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화를 내지도, 울지도, 형원을 때리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히 형원과 눈을 맞댔다. 아주 오랫동안,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둔 채. 여주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가라앉는것을 느끼며 형원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됐지. 나 갈게. 꽤 매몰찬 태도였다. 형원은 그런 여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갈 길을 잃은 시선에서 상처가 느껴졌다. 여주는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에서 수백가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럴때일수록 더욱 쌀쌀맞게 굴어야했다. 형원을 떼어놓기 위해, 불행한 자신을 곁에 두지 못하게끔.
끓는 봄
::둘::
형원아. 제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 우리 이미 끝 봤잖아. 그 날 여주의 마지막 말은 형원을 길거리 한복판에 남게 만들었다. 여주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5분을 더 걸어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섰을 때에도 형원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뒤늦게 형원이 횡단보도를 건넜을 땐 이미 여주는 청아의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주가 신발장에 서서 느릿느릿 신발을 벗었다. 그 움직임에 청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형원이 만났어? 뭐래? 제 3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청아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여주는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못봤다고 능청스레 거짓말을 하고 싶었으나 새어나오는 한숨하며 약간의 멈칫거림으로 들통이 난 것 같아 여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만났어."
"...무슨 얘기 하고 왔어?"
"아무 얘기도 안했어."
"거짓말 하지 말고. 뭐, 보고싶었다, 뭐하고 지냈냐, 이 정도는 했을 거 아냐."
조급함은 끝이 없었다. 가뜩이나 피곤함을 배로 겪은 이 날에, 자꾸만 캐묻는 그 행동이 여주의 신경을 거슬리게끔 했다. 진심으로 걱정을 한다거나, 형원과 여주의 관계가 호전되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소문을 퍼뜨릴 작정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괘씸했다. 여주는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너 좋을대로 생각해- 라는 속말을 꾹 삼킨 채였다. 하지만 그 무시를 청아가 좋게 받아드릴리 없었다. 청아는 금세 정색을 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잘 나오는 태도였다.내가 여기 집주인이잖아. 채형원이 무작정 찾아와서는 너 어디있냐고 행패를 부렸는데 내가 이것도 못물어봐? 표정만큼 달라진 태도에 여주가 멈칫거렸다. 얹혀산다는 사실에 기가 죽어서도 아니고, 아까부터 느꼈던 불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행패'라는 단어 하나에 발끈한 탓이었다. 여주는 순식간에 끓어오른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될대로 되라는 심보였다. 그래서 더욱, 청아의 빤한 눈빛이 흔들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 나 사랑한대. 끔찍하게."
-
갑작스러움은 또 한번 찾아왔다. 집을 향하는 길에, 정말 우연의 일치로, 여주는 또 한번 형원을 만났다. 여주는 짧고 빠르게 숨을 들이쉰 채 눈을 깜빡였다. 이게 정말 우연인지, 혹시 청아가 모든 것을 다 알려준건지, 반대로 형원이 캐낸건지, 이도저도 아니면 정말 필연인건지 싶어 여주는 진득하게 형원의 얼굴을 훑었다. 계획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형원 또한 가득 놀란 눈이었으니. 여주는 고개를 숙였다. 청아와 하던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잰걸음으로 형원의 곁을 지났다. 어? 아, 미안. 내가 정신을 놓고 있었나봐. 응, 아직 밥 안먹었어. 내가 가서 할게. 이 말을 끝으로 여주는 전화를 끊었다. 제발 모른 척 했으면, 싶었다. 여주는 패딩을 여민 채 뛰듯이 걸어갔다. 물론 참 뭣같은 전개라는 생각도 잊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형원은 달리기가 빨랐고, 눈치는 더 빨랐다. 여주가 간과한 점이었다. 형원은 몇 발자국 뛰지도 않곤 여주의 팔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들어맞는 갑작스러운 손길이었다. 여주는 몸을 홱 돌렸다. 매섭게 손을 뿌리 침과 동시였다.
"나 어제 분명히 말했는데. 모르는 척 하자고."
"설마 나 쫓아다니는 거 아니지?"
우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왈칵 내뱉은 말에 형원이 느리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무언가 할 말이 가득한, 억울한 표정이었다.
"일단 내 집은 저기고, 윤청아 사는데랑 10분 거리. 됐지."
"그렇다고 내가 너 쫓아다니려고 하루만에 이사한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저기 살고 있는데 윤청아가 이사와서 나 아는체 한거야."
그리고 너가 먼저 쳐다봤는데. 난 가만히 있었고. 형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반박할 게 있냐는 태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주에게 반박할거리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여주는 입을 앙 다물었다. 세상의 모든 창피함을 다 끌어안은 것만 같아 열이 뻗쳐올랐다.
"밥 먹었어?"
"먹었어."
"너 방금 안먹었다며."
"전화 내용 다 들었으면서 왜 물어봐?"
"넌 내 마음 알면서 왜 되물어봐?"
"같이 밥먹자는 거잖아. 너랑 나랑."
형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마치 여주의 모든 말을 다 받아쳐내겠다는 듯, 당돌하게 굴었다. 여주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떻게 채형원을 한 번도 이겨먹지를 못하냐, 진짜. 스스로를 자책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여주는 남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대화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수 밖에는.
"나 청아랑 같이 밥먹기로 했어."
"그거야 내가 윤청아한테 전화해서 얘기하면 되는거고."
"나 가서 밥도 차려줘야되고, 청소도 해야돼."
