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남자 OST- 두려움
경성 비밀결사대 23
written by 스페스
여자가 떠나고 손도 대지 않은 국수가 불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준 또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남준은 몇 번이나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올려둔 상패를 집어 들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치욕의 상패를 들고 자랑이라 말하던 순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행여 미묘하게 굳은 표정을 들킬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담담할 수 있으나, 월의 앞에서만은 한없이 작아지는 남준이었으므로.
계산을 마친 남준은 터덜터덜 국숫집을 빠져나왔다. 늦가을의 하늘은 공활한데, 기분은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오래된 국숫집, 잔치국수, 함께 온 월.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자신만 변했다. 감상에 젖어버렸다는 핑계로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눌렀는지. 남준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다잡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대로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던 남준의 눈에 허름한 노점상이 밟혔다. 남준은 맞은편으로 뛰어가 호떡 장수 앞에 멈춰 섰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랗게 익은 호떡 세 개를 주문했다. 금세 식어버릴까 봐 봉지를 품에 안은 남준이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매일신보요.”
편집장실 안은 고요했다. 평소의 태형이라면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들기 마련인데 오늘은 좀 달랐다. 소파에 앉은 소년은 어쩐 일인지 탁자 위에 펼쳐놓은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품에서 호떡을 꺼내 들었으니 냄새가 진동할 텐데도 여전했다.
"김태형"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태형은 활자를 손으로 한 글자씩 짚어가며 읽어 내려갔다. 얼굴에는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다 가끔 입에 물고 있던 연필을 쥐고 심사숙고하며 신문 위에 동그라미, 엑스 표시를 했다.
"김태형. 뭐 하는데 불러도 몰라."
그제야 고개를 드는 태형이었다. 그리고는 남준을 향해 인사를 하다가 손에 들린 봉투를 보고서 환하게 웃었다. 벌써 사무실 안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어? 호떡이다!"
"그래. 먹고 싶다며."
남준은 얼마 전 어렴풋이 들었던 태형의 말을 기억했다. 태형은 편집장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해맑게 웃으며 봉지를 받아들었다. 그러다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내고는 남준을 소파에 잡아 앉혔다.
"상 받았어요? 명예 기자!"
남준이 끄덕이자, 태형은 봉지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다급하게 제 책상을 뒤졌다. 아, 초가 없네. 멋쩍어하는 태형의 모습에 남준은 웃으며 얼굴을 감쌌다.
"됐어. 이리와."
태형은 가죽소파로 돌아와 호떡을 펼쳐놓고 박수를 쳤다.
"우리 명예기자 편집장님 만수무강하시고..."
도무지 수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축하 인사에 남준이 푸흐흐 웃어버렸다.
"아, 거참 상패도 같이 구경 좀 합시다."
"보여줄 테니까 일단 먹어. 식으면 맛없어."
종이봉투 귀퉁이를 찢은 태형이 호떡을 집어 남준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제 몫을 집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아, 기름 다 묻었어요."
바닥에 깔린 신문지에 눅진하게 묻은 흔적을 보고 태형이 울상을 지었다. 연필로 그려두었던 표식도 눈으로는 분간이 어려워졌다.
"대체 뭔데 그래."
기름에 번진 매물, 급매 따위의 단어에 남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태형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신문을 조심스레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르겠죠?"
말을 마치고는 호떡을 입에 물었다. 남준은 상패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태형은 다급하게 손을 쓱쓱 문지르고는 상패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검은색으로 새겨진 김남준 세 글자에 태형의 눈길이 멈췄다. 이윽고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이야~ 역시 우리 편집장님."
"자랑스러워?"
"당연하죠. 누가 받은 상인데."
그런 태형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남준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에 놓아둔 코트를 집어 들었다.
"나가자. 상 받은 기념으로."
문을 향해 고갯짓하는 남준을 보며 태형도 부리나케 외투를 갖추어 입었다. 편집장실을 나가려다 말고 바닥에 놓인 신문을 접어들고는 남준을 따랐다.
* * *
개점 시간까지는 삼십 분이나 남았는데 카페 스페스 앞은 오픈을 기다리는 모던보이들로 북적였다. 잔뜩 멋을 부린 사람들을 지나쳐 묵직한 철문을 열자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잘 정돈된 어두운 실내 안으로 드문드문 켜진 조명이 분위기를 더했다. 바삐 움직여야 할 시간인데 지민이나 호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대신해 유난히 크게 틀어놓은 피아노 선율만이 SP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들 자리를 비운 건가. 곧 개점 시간인데.
