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와르르 - Co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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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써머
Goodbye Summer
이동혁
/ deep.
4-5
젖은 걸 알아채니 한기가 들며 열이 오른다. 이동혁의 사소한 행동에도 오한과 열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그럴때면 꼭 심장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
난 순식간에 소꿉친구를 짝사랑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래, 남녀 사이에 친구는 개나 주라지. 몇년간 얼굴 부비고 살면 없던 정도 생길 판인데. 이제서야 그런 감정이 생긴 걸 보면 너무 뒤늦은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뒤숭숭했다. 자칫하면 내 손으로 이 지독한 인연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벼운 내 말 한마디로. 한숨이 입에서 끊이질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히 모르겠지만. 이동혁은 끊임없이 여지를 주고 더불어 상처를 줬다.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사소한걸 챙겨준다거나 또 귀엽…다는 둥 그런 말을 던질때마다, 그렇게 여지를 줄땐 뱃속에 나비 수천 마리가 날아오르는 듯 붕 떴다가,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여자 사람 친구'로 날 대하는 녀석을 보면 속에 생채기가 하나 둘씩 생겨났다. 물론, 옛날에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행동들이지만, 이제 와서 사소한거에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기분은 당연히 이동혁이 나에게 하는 행동에 따라 들쑥날쑥 널을 뛰었다. 재생 목록에 넣어놓았던 노래들의 분위기도 널을 뛰었다. 슬픈 노래가 이어진다 싶으면 봄 분위기 뿜뿜하는 노래가 이어지고, 그게 또 이어진다 싶으면 가슴 절절한 짝사랑노래가 주를 이뤘다. 변덕쟁이의 재생목록인걸 티라도 내는지 들쑥날쑥 오합지졸이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그것도 남들이 중요하다고 밑줄 두어번 치는 고등학교 3학년에 열병 제대로 겪게 생겼다.
“우리 여주 공부 열심히 하네.”
앞자리 빈 의자가 드르륵 끌리더니 이동혁이 뿅하고 나타났다. 손에는 간식거리를 들고 누가보아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잘난 얼굴을 빤히 보다 오답풀이하던 문제집으로 시선을 콱 쳐박았다. 그래. 2학년 수학여행 갔을때 왜 반 여자애들 절반이 진실게임할때 이동혁 좋아한다고 했는지 알거같다. 확연한 이유는 개나 줘버리고 느낌이 딱 그랬다. 선도 딱딱 지키고 장난도 적당히 치고, 뭐 모난데가 없으니까. 좋아하는게 당연했다. 나까지 녀석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너무나. 뭐 좋은 일 있나보네. 상념을 지우고 제시된 시를 풀이하기 시작했다. 아무 관심 없는 듯 툭 질문을 던지며 필기는 온 힘 다해가며 했다. 종이가 움푹 패였다. 아, 이동혁이 뜸을 들였다. 또 뭔 말을 하려고.
“오늘 점심에 교내 방송 안해서. 아 해.”
어미새가 모이 건네주듯 이동혁이 입 앞으로 과자를 디밀었다. 그래, 이런 사소한게 사람 미치게한다고. 설레게 하려고 작정한 것마냥 행동하는 이동혁에 난 속수무책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내주었다. 그래, 녀석이 건넨 과자를 받아먹었다. 달달한 바나나향이 입안에 퍼졌다. 혹여나 썸이라던지 연애라던지 그런 단어가 나올까 싶어 잔뜩 힘을 주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우물대며 과자의 출처를 물었다. 용돈 얼마 안남았다며 울상 짓던 건 어디로 가고. 갑자기 웬 바나나킥?
“매점에서 산거야?”
“어. 이거 살 돈까진 남아서. 이건 너 먹고.”
