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이 집에 들어왔다. 집안은 어두운데 태현의 방에서만 환한 빛이 나왔다. 여주 말이 맞았네. 태인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잘거라 생각했던 태현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태인은 깜짝 놀라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안 자고 있었네?' 태인은 태현을 당황한 눈으로 올려 봤다. '누나 개망했어. 생일 선물 못 샀어.' 태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태인은 태현에게 따지려다 코트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태현도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 태인은 촉박한 마음에 손톱을 물었다. '누나는 뭐 샀어?' 태인은 스크롤을 내리면서 대답했다. '캐시미어 목도리.' 태현의 표정이 더 절망적으로 변했다. '넌 좋아한다는 애 선물도 안사고 뭐했냐.' 태인은 전화를 걸었다. '어 언니~ 잘 지냈어?' 태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태현은 거실로 갔다. 소파에 몸을 쓰러뜨리면서도 핸드폰에 시선을 놓지 못했다. 여주는 보드라운 걸 좋아했다. 태인은 그걸 아주 잘 간파했다. 지금 시간에 배송을 하기엔 이미 글러먹었다. 내일 직접 현장 구매를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 사야 하는지 태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오히려 이것저것 다 살펴보려다 완전 말짱 도루묵이 됐다. 원래 같았으면 뭘 갖고 싶은지 물어 봤을텐데 이번 본인의 생일을 챙기지 않은 여주에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지속됐던 관계는 한번 끊기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었다. 태현은 아직 여주가 왜 본인의 생일을 무시했는지 모른다. 17년동안 받던 생일 선물은 이번 년도엔 없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날 하루종일 태현은 여주를 보지 못했다. 괘씸했다. 김여주는 내 생일 챙기지도 않았는데 나는 김여주 생일 선물을 못 샀다고 끙끙대는 꼴이 웃겼다. 나도 생일 선물 주지마? 태현은 눈을 감았다. 너무 정신없이 핸드폰만 들여다 본 탓에 눈을 빠질 것 같았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조금씩 몸이 나른해질 때 태인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 생일 선물 사러 나랑 같이 가면 돼!' 태인은 거실 불을 키고 태현의 옆에 앉았다. '친한 언니가 공방 열었다고 해서 거기 가서 사면 될 듯. 안그래도 한번 가려고 했는데 잘됐지 뭐.' 태현은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공방인데?' 태인은 그제서야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오르골. 완전 딱이지. 너 돈은 있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의 생일 때문에 용돈을 몇 달이나 모았다. '고마워. 완전 살았어.' 태인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태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알면 잘해. 나같은 누나가 흔한 줄 알고 있어.' 태현은 태인에게 맞은 곳을 문질렀다. 태인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쭉쭉 늘렸다. '오늘 달 예쁘네.' 태인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반달이 뭐가 예뻐.' 열심히 달을 찍던 태인이 태현의 말에 뒤를 돌았다. '그럼 보름달만 예쁘게?' 태현은 머리를 손으로 털면서 일어섰다. '응. 제일 꽉 차야 예뻐.' 태현이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자 태인은 거실에 혼자 남겨졌다. '뭐야 왜 저래...'