어쩔 수 없이 되돌아 나가려는 찰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구석에서 턱을 괴고 앉은 호석의 얼굴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 낯설었다. 한참이나 잔을 응시하던 그가 곧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늘 밝은 줄만 알았는데, 저런 모습도 있구나. 때마침 호석이 빈 잔을 매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어? 언제 왔어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게 걸어왔다. 아니 왔으면 말씀을 하시지. 그나저나 오래 서 있었어요? 평소의 얼굴을 되찾은 호석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바 앞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주면서 앉으라고 손짓 했다.
"지민씨는요?"
"심부름갔어요. 윤기형 만나러 왔어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가 물었다. 스페스로 오는 내내 남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변절해서? 그럼 민윤기씨는?’
친일파 부호의 아들. 수탈 기업인 조선 증권의 과장. 누가 보아도 친일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사람. 본인은 외면하면서 왜 윤기와는 만나느냐는, 그 말의 속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마음이 복잡했다.
호석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소다 한 잔을 건넸다. 빈 잔에 제 몫을 채우면서 덧붙였다.
“그 형이 좀 데면데면해도 진국이에요. 가끔 좀 모난 구석이 있어도 이해해주세요. 덕분에 이제 좀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서 보기 좋거든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박혔다. 내 표정을 읽은 호석이 말했다.
"그동안 아버지 말씀 듣는다고 힘들었을 거예요. 윤기형이 고집 있는데 그래도 도리는 다하겠다고 몇 년 째 마음에도 없는 증권회사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아버지 따라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것도 그렇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되게 웃기죠? 엄청 자기 고집대로 살 것 같죠? 그래 보여도 그렇게 못하는 인간이에요. 그 형이."
"왜요?"
"뭐 윤기형 말로는 부채감 때문이라는데 깊은 속내는 자기만 알겠죠. 나를 댄스홀로 밀어내고 자기가 여기에 눌러앉는다고 하는데 그 형 성격으로 카페는 영 아니여."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사투리 억양에 그가 먼저 박장대소했다. 광주 출신이라고 덧붙인 그가 씩 웃었다. 양 볼에 예쁘게 보조개가 피어났다.
남준이의 말을 듣고 스페스에 달려왔지만, 굳이 윤기를 만나지 않아도 충분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마음이 가벼워져야 마땅한데 도리어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끝없이 침전했다. 민윤기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순 자기 멋대로 하게 생겨 먹어서는. 문득 함께 냉면을 먹으러 갔던 날이 떠올랐다. 모두가 나처럼 지르고 살지는 않는다고 타박했던 민윤기. 가끔 속 답답한 날이 있다던 그의 목소리가 귀를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워졌다. 그 새하얀 얼굴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호석이 나를 흘끗 보고는 축음기로 향했다. 제법 빠른 비트의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여기 이름이 왜 카페 스페스인줄 알아요?"
그가 연주를 따라 흥얼거리며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잠시 뜸을 들였다. 궁금하죠? 몇 번이나 되묻던 호석은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을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윤기형한테도 안 알려준 거에요. 그니까 본정통 모던 뽀이의 집합소 스페스는 과연 무슨 뜻이냐 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장단을 맞추자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와 입가에 손을 댔다.
"아. 이거 일급 비밀인데. 에스. 피. 이. 에스. 스페스. 라틴어로 희망. 어떻게 좀 멋있어요? 그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쓸쓸한 얼굴은 하지 말라구요."
의기양양한 표정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호석씨는 아까 왜 그렇게 쓸쓸하게 앉아있었는데요?"
"...가을타는 모던 뽀이들은 좀 고독해야 해요. 위스키 한잔 딱."
그가 손목을 꺾어 술 마시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럼 저도 한 잔만 줄 수 있어요?"
호석의 눈이 커졌다. 나 그럼 윤기형한테 혼나요. 볼멘소리가 뒤이었다. 안 된다고 손사래 치는 나와 호석 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오늘은 좀 답답해서 마셔보고 싶다고 하니 결국 그가 못이기는 척 술병을 가져왔다. 도수가 낮은 거라 괜찮을 거라며.
쓰디쓴 맛에 미간이 좁아지자 호석이 박장대소했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흘러갔다. 으아.
"이거 대체 왜 마시는 거예요?"
그 질문이 무색하게 알싸함 뒤로 묘하게 단맛이 입에 퍼졌다.
