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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 less+ 1/2

:: 다니엘이랑은 어떻게 지내?::

1.

최연준의 연락을 알리는 알림음이 핸드폰에 떴다. 나 대신 핸드폰을 확인하던 샐리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나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메시지 내용이 한국어로 쓰여있을 텐데 뭘 어떻게 본 건가 싶어 확인해보니 맨 마지막에 붙어있는 하트가 문제였나 보다. 샐리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치킨을 뒤적거렸다. '빨리 대니랑 알렉스가 와서 니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아야 할 텐데.' 샐리는 얼굴을 있는 힘껏 구겼다. '너는 좋니?' 샐리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 같았다. 나는 튀김옷만 깨작거리다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만나보고 결정하려고.' 샐리는 들고 있던 치킨을 던졌다. '퍼킹, 니가 다니엘이야?' 나는 샐리가 던진 치킨을 받아 다시 샐리한테 던졌다. '왜, 포지션 좀 바꿔보겠다는데.' 샐리는 다시 돌려받은 치킨을 뜯었다. '우리 스윗 리틀 키티, 펴엉생 행복하렴.' 샐리는 정말 진심으로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샐리는 맥주잔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샐리의 사인을 제대로 알아먹은 웨이터가 바글거리는 사람을 뚫고 생맥을 테이블에 올렸다. 샐리는 생맥을 들고 건배사를 외쳤다. '스칼렛 초이를 위하여!'-미국은 결혼하면 부인이 남편의 성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이용해 친 개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온 대니와 알렉스가 멋도 모르고 샐리의 건배사를 따라 했다. '스칼렛 초이를 위하여!' 어이가 없어서 웃겼다. 내가 미친 듯이 웃고 있고, 이런 날 한심하게 바라보는 샐리에 대니와 알렉스는 그제서야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는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선 소리 질렀다. '왓??? 스칼렛 초이???' 나는 닥치라는 뜻에서 카디건을 대니 얼굴에 던졌다. 알렉스는 턱이 빠진 대니 대신 카디건을 낚아채서 다시 나한테 던졌다. 아! 미친놈이!! -알렉스는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배구 선수였다.- '헤이 스칼렛, 너 결혼해...?' 샐리가 대니 얼굴을 손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알렉스와 무언의 신호로 맥주잔을 부딪혔다. 대니는 주인이 내다 버린 테디 베어 같은 표정을 하고 날 바라봤다. '브로, 너 울어?' 내 말에 대니는 뭔갈 말하곤 테이블 밑으로 내 다리를 찼다. 대니 옆에 있는 샐리만 정확하게 들은 건지 샐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스칼렛은 비치다! -bitch : 쌍년- 샐리가 혼자서 신나게 만세 삼창을 하고 있을 동안 내 옆에 앉은 알렉스는 대니의 발길질에 같이 맞게 된 건지 나초를 한 움큼 잡아 대니한테 뿌렸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났다. 대니는 훌쩍거렸다. '스칼렛... 이 배신자...' 샐리는 대니에게 맥주잔을 건넸다. 대니는 맥주를 원샷으로 쭉 들이켰다. '우리가 그렇게 욕을 했는데!'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다. 대니는 오늘 나와 헤어질 때까지 말을 한마디도 섞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였지만 한 마리의 부엉이가 되어 말을 전해주다 빡친 샐리에게 한 방 맞고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대니는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걷어찼으면서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진 건 대니라 알렉스를 한숨을 쉬었다. 대니 목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백 퍼센트 알렉스의 힘으로 일어난 대니는 펍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향해 돌진하더니 창문에 딱 붙어서 소리쳤다. 알렉스는 다시 대니 옷을 잡고 질질 끌었다. 나는 알렉스와 샐리를 향해 무언의 끄덕임을 인사로 대신하고 대니의 침으로 범벅이 된 차 조수석을 열었다. 최연준은 어이가 없지만 당황도 했고 근데 또 웃기기도 한 복잡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안전벨트 버클을 채우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운전을 하다 최연준은 그 상황을 다시 곱씹기라도 하는 건지 핸들을 잡고 피식피식 웃었다.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대니가 열심히 영역 표시를 하고 간 창문에 기댔다. '왜 웃어?' 최연준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냥, 내가 진짜 잘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내 필름은 거기서 블랙아웃됐다.