'야야 돈 넣어. 지금 삘 탔으니까.' 최범규는 지갑에서 천원을 꺼내서 기계에 넣었다. 돈이 들어가고 나는 리모컨을 들었다. 춤추고 노래하느라 이미 땀 범벅이었다. 최범규는 소파 한쪽에 찌그러져서 거의 죽어갔다. 방금 노래가 좀 방방 뛰어야 하는 곡이라 미친듯이 뛰어재꼈더니 결국 쓰러지고야 말았다. 일단 쓰러진 최범규는 안중에도 없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최범규는 마이크를 거부하다 내가 눈을 부라리자 거기에 쫄아서 마이크를 받았다. '야... 좀 쉬자...' 응 안돼 돌아가. 그런건 내 노래방 사전엔 있을 수 없어. 힘들어하는 최범규를 위해서 특별히 잔잔한 노래를 골랐다. 그리고 파트 분배를 하면서 여유롭게 부르자고 남녀 듀엣 곡으로. 이정도면 진짜 배려왕 아니냐고. 최범규는 울면서 몸을 일으켰다. 사랑이 잘. 내가 선곡한 제목이 화면에 뜨자 최범규가 어깨를 툭 쳤다. '오~ 역시 대일고 아이유~'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 노래가 시작해서 급하게 박자를 따라갔다. '넌 노래도 잘 부르는 애가 왜 가수 안하고 공부하냐?' 지금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 옆에서 최범규는 문장을 물음표로 마무리했다. 내가 무시하고 파트를 부를 동안 최범규는 다른 듀엣 노래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좀 쉬자매요. 아이유 파트가 끝나고 최범규가 마이크를 들었다. 얘도 노래를 꽤 잘불렀다. 낮고 잔잔하게 부르는게 듣기 좋았다. 분위기를 조금 다운시키자 마자 다시 귀여운 노래가 나왔다. 최범규하고 나는 바로 상황극에 들어갔다. 노래 가사가 소개팅을 하는 남녀라 이런 건 또 따라하면서 불러야 맛이 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예쁘시네요.' 최범규는 예쁜 척을 하는 나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좋은 사람 요즘 찾는다고.' 최범규가 소개팅에 나온 남자 역할을 하는 데 웃음이 나왔다. 이제 파트가 넘어갔다.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멋지네요. 저도 얘기 들었어요. 요즘 외로움 타신다고. 범규 외로워?' 이상한 포즈를 하면서 멋진 척을 하던 최범규는 내 말에 발끈 했다. '아 뭐래!' 나는 웃으면서 노래를 껐다. '아 소개팅 망했어! 다음 다음.' 최범규는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뭐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에 제목이 떴다. 야 하고 싶어. '야! 최범규! 너 이거 노렸지!' 최범규는 좋다고 웃었다. 결국 체념하고 랩으로 시작했다. 최범규는 탬버린을 흔들었다. 이제 이 노랠 하도 불렀더니 최범규는 노래방 기계에 나오지도 않는 부분에 코러스를 넣었다. '엄마 아빠 여행 갔는데 나 지금 배고파. 오빠 치킨 먹고 갈래?' 자괴감에 빠진 나를 두고 노래는 시우민 파트로 넘어갔다.
'너는 오빠한테 자꾸 이럴거야.'
어, 뭔가 이상하다.
최범규하고는 거의 탈진 상태에 다다랐을 때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공차를 하나씩 들고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버스는 거의 앉자마자 왔다. 완전 타이밍 왕왕굿이었다. 그냥 빈자리를 찾아 거의 기어들어갔다. 창문에 기대 앉으니까 최범규가 옆자리에 앉았다. 최범규는 옆으로 매는 가방을 앞으로 돌렸다. 내일 목소리가 안나올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몇곡으로 부른건지 모르겠다. 최범규도 넋이 나가서 입을 다물지도 않고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버스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다행이었다. '헐, 나 카드 안 찍은거 같은데.' 카드 지갑을 찍고 들어온 기억이 없었다. 어라, 나 지갑 어딨지? 급하게 주머니를 더듬없다. '이 오빠가 찍었지. 크으 진짜 어떡하냐.' 최범규는 지갑을 나 무릎에 올렸다. '이 칠칠아 노래방에 그냥 다 놓고 올 뻔했다.' 패딩을 타고 미끄러지려는 걸 최범규가 다시 잡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잘 챙겨. 잃어버렸다고 또 찡찡거리면 혼난다잉' 나는 유독 지갑을 잘 잃어버렸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항상 지갑만 없어졌다. 전에도 학교에서 롯데월드를 보내줬을 때 지갑을 잃어버려서 울기 직전이었던 나한테 지갑을 찾아줬던 것도 최범규였다. 진짜 그때 최범규가 지갑을 가지고 딱 나타나자마자 엉엉 울었다. 고맙다고 우는 내 옆에서 최범규는 지갑 찾느라 하도 뛰어서 땀이 뚝뚝 떨어졌었다. 그러게, 얘는 내 지갑을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닌거야. '야 근데 너는 왜 아이유냐?' 아오 진짜 그 얘기 좀. 내가 대일고 아이유로 불리게 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질색 했지만. '1학년 때 축제에서 아이유 메들리 불러서. 내가 내 무덤을 팠었다...' 최범규는 내가 중3때 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 교육과정을 끝내고 1년을 휴학했다. 그래서 내가 1학년 때 어떤 미친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지 뭐. 그땐 진짜 내 흑역사였다. 애들이 페북에 영상을 도배해놔서 지금도 들어가면 볼 수 있었다. 진짜 혀 깨물고 죽을 생각까지 했다. 진짜 쪽팔림 박제 당했다. '뭐뭐 불렀는데?' 그때 내가 직접 mr까지 편집하는 정성까지 들였었다. 