빵 하나와 초코 우유 하나가 빼꼼 책상위에 올려졌다. 야, 너 돈 없다며! 과자를 아그작 씹으며 말하자 이동혁이 씩 웃는다. 이거 살 돈은 있거든. 먹고 해. 안먹으면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아서 봉지를 뜯어 빵 한 쪽을 물었다. 이동혁은 가끔씩 나에게 뭘 먹이려 혈안이 된 사람처럼 굴었다. 지금도. 눈 반짝거리며 나와 시선을 맞대고 있다. 꽤나 흐뭇해보이는 그 눈길을 피해 두 입 크게 베어물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올랐다. 귀신같은놈. 눈독 들였던 빵을 잘도 사왔다. 맛은 있네. 우물거리자 이동혁이 뿌듯하게 웃으며 빨대 꽂은 우유를 내민다. 체한다. 마시면서 먹어, 쫌. 녀석의 말은 곧이곧대로 듣는지라 우유도 받아 마셨다. 다시 한입을 베어먹으려던 순간,
“어우, 우리 여주 복어가 따로 없네. 볼 빵빵해가지고.”
이동혁이 앞머리를 헝클이곤 잽싸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이동혁 하지말라고!”
“아 해지맬래고!”
“야!”
“귀여워서 그런다 귀여워서! 아 아파아!”
이동혁의 등짝을 한대 때리자 엄살을 피운다. 또 나에겐 나름 금기어와 같은 -귀여워서 그래- 말이 이동혁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또, 그 말이다. 내 얼굴을 단숨에 빨개지게 만드는, 그 말.
“너넨 진짜 언제 사귀냐. 이쯤되면 사겨야되는데.”
“아 뭐래 나재민.”
“야, 이동혁 너한테만 귀엽다그래. 이쯤되면 받아줘라.”
동아시아사로 끙끙 골머리를 앓던 나재민이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다. 농담이지만 쿵했다. 그런데 나재민은 존나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다. 이동혁이 날 좋아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동혁 좋아하는거지. 이동혁은 나 친구로밖에 안보는데. 그렇지 않냐 이동혁? 원망스러운 눈길을 숨기고 이동혁을 보았다. 엥, 쟤 왜 표정 왜저런다냐. 내 옆에 서있을 이동혁을 보니 갑자기 엄살 피우던 표정 싹 지우고 나재민을 보고 있었다. 왜, 내가 뭐 말 잘못했냐? 나재민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 끝부분이 흐려졌다. 나로써는 두번 보는 냉한 표정을 한 이동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뭔소리야 진짜.”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 말로 붕 떠올랐던 나는 맥없이, 뚝 떨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단칼에 쳐낼 필요가 있나. 정색까지 하면서. 숱한 녀석의 말로 났던 생채기가 겨우 아물어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는데 이동혁은 하나의 생채기를 더 내고 말았다. 이동혁 너무한다. 괜찮은 척 애써 웃으며 나재민한테는 다른 말들을 늘어놓았다. 야 그니까. 되도 않는 소리 하지마. 나재민은 깔끔하게 그럼 말고, 라며 외우고 있던 동아시아사 연표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난 나재민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내 옆에 있는 이동혁에게 전처럼 웃으며 말할 자신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단칼에 거절당한 느낌이 이런 느낌이리라. 평소의 녀석처럼 장난식으로 받아치지도 않고 정색으로 받아친 것 보면 어지간히 화가 난 듯한데, 속이 상한 나로썬 녀석의 화를 달래줄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그 무엇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픈 마음도 없었는데, 억지로 고개를 돌려 이동혁을 내 눈에 담아냈다. 나와. 입모양으로 말한 뒤 복도로 나섰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이동혁이 내 뒤를 따라왔다.
“야. 나한테 계속 귀엽다고 하지마. 애들이 오해하잖아.”
“야, 우리 사이에 오해를 퍽이나 하겠다. 누가 몰라? 우리 어릴때부터 친한거,”
“그럼 이제껏 잘 받아쳐놓고 왜 정색해 갑자기.”
“아, 몰라. 추워. 들어가.”