눈을 뜨고 고개만 살짝살짝 움직였다. 술기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서 대충 더듬거리니 핸드폰이 잡혔다. 바탕화면으로 체인점에서 줄을 서고 있는 내 뒷모습이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빛을 쏘아댔다. 최연준 핸드폰이었다. 아까 애들하고 헤어진 게 10시쯤이었으니까, 고작 1시간 반 정도 지나있었다. 술을 꽤 마신 터라 잠깐의 쪽잠은 술을 깨기엔 무리가 있는 듯싶었다.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불을 만져보니 우리 집이 맞았다. 옷도 갈아입힌 건지 얼마 전에 최연준이 사온 아보카도 잠옷의 아보카도 패턴이 보였다. 최연준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옆에 누워있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보였다. 아 뭐야, 왜 등 돌리고 자?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미친, 왜 서러워하는데. 이성적 자아와 술에 찌든 본능이 내 몸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몸은 이미 술에 찌든 본능이 지배한 모양인지 눈물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머리로는 나를 향해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미친놈아 이게 울 일이냐고! 최연준이 깜짝 놀라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최연준은 눈이 번쩍 뜨였는지 다급하게 안아왔다. 나는 엉엉 울면서 할 말을 또 다했다. 내가 우는 사유를 울음소리와 함께 들은 최연준은 해독을 마쳤는지 웃어댔다. 누워서 대성통곡을 하니 코가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숨을 못 쉬겠다고 또 울었다. 신발... 조카 신발... 최연준은 나를 앉히고 불을 켰다. 그리고 나는 우느라 안 그래도 눈이 아픈데 부시기까지 해서 눈이 너무 아프다고 최연준한테 자발적으로 폭삭 안겼다. 조카... 조카 시팔색 크레파스... 최연준은 웃으면서 나를 안았다. 말투가 무슨, 유치원 선생님 같았다. 내가 우는 사유를 알고 있는 최연준은 그냥 내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등 뒤에 닿는 최연준의 손에 3차로 빵 터졌다. '왜 니 옷 맘대로 갈아입혀...? 이 변태야!' 최연준이 이 말에 진심을 당황했다. 최연준의 말을 들어보니까 덥다고 내 손으로 직접 옷을 벗은 모양인데 나는 아니라고 잡아땠다. 최연준은 그냥 본인 벗겼다고 나가 죽어야겠다며 죄인을 자처했다. 그리고 나는... 또 죽지 말라고 울었다. 정말이지, 답이 없었다. 최연준은 나를 안고 웃으면서 토닥토닥 달랬다. 그렇게 엉엉 울어재끼며 탈진한 나는 최연준이 대령한 물을 마시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다음날 떠오르는 아침해와 눈물 범벅이 됐을 티셔츠를 입고 자는 최연준을 내려다보면서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최연준을 피해 다녔다. 결국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잡혔는데 샐리와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대니는 차에서 부린 술 주정의 여파로 심히 쪽팔려 당분간 내 열굴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비보를 전했다.- 나도 다급하게 따라가려는 걸 최연준이 손목을 잡고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쟤네랑 같이 앉으면 내 등밖에 안 보이는데.' 나는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최연준은 탄산수같이 웃었다. 기포는 끊임없이 올라왔다. 나는 정말이지 온몸이 불타는 줄 알았다. 최연준은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그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밖으로 달렸다. 뒤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쪽팔려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튀었는데 다시 붙잡혔다. 최연준이 운동을 잘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젠장. 최연준은 나를 돌려세우고 내가 카페테리아에 내팽개치고 간 크로스백을 어깨에 둘러줬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던 볼캡의 챙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입술을 소리 나게 부딪히고 달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발끝이 간질간질했다. 얼굴이 달아올라 두 손을 들어 가렸다.

2.

최연준이 설정해 놓은 건지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폐인처럼 소파에 찌그러져 추리 소설을 보다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최연준은 알람 소리에 깨지도 않더니 내가 책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놀라 내 무릎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연준은 내 책을 주워주고 방으로 들어가 알람을 끄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요란하게 세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지금 나갈 시간이야.' 또 발음에 'ㅇ'이 붙기 시작했다. 웅냥냥 말하는 게 고양이도 아니고. 싫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제 범인이 밝혀지는 클라이맥스라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최연준이 앞에 서있자 빛이 다 가려졌다. 범인이 누군지만 알고 싶은데. 최연준이 얼굴에 맺혀있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쓸었다. 조금만 보면 될 텐데, 금방 누군지 나오는데. 다리는 일어날 준비를 했지만 엉덩이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책 조금 더 볼래?'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이 옆에 앉자 소파가 푹 꺼졌다. '언제까지 볼래?' 손가락으로 책 몇 장을 넘겼다. '범인 누군지 나올 때만, 금방이야.' 최연준은 다시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알겠어. 나 깨워.' 눈이 다시 감겼다. 마음속으로만 부린 어리광이었는데, 받아줬다. 그래서 평소보다 빠르게 글자를 읽었다. 알파벳이 눈을 스쳐 지나갔다. 아, 제레미 콘돌. 맨 처음에 범인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중간에 노선을 바꿔서 결국엔 맞추지 못했다. 진짜 아쉬웠다. 범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책갈피를 끼워두고 책을 덮었다. 최연준의 가슴팍을 흔들었다. 최연준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푸르고 일어났다. 최연준은 신발을 신고, 나는 가방을 들었다. 거실 불을 끄고 신발을 신으려 앉았다. 중간중간 센서 불이 꺼졌는데 최연준이 그 긴 팔을 머리 위로 흔들어 금방 불을 켰다. 신발 끈이 풀려있었다. 어제 귀찮다고 묶지 않고 그대로 집에 온 탓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내 정수리를 보고 있던 건지 최연준과 눈이 딱 맞았다. 눈을 꾹 감았다. '나 신발 끈 묶어주라.' 최연준은 청바지를 조금 걷어올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주에게 청혼하는 왕자들이 항상 저렇게 앉았던 것 같은데. 최연준이 신발 끈을 묶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되게 신기하게 묶는다...' 속삭이듯 말한 걸 들은 최연준은 피식 웃었다. '신발 끈 원래 잘 묶으면서 웬일이야. 요즘 이것저것 해달라는 게 늘었어.' 최연준이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최연준의 말이 사실이라 눈을 피했다. 완전 정곡을 찔렸다. 역시 눈치는 제일 빨랐다. 눈도 못 마주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싫어?' 최연준은 차 키를 꺼냈다. 차가 신호음을 보내면서 헤드라이트를 깜박였다. '난 좋은데. 믿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의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최연준이 먼저 차에 탔다. 차를 빼내고 내 앞에 멈췄다. 조수석 문을 열고 최연준의 옆에 탔다. 이미 최연준이 한 말 때문에 얼굴이 홧홧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벨트 하자.' 하자고 하면서 본인이 채웠다. 차가 이제 곧 질 것 같은 해를 등지고 달렸다. 점심은 아닌데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내비게이션도 없어 목적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 최연준은 그냥 은은한 미소만 얼굴에 띄웠다. '선물하러.'