"어? 달아요!"
맛을 확인하려 입을 들썩이자 호석이 다시금 자지러졌다.
"윤기형 말대로 진짜 상상을 초월하네."
호석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윤기. 윤기가 보고 싶었다.
***
선술집에 간이형 식탁에 나란히 앉은 남준과 태형 앞에는 탁주가 놓였다. 오늘의 메뉴는 뭐냐는 남준의 물음에 사장은 웃으며 갈비구이를 내왔다. 술값만 내면 알아서 안주가 나오는 선술집치고는 꽤 괜찮은 메뉴였다.
“오!”
눈이 동그래진 태형은 외마디 탄성을 뱉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입가에 덕지덕지 양념이 묻은 얼굴로 야무지게 갈비를 뜯는 태형이 귀여운지, 남준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한참 요리를 즐기고 있을 무렵 선술집 미닫이문이 열렸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왁자지껄하게 실내로 들어왔다. 태형과 남준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무리를 향했다. 그때 무리 중 한 사람이 남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둘을 향해 걸어왔다.
"어? 김남준?"
남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남자의 음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야. 소문만 들었는데 이렇게 보네. 반갑다 야."
남준을 툭툭 건드는 손길, 빈정대는 말투가 심상찮았다. 태형이 큰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게. 오랜만이다."
남준은 그제야 남자를 향해 아는 체를 했다.
"너 신문사 들어갔다며. 근데 글이 그게 뭐냐. 그러려고 유학 갔냐?"
"...."
"그러려고 유학 간 거냐고. 나라 팔아먹으려고."
"기분 좋게 한잔하러 왔을 텐데, 조용히 마시다 가."
남준이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얼굴은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남자에게 쏠렸다. 태형 또한 손에 든 고기를 내려놓고 눈치를 보았다.
"돌아가신 네 아버지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아버지는 입에 올리지 말지."
남준의 경고는 매서웠다. 남자가 한발 물러섰다.
"그니까 그 잘난 문학 한다더니 일제 앞잡이가 뭐냐고. 진짜 실망이다. 김남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내가 남준의 어깨를 툭툭 밀자 태형이 참지 못하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희 편집장님 건들지 마세요. 양손을 쭉 뻗은 채로 태형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준은 소년을 저지했다. 앞에 선 남자가 픽 웃었다. 그리고는 태형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남준. 그래도 애 앞이라고 창피하긴 한가 봐."
"그만하자."
남준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냈다. 식탁 위에 돈을 올려놓고 태형의 팔을 끌었다. 남준의 손에 붙잡혀 가면서도 태형은 남자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선술집 밖에 나온 남준이 제 얼굴을 쓸었다. 태형을 향한 미안함과 모멸감이 뒤범벅되어 남준을 짓눌렀다. 아무도 없었더라면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게진 얼굴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겪는 건 여전히 혹독했다. 아픔은 무뎌지지 않았다. 태형은 골목에 서서 남준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냐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일 괴로운 사람이 남준인것 만은 분명히 알았다.
"이런 꼴 보여서 미안"
남준이 바닥을 보면서 말했다. 태형이 입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쉽게 나오지 않는 탓이다.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남준이 고개를 들어 태형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태형의 얼굴 위로 차마 닦지 못한 기름이 반들거렸다. 남준은 손수건을 건넸다.
"입가는 닦고. 괜찮냐."
태형이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문지르고는 남준을 향해 애써 웃었다. 괜찮냐 묻는 남준의 아직 괜찮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일부러 입꼬리를 올렸다. 편집장님만 아니었어도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건데. 태형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 광경에 남준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태형에게 지폐를 건넸다.
"택시 타고 가. 놀랐을 텐데. 오늘 일은 미안했다."
그리고는 먼저 뒤돌았다. 저벅저벅 대로변을 향해 걷는 남준이 위태로워 보였다. 몇 번이나 따라붙었지만 남준의 만류에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항상 커 보이기만 했던 편집장이 이토록 작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태형은 멀찍이 서서 택시를 잡는 남준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도 반격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남준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다. 남준이 건넨 택시비를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은 채, 태형은 정처 없이 도로를 걸었다. 모멸감으로 물든 남준의 얼굴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오늘은 유독 건물마다 걸린 일장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태형은 우두커니 멈춰 서서 도시의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유독 생경한 풍경이었다.
***
"얘 왜 이러냐."