미쳤지 내가. 뭐뭐 불렀더라. '분홍신, 너랑 나, 좋은 날도 했고, 잔소리도 했고.' 최범규는 공차 빨대를 물었다. 펄이 빨대를 타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뭐 되게 많이 했네. 잘했어? 영상은 없나?' 최범규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씨 좆됐다. 최범규가 핸드폰을 몸을 날려 팔을 뻗어서 덮었다. 내가 뺏어갈거라고 생각했는지 핸드폰을 꽉 쥐어서 부들부들 떨렸다. '아 진짜 보지마...' 최범규는 뭔가 건수를 잡은 표정이었다. 얼굴이 사악하게 변했다. '아 그럼 3단 고음 그거 했나?' 다급한 나는 그냥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었다. '그날은 3단 고음 잘 나오더라! 아! 진짜 보지마!' 내가 말하는 도중에 핸드폰이 쭉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최범규 무릎에 엎어졌다. '알았어 안볼게ㅎㅎㅎㅎ' 저렇게 사악하게 웃으면서 말하면 내가 믿겠냐? 최범규 무릎에서 일어났다. 최범규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렇게 말해봤자 집에 가서 보겠지. 난 진짜 죽을거야. 한강물 따뜻할 때 뛰어내려야지. 아 따뜻해지면 지구 온난화. 정신이 나가서 별 이상한 소리를 다하면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가 자꾸 부딪혔다. 드럽게 아프다. '너 머리 안아프냐?' 나는 다시 똑바로 앉았다. 머리에 혹나게 생겼다. '아파. 더럽게 아파. 감각이 없어졌어.' 최범규는 내 이마를 보더니 킥킥 웃었다. '너 여기 빨개졌는데?' 아 진짜. 나는 패딩 모자를 뒤집어 썼다. 모자를 쓰느라 머리는 산발이 되서 자동으로 앞에 커튼이 생겼다. 최범규가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찍어라... 최범규가 나를 내 팔을 당겼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힘들어.' 내 몸 전체가 최범규에 기댄 것 같았다. 뭐, 편했다.
이번엔 버스 카드를 잘 찍고 내렸다. 또 내리자마자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껴서 열라 뛰었다. 원래 이 신호등을 건너면 최범규랑 안녕해야 하는데 최범규가 따라왔다. '너 집 안가?' 최범규가 멈추고 가방을 열었다.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는데 잘 안보였다. 아, 작은 상자 같았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어서 뭐를 또 꺼냈는데 그것도 잘 안보였다. 최범규는 그걸 들고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거의 안듯이 팔을 둘렀다. 최범규가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몸이 굳었다.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조금 있다 최범규는 떨어졌다. '이쁘네.' 어?
'아직 몇 시간 남았는데, 생일 축하해.' 그리고 최범규는 '버스 잘 타고! 안녕!'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아파트 셔틀 버스를 기다리면서 신발 앞코만 바닥에 찍었다. 버스가 오고, 버스에 타고, 버스에서 내리는 그 모든 시간 동안 걔는 사람을 참, 이상하게 만들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둠 속에서 케이크 위에서 불타고 있는 횃불을 껐다. 엄마, 아빠, 언니는 이걸 하려고 하루종일 기다린 것 같았다. 내일이 생일이지만 내일 생일선물로 이 집을 비워달라는 내 요청에 미리 케이크를 잘랐다. 그리고 선물 교환식. 언니는 내일 밥 먹을 때 줄거라면서 좋아서 뒤로 넘어가지나 말라고 큰소리 쳤다. 나는 코웃음 치면서 케이크 위에 있는 장식을 먹었다. 엄마, 아빠는 내일 정동진에 가기로 했고, 언니는 친구집에 가기로 했다. 새해 마지막 날에 다들 어디로 보내버려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제 집에 내가 혼자 뭔가를 누릴 기회는 거의 없었다. 엄마는 나한테 카드를 주고 케이크를 다 먹자마자 아빠랑 현관문을 나섰다. 저렇게 신이 날 줄은 몰랐는데. 언니도 엄마가 나가자마자 신나게 화장하고 옷을 입고 나갔다. 이따 밥 먹을 때 집에서 만나자고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사라졌다. 와우. 이사람들 마치 내가 집에서 나가달라고 말하기를 기다린 사람들 같았다. 어이가 살짝 없을 뻔 했지만 그냥 넘겼다. 현관 거울 앞에 섰다. 목에 전에 없던 은색 팬던트가 있었다. 달 모양의 은색 팬던트 뒤에는 내 이름 이니셜이 있었다. 11시 59분. 다급하게 목걸이를 찍고 인스타에 올렸다. 12시 땡 치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는 태그가 달린 게시물이 업로드 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얼굴은 나오지 않은 목걸이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내가 태그된 게시물에 하나하나 찾아가서 댓글을 달았다. 이제 새해면 인스타까지 지울 생각이어서 더 아쉬웠다. 그리고 마지막 댓글을 달았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내 게시물에 하트를 눌렀다는 알람이 떴다. 거의 1시간이나 지난 시간에 하트를 누르는 사람이라니 되게 센스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정직한 아이디가 보였다. taehyun_0205. 알람을 밀어 없앴다. 이제 왠만한 건 다 댓글을 달아줬다 싶을 때 디엠이 왔다.