설마 했다. 도착한 곳이 백화점이길래 누구한테 선물하길래 여기까지 오나 싶었고,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지나치고 가길래 옷 선물은 아니구나 싶었고, 주얼리샵으로 들어가길래 어머님 생신 선물인가 싶었고, 반지 앞에 멈춰 섰을 때 그제서야 '누구'가 나였구나 싶었다. 두근거림이 너무 심해져 배속이 울렁거렸다. 이미 유리관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최연준의 몇 발자국 뒤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최연준은 뒤를 돌았다. 가방끈을 꽉 붙잡았다. 최연준의 옆에 섰다. 유리관 위에는 이미 몇 종류의 반지가 올려져 있었다. 최연준 취향 아니랄까 봐 다들 그냥 심심하게 끼기엔 화려했다. 쌍으로 나란히 있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들에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 엄지손톱으로 꾸욱 눌렀다. '내가 너 취향은 잘 모르겠어서... 일단 잘 어울릴 것 같은 것만 골라본 건데...' 또다시 과부하가 시작됐다. '커플링 우리만 없는 거 같아서. ... 별로야?' 솔직히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아니야. 좋아. 정말로.' 브랜드부터가 일반 커플들이 끼고 다니는 것과 달랐다. 심지어 몇몇 반지에 박혀서 반짝이는 건 다이아 같았다. 횡설수설한 나를, 내 손을, 최연준이 덮었다.

디자인을 보면서 느낀 건, 최연준의 눈을 의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솔직히 최연준이 미리 골라놓은 게 제일 예뻤다. 그 중에서 제일 예쁜건 작은 다이아가 박힌, 양심상 고르면 안될 것 같은 것과 다이아는 없지만 그냥 디자인이 예쁜 두 개가 결승까지 올랐다. 나는 어느 걸 선택하든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기 때문에 선택을 최연준한테 미뤘다. 내 간곡한 부탁에 최연준은 몇번이고 거절하다 직원을 불렀다.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그 '이건' 다이아였다. 최연준은 한껏 잘난 척을 하면서 카드를 계산서에 넣었다. '완전 멋지지.' 나는 최연준과 팔장을 꼈다. '응. 근데 진짜 나 끼고 다녀? 누가 보면 결혼한 줄 알겠다.' 왜냐하면 이 반지는 러브 컬렉션이었고, 웨딩링으로 유명한 라인었다. 최연준은 영수증과 보증서, 그리고 반지 케이스를 받았다. '이미 걔네는 스칼렛 초이라고 부르지 않아?' 아. 솔직히 안듣길 바랬는데. 그날 펍에서 한번 맛들린 이후로 애들은 나를 계속 스칼렛 초이라고 불렀다. 어디를 가도 꼬박꼬박 성까지 붙여가며 부르는 바람에 안듣기가 쉽지 않았다. '들었네...' 최연준은 케이스를 열고 조금 더 작은 반지를 네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나도 껴줘.' 최연준이 남은 반지를 나에게 건넸다. 반지도 받는데 이걸 못해줄까 싶어 약지에 반지를 받아들고 손가락에 넣었다. 최연준이 손을 가볍게 말아쥐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손만 바라봤다. 최연준은 노트북을 정리하다 소파에 무릎을 당기고 앉아 손을 이리저리 펼쳐보는 나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좋아? 진작에 할 걸 그랬네.' 최연준이 노트북을 방에 가져다두고 소파를 등받이 삼아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다리를 내려 최연준의 어깨 옆에 붙였다. 최연준이 다리 사이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질릴까봐 무서워.' 최연준은 빙구같이 좋다고 웃었다. '질리면 다시 새로 바꿔줄게.' 최연준은 내 손을 잡아 본인의 시야에 들어오게 했다. '너가 나를 받아줘서 이 정돈 받아도 돼.' 손등 위로 닿는 입술의 촉감이 간지러웠다.

그날, 우리의 손가락에 새롭게 자리한 반지는 서로 맞닿아 부딪히며 인사했다.

3.