"너 가사도우미야? 아니잖아. 근데 그걸 너가 왜 해."
"나 얹혀사는거 알잖아."
"그럼 나도 같이 가면 되겠네. 청아네 집에서 밥먹지, 뭐."
"그리고 나 사실 배 안고파. 밥먹을 생각 없어."
"그럼 애초에 밥먹었다고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와. 여주는 외마디 감탄사를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온갖 변명이 빠져나간 머릿속은 백지장이었다. 형원은 몸을 돌렸다. 뭐 먹을래. 나 배고프다, 여주야. 제멋대로 구는 모양새에 장난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여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밍기적거리며 형원을 따라갔다.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형원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
"나 진짜 밥만 먹고 갈거야."
"여주야, 나도 되게 바빠."
"뭐, 그렇다고 너한테만 시간 쏟아붓는다는 건 아니고."
그냥, 아까전부터 나 오해하는 것 같길래. 형원이 생글생글 웃었다. 여전한 능청스러움이었다. 여주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얼굴에 체념과 지친 기색이 한꺼번에 묻어났다.
30여분 동안, 둘은 묵묵히 밥만 먹었다. 말 한 마디 없었다. 꽤 불편한 침묵이었다. 결국 형원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 움직임에 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냥 그럭저럭 지냈어."
"...나 아무 말 안했는데."
"얼굴에 다 드러나, 너. 너랑 나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어?"
여주가 잠시 형원과 눈을 맞췄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깨작깨작 반찬을 집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이번엔 여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지, 말한다면 어떻게 꺼내야할지,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채형원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가늠을 해야했다.
"너한테 더 이상 의지하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래서 연락 끊었어."
아빠 사업 망하고, 서로 바람펴서 갈라지고, 동생은 철없이 굴고. 처음엔 하루종일 너 생각하고, 죽고싶을 때마다 너 목소리 들을려고 전화하고 그랬는데 뭔가 더 이상 그러면 안될 것 같았어. 내가 이렇게 사는거 보고 너가 슬퍼하면 안되니까. 나 죽어도 너는 몰라야되니까. 띄엄띄엄, 여주는 힘겹게 말을 뱉고 끊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들어찬 공간 안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여주가 조심스레 형원을 눈에 담았다. 형원은 어느새 여주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여주가 무거운 얘기를 꺼낼때마다, 분위기가 가라앉을때마다 차분히 구는 그 태도가 오랜만에 드러나는 찰나였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의지해. 그러면 되겠네. 한참 후에야 형원은 말문을 열었다. 여주를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두려는 태도였다. 그러나 여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형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완강했다.
"안돼, 형원아. 그게 안돼."
"사람 감정에 안되는게 어디있어."
"결혼했으니까."
"너가 나를 사랑하던,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하던, 내가 결혼했으니까. 안된다고."
갑작스러운 전개에 여주와 형원의 눈이 동시에 맞물렸다. 여주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그 어느때보다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형원은 믿지 않았다. 대신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밥이나 먹자- 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견디고, 피하려 들었다.
"내가 무작정 나타나고, 밥먹자 그런거 미안해."
"다시는 안그럴게. 그러니까 그런 거짓말 하지마. 나 상처받아."
"일부러 거짓말 하는거 아니야, 형원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밥이나 먹자고."
"내가 만약에 결혼 안했으면, 너 만났을 때 그렇게 했겠어?"
"내가 예의 없이 굴어서 그런거겠지."
"아니. 난 너한테 예의같은거 안따져."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
형원은 수저를 놓았다. 더이상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
하늘이 캄캄해졌을때에야, 형원과 여주는 식당을 나왔다. 저 멀리 어젯밤 여주가 화를 내며 건넜던 횡단보도가 보였다. 여주는 겉옷에 얼굴을 더 여몄다. 쌀쌀맞은 날씨이기도 했거니와, 형원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을 맞대고 있다보면 펑펑 울 것 같아서, 울음을 참을 자신이 없어서 여주는 바닥만 보며 걸었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보니 횡단보도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형원과 여주는 입김을 퍼뜨리며 파란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누군가 보면 사소한 질투로 시작해 크게 싸움을 낸 커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형원의 시선이 횡단보도 너머의 갈림길로 향했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자신은 왼쪽, 여주는 오른쪽으로 갈라서야했다. 그러나 형원은 갈라서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형원은 수많은 질문을 해야했고 그에따른 수많은 대답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결국 형원이 여주의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횡단보도는 파란불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7년 동안 나 생각한 적 없어? 정말로 단 한번도?"
"..."
"그러면 넌 나 생각하면서도 다른 남자랑 결혼했어?"
"......"
"여주야."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엄마랑 동생한테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냥 결혼했어. 갑자기."
여주가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살짝 올려뜬 눈은 이미 바다였다.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왜 남편이랑 안살고, 왜 집 나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
"..."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 만나면 결혼할려고 했는데."
"이렇게 갔으면 행복하게라도 살았어야지. 왜 나 만냐고 있냐고."
형원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리고 그만큼 끈질겼다. 여주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눈물은 한참을 흐르고 있었다. 형원은 느릿하게 두 팔을 여주에게 벌렸다. 여주에게 화를 낼 마음도, 그녀를 두고 가버릴 마음도 없었다. 대신, 형원은 조용히 여주를 품에 안았다. 그 따뜻함에 결국 여주는 눈물을 터뜨렸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형원아. 형원의 코트를 꼭 쥔 채. 그렇게 오랫동안 형원과 여주 둘만이 오롯이 횡단보도 앞의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