이동혁은 대화를 피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태도에 그만 빈정이 확 상해버렸다. 춥기는 개뿔. 봄의 끝물인 5월인데 추울리가 있나. 심지어 반팔까지 입은 이동혁이 할말은 아닌거 같았다. 아니, 그렇게 싫나 내가. 이동혁은 나와 둘이 엮이는 것이 눈 부릅뜨고 정색할만큼 싫은 모양이었다. 짜증 제대로 난 건지 이동혁은 교실 문 열고 자기 자리로 가 앉자마자 엎드린다. 그 뒷모습을 못본 체하며 내 자리에 앉았다. 사방에 널부러진게 이동혁이 사준 빵이며 우유였던라 관자놀이를 지근지근 누르며 그것들을 저만치 밀어놓았다. 남아있는 45번 문제에 집중을 해야하는데, 도무지 집중이 안되는거다. 아까의 상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코가 시큰거리며 절로 속이 쓰려왔다. 저 아래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 먹기는 그른거같았다. 이런 기분으로, 이런 속으로 어떻게 점심을 먹으러 가. 앉아서 공부나 해야지. 울컥, 눈물마저 고이는 느낌이 들어 고갤 푹 숙이고 말았다.
*
점심은 결국 안먹었다. 뭐라도 욱여넣으면 체할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 영어 모의고사를 풀고 있는 나에게 걱정스러운 질문들이 한바가지로 쏟아졌다. 어디 아파? 양호실 가야되는거 아니야? 왜 밥 안먹어 무슨 일있어? 이 수많은 질문 중에 이동혁이 던진건 하나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교실 문을 나섰으니까. 녀석이 급식실로 간건지 방송실로 간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뭐 톡으로 물어보면 되지만 빈정 상해서 그것도 하기가 싫었다. 내가 뭣하러 물어봐. 누가 또 엮으면 어쩌려고. 이동혁이 준 빵은- 그냥 먹었다. 이거라도 먹어야지 어떡해. 이동혁이 사준건데 버리기 아깝기도 해서 그냥 다 먹었다. 아깐 부드러웠는데 다시 먹으니까 퍽퍽한 것이 꼭 닭가슴살같다. 우유와 같이 먹어도 속 답답한건 고쳐지지가 않았다. 아, 완전 체할 각인데. 복도에 있는 쓰레기통에 빵 봉지와 빈 우유곽을 넣고 돌아서는 길에 명치를 쿵쿵 쳤다. 뭐가 꽉 틀어막힌것만 같았다.
“뭐야 너 얼굴 왜그래?”
밥 안먹을거냐며 울상이던 담이가 급식실에서 돌아와 내 얼굴을 보더니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 체했어? 얼굴 완전 하얀데. 어, 나 체한듯…. 각이 아니라 진짜 체했다. 그냥 뭐 먹는게 아니었다. 이동혁이 준 빵 개나 줘 이런 태도여야했다. 미련 덩어리인 나는 그 이동혁이 준 빵 반조각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위장 트러블을 자처했다. 진짜 노답이네 나. 뭐먹고 체한거야 많이 아파? 손 따줄까와 같은 질문들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이어졌다. 괜찮아 소화제 먹으면 돼. 사혈기 있다며 손 따주겠다는 담이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어릴때부터 손 많이 땄어도 아직 사혈기랑은 낯가렸다. 괜찮겠냐며, 얼굴이 둥둥 떴다며 동동대는 아름이에게도 괜찮다며 입꼬리를 열심히 끌어올렸다. 웃기고 있네. 속에서는 아주 그냥 난리 났다. 점심시간 끝나려면 한참은 남았기에 서둘러 본관에 있는 양호실로 향했다. 내가 진짜 못산다. 이동혁이 준거라고 꾸역꾸역 다 먹은거야? 얼씨구. 내가 이동혁 좋아하는 걸 유일하게 알고있는 아름이는 체기를 내려보겠다고 내 등을 치며 나와 함께 양호실로 가는 길이었다. 어김없이 질책이 쏟아져 내렸다. 아까보다 손길이 조금 더 매서워진것 같기도 하고.
