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여주를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고, 여동생은 여주를 악랄하게 괴롭혔으며, 부모는 여주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일부가 철저히 타인에 의해 망가졌다는 소리였다. 여주는 형원의 코트를 더욱 세게 쥐어 잡았다. 어디선가 화에 가득 찬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엄마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을 것 같았다. 안돼. 진짜 안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언뜻언뜻 품안에서 흘러나왔다. 형원은 그런 여주를 꼭 끌어안곤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혼잣말이 누구를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끓는 봄
::셋::
형원은 본래 그랬다. 무심하면서도 깜짝 놀랄만큼 다정한 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이러한 성격에, 형원은 퇴근을 하고 나면 꼭 횡단보도 앞에서 여주를 기다렸다. 일이 일찍 끝나 종종 회식을 할 때도, 큰 무리 없이 2차와 3차를 달리던 그가 술을 한두잔만 마시고 사라지는 것은 크나큰 변화였다. 바쁜 분위기 속에서도 형원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느닷없이 퍼져 곧 결혼을 한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물론 이 소문을 직접 들었을 때, 형원은 그저 웃어넘겼을 뿐이었다.
추울때는 몸을 으슬으슬 떨며 기다렸고, 비가 내릴때면 일부러 큰 우산을 쓴 채 기다렸으며, 예상치 못한 날씨로 눈이 내릴 때면 휘날리는 그것을 소복소복 맞아가며 기다렸다. 그마저도 늦은 시간치고 날이 따뜻하고 좋을 때면 여주는 이미 집을 들어간 뒤였다. 그럴때면 한 시간이나 횡단보도에서 얼쩡거리다 결국 보이지 않는 여주의 모습에 못내 아쉬워하며 등을 돌려야 했다.
이런 형원의 속도 모르고 여주는 짐짓 그를 모른체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본 채 횡단보도를 건너든, 청아가 수선을 맡긴 여러벌의 원피스와 바지, 치마, 코트 등을 한무더기로 힘겹게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든, 하다못해 날씨가 짓궂을 때도 형원은 그 자리에 서있었으므로 여주는 매몰차게 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주가 뼛속까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속을 파보면 여주가 형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깔끔하게 놓아줄 순간을. 일방적 사랑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 순간을. 그래서 반찬거리가 한가득 든 봉투를 형원이 나눠들려 할 때 매서운 표정을 짓거나, 형원이 무거운 세탁물을 뺏어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고맙단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뒤엔 꼭 방의 구석에 처박혀 울었다. 침실에서 곤히 잠들었을 청아가 소리를 못듣게끔,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참을 울었다. 여주 또한 끙끙 앓고 있다는 뜻이었다.
형원을 생각하다보면 여주는 문득 얼굴에 열이 달아올랐다. 시도때도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퇴근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다보면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원이 떠올라 울컥하는 눈물을 남몰래 참아야 했다. 누군가는 분명 그런 여주를 보며 뭐하는 짓이냐고 혀를 쯧쯧 차고 한심해 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때까지 모든 것을 참고 살아야 했던 여주에게는 흘릴 눈물이 한가득이었다.
애석하게도, 여주가 형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건 그리 먼 일이 아니었다. 이미 버스에서부터 한껏 감정이 북받쳐있던 여주에게, 형원은 대뜸 검은 봉투를 건넸다. 여주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봉투 안을 뒤적거렸다. 파스와 감기약이었다. 은연중에 그녀가 아픈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잔기침을 하는 것을 알아챈 형원의 작은 배려였다.
결국 여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혹시 몰라 파스의 종류, 붙이는 파스의 크기를 다르게 하여 골고루 사고, 감기약 마저도 이것저것 사넣어 꽤 묵직한 봉투를 품에 안은 채. 숨죽여 울었다. 가끔씩 격한 숨을 삼키는 소리가 꽤나 처량해보였다.
“왜 울고 그래. 꼭 내가 나쁜 사람 된 것 같잖아.”