토요일의 해가 뜨자마자 최연준은 머리를 몇번 쓱쓱 만지더니 나에게 머리를 들어밀었다. '많이 길은 것 같지?' 눈썹 밑으로 내려온 앞머리와 덮수룩해진 뒷머리가 이제 곧 머리를 잘라야 할 때라는 걸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근처 미용실이나 다녀와야겠다.' 최연준은 프링글스를 한입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최연준은 대략 30분정도 후에 머리를 자르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최연준이 바닥에 잔뜩 흘려놓은 프링글스 조각들에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에 프링글스가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 나는 식탁에 통장들과 다이어리를 펼쳤다. 아낀다고 했는데도 통장은 홀쭉해져 있었다. 그동안 간간히 알바를 해오다 요즘 잠깐 안하고 있는데 조만간 새로운 알바를 구해야 할 듯 싶었다. 식비 정도는 아르바이트를 수당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월세만 내도 벅찼다. 안그래도 다시 기숙사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값도 싸고 시설도 나쁘지 않고. 기숙사를 탈출한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돌아가게 생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리는 있으려나, 얼마 전에 다른 애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기숙사 자리 기싸움이 치열하다고 했다. 역시 빡셌다. 핸드폰 계산기로 이것저것 두드리고 있었는데 카톡 알람이 떴다. 친구로도 되어있지 않아 카톡창에 주의 표시가 떴다. 방학이 언제니? 책가방을 매고 브이를 한 남자아이 프로필이 물었다. 캘린더를 켜서 방학 날짜를 확인했다. 12월 20일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묻는 질문에만 답했다. 다른 사족은 필요없었다. 그때 잠깐 한국 들어와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다시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절대로 다시는 한국땅을 밟지 않겠다고, 그럴바에 차라리 죽을 거라고 다짐했다. 도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머리를 싸맸다. 하얀 말풍선이 하나 더 생겨났다. 할머니가 너 안오면 바로 학비 끊는다고 하신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 남자친구 생겼던데 이왕이면 걔도 데리고 와. 할머니랑 아빠가 궁금해 하셔. 연달아 오는 말풍선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을 설마 서울이라고 착각하시는 건가 싶었다. 기가 막혀서 채팅창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최연준인가 싶어 바로 달려나갔다. 최연준은 덮수룩한 머리를 적당한 길이로 예쁘게 잘랐다. 그리고 볼에 노란색 밴드가 붙어있었다. 최연준은 내 시선을 느끼면서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다친거야?' 빤히 밴드만 바라보는 나를 보면서 최연준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미용실 다녀오는데 다칠 일이 있나 싶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밴드에 시선을 고정했다. 편의점에 파는 싸구려 밴드였다. '어떻게 다친 건데. 많이 아파? 약은 바르고 붙인거야?' 최연준은 안절부절해 하는 나를 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머리도 자르는 김에 면도도 했는데 그때 베였어.' 아 진짜 이 잘난 상판에 생채기를 내면 어쩌자는거야. 최연준의 볼에 붙은 밴드를 살살 떼어냈다. 꽤 길게 생긴 상처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 어딘가에 놓아뒀던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아팠겠다...' 얼굴에 흉이 지면 안되니까 일단 소독부터 했다. 빨간약을 볼에 톡톡 바르자 최연준이 쓰라린 듯 작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약을 휴지로 톡톡 닦아내면서 후후 불었다. 얼른 말라야 연고를 바를 수 있었다. 살짝 마르지 않은 건 휴지로 닦아내고 면봉에 연고를 뭍혔다. 면봉을 상처에 가볍게 두드렸다. 밴드를 그 위에 붙였다. '됐다...' 내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최연준이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안겼다. 졸지에 최연준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고마워.' 최연준의 말에 손에 연고를 든 채로 최연준을 안았다. '다치지마. 속상해.'

소독도 잘했고 연고도 잘 발랐지만 아무래도 얼굴에 난 상처다보니 수시로 확인하면서 연고를 덧발랐다. 최연준은 그때마다 순순히 고개를 돌려 볼을 헌납했다. 재생력이 좋은건지 상처는 꽤 빠르게 아물었다. 흉터 하나 없이 잘 아물었다. 최연준은 밴드를 떼어냈다. 나는 화장실 문턱에 서서 거울에 비친 최연준의 볼을 봤다. 깨끗했다. 최연준은 밴드를 붙이고 남아있는 끈적끈적한 볼을 물로 몇 번 행궈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세면대에서 그동안 헤어 스프레이인줄로만 알고 있었던 길다란 통을 들고 흔들었다. '그거 헤어스프레이 아니야?' 최연준은 손을 스프레이 가까이 대고 짜려다 멈추고 통을 나에게 건넸다. '이거? 이거 쉐이빙 폼이야. 해볼래?' 얼떨결에 쉐이빙 폼을 받아들고 최연준의 볼을 향해 에프킬라를 뿌릴 때처럼 자세를 잡았다. '바로 하게?' 최연준은 당황했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바로 하는 거 아니야?' 최연준은 다시 쉐이빙 폼을 가져가서 내 손을 펼쳤다. 그리고 쉐이빙 폼을 쭈욱 뿌렸는데, 느낌이 참, 이상했다. 생긴 건 완전 사워 크림인데. 손으로 만지다 그냥 바로 최연준의 얼굴에 발랐다. 이제야 뭔가 내가 아는 면도 같았다. 남자가 아니라 수염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몰라서 그냥 넓게 넓게 발랐다. 혹시라도 먹을까 말을 할 수 없는 최연준은 음, 응 으로 최대한 의사표현을 했다. 알아듣는 건 내 몫이었다. 최연준이 수염 많은 산타 클로스가 됐을 때 최연준은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고 거울에 걸려 있던 면도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나에게 줬다. 작거나 말거나 일단 칼이고 얼굴에 닿는 거라 손이 부들부들 떨려올 지경이었다. 일단 최연준의 볼과 턱 그 경계쯤 되는 부분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는 기권을 선언했다. 백기를 흔드는 날 보고 최연준은 웃으면서 다시 면도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빠르게 빠르게 거품을 걷어냈다. 면도를 하는 거겠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거품을 닦아내고 세수를 했다. 마지막 스킨까지 바르고 끝인가 했는데 병을 하나 더 꺼내서 얼굴에 발랐다. '왜 두개야?' 최연준은 눈을 꼭 감고 얼굴을 두드렸다. '응?' 젖은 머리를 한번 털어주고 스킨병을 차곡차곡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스킨을 왜 두개나 바르는거야?' 최연준은 티셔츠에 손을 툭툭 털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그 뒤를 졸졸 쫓았다. '하나는 면도 다음에 바르는 거, 하나는 진짜 스킨. 그래서 면도하고 나면 스킨 냄새가 두배로 세져. 봐봐.' 최연준은 뒤를 돌아서 내 얼굴 옆에 본인 얼굴을 아주 가깝게 붙였다. 최연준 말대로 정말 평소보다 강한 향이 훅 올라왔다. 흔히들 말하는 남자 냄새. 여자 화장품에서는 찾기 아주 힘든 남자 스킨 냄새가 파고들었다. '남자 냄새나. 완전 남자 냄새. 신기하다...' 내 어휘 선택이 재밌기라도 한건지 최연준은 내 정수레 손을 올리고 이리저리 헝클어 트렸다. 그리고 다시 정리했다. '신기해? 귀여워.'