“미련해 미련해. 김여주 존나 미련해. 차라리 밥을 먹던가.”
“난 빵은 괜찮을 줄 알았지.”
“웃기고 있네. 밥이나 빵이나 둘다 탄수화물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래, 이거 다 변명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게 이동혁이 준 빵이라서. 그게 다였다.
“……?”
“엥, 너 방금 내 눈 앞에서 약먹었지 않아?”
개소름. 뭐야? 아름이는 소름이 돋는지 팔을 마구 쓸어내렸다. 그러게, 왜 먹은 소화제가 또 놓여있을까…. 아까 먹은건 꿈이었나? 무슨 영화 인셉션도 아니고. 양호실에서 알약 받아서 삼키고 물 다섯 컵이나 먹고 돌아왔는데 교실 내 책상에 떡하니 소화제 한 알이 올려져 있는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거 누가 올려놨어? 뒤에 앉은 나재민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며, 갑자기 소화제는 무슨 일이냐며 일도 모르는 눈치길래 물어보는걸 포기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아름이는 무섭다며 자기 자리로 내뺐고 나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누가 준거야 도대체. 담이가 줬나? 담이 자리로 고개를 돌리자 담요 덮어쓰고 자고있는 담이가 보인다. 그럼 쟤도 아닌데. 감사합니다 하고 먹기엔 무서워서 일단 밀어놓고 문제집을 펼쳤다. 「물 다섯번 - ㅇㄷㅎ」익숙한 필체를 품은 노오란 메모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완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것 같았다.
이동혁은 또 여지를 줬다.
*
병주고 약주는거야 뭐야. 이동혁은 5교시부터 9교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공부하다 쉬는 시간에는 엎어지고. 공부하다 또 엎어지고. 그 루틴을 반복하다 6시 20분 석식시간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진짜 쟤 왜저래…. 답답한 마음에 입맛까지 없어지려나 싶었는데 석식 식단을 보니까 입맛이 확 돌더라. 아름이와 담이가 내 양쪽 팔을 차지한 채 급식실로 향했다. 맛있는 걸 아는지 급식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있다. 급식판을 들고 대기타던 도중에 누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내 팔꿈치를 툭 치는게 느껴졌다. 누구야. 1,2 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애 아니면 지금 같은 반인 애일텐데. 이동혁인가, 싶다가도 가라앉은 얼굴로 반찬을 깨작이는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그런 기대는 짜게 식었다. 그럼 누구지. 그냥 찾으려는 시도도 않고 고개를 팩 돌렸다. 반응이 없으니 한번 더 해보겠단 심보인건지, 손가락 하나가 가까워져오는게 기척으로 느껴졌다.
“어,”
“너야?”
손을 붙잡았다. 덜컥 잡으며 뒤를 돌아보니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민형이 서있었다. 반에서 이동혁 다음으로 친한 남자애, 이민형. 이거이거, 안되겠네? 말끝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머쓱하던 입꼬리가 휘익 올라간다. 들켰네. 이민형의 웃음에 따라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바지런히 이동혁을 좇았다. 밥과 반찬을 깔작이던 이동혁은 싹다 잔반으로 버릴 심산인지 한쪽으로 음식들을 몰아놓고선 몸을 일으킨다. 나와 이민형이 서있는 급식줄과 녀석이 앉아있던 테이블은 그렇게 멀지않아 이동혁은 곧 가까이 다가왔다. 잔반을 처리한 후 젓가락과 숟가락을 차례로 넣은 이동혁은 곧장 급식실을 나서지 않고 도리어 나와 이민형이 손을 붙잡고 서있는 줄로 다가왔다. 이야, 정답게 손잡고 있는거 봐라. 보기 좋다? 그런 말을 하는 이동혁은 웃기는 커녕 무표정이었다. 아, 하며 이민형의 손을 놓자 이민형은 이동혁에게 말을 건다. 밥 맛있냐? 이동혁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한다. 다 버렸으면서.