→마음에 들어?
최범규였다.
태현은 하트를 누르고 핸드폰을 껐다. 전화 하겠다고 했으면서 전화는 안하고 인스타나 하고 있었다. 사실은 하트 따윈 누를 생각이 없었는데 전화하기로 한 거 까먹지 말라고 고민 끝에 하트를 눌렀다. 하트 누른 걸 보면 뭔가 생각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솔직히 이러는 것도 강태현 자존심에 금이 갔다. 평생을 누군가한테 절절맨 적이 없었는데 전화 좀 해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꼴이라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이 개박살 나버렸다.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닌것 같다. 이건 그냥, 내가 얘를 싫어하는 거다. 내가 싫어하니까 신경이 쓰였던거고 과도한 관심이 생겼던거다. 내가 얘를 이겨야 하니까. 강태현은 그렇게 결론을 짓고 나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김여주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강태현은 그렇게 정리를 하려다 다시 심각해졌다. 그럼 내가 왜 김여주를 싫어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그걸 모른다. 강태현은 다시 좋아한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으려고 머리를 싸맸다. 블랙라벨을 풀 때도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않았는데. 블랙라벨은, 결국엔 답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왜 김여주를 싫어하는지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강태현은 자기합리화를 시도했다. 저녁에 얼굴을 보면 왜 싫어했는지 답이 나올거야. 요즘 너무 안봐서 감정이 무뎌져서 그래. 그래, 그냥 그럴뿐이야. 이과 주제에 감정을 운운하는 꼴이 웃기다고 김여주가 배를 잡고 웃을 장면이었다. 강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튀어나왔다.
태현은 결국 태인에게 약속 시간을 물었다. 태인은 여주가 그걸 안알려줬냐면서 의아해 했지만 태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현은 김여주의 머릿속에서 본인이 잊혀졌다는 사실이 분했다. 어딜 가든 존재감이 넘치면 넘쳤지 없었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늘 재수 없이 살았던 강태현의 인생에 처음으로 재수를 만들어준 여주는 정작 전화를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범규와 디엠을 하는 중이었다.
여주는 범규와 디엠을 끝내고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새벽이었고 체력은 방전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씻고 나온 여주는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다. 저녁에 갈 애슐리를 생각하면서, 최범규가 준 목걸이를 만지면서 그렇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최범규가 디엠으로 보낸 사진이 정말 웃겼다고 생각하면서.