4.

강의가 끝나고 책상 위에 늘어뜨렸던 걸 하나하나 가방 안으로 회수하고 있는데 옆에서 이미 가방을 다 싸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샐리가 완전 관심없다는 말투로 툭 던졌다. '오늘 농구 경기 있다고 들었는데.' 노트북을 가방 안에 넣다가 아, 싶었다. 맞다, 완전 잊고 있었다. 원래 샐리는 이런걸 듣고 전해주지 않았다. 니가 가봤자 뭐하냐면서. 일종의 보호였다. 최연준이 골대에 골 넣고 다른 여자애한테 세러모니 하는 걸 니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볼 이유가 하덜덜 없다면서 농구 경기로 학교가 시끌시끌할 때 샐리는 나를 데리고 대형몰로 데리고 갔다. 샐리가 이러는데에는 나름 다 이유가 있었다. 맨 처음 최연준이 농구 선수로 시합에 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몰라 생수 한 병을 챙기고 사람들 틈 어딘가에 샐리하고 같이 농구를 보러 갔었다. 농구는 재밌었다. 애들이 잘하기도 했고, 최연준이 잘하기도 했고. 그럼 뭐하나, 결국 최연준은 다른 여자애가 주는 수건과 물통을 받았는데. 샐리는 그걸 보자마자 내 손에서 생수통을 뺏어서 바닥에 몽땅 부어버리고 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뒤로 샐리는 농구 채널만 나와도 돌렸다. 참 안타까운 사실 중 하나는 샐리의 남동생이 농구 선수라는 점이었다. 샐리 남동생 테디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나한텐 정말 끔찍했던 날 중 하나였다. 그뒤로 최연준이 출전을 하던말던 농구 시합 따윈 본 적이 없었는데 이틀 전부터 최연준이 본인이 이번 경기에 나간다고 그렇게 그렇게 광고를 했다. 처음에 듣고 대답을 얼버무리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어제 하루종일 쫓아다니면서 꼭꼭꼭 보러오라고 했다. '레타, 갈거야?-샐리는 처음 내 이름을 보고 스칼레타라고 발음했다. 그때 이후로 생긴 애칭- 나는 가방을 매면서 말했다. '가야지.' 샐리는 미드에서나 자주 볼 법한 어이가 없다는 제스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이, 이것도 없이 가려고.' 샐리는 나를 부르고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그때 이후로 그 생수는 잘 마시지 않던 나를 잘 알기에 샐리가 나에게 준 건 파워에이드였다. '이걸로 깔맞춤이나 하라 그래.' 파란색 파워에이드를 보고 최연준 머리색이 생각나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 이건 몰래 슬쩍 했어.' 샐리는 테디라고 쓰여져 있는 스포츠 수건을 내 손에 단단히 묶었다. '내가 이 자식 농구 응원 때문에 몇 번 해보니까 이렇게 안하면 떨어져.' 그뒤로 아무말 없이 나를 보더니 샐리가 먼저 걸어나갔다.''고마워. 진짜 진심으로.' 샐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체육관의 응원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게 이미 저 자리에 가긴 글렀다 싶었다. 아직 경기 시작하기도 전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자리를 맡아두고 있었는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샐리하고는 사람이 없는 구석쯤에 앉았다. 가방을 한 곳에 모아두고 샐리는 풀린 신발끈을 묶는 동안 선수들이 입장했다. 파란머리가 눈에 확 띌 줄 알았는데 최연준 말고도 개성이 넘친 친구들이 많아서 그렇게 눈에 띄진 않아서 좀 신기했다. 최연준은 농구할 때 입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두리번 거렸다. 그 와중에 피어싱은 드롭이어서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거 잘못하다 찢어지진 않으려나.'쟤 너 찾는거 같은데 손이라도 흔들어줘!' 큰 함성소리를 비집고 샐리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다, 너 찾는지 한 번 봐봐!' 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휘슬이 울렸다. 손도 못 흔들었는데 농구공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고 괜히 기시감이 들 정도로 농구는 그때만큼 재밌었다. 그리고 세상 관심 없는 척하던 샐리는 상대팀의 반칙에 선수들보다 더 열을 내고 있었다. 무진장 재밌었지만 정말 최연준이 나를 못 찾으면 어떡하지 싶어서 긴장이 됐다. 샐리는 어느센가 일어서서 응원하고 뛰어다니고 난리가 났는데 마냥 재밌어만 할 수 가 없어서 그대로 망부석처럼 앉아만 있었다. 경기가 끝났다. 기분 좋게 이겼다. 선수들은 상대팀과 악수를 한 번 하고 서로 안고 승리의 기쁨에 난리가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파워에이드를 움켜쥐었다. 최연준은 단체 세레모니가 끝나고 같은 팀 선수들이 개인 퍼포먼스를 할 때 혼자 빠져나와서 응원석 주변을 맴돌았다. '야 쟤가 너 찾는데? 한 번 부를까?' 샐리가 소리를 크게 지르려고 숨을 들이마시는 걸 보고 손목을 잡았다. '오케이... 알겠어.' 최연준은 본인을 향해 뻗은 수많은 손을 무시했다. 옆에 있는 샐리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응원석에서 나를 찾지 못하고 체육관을 나가려는 걸 보고 나도 포기하고 가방을 들었다. 일단 다른 사람이 주는 건 안받았으니까 그걸로도 만족했다. 샐리는 가방을 챙기는 나를 한번 보더니 무작정 크게 소리 질렀다. '다니엘!! 헤이!! 다니엘!!' 내가 왔다고 부르는게 맞는건데 그렇게 부른다고 되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그 시끄러운 틈 사이로 샐리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는지 최연준이 한번 돌아봤다. 샐리는 양손을 크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여기!! 다니엘!!' 최연준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듯 상체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샐리는 본인을 못 찾는 최연준을 향해 욕을 한번 곱씹더니 다시 한번 소리쳤다. '여기라고!!! 스칼렛!!!' 최연준은 계속 헛다리를 짚다가 그제서야 팔을 크게 흔들고 있는 샐리와 그 옆에서 이미 갈 준비를 마친 나를 보고 뛰어왔다. '왔었네?! 왜 말 안했어? 이거 내꺼야?' 샐리는 최연준이 오는 걸 보고 가방을 챙겨서 빠르게 나갔다. 가는 길에 핸드폰을 한 번 흔들면서 연락하라고 말하면서.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파워에이드를 최연준의 앞에 어정쩡하게 내밀었다. 최연준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파워 에이드를 깠다. 내가 준 파워에이드 하나에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받는게 진작에 왔다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땀을 티셔츠에 쓱 닦아내는 걸 보다 급하게 손목에 묶인 수건을 풀렀다. 최연준은 내 손목에 있던 수건을 가져가서 얼굴을 닦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지만 그래도 파란 머리하고 잘 어울렸다. '나 오늘 골 넣는거 봤어?' 나는 수건을 받아들고 다시 파워에이드를 최연준에게 건넸다. '봤어. 잘하던데.' 최연준은 다시 파워에이드를 마셨다. 파란색 물이 금방금방 없어졌다. '이번에 온 거 처음이지? 어때? 완전 멋지지.' 애같이 칭찬해달라고 보채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멋져. 제일 멋졌어.' 최연준은 크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나 처음 온 건 아니야.' 최연준은 남은 파워에이드를 천천히 마시다 내 말에 급하게 잔기침을 했다. '언제?' 최연준이 완벽하게 당황한 표정을 짓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잘봤어 그때 다른 여자애가 준 물통 받는거.' 최연준은 안절부절 못했다. 낑낑거리는게 주인이 화난 모습을 보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가슴 한 쪽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기분. 민트초코를 바른 것 같은 상쾌함. 유쾌 상쾌 통쾌한 순간이었다. 너도 애 좀 타보라지. 나는 그대로 체육관을 나왔다. 최연준은 내 팔에 붙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귀여워서 오늘 저녁까지만 화난 척 좀 하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최연준은 내 옆에서 평생 부릴 애교는 다 부리고, 나는 내가 평생 받을 여왕 대접을 다 받았다. 계속 내 눈치만 보는 게 불쌍하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최연준은 이때다 싶어 나에게 더 파고들었다. 자세로 보면 내가 안긴게 맞는데 그냥 보이기로는 내가 안긴 것 같았다. 최연준이 허리를 숙여서 어깨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별로 볼일이 없었던 최연준의 뒷목을 쓸어내렸다. 손에 목걸이가 걸렸다. '목걸이 새로 샀어?' 줄을 만지작 거렸다. '목걸이? 아아, 이거 반지 걸어 놓은거야. 농구하다가 빠질까 싶어서.' 최연준은 목걸이를 푸르고 반지를 빼냈다. '이제 끝났으니까 다시 껴야지,' 너구리 같이 웃었다. 좋았다.