“아까 체한건 괜찮고?”
“여주 체했었어?”
“어. 괜찮아.”
이동혁을 보지 않고 날아온 두개의 물음에 답을 했다. 아름이는 이 전개가 꽤나 흥미진진한지 급식판 끌어안고 관전중이었고, 담이는 앞에 서있던 애가 아는 애였는지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밥도 안먹었는데 불편한 공기에 또 체할것같았다. 넌 안가고 왜 여기있냐. 이동혁에게 말붙이는 애는 이민형밖에 없었다. 난 몇시간 전의 상처가 아직도 아팠고 아름이는 이동혁과 말 몇마디조차도 섞지 않는 사이였으니까. 이동혁은 이민형의 물음에 이제 가려고 했어, 라고 답을 한다.
“야. 한번만 더 찌르면 너 급식 내가 먹는다.”
“왜, 키크게?”
“지는 얼마나 크다고.”
“너보단 크지. 작아가지고.”
씨, 나 키로 놀리는거 싫어하는데! 이동혁은 개무시한 채로 이민형과의 티키타카를 이어나갔다. 키로 공격하는 이민형을 흘겨보자 그는 걱정말라는 듯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작아서 귀엽다고.”
“아 네.”
먹이를 주지 마세요. 먹이 금지. 이럴땐 먹금이 최고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충 고개 끄덕이고 밥과 반찬을 받았다. 이동혁은 내가 밥을 받는 순간 급식실 문을 나섰다. 어떤 표정으로 나갔는지 알 길은 없으니 그냥 모른체 하련다…. 아까보단 편한 속으로 밥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 담이는 매점, 아름이는 화장실로 가버리고 나 혼자 교실에 남았다. '야간 자율 학습 7시 10분에 시작합니다. 준비해주세요.' 평소같았으면 이동혁이 했을 멘트인데 오늘은 다른 목소리였다. 메인 아나운서 이동혁 어디가고? 양치를 하러 치약 가득 짠 칫솔을 입에 물고 화장실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방송실에 있어야할 이동혁이 대뜸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야. 부르는 녀석의 얼굴이 상당히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부터 되었는데 무작정 피하고 싶었다. 네가 선 그어놓고 왜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지어. 피하려다 피해주지 않을 것 같아 거품 가득한 입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아, 이 치약 매워죽겠네. 괜히 이거 샀다.
“애? 나 양히해아하으데?(왜? 나 양치해야하는데?)”
“교실 앞에서 기다릴테니까 이 닦고 와.”
뭐야. 왜저랩. 화장실로 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 안을 여러 번 행구고, 물기를 휴지로 닦아 없앤 뒤 교실로 향했다. 기다리겠단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동혁은 교실 문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칫솔을 사물함에 집어넣자마자 이동혁은 기다렸다는 듯 3학년 건물의 문을 열고 나간다. 그를 따라 나가자 이동혁은 2학년 건물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 천천히 멈춰선다. 야자 시작이 1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기에 학생들은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늦은 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동혁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왜. 뭐. 난 이동혁이 화난 이유를 알리가 없으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불퉁한 내 말투에 이동혁의 눈썹 하나가 치켜올라간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때 녀석은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곤 하는데, 지금은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동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동혁은 뭐가 그리 답답한지 한숨을 연거푸 쉬고, 머리를 뒤로 두어번 쓸어올린 뒤에야 입을 뗐다.
“넌 왜 이민형이 너한테 귀엽다고 할때는 웃고 내가 그말 할때는 하지 말라고해?“
“너랑 이민형이 같냐.”
“그럼 뭐가 다른데. 너 이민형 좋아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야 너만큼 친하지도 않은 애가 나한테 귀엽다고 하는데 귀엽다고 하지 말아달라 할까?”
