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resh
분명 찬란한 달빛이야 존재했다. 조금의 틈마저 허용하지 않는 암흑이 반기는 건 오직 어둠일 뿐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까만 밤하늘 아래는 눈부신 도시와 도로가 존재했다. 다채롭지만 동일한 밝기로 빛나는 네온사인과 개성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정신없이 흘러가는 모든 것이 역동적이었다.
꽤 값이 나가는 벤츠 뚜껑을 열고 환호성을 지르는 그들의 뒤로 몇 대의 경찰차가 뒤따라 추격했다. 온 사방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상가로 몸을 피했다. 심각한 상황인지 몇 대 더 동원된 경찰차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유발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리 많은 경찰이-
쫓기는데 뭐 저리 행복한 표정을-
딱 봐도 다들 나사 하나씩은 빠진 모양새가-
여전히 환호성을 지르는 그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각자 짐작한 바를 수군거렸다.
*
옷 같지도 않은 천 쪼가리를 걸친 여자들이 심기에 거슬린 태형이 양손을 휘적였다. 동시에 속옷만이 남겨진 모양새였지만 여자들은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눈치였다. 눈을 게슴츠레 뜨며 크게 웃는 태형에게 여자가 잡혔다.
"오늘은 나야?"
새빨간 립스틱이 번진 채로 그에게 무릎을 꿇은 여자가 웃음을 흘렸다. 광기를 담은 얼굴이었지만 살면서 본 가장 매혹적인 마스크였다. 여자의 붉게 달아오른 뺨은 완전한 복종을 선포했다. 태형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고 당기자 군말 없이 끌려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앉아있던 다른 여자들도 각자 자리를 잡았다.
쾌락에 담겨 흘러나오는 소리에 만족한 여자들이 미소를 짓는 순간 그녀들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속옷에 물든 피는 방울방울 떨어져 차디찬 바닥을 서서히 적셨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을 치운 태형이 잘게 숨을 내뱉었다.
입술에 묻은 진한 자국을 문질렀다. 깨진 창문 밖에서 총을 쏜 남자가 방 안으로 손을 디밀자 태형은 옆에 있던 유리잔을 던졌다. 손에 파편이 박히기가 무섭게 굵은 철창으로 창문을 봉쇄했다. 빠르게 제 옷을 챙겨 입은 태형이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에 담긴 자신의 외양을 살폈다.
"씨발 립스틱을 무슨"
입가에 옅게 번진 립스틱 자국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흩어진 머리칼과 여전히 찢어진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만족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급박한 순간에도 잠시 거울을 응시한 태형이 한쪽 눈썹을 찡긋 올렸다. 유려하게 이어지는 행동은 미동 없이 작은 서랍 안의 열쇠를 꺼내는 것이었다. 태형은 가벼운 웃음을 머금으며 방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보이는 서늘한 공간에 풀썩 몸을 내렸다.
한기가 돌아 부르르 몸이 떨렸다. 차가운 공기와 기름냄새가 섞여있었다. 태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좁은 골목까지 가볍게 뛰어와 뒤를 돌아보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어 보였다. 가소로운 표정으로 낄낄 웃던 태형의 앞으로 바람을 가른 총알이 지나갔다. 씨발, 태형은 작게 욕을 읊조리고 힘껏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길게 숨을 몰아쉬며 꽤 오래 뛰었지만 끈질기게 쫓아온 패거리 몇몇이 남아있었다. 뒤를 돌아 그들은 바라본 태형이 옆에 있는 담을 훌쩍 넘어 내렸다. 병신들, 쫓아오지도 못하는 거 가오만 살아가지곤! 즐겁게 소리친 것이 무색하게 초록색 우유통을 깔고 담을 넘어온 패거리가 밝게 빛나는 칼을 내놓았다.
"날씨는 또 존나 밝지"
오늘은 이상하게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이글이글 타는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햇빛이 칼을 비추었다. 반짝이는 모양새가 아까 죽은 여자의 목걸이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패거리들은 한걸음 한걸음 태형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가쁜 숨을 내뱉던 태형의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막혀있는 길이였다.
**
빨간 줄과 파란 줄로 감싸진 원통형의 이발소 싸인볼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았다. 끼익, 끼이익, 낡다 못해 부서질 듯한 모양새로 힘겹게 돌고 있는 싸인볼은 이곳이 이발소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깨진 플라스틱 문에 덕지덕지 붙은 박스 테이프가 초라한 행색을 더했다. 그 문은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밀어야만 했다.