태현은 점심도 먹기 전에 태인과 집을 나왔다. 홍대를 간다는 태인의 말에 태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에 홍대는 그냥 다 죽자는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태인이 해준 게 있어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외국인 인파를 뚫고 태현은 작은 공방에 도착했다. 여러 오르골이 돌아가는 아늑한 분위기의 공방에 태인을 따라 들어갔다. 태인은 미리 사온 꽃다발을 꺼내고 오르골을 정리하던 여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가 안았다. 태현은 슬쩍 빠져서 진열해놓은 오르골을 구경했다. 태인은 몇 시간씩이나 얘기를 할 것처럼 굴더니 쏙 빠져있던 태현을 잡아 끌었다. 태인은 태현을 짧게 소개했다. 태현은 눈치껏 허리를 살짝 숙였다. 태인의 대학 선배인 허언니. 이름은 모른다. 태인은 그냥 태현에게 저렇게 소개했다. 허언니도 태인의 소개에 따로 토를 달지 않았다. 허언니는 태현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 그 대일고 정국! 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죠? 그때 태인이가 보여줬나?' 허언니는 태현에게 존댓말을 썼다. 태현은 허언니의 매너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연예인 태가 나더라! 화면 보다 되게 잘생겼네요?' 태현은 웃으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태인은 허언니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 맞아 오늘 오르골 사러 왔댔지? 누가 쓸건데? 너? 아니면 동생?' 태현은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생일 선물로 선물하려고요.' 태현의 말에 허언니는 의외라는 듯 태현을 돌아봤다. '남자요?' 이번엔 태인이 끼어들었다. '여자애, 여자애. 예쁜 걸로 골라야 줘야 해. 이거 나름 큰 의미가 담긴 거라서.' 태현이 태인을 째려봤다. 솔직히 째려봤다는 표현보다는 야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아 진짜? 좋아하는 여자앤가보네? 그럼 특별한 걸로 골라야겠다.' 분명 태현이 선물을 사러 왔는데 태인과 허언니가 더 신난 것 같았다. 둘은 오르골 모양, 노래까지 세세하게 살펴봤다. 태현은 여주의 취향에 대해 최대한 관심이 없는 척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둘을 방관했다. 태현은 전시된 오르골만 대충 살피다 태인의 부름에 둘 앞에 섰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오르골은 태엽을 돌리는 부분이 동물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었다. 태인과 허언니가 고른 오르골은 세개였고 노래는 똑같았다. 겉 도자기 장식이 어떤 동물로 되어있는지만 태현이 골라야 했다. 솔직히 둘이 고른 동물도 거기서 거기였다. 끽해야 토끼 색깔만 다른 정도였으니까. 태현은 귀가 분홍빛을 띄는 하얀 토끼를 골랐다. 태현이 오르골을 고르자 허언니는 오르골을 포장하러 갔다. 그동안 태현은 계산을 마쳤다. 태현이 작은 쇼핑백에 담긴 오르골을 받아들고 태인은 허언니와 찐한 포옹을 했다. 태현이 문을 열자 허언니는 밝게 인사했다. '짝사랑 꼭 성공해요!' 태인은 옆에서 배를 잡고 웃었고 태현은 귀가 새빨게진 채로 급하게 가게를 나왔다.
태현은 태인이 뒤따라오는 걸 중간중간 확인하면서 빠르게 인파를 헤쳤다. 그리고 길거리에 팔고 있는 목걸이에 시선을 뺏겨서 태인이 태현을 따라잡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게?' 태현은 손을 뻗어 목걸이 팬던트를 만졌다. '고민 중.' 태인은 태현이 보는 목걸이를 흘기곤 살짝 비웃었다. '니가 그렇게 예쁘다는 보름달이다 태현아.' 태인의 말에 태현은 결국 그 목걸이를 샀다. 얼떨결에 선물이 두개나 생겼다.
언니는 6시까지 지하주차장에 있을 거니까 늦지 말고 시간 잘 맞춰서 내려오라는 카톡을 아침에 보내놓고 연락이 없었다. 아무렴 상관 없었다. 나는 오늘이 생일이고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았고, 엄마, 아빠도 아침에 전화를 했고, 태인 언니의 축하 카톡도 받았을 뿐더러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미치도록 좋았다.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뒹굴거렸는 데 벌써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 왔다. 화장을 하는 법을 잘 몰라서 화장 욕심은 일찍이 버렸다. 언니들이 해주거나 친구들이 해주지 않으면 화장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썬크림에 입술만 바르고 머리는 잘 쓸 줄도 모르는 고데기로 대충 말다가 포기했다. 머리카락에서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올라와서 그냥 콘센트를 뽑아버렸다. 머리를 푸르기엔 고데기의 망한 흔적이 너무 잘 보여서 반묶음을 했다. 솔직히 이것도 묶는 데 고생을 많이 했다. 최대한 아무생각도 안하려고 했다. 덕분에 하늘 구경이나 실컷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먹다 남은 케이크를 먹으면서 하늘을 멍, 집에 있던 빵에 잼을 바르면서 하늘을 멍, 우유를 따르면서 멍. 하루종일 멍 때리고 있었던 여파가 큰 건지 거울을 보다 초점을 잃었다. 이제 집을 나가야 할 시간이라는 알람이 울렸고, 나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면서 집을 나왔다. 엘레베이터를 잡고 반스를 내려다 봤다. 주차장에 가면 언니 차를 타고, 태인 언니가 오고, 강태현도 오면 출발해서 애슐리에 가고. 강태현은 언니 차에 잘 있겠지? 근데 내가 어제 강태현한테 전화를 했나?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아, 안했다. 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기분이었다. 개망했다.