진짜 얘 왜이러냐. 이동혁과 이민형은 엄연히 달랐다. 이동혁은 소꿉친구, 짝남이란 수식어가 붙는 반면에 이민형은 같은 반 남자애란 수식어만 덜렁 붙는데. 이게 다르지 같냐고. 이미 내가 이민형 좋아한다고 단정 지은 말투였다. 나재민도 잘못 짚었는데 이동혁은 그냥 헛다리 짚었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이미 녀석의 마음 속에선 결론이 났는데 내가 뭔 얘기를 해. 지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이동혁은 또다시 머리를 쓸어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렇게 해. 왜 그렇게 안해.”
“아, 내 마음이야!”
지치고 짜증나는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이동혁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었다. 그래, 니 마음대로 해. 이동혁이 돌아섰다. 아, 진짜…. 머리가 댕댕 울리는 느낌이 들어 두 눈을 꾹 감았다.
*
이동혁은 야자를 쨌다. 말도 없이. 야자 출석 체크를 위해 들어온 담임의 당혹스러움과 화남이 섞인 표정을 보고 이동혁이 어떤 언질도 없이 그냥 쨌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9시쯤 되었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심자까지 해야하는 나로썬 당혹스러운 날씨였다. 에이, 심자 끝나는 11시면 그치고도 남겠지. 그렇게 안일한 마음으로 자습을 끝내고 3학년 건물 입구에 섰는데, 그런데….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비는 더럽게 많이 왔다. 밤이라 상당히 어두운 시야에도 그리 보였다. 수없이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멀거니 쳐다보다 그 숱한 빗방울들을 막을 용도로 쓰일만한 그 무언가도 내 손에 쥐여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냥 맞고 갈까…란 생각이 들었으나 세게도 내리찍는 빗방울들을 다 맞고 집에 갔다간 다음날에 사단이 나도 보통 사단이 나지는 않을것 같았다. 감기라던가 독감이라던가 무튼 몸이 아플 것은 분명한데. 고3인 나로썬 패기있게 빗속으로 뛰어들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곧 6월 평가원 모의고사인 만큼 컨디션 관리가 최우선이라며 으름장을 놓던 담임의 얼굴이 둥실둥실 빗속을 떠다녔다. 만약 아파서 토요자습도 빠지고 진단서 떼와서 콜록거리며 담임 앞에 선다면? 컨디션관리 똑바로 안하냐는 잔소리 들을건 뻔했다. 더군다나 교복은 어쩌고. 체육복 등교가 허용되지 않은 구시대적 학교였기에 일은 두배로 커진다. 아오, 인생 진짜 뭐같네. 괜히 심자까지 하겠다고 나댔네 내가. 심야자습은 그렇잖아도 하는 학생들이 적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와 우산을 공유할 친구가 극히 드물어진다는 소리였다. 오늘 밤에 비온다는데 너 심자까지하게? 걱정 가득 섞인 아름이의 목소리가, 귓등으로 대수롭지않게 흘려보냈던 그 말이 이제와서 귓가에 웅웅댔다.
그러다 이동혁이 생각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번 뒷문에서 우산을 꾹 쥐고 날 기다리던 이동혁이. 봄에는 교복 마이를 걸치고 여름에는 까만 반팔 하나 교복셔츠 안에 입고 가을에는 꼭 후드집업을 입고 겨울에는 패딩으로 온 몸을 싸매던 이동혁이. 문제집이다 뭐다 바리바리 싸가는 날 보고선 보부상이냐며 허리 굽혀 웃던 이동혁이 그렇게 생각나는거다. 그러다 처음보는 냉한, 누가 보아도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한 녀석의 얼굴이 눈 앞을 순식간에 가렸다. 아까 전의 상황이 또다시 생각났다. 그 상황으로 가라앉은 기분은 비때문에 저 지하로 내려갈 지경이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늘상 기분 안좋은 날에는 비까지 꼭 내렸다. 징크스인가, 싶었다. 우중충한 기분에다 비까지 겹쳐지고, 거기에다 우산이 없는 상황까지 합쳐져 절로 코 끝이 시큰거렸다. 엿같네 진짜. 아무것도 오지않아 잠잠한 폰 화면만 뚱하니 내려다보았다. 엄마아빠 오늘 회식이라고 하던데. 진짜 최악이다 내 상황….