늦은 밤이 되어서야 스페스에 나타난 윤기가 여자를 가리켰다. 테이블에 고개를 떨군 채로 잠이 든 여자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네가 먹였냐. 윤기의 낮은 목소리에 호석이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내가 형한테 혼난다고, 안 된다는 걸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계속 그랬다니까. 딱 한 잔만 주려고 했는데 손님 몰려와서 정신없는 사이에 한 병을 다 비워버렸어. 호석이 빈 병을 들어 흔들었다. 윤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하여간 매번 놀랍다. 진짜.
"쌈닭."
윤기가 여자의 어깨를 흔들려다가 손을 멈추고는 외투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덮었다. 그리고는 턱을 괸 채로 잠든 여자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걸 보고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호석이 몸서리치며 창고로 향했다. 하여간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니까.
한참이 지나 윤기가 손목에 놓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침이 숫자 십을 향했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마냥 깨어나길 기다릴 수 없었다. 윤기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등을 토닥였다. 가야지. 이제. 아이를 달래듯 제법 다정한 말투였다. 그제야 여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 윤기? 진짜 윤기인가."
난데없는 반말에 윤기가 헛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더니 남자의 양 볼을 감싸고는 빤히 쳐다보았다. 당황한 윤기가 여자를 응시하다가 픽 웃고는 답했다.
"그래, 윤기 맞다."
"맞네. 여기 있네.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윤기."
여자의 마지막 말에 새하얗던 윤기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윤기가 제 볼을 붙잡은 여자의 손을 떼어내고는 말했다. 우리 이제 가야 해. 진짜.
"어디를?"
"집 가야지. 아주 어린 애가 됐네."
의자에서 먼저 일어난 그가 여자의 양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자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어? 왜 이렇게 어지러우냐. 세상이 막 빙빙 도네. 뭉개지는 발음에 윤기가 또 픽 웃어버렸다.
"그니까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핀잔치고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윤기는 여자를 꼭 붙들고 제 자동차로 향했다. 열 시라고 했지만 본정통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를 주행하던 자동차는 머지않아 종로로 진입했다. 한참이나 창밖을 응시하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 종로도서관. 내가 여기서 정국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윤기를 못 만났지."
어두운 거리라 앞이 잘 안 보일 법도 한데, 여자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친 건물을 가리켰다. 윤기가 여자를 흘끗 보았다. 침울한 낯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밖을 살피던 여자가 말했다. 아직 술이 덜깬건지 여전히 발음을 뭉갰다.
"있잖아요. 나는요. 정국이 방에 불이 꺼져있으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아요. 혹시나 나도 모르게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서 끌려간 건가 너무 무섭거든요. 혹시 그렇다면 우리 엄마는 어떻게 하나, 우리 막둥이는 아직 내 눈엔 어린데, 걔가 몹쓸 일 당하면 어쩌지 걱정이 돼요."
윤기는 여자의 말을 들으며 정국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초조한 낯, 겁에 질린 눈동자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런데요. 정국이가 일제에 부역하고 있다면 나는 걔한테 실망할 것 같아요. 모순이죠."
윤기는 아무 대답 없이 차를 몰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골목이 나타났다. 자동차는 정미소 앞에 멈춰 섰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꽤 오랜 시간 전면을 응시하던 윤기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는 학교가 끝나면 방에 박혀 있다가 숙부가 집에 들어올 즈음 야시에 갔어. 시끄러운 데는 질색인데, 남자 둘이 사는 적막한 집보다는 낫더라고. 그러다가 스페스가 생기고 난 이후로는 줄곧 거길 갔어. 진탕 술을 마시고 한량처럼 사는 놈들을 보면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게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유독 느리게 이어졌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오셔.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도 꼭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아. 제대로 살고 있냐고."
어둠 사이로도 씁쓸한 표정이 느껴졌다. 어렴풋이 호석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숙부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민윤기.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민윤기. 그래도 애쓰고 있는 민윤기. 그리고 그럼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민윤기.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무너졌다.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술 기운 때문인지 속이 뜨거워졌다.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윤기를 향해 몸을 틀었다. 손을 뻗자 그가 닿았다.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꼭 감싸 안았다.
"윤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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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울린 알람에 놀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금방 다음편을 가져와야지 했는데, 거진 2년이 지났네요.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특히 기다려주셨던 분들께는 더욱 미안합니다. 그간의 행태로 보아, 언제 끝 날거라고 약속드릴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완결이 나면 읽는 걸 추천드립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스페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