똥줄이 타서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언니 차를 찾아 달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땐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태현이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태인언니의 축하가 쏟아졌고, 나는 힘겹게 웃으면서 벨트를 채웠다. 강태현은 내가 차에 타고 보던 핸드폰을 집어 넣은 것 말고는 딱히 별다를 움직임이 없었다. 언니는 네비를 켰고 태인언니하고 시끄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네비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반면, 뒷자리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언제 말을 해야 하나 손가락을 꾹꾹 누르다 슬쩍 말을 꺼냈다.
"내가 어제 전화,"
"나도 까먹었어."
"어?"
"서로 잊었으니까 쌤쌤."
칼 같이 잘라내는 강태현에 순각 울컥했지만 쌤쌤으로 쳐준다길래 삼켰다. 재수없는 새끼. 되게 선심쓴다는 듯이 말하네. 사실 오늘 하루종일 다짐했다. 절대로 강태현 좋아하지 않을거야. 싫어할거야.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강태현을 왜 싫어하냐면, 재수가 없으니까. 재수 없는 새끼라 얼굴이 꼴보기도 싫어서. 다시 내 다짐을 곱씹고 있을 때 태인 언니가 나를 불렀다. '여주! 너 인스타에 올린 거 뭐야? 남자친구 생긴거야?' 아 언니가 인스타에 올린 목걸이를 본 모양인 것 같았다. '얘 남친 없어. 모쏠한테 그런 말하면 김여주 운다 울어.' 저 언닌 또 쓸데없는 말만 한다. 진짜 죽일까. 마침 언니 뒷목이 무방비 하네. '언니는 좀 운전이나 열심히 해. 목걸이는 생일 선물 받았은거야. 약간 플렉스?' 내 말에 태인언니가 힙합씬에서 나오던 효과음을 외쳤다. '뿌이뿌이뿌이~ 오 여주 목걸이 플렉스~ 누가 준건데?' 강태현을 슬쩍 흘겼다. 강태현은 엉킨 이어폰 줄을 풀고 있었다. '아, 남자애.' 강태현은 1도 반응이 없던 대신 앞자리는 난리가 났다. 언니는 대체 그런 초깜띡한 귀요미는 누구냐면서 운전대를 퍽퍽 내리쳤고 태인언니는 입을 막고 꺄악 소리를 질렀다. '누군데?!! 내가 아는 애야??' 어째 선물을 받은 건 난데 왜 언니가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언니 전에 한 번 봤을걸?' 그 말에 언니는 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누구지? 남자? 재후?"
"아니."
"재환이? 아니야 성혁이? 승재?"
"와 진짜 걔넨 딱 한번밖에 안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잘 하고 있어?"
"내가 걔네한테 편의점 쐈잖아. 아 그게 아니라! 누군데!! 누구냐고옥!!"
강태현이 이어폰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그때 언니가 사귀라고 했던 애 있잖아. 범규."
강태현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언니는 다시 핸들을 내리치는 중이었고 태인언니는 같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냥 한번 웃었다. 강태현은 음악을 틀지도 않고 리스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태현은 기껏 열심히 풀어놓은 이어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고 다리 위에 올려두고 있던 쇼핑백을 열고 비닐 포장된 뭔갈 꺼내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Behind Sene
→마음에 들어?
←솔직히 좀 감동
←깜짝 놀랐네 진짜
→다행이다ㅋㅋㅋㅋㅋㅋ
→나 그거 고르느라 진짜 힘들었어ㅜㅜ
←완전 땡큐큐
←울까?
→진짜 울거야?
←내가 목걸이 받았으니까 이정돈 오열해줄 수 있어
→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나 선물 하나 더 있는데
←헐 뭔데???
←또 있어?
→
→나야♥
←ㅋㅋㅌㅌㅌㅋㅋㅋㅋㅌㅌㅋㅋㅋㅋㅋㅋㅋㅌㅌㅌㅌㅌㅋㅌㅌ
→엄마한테 묶어달라고 하니까
→형ㅇ이 이상하게 쳐다봤어
→책임져 김여주
←선물 반송 안됨?
→와 이거 너무하네 진짜
←그럼 배달 오던가ㅋㅋㅋㅋㅋㅋ
←이거 사람이 센스가 없네
→너무하네 진짜...
여러분이 과연 범규 주식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이 질문이 절 불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범규가 날이네요 (흐뭇)
오늘 킬포는 오빠 최범규와
샀던 목걸이 다시 회수 하는 태현이랄까요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범규 주식 떡상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