“야!”
“이동혁?”
뭐야. 저 멀리서 뛰어오는 형체나 들려오는 목소리나 둘다 주인이 이동혁임을 알려주고있었다. 니가 여기서 왜 나와? 유명한 짤 하나에서나 봤을법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이동혁을 보고 있자니 귀 바로 옆에서 심장이 쿵쿵대는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걸 숨기고 싶었다. 꽁꽁 싸매고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도록. 심지어 이동혁도 볼 수 없도록. 밤이라 보일리가 없는데도 숨기고 싶은 벌개진 볼을, 울음을 참느라 찡해진 루돌프 코마냥 빨간 코를. 숨기고 싶은데 이동혁은 빨리도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그렇게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순간처럼 순식간에 너무나도 빠르게. 이동혁은 나와 그의 거리가 두 뼘은 되는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가깝고도 왜인지 모르게 먼 거리에서 녀석 특유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나는 시선을 신발 앞 코에 고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동혁과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참고있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부러 입술까지 앙다물었다.
“…야. 김여주.”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 울퉁불퉁한 부름은 돌처럼 절그럭거리며 내 속을 굴러다녔다. 불과 네시간 전에 먹은 석식이 이제 와서 소화가 안된다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이 속이 울렁울렁거렸다. 대답을 할 자신도 그렇다고 녀석과 눈을 마주칠 자신도 없는 나로썬 그 부름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왜. 뭐.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던지. 이동혁이 여기 온 이유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란 걸 나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더불어 이동혁이 숨 차도록 뛰어온 이유가 우산없는 날 데리러 오기 위해서란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 속으로 툴툴대고 있는거다. 시선은 아래로 쳐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 때문에 짜증이라도 난건지, 이동혁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토록 가깝던 우리 둘의 거리는 적막과 빗물 그리고 빗소리가 채움으로써 간극이 생기는 듯 했다. 그게 공기마저 채운 탓일까, 불현듯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먼저 그 간극을 깨부수고 말을 한마디 더 보탠건 이동혁이었다. 내가 아니라.
“우산.”
녀석이 불쑥 우산을 내밀었다. 문장도 성립하지 않는 단어 하나만 꺼내며. 천천히 이동혁이 내민,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이동혁과 함께 쓰곤 했던 그 우산을 건네받아 손에 쥐었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 고맙다는 말도 하다못해 왜 왔냐는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말이다. 내 손으로 넘어온 우산의 손잡이가 퍽 뜨거웠다. 오는 내내 꼭 붙들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러면 난 또 착각을 하고 마는데. 개복치도 아니고 쉽게 마음의 문이 열리는 나로썬 이동혁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의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시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부시고 들어와선 온 마음을 헤집는 것만 같다. 속이 또 울렁거렸다. 다잡지 못한 마음들과 생각들이 엉키고 엉켜 무어라 말을 뱉어내기도 힘들 만큼. 나는 어지러이 엉기는 숨을 고르고 말을 골랐다. 녀석에게 꺼낼 만한 가장 좋은 말이 뭐가 있을까, 하고.
“고마워.”
“……그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난 그 고맙다는 인사도 겨우 뱉었는데, 고르고 골라 내 진심이 드러나지 않을 말을 겨우 뱉었는데. 넌 뭐가 그렇게 쉬울까. 결국 어려운건 내 마음 뿐이었다.
“… 우리 따로 갈까. 너 내 얼굴 보기도 싫은 것 같은데.”