여주가 봉지를 내팽개친다거나, 못된 말을 퍼붓는다 해도 꿋꿋이 견뎌낼 생각으로 있던 형원은 손등으로 여주의 얼굴을 닦아냈다. 오롯이 여주에게만큼은 능숙한 그였기에 멈칫거림은 없었다. 여주는 쉴새없이 울었다. 마치 무언가에 져서 서러움을 참지 못하는 5살 짜리 어린애처럼, 끅끅거리며 울었다. 얼굴은 금세 눈물범벅이었다. 형원은 몸을 조금 숙여 여주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우리 같이 울까. 나도 슬픈데. 여주의 표정을 훑으며 내뱉는 말투가 느릿했다. 무작정 울지말라고 다독여주는 것보다 더 다정한 말씨였다.
“마음 단단히 먹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네.”
“너가, 너가 나빠서 그래.”
“이렇게 울어도 나 착한 사람 되는거 아닌데.”
“난 너 계속 쫓아다닐거라서.”
“진짜, 못됐어.”
“너 이래놓고서 막상 나 없으면 엄청 섭섭해할걸.”
여주는 붉어진 눈을 조금 치켜떴다. 다시금 유치한 말장난이 오고갈게 뻔했다.
“채형원, 너 빨리 결혼해.”
“누구랑. 너랑?”
“장난치지말고. 난 안되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라고.”
“너 지금 억지부리는 것도 장난치는거야.”
여주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때까지 수도없이 북받쳤던 감정이 조금씩 올라와 여주를 괴롭게끔 했다. 여주는 겨우 멈췄던 울음을 보이지 않으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과 기분을 말하기에 무뚝뚝함은 있을 수 없었다. 여주는 벅차오르는 숨을 겨우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나 일도 해야되고, 밥도 먹어야되고, 잠도 자야되는데 너 때문에 그게 하나도 안돼. 맨날 너 생각나서 짜증나고, 억울해 죽겠어. 너 하루종일 울어본 적 있어? 나는 그래. 일 하다가도 우울해서 눈물나고, 지하철 타기 전에도 울컥해서 화장실에서 울고, 버스 타다가도 막, 막 그냥 울고싶어져."
여주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아무렇게 정리했다. 얼굴은 이미 붉었다.
“나 남편이랑 이혼하고싶어. 그리고 할거야. 근데, 그게 어려워. 그러니까 너가 빨리 결혼해. 억지인거 아는데, 그냥 너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너도 나 그만 기다려야되고, 나도 너 생각 못하니까. 나는 나 혼자만 힘들어할게. 그러니까 너는 너 혼자만 행복해. 너한테 그만 미안해하고 싶어, 형원아.”
형원은 고개를 돌렸다. 적막과 동시에, 코끝이 빨개졌다. 여주는 다시 울고 있었다. 이때동안 속을 썩였던 감정을 털어놓은 덕에 울음소리 또한 아까보다 훨씬 더 격해져있었다.
형원은 한참을 있다가 여주와 눈을 맞췄다. 여주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한쪽 손에는 비닐봉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형원은 슬픈 감정을 꾹 참으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쪽 손을 꼭 쥐었다.
“그래. 나 진짜 못됐다. 내가 생각해도 못돼먹었어. 미안해. 미안해, 여주야.”
“근데 여주야. 더 미안해하는 대신에 너한테 더 매달리면 안돼? 나도 너 생각 하루종일 하고, 너 기다리면서 매일매일 슬퍼할게. 너보다 더 힘들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너랑 같이 힘들어할 테니까, 너도 나중에 나랑 같이 행복해하면 안돼?"
그 날 밤, 형원의 손에는 800원짜리 레쓰비가 쥐어졌다. 형원에게 미안함을 대신해 여주가 언젠가는 주려던, 가방 속에 넣어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캔커피였다. 형원은 캔커피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레쓰비와 함께 준, 형원아-로 시작되는 편지를 찬찬히 읽었다. 중간중간 미안해, 라는 단어가 박혀있었다. 이때까지의 쌀쌀맞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정(情)이 가득한 글씨와 뜻이었다. 형원은 여주의 편지를 여러 번 읽어본 뒤에야 살짝 웃으며 편지를 집어넣었다. 명확한 답이 써져있는 것도, 그로 인해 갑작스런 해피엔딩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이 밤과 편지로 인해 어느정도 마음이 홀가분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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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깊은 속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런 여주를 위로해줄 사람은 형원 말곤 존재하지 않았다. 이 문장은 자연스레 여주가 형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리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작스레 남편이 아파트의 건물을 들어가는 유리문앞에 서있었을 땐 여주는 순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짐을 챙겼다. 청아는 여주에게 남편이 있는 것도 알지 못할뿐더러, 망가진 모습으로 나가기는 싫었으므로 그저 죽고싶은 마음으로 옷가지를 가방에 집어넣어야 했다.