큰 덩치를 가진 중년 남자와 그의 턱수염을 면도하는 세이가 있는 내부는 바깥보다는 깔끔했다. 크고 조금 딱딱한 의자에 앉아 거울을 응시하던 중년의 남성이 느릿하게 혀를 굴렸다. 그에 쩍쩍 입안이 말라가 꼴깍 침을 삼켰다. 조용한 이 공간은 그 소리마저 울려 퍼졌다.
"면도 해드릴게요"
해가 졌다기엔 이르고 낮이라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금세 저물 듯 옅게 들어오는 노을빛에 나른한 온도가 감돌았다. 미지근한 공기 속 천천히 떠도는 먼지가 눈이 보이게 햇살을 가득 삼켰다.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세이의 다리 주변을 맴돌았다. 빛이 그쪽으로 들어온 탓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세이는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가벼운 차림새였다. 위에 로브를 걸치긴 했지만 입었다기도 애매할 만큼 얇았다. 세이는 진한 화장을 한 얼굴로 말없이 남자의 턱을 들었다. 면도를 해주는 세이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남자는 거울을 보다가도 그런 손길에 자꾸만 시선이 닿았다. 살짝 닿는 세이의 손길에도 몸이 후끈해져 갔다.
진공 상태의 공기처럼 느릿느릿하던 흐름이 갑작스레 크게 요동쳤다. 남성의 투박한 손이 세이의 허벅지를 향했다. 면도를 하던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성은 푸르죽죽한 입꼬리를 올렸다. 닿은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세이의 손이 크게 떨렸다. 하지 마세요, 그러나 기어들어가 듯 작은 목소리였다. 한층 깊어진 욕정을 가진 눈빛이 뱀처럼 세이를 휘감았다.
***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으스스 한 방 안에 찢어진 비닐봉지 수십 개가 나뒹굴었다. 켁, 켁, 거친 기침을 하다 숨을 몰아쉬는 윤기의 얼굴에는 새까만 절망이 어려있었다. 나약한 제 자신에 대한 아픔은 어느새 증오로 변했다. 이젠 죽지도 못하는 신세가 한심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고 다시 한번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다. 머리에 뒤집어 씌우자 어두웠던 방 안이 새까맣게 변했다. 더듬더듬 감각에만 의지해 봉지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자유였다.
비닐봉지 안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자 그의 눈에 힘이 풀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절정에 이르러 몸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몸이 웅크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 날갯짓을 하듯 파르르 떨리는 모양새가 마치 죽기 바로 직전의 벌레 같았다. 얇은 다리를 부르르 떠는 그 벌레가 겹쳐 보였다. 그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점점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었다.
"흐억, 으.."
꽤 요란하게 눈을 뜨자 목에 닿는 비닐봉지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한참을 멍하니 누워 얕은 숨을 내뱉고 든 생각은 결국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은 일어나기 힘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거울을 응시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막은 비닐봉지를 뜯은 것인지 너덜너덜한 상태로 목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생기를 잃은 듯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였지만 답지 않게 혈색이 도는 것이 꼴 보기가 싫었다.
**
우욱 , 흐으,
고요한 분위기를 깨는 세이의 신음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세이의 손에서 묽은 혈흔이 뚝뚝 떨어졌다. 면도 칼은 오른 편이 잘린 채 삐죽 튀어나와 날카로운 모양이었다. 남성의 목을 찌른 나머지 반쪽 면도 칼은 급소에 꽂혀 숨을 막은지 오래였다.
허옇게 눈이 뒤집힌 남성을 경멸스럽게 쳐다본 세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대충 슬리퍼를 구겨신은 발로 힘겹게 나오자 쏟아지는 빛이 시야를 가렸다.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걷는 모습도 충분히 이상했지만, 로브에 혈흔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더했다. 세이는 멍한 표정으로 정처 없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걸음의 끝이 어디일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새 큰 도로에 당도한 세이는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는 차를 인지하지 못했다. 몇몇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 소리를 내며 세이를 피해 갔다. 미처 방향을 틀지 못한 차가 아슬아슬하게 세이의 앞에서 멈췄다. 그제서야 찻길이라는 것은 인지한 세이가 초점 없는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 그 안을 응시하는 세이의 눈에 태형이 담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 동안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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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FRESH는 상 중 하로 나뉩니다. 중,하편은 상편과 달리 불마크가 달릴 예정이니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