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花, 僞贋
월화위안: 달꽃아, 거짓은 옳지 않구나.
장위안X로빈
* 조선의 정치 제도를 참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픽션이므로 재미로 감상해주세요 :)
1
궁 안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수군거리는 궁녀들의 소리, 무언가 일이 터진 모양이다.
"전하께서 또..."
"이번엔 무슨 이유래?"
"경연시간에 책을 제대로 가져다 놓지 않았다더라."
"세상에, 어쩌면 그런 일로 사람 목숨을..."
"얘, 입 조심해. 너도 위험할지 몰라."
사람이 죽었다. 단지 경연시간에 있어야 할 책이 없었다는 이유로.
궁녀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일쑤였고 대신들은 자신의 당파 사람이 죽지 않아 다행이라며 웃거나
자신의 사람이 죽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궁궐을 나섰다.
영의정 김문식이 헛기침을 뱉으며 수다를 떠는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뭣들 하시는 겐가, 다들 자기 일 하지 않고."
"대감, 노여워 마십시오. 전하께오서 다시 일을 그르치지 않으셔서 다행 아닙니까."
"다행이긴 하지요. 허나, 이 일로 죽은 사람이 우리 쪽 사람이라지요?"
"예. 안타까운 일이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분명 대제학의 꼼수였을 터, 이를 어떻게 할까요. 좋은 수가 있겠습니까 도승지 영감"
"듣기로 대제학의 양자가 이번 문과에서 급제를 했다지요."
"법국(法國 ; 프랑스를 이르는 한자말)에서 북적에게 납치되었다던 그 양자 말이오?"
"예. 곧 궁에 입궐한다고 들었사온데, 그 자를 이용하심이 어떠합니까?"
"...좋습니다. 내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오늘은 이만 퇴궐하도록 하십시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강녕전 내부에서 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인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영의정 김문식의 딸이자 중전인 김씨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강녕전으로 달려왔다.
도착한 강녕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상궁 하나가 엎드려 절한 채 오열하며 통촉하여달라는 말만을 내뱉고 있었고
나인들은 제 윗사람이 절을 하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조아리고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전하! 이게 무슨..!"
"..중전이...예까진 웬일이십니까? 혹, 과인을 꾸짖으려 오신겝니까?"
"일어나게 한상궁.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내 잘못이네."
"과인을 넘어서려 드십니까? 제게 용서를 구하는 한상궁을, 과인이, 어찌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차가운 눈빛으로 중전을 쏘아본 위안이 자기보다 20살은 더 많은 상궁에게 다가갔다.
상궁에게 고개를 들라 명한 위안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해사하게 웃었다. 소름이 끼치는 미소였다.
한상궁은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세요. 그대가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온전히 미쳐버린 과인의 탓이지요."
"저, 전하...."
"일어나시라, 명했습니다."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겨우 두 다리로 일어선 상궁을 보고 웃은 위안이 중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뜻대로 되셨습니까? 허면, 이제 돌아가시겠습니까?"
"어찌 그리 사람을 비뚤게 보십니까! 제가 경연의 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대의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꾸짖지 않겠습니까."
한숨을 내쉰 중전이 나인들과 상궁에게 물러가라 일렀다. 이내 적막해진 강녕전, 위안의 금침 앞에 중전이 다소곳이 앉았다.
"전하께오서는 저를, 부인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영의정 김문식의 여식으로 보십니까?"
"중전은 내 부인이시지요."
"허면 어찌 제게 연정을 품지 아니하시는 겝니까."
"중전,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서서 말하던 위안이 중전 앞의 금침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중전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낮게 이야기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그 날 부터, 중전은 내 적이라고. 연정을 갈구하지 마십시오. 계집질이라면, 알아서 하겠습니다."
"전하!"
"계속 계신다면. 제 앞에서 계집질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될겁니다. 물러가세요."
".....!"
중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맺혔다. 위안을 향해 애처롭게 웃어보인 그녀가 목례를 하고 뒤돌아섰다.
"물러가겠습니다. 노여워 마세요."
중전이 저만치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위안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어쩌자고 경연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제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벌만 주려 했건만 기어이 심기를 건드리는 김문식의 말에 화가 나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렸다.
산책, 산책이 필요했다. 머리를 비워야했다. 위안은 내관과 나인 몇 명 만을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경회루로 향하는 도중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관리 몇 명이 퇴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달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위안의 눈에 들어왔다. 이국적인 생김새에 잠시 놀랐으나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명경과 장원급제자, 로빈. 어린시절 법국(法國)에서 상인행렬을 보다 납치되어 명나라에 팔려갔다가 대제학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달을 바라보는 것이 꼭 달꽃같이 희고 곱다. 위안은 내관과 나인들을 모두 물리고 로빈에게 다가섰다.
"달이, 참 밝구나."
로빈은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입궐한 이후 한 번도 뵙지 못했던 용안이 눈 앞에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경연 사건 이후 나라님은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이렇게 막상 마주치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방향으로 발의 방향을 튼 제 머리를 탓하고 있었다.
"법국에서 왔다지?"
"예. 어린시절 길을 잃고 납치되어 왔습니다."
"그래, 이름이. ㄹ, 로븐, 이던가?"
"로빈입니다."
"발음이 어렵구나, 얘기를 더 나누고 싶은데. 조선식 이름은 없느냐?"
"송구하오나, 아버님께서 굳이 짓지 않아도 된다 하셔 아직 없사옵니다."