5.

이제 슬슬 새 옷을 살 시즌이 온 것 같아서 방금전까지 샐리하고 인터넷으로 옷을 보다 왔다. 중간에 대니도 옷을 사야 한다면서 신나게 인터넷 서핑을 하다 집에 돌아왔다. 셋 중에서 끝까지 옷을 사지 못한건 나 혼자 뿐이었다. 사고 싶고 예쁜 옷은 널렸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신중에 신중을 가해 제대로 질러야 했다. 샐리는 옷에 딱히 큰 관심이 없었다. 심플 이즈 베스트 타입이라 늘 청바지에 편한 티, 때에 따라 체크 남방을 입는 정도였다. 알렉스도 마찬가지였다. 배구선수로 사느라 늘 입었던 건 트레이닝복이 전부라 딱히 관심 가질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에 비해 대니는 패션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이번 시즌 유행을 빨리빨리 캐치해서 나하고 샐리한테 알리면 그걸 듣고 살까말까 고민하는 게 우리의 사이클이었다. 알렉스는 패션 사이클에서 기권한지 오래였다. 나도 샐리하고 비슷한 과였지만 최연준도 만만찮게 옷에 관심이 많다보니 슬슬 옷의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었다. 소파에 누워서 한참동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그냥 포기했다.

결국 치트키를 썼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대니하고 큰 몰로 달렸다. 내 sos에 대니는 니가 웬일이냐며 오늘 스칼렛의 패션을 뜯어 고치겠다는 발언을 했다. 대니는 신나게 여성 의류층으로 달려갔다. '너는 마른 타입이니까 그걸 살리게 입으면 될거야. 음, 약간 천사 스타일? 피부톤도 밝아서 하얀 블라우스에 스커트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나는 아무말 없이 대니의 옆에 서있었다. 내가 이제 할 일은 대니가 고른 옷 전부를 피팅하는 것 뿐이다. 대니에 손에 점점 옷이 쌓이고 있었다. 옷을 사는 걸 도와달라고 했지만 슬슬 후회하는 중이었다. 저걸 다 입어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적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대니가 옷 무더기를 나에게 안겼다. 그리고 친절히 피팅룸까지 나를 밀어넣었다. '입고 나와 스칼렛~' 대니는 친절히 손까지 흔들었다. 그래, 입다 보면 끝이 나겠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올렸다. 오늘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는데 초반부터 무너질 수 없었다.

