘들어보이는 경수는 색색 가쁜 숨만 내뱉고 있었고, 종인은 방금까지 그런 그를 강간했다기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메론을 잘게 썰고 있었다. 달콤한 향을 이리저리 내뿜는 꼴이 꼭 도경수 같았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메론이 담긴 접시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경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웠다.
“아저씨…….”
경수의 목소리였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힘든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는지 끙차 하고 일어나 종인의 옆으로 슬그머니 기어왔다. 종인도 그런 경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두 눈도 안 보이는 경수가 어떻게 자신에게 왔는지가 의문일 뿐, 종인은 말없이 잘게 떠는 경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저씨, 내가 그렇게 미워요? 참 어리고 풋풋한 질문이었다. 열 여덟살. 이 정도면 알 건 다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어린애같은 그를 탐한 게 아닐까 종인은 조바심에 휩싸였다. 재차 묻는 경수 때문에 종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고갯짓이 경수의 두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종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다른 사람들하고 많이 다른 거 알아요. 아저씨가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면…… 내가 이해할게요.”
“경수야”
“…… 네.”
“이건 좋은 게 아냐. 사람들은 누군가 좋을 때…… 이런 식으로 굴지않아. 그러니까 넌 절대 이러면 안되.”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경수가 거칠어지는 숨결을 토해내는 종인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아프긴 했지만 좋았는걸. 경수의 딱딱한 한 마디에 종인은 자책감을 느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거지. 영화 속 한 장면과 다를 바 없었다. 두 눈이 안 보이는 엄연한 신체적 약자인 경수를 강간했다. 탐했다. 이런 쳐 죽일 놈. 종인은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너무나 편안히 자신의 가슴팍에 안겨있는 경수를 앞에 두고 그런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만 할 노릇은 아니었다. 종인이 경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저씨가 미안해. 앞으로 경수한테 잘 해줄게,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알았지?”
“…… 졸려요.”
대답을 회피하는 경수였지만 어느정도 긍정의 뜻이라 생각하고 종인은 경수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애써 두 눈을 감았다. 스물 일곱살이란 나이에 얼마나 쪽팔리고 비겁한 짓을 한건지 이제서야 상황이 인지되는 기분이었다. 미쳐버리겠다. 정말이지, 평생 경수의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반쪽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달빛이 둘의 모습을 은은히 비췄다. 절대 숨을 수 없을 거라고 암시라도 하듯이.
*
종인은 착잡한 심경으로 카페 문을 열었다. 은은한 원두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언제나처럼 손님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던 찬열이 종인을 발견하고 뚜벅뚜벅 걸어온다. 갈색 머리가 예쁘긴 한데 흑발이 더 잘 어울리는듯 해 종인은 그런 찬열을 보자마자 염색 좀 하라고 질책했다. 시간이 없어서 라고 변명하는 꼴이 얄밉기만 해서 대꾸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솔솔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텁텁한 더위도 가시는 듯 했다. 커피 줄까? 찬열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종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스무디를 주문했다. 생긴 건 아메리카노 더블 샷 이라고 외칠 것 같은게 초딩마냥 툭하면 스무디냐. 궁시렁대던 찬열은 부하직원에게 주문을 끝내고 종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쩐 일로 친히 발 걸음을 옮겨주셨을까―.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래?”
“…… 아 시발, 나도 모르겠다.”
검은빛 머리를 탈탈 털며 한숨만 내쉬는 종인이 답답한지 마늘바게트와 스무디를 가져온 찬열이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종인은 어찌해야할까 입술만 달싹거리다 앞에 놓인 스무디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그를 따라 바게트를 입에 앙 문 찬열은 휴대폰 액정을 한번 바라보다 이내 종인에게 시선을 박았다. 참 이런 친구놈이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건지. 종인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번에 자원봉사 갔을 때, 너가 귀엽다고 한 애 있었잖아.”
“아…… 경수?”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경수. 듣기만해도 미안함과 자책감이 확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걔랑 뭐, 뭔 일 생겼어? 찬열이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달려들자 부담스럽다며 그를 밀쳐낸 종인이 두 어번 스무디를 더 들이킨 뒤 중얼거렸다. 일이 생겼지. 엄청난 게 하나 생겼지. 종인답지 않은 우중충함에 안되겠다 싶은 찬열이 바게트 하나를 종인을 향해 통하고 던지며 닦달했다.
“병신새끼, 너 나한테 상담하러 와 놓고 뭘 그렇게 뜸을 들여. 전기밥솥이냐? 빨리 말해라, 나도 바쁘거든.”
“내가 경수를 강간했어.”
“아하…… 뭐? 뭐라고?”
내가 경수를 강간했다고. 또박또박 입을 떼는 종인이 놀랍기만 한 건지 찬열은 한참을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오물거리던 바게트도 퉤 뱉어버리고는 찬열과 종인 사이엔 알 수 없는 적막만 맴돌았다. 알아 나 죽일 놈인 거. 그래서 너한테 말하러 왔어. 종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한참을 삐딱히 그를 노려보던 찬열이 차갑게 대꾸했다. 뭘 말하러 온 건데. 말할 낯이나 있어? 종인의 가슴이 음푹 패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경수가 당했던 그 고통보단 덜하겠지만.