남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여림의 짓이었다. 담임이 여주의 친구라는 걸 안 뒤로, 여림이 온갖 변명을 얹어 그녀에게 여주가 살고 있는 주소를 알아내고, 몰래 몇 번 찾아와 여주와 형원이 같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 뒤 ‘바람을 핀다’는 말로 남편을 건드린 것이었다.
여주는 집을 나서기 전, 청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뜻밖의 상황에 대한 놀라움과 미안함을 복합적으로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여주는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여 하얀 봉투를 청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제서야 청아가 여주와 눈을 맞췄다.
“미안. 너 집에 얹혀사는 것도 민폐였는데 끝까지 민폐만 부리면서 나가네.”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
“너가 아니라고 하면 다행이고.”
“돈 안줘도 돼. 너가 집안일 다 해줬잖아.”
“그래도. 그냥 가면 예의가 아니니까. 거절도 자꾸하면 상대방이 민망한거 알지?”
청아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하고 봉투를 받아들었다. 머릿속에선 대뜸 걸려왔던 여주의 전화가 생각이 났다. 월세가 올라서 방을 뺐는데 도저히 남은 돈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가족들한테는 더 이상 손을 벌릴수가 없고,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충분히 염치없는 거 알지만 그나마 이렇게 연락 받아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간절한 말까지. 물론 이 중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집 어디다 구했어? 청아의 물음에 여주는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곧, 청아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대뜸 튀어나온 말에 청아는 아무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는 손에 쥔 무거운 가방을 고쳐들었다. 청아한테 뱉어야 할 말이 뒤죽박죽 엉켰음에도, 여주는 말문을 열었다. 그만큼 여주는 다급했다.
“나 가고나면 형원이한테 내 번호 좀 알려줘.”
“그리고 내가 먼저 연락할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해줘. 무슨 일 있어도 내 번호로 전화든 문자든 하지말라고. 이 약속 안지키면 다시는 안만난다고, 못만난다고 말해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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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썼다. 오래도록.
청아의 집을 나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때도, 차 안에서도,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 남편을 이리저리 밀치고, 때리고, 잡힌 손목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완벽히 이기지 못할걸 알면서도 지고싶지는 않은 마음이었다. 남편은 그런 여주를 묵묵히 끌고갔다. 그러나 그 묵묵함도 잠시,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이 번지고, 그릇과 화분이 연이어 깨졌다. 결국 여주는 악에 받쳐 울었다. 오래도록.
여주의 뒷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애처로웠다. 외투 하나 없이 얇은 옷차림만 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문을 두드렸다. 불빛도 없는 복도식 아파트였기에 찬바람을 그대로 맞아야했다. 여주는 덜덜 떨면서도 문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외투와 핸드폰, 지갑은 남편에게 뺏긴지 오래였고, 비밀번호는 이미 남편이 바꾸어놓은 상태였으며, 늦은 밤이었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이 빨갛게 되도록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는.
저 끝에서 전등 하나가 약하게 켜졌다. 여주가 한 시간째 매달리던 중이었다. 눈물이 가득한 여주의 눈과 남자의 눈이 맞물렸다. 남자는 조금 놀란 것 같기도, 아니면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여주는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먹먹함과 민망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사이, 멈칫했던 남자는 405호에서 조금 떨어진 402호에 들어갔다. 그리곤 곧장 두꺼운 외투를 팔에 걸친 채, 다시금 집을 나와 여주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에 여주는 자연스레 몸을 움츠렸다. 남자는 그런 여주를 살피곤 조심스레 여주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의 주머니에 있던 뜨거운 핫팩 또한 여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엄청 추웠을텐데. 걱정스레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곧이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라는 물음 또한 들려왔다. 그러나 여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이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갑작스러운 관심이 불안했다. 물론 남자는 이런 여주의 속도 모르고 그녀의 얼굴을 보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여주가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입꼬리를 늘어뜨린 채, 매달리는 수밖에는.
“나 한번만 봐주면 안되나.”
“혹시나 맞았을까봐 걱정돼서 그러는건데.”
“딱 한번만, 한번만 나 봐주면 안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