젠장, 내가 끝이 난다고 말했던가. 그건 개소리였다. 끝이 안났다. 대니는 내가 피팅룸에서 나오면 또 다른 옷을 줬고, 나오면 또 다른 옷을 줬다. 대니의 눈은 꽤 믿을만 하고, 또 나를 도와준다고 왔는데 이 고마운 마음에 토를 달진 않았다. 그냥 나만 죽어갈 뿐이었다. 대니는 피팅을 하고 잘 어울린다 싶은 옷은 따로 빼놓았다. 근데 그 옷이 산이 된 것 같은데. 내가 점점 죽어가는 게 보였는지 대니는 이제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지저스. 드디어. '치마나 숏팬츠는 왜 안입어?' 최종적으로 구매할 옷을 추리는 도중에 대니가 물었다. 왜냐, 내가 치마하고 숏팬츠는 일단 재끼고 있었다. '셀룰라이트 때문에. 허벅지에 너무 심해서.' 내 말에 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다이어트 진짜 열심히 했었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어때? 롱스커트. 스칼렛, 내가 너 몸매를 가졌으면 난 맨날 점프슈트만 입고 다녔을거야.' 대니의 강력한 주장에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서 결국 그 스커트까지 같이 계산했다. 손에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대니는 팔짱을 꼈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몸이 질질 끌려갔다. 배가 진짜 고팠다.

대니는 나를 끌고 몰 안에 있는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난 버거킹 파였지만 버거킹을 찾으러 갈 체력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그냥 빠르게 앉았다. '치즈버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대니는 금방 치즈버거를 들고 왔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안먹어봤는데 맨날 애들이랑 치즈버거만 먹다보니까 그냥 입에 붙어버렸다. 나름 먹을만 하더라고 이젠. 포장을 벗기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대니가 버거를 내려놓고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내가 일부러 했다는 게 아니라 우연히, 정말 우연히 보게 된건데, 너 가방에 종이백을 왜 그렇게 많이 들고 다녀?' 피팅룸에 있을 때 가방을 맡겼는데 그때 보게 된 것 같았다. 지퍼 하나 없는 크로스백이라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기 더 쉬웠던 것 같았다. 비닐봉지도 아니고 언제 뚫릴지 모르는 종이백을 무더기로 들고 다니는 건 좀 이상하게 생각할만 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만 늘렸다. '혹시 너, 과호흡 있어? 아 오해하지 마!! 그냥 추측이니까...' 정곡을 찔렀는데. '정확하네. 어떻게 바로 알았어?' 대니는 다시 버거를 들었다. '사실 나도 있거든.' 음료 컵을 들어올리다 깜짝 놀라서 대니를 쳐다봤다. 늘 밝고 활기찬 애라서 이런 병이랑은 거리가 멀거라고 생각했다. '맨 처음에 부모님한테 커밍아웃 하고 나서 생겼어. 뼈대 깊은 영국 귀족 가문에 무슨 게이냐면서.' 대니가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이젠 괜찮아. 부모님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과호흡이 딱히 생길 일이 없더라고. 나쁜 아들 같아 보이지만 난 부모님이랑 연락 아예 안해.' 대니는 게이였다.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았다. 나도 샐리도 알렉스도 그냥 같이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남자친구랑도 나름 잘 만나는 중이었다. '넌 과호흡 언제 생겼어?' 대니의 말에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한국 나이로 17살, 미국 나이로 치면... 16살 정도.' 대니는 피식 웃었다. '완전 베이비네. 14살에 과호흡이 생긴 선배로써 조언 하나 할게. 커피 절대 마시지 마. 완전 독이야.' 기름진 손을 냅킨에 닦으면서 테이블에 엎어놓은 대니의 핸드폰을 돌려놓으면서 말했다. '선배니임, 그정돈 나도 알거든.'

6.

알렉스는 내기에 이겨서 탄 돈으로 밥을 사겠다고 해서 빈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나를 아웃백으로 불러냈다. '에이~ 스칼렛 초이~ 여기.' 먼저 자리를 잡아놓은 알렉스가 손을 흔들었다. 알렉스를 확인하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온지 꽤 됐던 건지 이미 식전 빵을 뜯고 있었다. '난 너가 다니엘이랑 데이트 하느라 못 올 줄 알았는데.' 슬며시 포크를 들어올렸다. '농담이야, 농담. 한번만 더 하다간 머리에 포크 달고 다니겠네.' 다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게 요즘 자꾸 까불어. '메뉴는 예산에 맞게 아무거나 시켰어. 못 먹는 거 없지?' 물을 마시다 어이가 없었다. '원래 그걸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알렉스는 보지도 않던 메뉴판을 덮고 테이블 끝 쪽으로 밀었다. '니 말이 맞긴 하네.' 알렉스는 이어서 신나게 교수님 욕을 했다. 인종차별을 좀 심하게 하는 교수님이었다. 나도 심하게 당한 적이 있어서 정말 둘이서 열심히 욕했다. 교수님은 아마 최연준 버금가게 오래 오래 살아계시지 않을까 싶었다. 고기가 테이블에 오르고 대화는 급격하게 줄었다. 일단 고기를 뜯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뜯었다 싶을 때 알렉스가 고기를 입안에 빵빵하게 넣고 물었다. '이번에 코스튬 파티때 뭐 할거야?'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 코스튬 파티를 따로 열었다. 학교 전통이래나 뭐래나. 특이한 옷을 입고 상금을 노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난 그냥 노말하게 갈려고. 마침 얼마 전에 대니랑 쇼핑하고 왔어.' 내 말에 알렉스는 기겁을 했다. '걔랑 쇼핑을 했다고? 너 다리 살아있어?' 알렉스도 대니하고 쇼핑을 한 전적이 있었는지 갑자기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래... 너도 아는 구나...