“내가 경수 데리고 살려고.”
“왜? 이젠 아예 가둬놓고 꼴릴 때마다 박아버리게? 너 진짜…… 쓰레기다 김종인.”
“안 그럴거야. 잘 해줄거야…… 불안해서 어딜 못 놔두겠는데 어쩌라고.”
“네 놈이랑 있는 게 더 불안해. 여튼 네가 알아서 해라. 난 할 얘기 없다 이제.”
뒤돌아서는 찬열에게 한 마디도 더 내뱉지 못했다. 하나뿐인 진솔된 친구마저 잃어버린듯한 기분에 괜히 경수가 미워졌다. 이럼 안되지 김종인, 정신차려. 종인은 자신의 뺨을 두 어번 작게 내려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벤더 향이 훅 느껴지는 집 안에 들어서자 경수는 아직도 헐렁한 와이셔츠와 속옷 차림으로 티비를 보고있었다. 그에게 티비란 라디오 수준밖에 그치지 않을텐데, 화사한 성우의 목소리가 기분을 붕붕 띄워주는지 함박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채 한참을 꺄르르 웃어제끼고 있었다.
“경수야…….”
나즈막한 중얼거림과도 같은 종인의 목소리를 시끌벅적한 티비 소리 사이에서 어떻게 들어낸건지 경수는 귀신같이 종인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수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은 종인의 손을 꼭 붙든 경수는 어린아이마냥 조잘조잘 질문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어디 다녀왔어요? 아참, 그리구 생각해봤는데 아저씨보다는 형이란 호칭이 더 괜찮은 거 같아요… 그쵸? 하지만 아무것도 종인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경수가 아저씨? 라고 한참을 불러도 대꾸하지 않았다.
“…… 아저씨!”
답답한 경수가 쪽하고 종인의 입술에 입 맞추자 그제서야 종인의 정신이 번뜩 들어왔다. 촉촉한 느낌이 다녀간 기분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힘든 처지에 놓여있는데, 열 여덟이나 먹은 이 아이는 왜 알아주지 못 하는걸까. 모든 게 자신의 잘못임에도 괜히 경수가 원망스러웠다. 종인은 이성을 꼭 붙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경수가 더듬더듬 주변의 사물을 만지며 종인을 뒤따라오자 종인이 짜증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경수에게 외쳤다.
“도경수, 너 왜 이렇게 나 귀찮게 해? 방금 외출했다가 들어온 사람이거든? 뭘 바라고 이렇게 따라오는 거야?”
“…… 섹스, 섹스요.”
뭐라고? 기가 찼다. 싫었으면서. 어젯밤엔 강제로 자신을 덮치려드는 종인을 보며 그렇게 목놓아 울었으면서. 싫다고 몇번이나 외치고 반항하며 피했으면서. 이제와서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자마자 쫄랑거리며 섹스를 외치는 이 요망한 생명체를 어떻게 해야할까. 종인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좆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정말이지 한강에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소를 내뱉은 종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경수야”
“…… 네.”
“넌 너무 어려.”
하고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더 이상 말을 이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 같아 꾹 누른 채 후덥지근한 기운을 피해 욕실로 들어섰다. 찬물에 온 몸을 씻어내려봐도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욕실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은 경수가 중얼거렸다. 나 절대로 안 어린데……. 어젯밤 사실 너무나도 강렬한 쾌감과 만나 종인과 다시 한 번 그 사랑을 나눠보고 싶었다. 두 눈이 안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퍼붓지 않았던 사람들과 달리, 지난밤 종인은 경수의 귓가에 너무나 달콤한 이야기들을 많이 늘여놓았다. 뉴스에서 접하던 성폭행이 이런 거라면 사실 씁쓸할 것 같았지만, 자신을 버리지않고 집 안에 두는 종인을 보며 느꼈다. 아마 자신이 종인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아저씨…….”
작게 중얼거려도 들리지 않았다. 쏴아 하는 물 소리만 들려올 뿐. 경수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흐르려드는 눈물을 꼭 삼킨 채 말라가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하면 자신의 진심이 먼지 한 톨 묻지않은 채 종인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 점점 엉켜가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까만 세상 속 얼굴도 모르는 김종인이란 사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린 자신이, 너무나 갑갑하고 밉기만 했다.
“좋아해요… 아저씨 내가 많이 많이 좋아해요…….”
< 작가의 말 >
안녕하세요 갸또입니다
글잡담에 글을 써보는건 처음이라 너무 많이 설레요.. 물론 눈팅도 많겠지만
갠홈을 파는 건 못 하겠고 블로그도 엄두가 안나서 여기가 제일 편한 것 같더라구요.
물론 조회수만 높으면 서운한 감도 있겠지만 한 분이라도 댓글과 추천 주시는 분이 계시면
꼭 힘내서 완결까지 하구 싶어요.
다음 편엔 찬백 분량이 조금 많을 것 같구요, 1화는 카디 위주로 전개되었습니다.
암호닉은 부담갖지 마시고 걸어주시고, 신알신도 꼭 해주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