"달꽃을 닮았다."
"...예?"
"너 말이다."
"......."
"월화(月花), 월화가 어떻겠느냐?"
"전하께오서 그리 하라시는데, 소인이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래, 월화야."
"예, 전하."
위안은 말 없이 로빈을 바라보았다. 희고 곱다. 동양의 것과는 다른 깊은 눈매와 높은 코, 전체적으로 수려한 외모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으리라.
위안은 생각했다. 자신의 시선을 불편히 여기는 듯한 로빈을 보고 위안은 오랜만에 진실된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는 조정에서 보자꾸나."
"예, 침전까지 무탈히 가십시오."
"그래."
***
위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이겨내고 침전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그 사람들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원을 불러 진맥을 시키고 몸 상태가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나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강을 끝내고 아침식사를 마친 위안이 신료들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도착한 곳에는 어김없이 당파대로 나뉘어 양쪽이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위안이 등장하자 다들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인사가 위안에게는 독이었다. 위안의 형을 죽인 자들이다. 감언이설로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고, 형의 목숨줄을 흔들었다.
그런데 당파로 갈라선 신료들 그 사이에, 로빈은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채 홀로 서 있었다. 흥미롭다. 위안은 생각했다.
"어제 일은, 내가 미안했소. 경들께 미안하다는 의미로 오늘 경연은 조금 느슨히 진행할까 하는데, 어떻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영의정 대감, 표정이 굳으셨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렇게 보이셨습니까?"
"아니라면, 괜한 말을 했군요."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 매번 신경전을 벌였다. 질릴만도 한데,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계속되는 걸 보면 제가 왕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곤 했다.
조정에 새로운 얼굴이 많이 보였다. 지난 번 과거에서 급제한 자들이다. 명경과 장원 로빈, 제술과 장원 김현보, 무과 장원 하덕진. 단연 돋보이는 건, 로빈이었다.
"조정에 새 얼굴이 많습니다. 어제 과인이 정신이 없었던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하였는데, 과연 인재들 답습니다. 헌데, 자네는 왜 홀로 서 있는겐가?"
위안이 로빈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안의 눈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대답하지 않으면 꼭 제 목을 죄여올 것만 같았다.
로빈은 이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납득할까, 하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줄은 끊어지기 마련이고 심(心)은 엇갈리기 마련입니다. 해서 홀로 있사옵니다."
"줄은 끊어지기 마련이라. 이해가 가는군."
대신들은 로빈의 말에 발끈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저 어린 녀석이 무엇을 안다고 저런 말을, 그것도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과연 대제학의 양자다운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로빈은 대제학의 당파도, 영의정의 당파도 아니었다.
로빈은 실로 혼자였다. 썩은 조정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께서 하신 단 하나의 부탁은, 당파에 들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당신 자신도 당파에서 수장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영 내키지 않는 것이다.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자, 이제 시작하십시다."
"전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과 돌림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의료시설이 부진하여 치료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의료시설이 부진하다니, 왜 그렇게 된 것이오?"
"황해도 감사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사옵니다. 지역시설의 돈을 횡령하는 듯 하옵니다."
"전하, 그는 단지 소문일 뿐 사실무근한 것이옵니다."
"그대의 사람인가봅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참 우습습니다. 그렇지요?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며 내게 상소를 올린 게 엊그제 같은데, 제 사람을 감싸고 있으니 말입니다."
위안의 기색이 편치 않아 보였기에 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싸한 공기가 적막을 만들었다. 그때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허나 전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확인해보면 되는 것이고, 부패를 저지른 관리가 맞다면 엄벌에 처하면 될 것이며, 전하께오서 그리 대감을 꾸짖지 않아도 드러날 일은 드러난다 생각하옵니다."
로빈이 막힘없이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두 당파 모두에게 미움을 살 발언이었다. 그러나 로빈은 개의치 않았다.
위안은 로빈의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었다. 대신들은 드디어 왕이 미쳐 갓 입궐한 관료를 죽이겠구나, 생각했다.
"더 해보거라."
"황해도 지역의 가뭄의 근본적 원인은 지금이 아직 장마 때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사흘 후면 비가 시작될 것입니다. 해서, 백성을 돌보심이 우선이옵고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는 것은 다음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벌한다면 민심은 흉흉해질 것이고 가뭄과 돌림병으로 피폐해진 민심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경들이 이 자의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많기를 바라오. 어찌 그 누구도 백성을 돌보라는 말은 꺼내지를 않고 그저 관리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게 썩은 조정의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오!"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대의 호가 무엇인가."
위안이 로빈에게 눈을 맞추며 은근한 눈치를 주었다.
"월화(月花), 월화입니다."
로빈이 대답했다. 위안은 해사하게 웃었다.
"황해도 감사와 연관이 있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싶지만 어제 일이 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허나, 그를 감쌌던 그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위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관료는 의금부로 끌려갔다. 이로써 2명의 외척세력이 죽었다. 누가 봐도 위안의 수가 틀림없었으나 영의정 김문식은 그를 눈치채지 못 했다.
대제학을 향해 속으로 비난의 말을 퍼부으며 그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두고 보아라, 장위안. 네 녀석의 숨통을 죄여갈테니.
-----------------
와! 안녕하세여 :) 위로는 처음이라 헿..하ㅏㅎ..괜찮나요?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겠습니다! 사랑해요!
다음편은 시험 끝나고 오거나 시간 될 때 올게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