알렉스의 얘기를 듣다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아서 알렉스의 말을 잠깐 끊었다. '말 끊어서 진짜 미안한데 너 핸드폰 돌려주면 안될까.' 알렉스는 액정이 위로 가게 핸드폰을 돌렸다. '이렇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 알렉스를 핸드폰을 뒤집고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아이폰 11 카메라 너무 징그러워. 환공포증 도질 것 같아.' 사실 아이폰 11의 카메라를 보고 징그럽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7.

대니하고 쇼핑한 옷들을 정리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한동안 쇼핑백 그대로 뒀었다. 최연준이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 말이다. 최연준은 옷을 거실에 하나 하나 펼쳤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최연준이 옷을 펼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최연준은 펼쳐놓은 옷을 쭉 둘러봤다. '치마도 샀네?' 새삼 옷을 저렇게 많이 샀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치마 입은 거 나 한 번도 본 적 없다.' 최연준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한번만 입어주면 안돼?' 저렇게 물어보는 데 차마 귀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치마를 들었다. '이것도, 이것도.' 방으로 들어가서 갈아입으려는데 최연준이 새로 산 상의를 내 팔에 걸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차례차례 옷을 갈아입었다. 이렇게 치마를 입는 게 도대체 몇년만인지 싶었다. 한국에 있을 때 교복 치마조차 잘 입고 다니지 않아서 꽤 어색했다. 다리에 살랑살랑 스치는 감촉이 생소해서 쭈뼛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최연준은 핸드폰을 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긴 치마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안이 보이지 않을까 신경이 예민해졌다. 최연준은 미친듯이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더니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한바가지나 쏟아내서 낯이 뜨거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 냉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최연준이 바닥에 펼쳤던 옷을 하나하나 개키고 있었다. 내가 들고 나온 옷도 가져가서 모양 예쁘게 접었다. '치마 왜 그동안 안입었어? 너무 예쁜데.' 최연준이 옷을 다 개키고 쌓아놓은 걸 들었다. 질문을 해놓고선 옷을 넣어두려는 건지 방으로 쏙 들어갔다. 덕분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최연준이 방에서 나와 내 옆에 앉았다. 소파 한쪽에 기대 앉아 있는 내 옆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았는데 최연준이 살짝 누르는 느낌이 좋았다. '다리가 안이뻐서.' 최연준이 나를 돌아봤다. '말도 안되는 소리야. 누가 그랬어 너한테?'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잠깐 멈췄지만 결국 끄덕였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치마를 입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니었지만. 세명이나 나에게 그 소리를 해댔지. '그 자식 누구야. 데려와 내가 그런 말 꺼내지도 못하게 뚜까 패줄게.' 꽤 진심인듯한 진지한 최연준의 표정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누군지 알면 그 소리 못할텐데.' 내가 놀리는 줄 알았는지 최연준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아 누군데~ 누구냐고오~' 이 시대의 새로운 찡찡이로 태어난 최연준을 떼어내고자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최연준에게 잡혀서 실패로 돌아갔다. '안알려주면 뽀뽀 백번 한다 진짜.' 눈에 힘 빡주면 무섭게 느낄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냥 눈에 힘들어간 고양이 같았다. '못 알려주는데 어떡해?' 최연준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점점 최연준 몸에 눌리고 있었다. '나 진짜로 할거야. 너 숫자 열심히 세야 할걸?' 나는 거의 반 누운 상태였다. 천장 대신 파란 머리가 보였다. '못 알려준다니까.' 최연준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지금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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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작가님임ㅜㅜㅜㅜㅜㅠ
4년 전
독자4
저 럽미레스 악개예오ㅜㅜ
4년 전
독자3
너무...좋ㅇㅏ..........럽미레스 진짜 너무 재밌어요.........흐엉엉 아 대박이야 진짜 웅냥냥 최연준 최고다 진짜
4년 전
비회원21.238
진심,,, 럽미레스는 레전드예요,,,,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나,,,,(최연준은 한국에)
4년 전
독자5
헐ㅜㅜㅜㅜ 작가님ㅜㅜㅜ
4년 전
독자6
진짜 너무 좋아요...럽미레스 연준 너무 사랑해ㅠㅠㅠㅠ
4년 전
독자7
진짜..........진짜 너무 좋아요.......와...........진짜..
4년 전
독자8
헐 작가님 ㅜㅜㅜ 진짜 너무 좋아요 퓨ㅠㅠㅠㅠㅠ 스칼렛 초이에서 캬..
4년 전
독자9
헐헐 띵작 럽미레스ㅠㅠㅜㅠㅠ넘 조아요
4년 전
독자10
다음화 엄버 합니다.....
4년 전
비회원160.132
아 진짜 너무 좋아요 분위기가 진짜 저 환장하게 만들어요ㅜㅜㅜㅠ 감사합니다ㅜㅜㅜ
4년 전
비회원241.30
작가님 제발 장편으로 연재해주세요 ^^ㅜ 제 삶의 낙... ㅠ
4년 전
독자11
아 진짜 너무 설레요 ㅠㅠ 꽁냥꽁냥 더해줘... 진짜 럽미레스 체고... 저 너무 빠져버렸어요 책임지세요... 더... 더주세요...ㅠ ㅠㅠㅠㅠㅠㅠㅠ 이 다음 편이 없다는건 말이안돼
4년 전
비회원241.30
오늘도 엄버.... 작가님 사랑해요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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