말 참 모질게도 뱉는다 이동혁. 체념한 듯한 말투가 마음에 턱 걸려 넘어졌다.보기도 싫은게 아니라 볼 수가 없어서 못 보는건데.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또 헷갈리는 내가 존나 바보같아서 못보는거다. 어떻게 이렇게 정처없이 흔들리냐고 마음이. 왜 이동혁 행동 하나 하나에, 말 하나하나에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휘둘려다니는 거냐고. 3월 끝자락, 봄의 초입부터 5월의 끝자락, 봄이 마무리 되는 시기까지 약 두 달동안 허우적댄 결과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짝사랑 그까짓거 혼자 하고 혼자 끝내면 된다고 자부하는게 아니었다. 반이 갑자기 뒤바껴 각자 다른 반이 되거나 우리 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녀석과 나는 얼굴을 맞대야했다. 즉, 접겠다고 쉽게 접어질 마음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담 진즉에 끝냈어야 맞는거지.
짝사랑이 장거리 마라톤이라면 난 어디까지 가 있는걸까. 체감상 아직 절반도 못 간거 같은데. 그럼 난 얼마를 더 달려야 할까. 그만 달리고 싶어도 다리는 계속 앞으로 뻗어나갔다. 이동혁이 하는 행동과 말,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 전부 다 중간 중간 마라토너에게 주는 물과 초코파이 같았다. 그 작은 것들에 의지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위태하게 보이지 않는 결승선으로 달려간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오듯 흘러도 나는 홀린 듯 뜀박질을 계속한다. 그 끝엔 뭐가 있을까. 이동혁이 서 있을까, 아니면 나 혼자 땀 뻘뻘 흘리며 나뒹굴고 있을까. 아니. 이 질문을 먼저 던져야 될 듯 싶다. 나는 끝까지 갈 수는 있을까? 나는 계속 달려갈 수 있을까. 맹목적인 마음을 안고서. 그렇게 쉼없이?
“그럴까.”
“…진짜로?”
“……어.”
같이 걷는다는건 싸우지 않은 상황을 전제로 해야 좋은거다. 화해를 하지않아 어색한 공기는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긍정의 뜻을 표했는데. 그런데 이동혁이 한숨을 폭 내쉰다.
“…김여주. 여주야.”
“왜.”
“우리 이제 화해하면 안될까. 나 너 얼굴 보고싶은데.”
말을 하던 이동혁이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쓸데도없이 존나 다정했다. 의미가 있는 다정함일까, 없는 다정함일까. 녀석의 다정함에 숨이 다 가빠왔다. 열심히 가라앉혔던 마음이 또 울렁울렁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차게 내리는 비로도 진정이 안될 마음이었다. 그래, 나는 계속 달려가야 할 것만 같다. 이동혁에게로. 봄을 지나 여름으로. 비가 쏟아져 내려도 햇빛이 살을 태울만큼 따갑게 내리쬐도, 여름으로, 이동혁에게로. 달려가야 직성이 풀리는 마음이었다.
“아깐 내가 말을 잘못했어. 미안해. 네 마음인데 내가 심통나서 그랬어.”
“……나도 미안.”
“귀엽다고 한것도 미안.”
“괜찮아 그건, 할 수도…”
있지, 라고 해야하는데. 이동혁이 말끝을 가로챘다.
“그런데 나, 너 계속 귀여워하면 안될까.”
“뭐?”
“아니, 나 너 계속 귀여워할거야. 그건 내 마음이니까. 너가 네 마음대로 한 것처럼. 나 너 계속 귀여워할거야.”
쉴 틈도 없이 말하는 녀석에 숨은 도리어 내가 막혔다. 숨을 뱉기도 어려울 만큼. 누가 얼음 둥둥 띄운 물 가득 담긴 통을 건네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도를 적셔야 할 물이 온 몸을 적시는 것처럼. 쉼없이 밀려들었다. 이동혁이.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마냥 온도가 확 내려갔다 열기가 바짝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봄인데, 봄의 끝자락인데. 나의 온도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름이었다. 여름이 찾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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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부 이동혁 두번째이야기
(브금 까먹어서 첨부해 다시올려요)
그때그ㄸㅐ 쓰는거라 담편은 미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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